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49) 천국인데 왜 생명강과 생명나무가 필요한가?(계22:1~5)_2022-04-20(수)

https://youtu.be/KrqTlp7_Vi8  [혹은 https://tv.naver.com/v/26371212 ]

 

1.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은 어떤 모습인가?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은 장 광 고가 각각 12,000스타디온(약24,000km)이나 되는 정방형의 거대한 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의 한 복판에는 높은 산(시온산)이 있고 이 산 꼭대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오는데, 그 물은 큰 강을 이루어 동서남북으로 흘러 내려간다. 그리고 생명강의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성 안에는 다시 저주가 없으며, 다시 밤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성안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 성은 햇빛이나 등불이 필요가 없다. 

 

2. 천국의 생명강과 생명나무는 어떻게 생겼는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하여 흘러 내려가는 강줄기는 추측컨데 여러 개인 것 같다. 그런데 그 강줄기가 몇 개나 되는지 정확히 아는 분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다. 그 숫자는 가장 작게 보면 에덴동산처럼 4개가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많게는 24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총 2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천국은 이 강줄기를 중심으로 집이 지어진다. 이 강줄기에서 다시 지류로 물이 나뉘어 흘러가는데, 천국의 건축 천사들은 성도들의 집에 이 지류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사를 한 후에 집을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에는 이 생명강의 작은 물줄기가 들어간다. 한편 생명강의 큰 줄기에는 생명나무들이 즐비해 있다. 

  천국에 있는 생명나무는 생명강의 좌우에 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한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라, 수많은 나무들이 있다. 그런데 그중에는 원 생명나무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 나머지는 생명강의 큰 물줄기를 따라 강 좌우편에 놓여 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이 생명나무가 열매(과일)를 맺는데, 달마다 열매를 맺어서 일 년에 12번이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달마다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 열매를 따먹게 되더라도 곧 다시 그곳에 열매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병이어이 기적처럼 떡과 물고기를 나눠줘도 예수님의 바구니 안에 또 떡과 물고기가 생겨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3. 천국의 생명강과 생명나무의 환상은 어디에서 이미 주어진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생명나무와 생명강의 모습은 사실 에스겔 선지자가 B.C.593~571년경에 환상으로 보았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강줄기가 있고 강좌우편에 달마다 열매를 맺는 각종 과실나무가 있는 것은 거의 똑같다(겔47장). 그때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으로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성전이 보였고,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 손에 척량 줄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천 척(약532m)을 재어보니 물이 발목에 찼고, 다시 천 척을 재어보니 물은 무릎에 차 올랐으며, 다시 천 척을 재어보니 이번에는 허리에 차 올랐다. 그리고 다시 천 척을 재어보니 강이 되었다. 그래서 더이상 사람이 건널 수 없을만큼 큰 강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강 좌우편에는 나무들이 심히 많이 있었다. 또한 물에는 물에서 번성하는 모든 생물들이 살고 있었고 고기도 심히 많이 있었다. 그리고 강좌우에는 각종 먹을 과일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잎들은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열매를 음식이 되었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약 재료가 되고 있었다. 

 

4. 왜 천국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생명강과 생명나무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아니할 수 없다. 왜 천국에 생명강이 필요하며 생명나무가 필요한가를 말이다. 사실 천국에는 영생을 얻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기에 물이 필요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천국에서 역시 각 집마다 생명수가 들어가고 있으며, 생명나무에 열매들이 있어 그것을 따먹도록 되어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에덴동산과 그 이치가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어서 그 열매를 먹도록 하셨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도 사람들이 영생하도록 하기 위해서 생명의 물을 두신 것이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 천국에서도 사람들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각 집집마다 생명의 물이 들어가도록 만드셨으며, 생명나무에 달마다 다른 종류의 과일이 맺히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생명의 물이나 생명나무의 열매는 다 생명이신 예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의 물이나 생명의 과일은 예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나눠주는 통로들인 셈이다. 그렇다. 아무리 천국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영생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음식과 음료로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다. 

 

5. 천국의 생명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가? 

  그렇다면 생명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가? 사도 요한은 그것이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서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천국에도 아프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나 사망, 울부짖음이나 우는 것이 있지 아니하며, 무엇보다도 아픈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계21:4). 한 마디로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더이상 저주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와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생명나무 잎사귀가 약치료제로 쓰인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2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본다. 하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픈 자들을 치료해주기 위해서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기적적인 치료가 일어나는 것은 다 천국의 치유 천사들이 다 이 천국의 생명나무의 잎사귀로 만든 약을 가져와서 치료해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성밖에 거주하는 자들을 치료하려고 그러한 것이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아픈 것이 있지 않지만 성밖은 좀 다르다. 우선 거기에는 생명강도 없으며, 생명나무의 실과도 없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칠 수도 있다. 부활체는 피도 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21:24~26의 말씀을 통하여, 만국이 새 예루살렘 성밖에 거주하고 있음을 배웠다. 그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적이 있었지만 결국 그 이름이 지워져 성밖으로 쫓겨난 자들이 거기에 거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이들은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는 성 바깥에 거주하는 자들이 있고, 둘째는 더 바깥쪽의 어두운 곳에 거주하는 자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셋째는 바깥 끝의 아래의 낭떨어지의 불못에 거주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바로 옆의 성 바깥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기 때문에 다치는 일이 별로 없겠지만, 더 바깥 쪽의 어두운 곳에 사는 자들은 형벌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 다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때에 천사들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서 생명나무 잎사귀를 쓰는 것 같다. 그러므로 성 바깥의 더 어두운 곳에 있는 자들이 다칠 때에 그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생명나무의 잎사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아마도 십중팔구는 맞는 이이야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 "땅의 왕들"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밖으로 나가서 왕노릇을 하기 때문이다(계21:24,26, 2:26~27). 이들이 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는 성밖에 위치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성밖에 남겨지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꼭 회개하고 또 충성하여서 죽은 후에는 반드시 성 안에 들어가서 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22년 04월 20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1)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마4:17)_2022-02-21(월)

https://youtu.be/2iMh-QD7aWo  [혹은 https://tv.naver.com/v/25310479 ]

 

1. 왜 우리는 천국 알기를 사모하고 또 천국을 구해야 하는가?

  천국은 믿기만 하면 그냥 얻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찾으려고 하는 자라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6:33). 그것도 그것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자가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뒤집어 놓고 보면, 천국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는 열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천국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천국을 사모하지도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천국을 열어서 보여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마치 좋은 진주들을 찾고 있는 장수와 같다고 하셨다(마13:45~46). 그런 자가 어느 날 지극히 값비싼 진주 하나라도 발견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진주가 얼마나 좋은지 진주 장수는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다 처분하여 그 진주를 샀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댓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천국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고 천국을 얻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런 자가 어느 날 값진 진주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2. '천국'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성경에 보면 '천국'이라는 단어도 나오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도 나온다. 이 둘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가? 아니면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인가? 사실 '천국'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36회)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나올 뿐이다(딤후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그런데 디모데후서 4:18에 나오는 '천국'은 '하늘에 속한 왕국' 혹은 '하늘에 있는 왕국'이라는 뜻이지만, 마태복음에 나오는 천국은 '하늘들의 왕국'이라는 뜻이다. 디모데후서 4:18에 나오는 '하늘'은 형용사로서 '에푸라니오스(heavenly)'라는 단어이지만,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은 복수 명사로서 '우라논(heavens)'이라는 단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천국'이라는 단어는 오직 마태복음에 있는 것이다.

 

3.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의미인가 다른 의미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 두 단어는 서로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하지만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천국'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 중에서 주로 어떤 공간적인 장소를 따로 특정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전 영역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공간적이 아니라 약간 상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는데 귀신이 그에게서 쫓겨나갔으면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마12:28). 하지만 '천국'은 귀신이 잠시 동안 쫓겨난 그 순간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아니 모든 시간 동안 귀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이라는 개념은 '사탄 마귀'와 '귀신들'이 없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더이상 '죄'도 없고, 더이상 '사망'도 없는, 하나님이 완전히 다스리는 공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공간적인 개념을 가리켜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항상 우리가 장차 들어가야 할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신다(마5:20, 7:21, 11:12, 19:23, 23:13, 25:1). 고로 우리가 죽어서 장차 부활체를 입게 되고 그 몸이 장차 들어가서 거주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 공간이 '천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더이상 사탄 마귀와 귀신들, 그리고 죄와 사망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어둠도 없고, 근심 걱정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다. 그러므로 영원무궁토록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공간적인 장소가 천국인 것이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실현되는 장소가 바로 '천국'인 것이다.

 

4. 마태복음에서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가?

  마태복음에서는 공간적으로 들어가는 '천국'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나라'를 같이 동시에 사용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굳이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장소만을 특정해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그것을 포함하면서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을 통칭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의미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좀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천국'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저 셋째 하늘에 있는 공간적인 영역만을 가리키는 특수한 단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천국'이라는 단어가 어딘가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주로 공간적으로 이동해서 들어가는 셋째 하늘의 나라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공간으로서, 일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상태적인 천국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장소적인 천국도 가리킬 수 있는 폭넓은 용어인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용어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나 둘 다 장차 성도들이 죽어서 부활체가 되어서 들어갈 공간적인 영역의 개념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이라는 개념은 장차 들어갈 장소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여전히 신분의 격차가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천국에서는 자신이 누릴 지위가 더 높은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지위가 작거나 없어서 천국에서의 그 지위를 누리지 못할 자도 있는 것이다(마5:19). 그렇다. 이처럼 천국은 분명한 신분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장소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면 모든 성도들이 다 똑같은 신분과 지위를 누린다고 주장하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곳에는 엄연히 신분적인 차이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은 거기에서 왕 노릇을 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왕 노릇하는 자의 집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는 자를 섬기는 자로서 곧 종노릇하는 자로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천국에서 '섬기는 자'라는 개념은 이 세상에서의 종과 같은 개념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서 '섬기는 자'는 기쁨과 감사로 일하는 직분인 것이지, 차별 대우받고 주눅들거나 창피하여서 괴로워하는 직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5.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사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의 지구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 영혼들을 선발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맨 처음 하늘들(샤마임)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두 번째 지구(에레츠)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1:1). 그리고 이것들은 첫째 날에 창조하신 것들이다. 그렇다면 '해와 달과 별들'은 언제 창조되었는가? 그것은 '넷째 날'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 천국은 밭에 씨를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마13:3). 이 지구라는 밭에 하나님께서 천국의 씨(영혼)를 뿌리셔서 자궁 속에 있는 임신된 3~4개월의 태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런데 이때 사탄 마귀도 덩달아 아기의 태아에 가라지를 뿌리기도 한다. 여기서 '가라지'란 귀신들(사람 몸속에 들어오는 뱀들)을 지칭한다. 고로 사람은 이미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씨인 영을 갖게 되지만, 동시에 귀신들의 공격도 같이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태어났을 때에 우리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창조되었고 보내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발견해 내야 하고 성령으로부터 하늘의 생명(씨앗)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거듭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거듭난 영혼을 천국에 장차 데려가실 것이다. 물론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인지 아닌지는 이 땅에서 사는 삶을 통하여 주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번 기회에 '천국'에 관한 말씀을 잘 배우고 익혀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온전히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2월 21일(월)

정병진목사

 

 

다윗의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때 다윗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다윗은 국가의 안정을 이룬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이 된다. 예루살렘은 대체 어떤 장소였는가? 하늘에 있는 도성은 왜 새 예루살렘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다윗이 찾아낸 이 도성은 왜 중요한가?

2022-01-0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하강해(05) 다윗의 천도, 예루살렘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드디어 시작되다(삼하5:1~2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XRdiSVTjP7k [혹은 https://tv.naver.com/v/24771222 ]

 

1. 들어가며

  다윗이 드디어 온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된다. 후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 죽었고 또한 사울 왕국의 왕이었던 이스보셋도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게 있는 다윗에게 와서는 그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와 주권자로 세우셨다고 말씀드리며 그에게 기름을 부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이제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사무엘하 5장의 이야기는 그가 왕이 된 이후에 무엇을 했는가를 3가지로 기술하고 있다. 하나는 왕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블레셋과의 2차에 걸친 전투에 대해서 다룬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의 역사와 예루살렘 역사를 조금 더 깊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좀더 배우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다윗 왕국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다윗은 언제 비로소 온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었는가?

  다윗은 15살 때(B.C.1025년)에는 베들레헴 자기의 아버지의 집에서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때 그에게 기름을 부었던 이는 선지자 사무엘이었다. 그런데 그가 비로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때는 사울왕의 통치 40년이 끝나고 후사울 왕국이 멸망하고 난 뒤에였다. 그러니까 다윗의 나이로 치자면 37세 때(B.C.1003년)에 비로소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던 때부터 계산한다면 약 22년이 지난 시점이 되어서 비로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다. 한편 다윗은 중간에 한 번 더 기름부음을 받았었다. 그것은 사울왕이 죽자 다윗이 변방인 시글락에서 올라와 유다의 산지 헤브론에 자리를 잡을 때였다. 그때에 유다 지파의 장로들이 와서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왕국의 왕으로 삼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B.C.1010년). 그러니까 다윗은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다윗이 이렇게 왕위에 오르기까지 힘겨운 시간들이 지나가야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연단시켜 겸손하고도 신본주의적인 왕을 세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선왕이었던 사울왕은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했으나 왕이 된 후에는 교만해져서 아무도 그를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쉽게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게 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리고 22년이라는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로서의 훈련을 철저히 받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이 쓰시는 큰 그릇은 역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3.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서 맨 처음에 한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서 맨 처음에 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왕궁을 새로 정하여 옮긴 일이었다. 이전에 다윗은 유다 산지 헤브론에서 유다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의 12지파의 장로들이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온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게 했을 때, 다윗은 천도를 결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첫째, 헤브론은 전 이스라엘의 영토 가운데 남쪽 아래에 위치한 성읍이요, 유다 지파의 성읍인지라 온 이스라엘의 왕도라는 상징적인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원래 예루살렘은 베냐민 지파에 할당된 땅이었으나 그들이 여부스인들을 쫓아내지 못했으며, 이어 유다 지파가 올라가서 그 도시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일이 이었다. 그러므로 그 도시는 베냐민 땅도 아니고 유다 땅도 아니었기에 거기에 왕도를 정한다고 해서 시기 질투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서 가나안 부족이었던 여부스인만 몰아내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왕을 만나러 올 때 아무래도 접근성이 용이한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런데 과거에 도시는 난공불락의 요새나 천연 요새일수록 인기가 높았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에서 적이 몰아닥칠지 모르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천연 요새로서 용수 공급도 아주 용이하고, 사방이 성벽이 있어서 외부 침입에서 방어하기 좋은 도시였던 여부스인들의 거주지, 곧 예루살렘을 왕도로 정하고 그것을 빼앗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이 된다. 

 

4. 다윗이 왕도로 삼은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였으며 지금까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사실 다윗이 여부스인들에게 빼앗아 왕도로 삼은 예루살렘은 다윗이 이 성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그리 유명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도시였을 뿐이다. 다만 이 도시가 천연 요새 지역에 위치하여 있었다는 점은 좀 특별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이 이 도시를 여부스인들을 정복하여 다윗성이라 명명하기 시작한 때부터 이 도시는 고대 근동 지방 요새 지역의 가장 유서 깊은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성은 다윗이 빼앗아 자기의 왕도로 삼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1,000번의 외세의 침입을 받은 장소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고고학이며 성지가 되고 있다. 특히 다윗이 이곳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에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한 후에 솔로몬이 거기에 성전을 지으므로 이곳은 하나님을 모시는 지상의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을 가진 성읍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는 언제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 때다. 아브람이 살고 있었을 당시 그 도시는 '살렘'이라고 불렸다. '살렘'이라는 말은 '살롬'이라는 말로서 '평화'라는 뜻을 지녔다. 그런데 그때 살렘왕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빌어 주었다. 그런데 다윗과 히브리서 기자는 살렘왕 멜기세덱은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최종적으로 시험하려고 그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의 제단에 바치라고 하였는데, 실은 그 장소는 살렘왕이 거주하는 도시의 산이었다. 그런데 모리아산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성전산이 되었기에 아브라함이 성전에서 독자 이삭을 바친 격이 되었다. 그러다가 살렘은 기억에 잊혀져 있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산성을 찾아내어 정복하여,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항상 유다인들의 수도로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특히 이 도시가 유명하게 된 것은 솔로몬의 성전 때문이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성전을 B.C.966~959년에 솔로몬이 7년간 지은 성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전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하였고 그 중에 시바여왕도 들어 있었는데, 그녀가 솔로몬의 아들을 낳아 이디오피아에서 히브리인들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한 그 성전마저 우상 숭배로 더럽히자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왕에게 넘겨 주어, B.C.586년 예루살렘은 쑥대밭이 되었고 성전은 파괴되고 말았다. 시랑이 뛰노는 황폐한 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땅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때부터 70년이 지나서 B.C.516년에 다시 성전을 세울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에는 1차 포로 귀환자들의 대표였던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었다고 해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른다. 이 성전을 B.C.37년부터 헤롯대왕이 개축하여 예수님 시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땅에 하나님과 함께 오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결국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40년 만에(A.D.70년) 로마의 디도(타이터스)장군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그때에는 성전에 누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녹아내리는 금을 캐가기 위해서 그 아름답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때 디도장군이 성전을 허물게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성전의 서쪽벽 일부를 허물지 않고 놔두게 되는데 오늘날에는 이 성벽을 두고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다가 1948년 5월 14일, 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과 우리나라 그리고 이스라엘도 독립을 하게 된다. A.D.70년에 망해 버렸다가 2,0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심이니 흩어진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고토로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다윗의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알려 주는 2가지 싸인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다윗 왕국이 안정이 되었다. 그러자 다윗에게 2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는 다윗의 왕국이 장차 엄청나게 번영할 것을 예상한 북쪽의 두로왕이 레바논의 백향목을 보내고, 목수와 석수를 파송하여 다윗의 왕궁을 지어준 일이다(삼하5:11~12). 그러자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를 세우시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과 그의 백성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높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아내들과 첩들을 더 거느리게 되는데, 예루살렘에 이사와서 낳은 자식들 중에는 밧세바가 난 자식이 유명한데, 그녀의 셋째 아들은 나단이며, 넷째 아들은 솔로몬이다(삼하5:14). 그리하여 나단의 후손에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태어나고, 솔로몬의 후손에서 예수님의 법통적인 부친인 요셉이 태어나게 된다. 고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족보 가운데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예수님의 부친 요셉의 족보로서, 아브람...다윗-솔로몬...유다-요셉으로 이어지는 족보인 것을 알 수 있고,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족보로서, 아브라함...다윗-나단...헬리-요셉(헬리의 사위이자 아들)으로 이어지는 족보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로서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이다. 

 

6. 다윗 왕국이 세워진 것을 두려워한 블레셋의 2차례의 공격을 다윗은 어떻게 막아 내었는가?

  그런데 그때였다. 이스라엘을 패전국으로 알던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중북부까지 차지한 가운데 다윗 왕국의 강성함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치려고 올라온다. 그러자 다윗이 나가서 그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들은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히 모여 있었다. 그렇지만 신본주의적인 왕이었던 다윗은 언제나 먼저 하나님께 물어본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치라고 하셨다. 그들을 다윗에게 넘겨 주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블레셋이 다윗에게 2차로 침입해 온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뽕나무(바카 향나무)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면 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그때에 다윗이 블레셋을 침으로 블레셋은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후로 블레셋은 두 번 다시 이스라엘을 치러 오지 못하였다. 이처럼 다윗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여쭈어 보고 일을 한 왕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그 이후에 다윗이 행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그에게서는 사울에게서 빼앗은 것처럼 그의 왕위를 빼앗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왕 노릇을 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7. 나오며

  다윗의 이야기는 비단 다윗의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점령한 다윗성은 예루살렘으로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과 동일하다. 다윗 이전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성의 이름을 따서 이 땅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다윗 시대에 비로소 예루살렘성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도성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성', '거룩한 도성', '왕의 도성', '진리의 성읍', '의의 성읍'이라고 불리었다. 이곳에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국은 무엇이고 지옥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 지옥이다. 또한 하나님이 계신 도성을 일컬어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그 성에 들어갈 사람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있다. 그래서 그 성에 들어가기를 사모했고 그 성에 들어갔던 다윗의 일대기를 살펴보라고 하신다. 다윗의 삶에서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단서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처럼 아끼고 사랑했고 보호해 주셨던 다윗을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앞으로 진행될 사무엘하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더 기대가 된다. 

 

2022년 01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16)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열 처녀에게 꼭 있어야 할 기름은 무엇인가?(마25:1~13)_2021-09-03(금)

https://youtu.be/5jZ_zWOELI8  [혹은  https://tv.naver.com/v/22243488 ]

 

1.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신랑이 신부를 취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나와서 예비 신부들을 데리고 들어가려 하는 시각에, 같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름이 없어 등불이 꺼져 가고 있었기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말을 듣고서 자기들도 자기의 등에 채워 넣을 기름을 사기 위해 어디론가 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시간에 문은 닫히고 말았던 것이다. 

 

2.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바 열 처녀에게 꼭 있어야 했던 '기름'은 어떤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열 처녀에 꼭 필요한 기름을 '믿음, 선행, 성령' 혹은 '성령충만'이라고 언급한다. 또 어떤 이는 '성령의 열매, 회개의 열매'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열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기름'이란 성령이 오히려 더욱 더 활활 타오르게 해 주는 어떤 재료여야 하는 것이지, 성령이 일한 어떤 결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열매'는 성령께서 일하신 어떤 결과물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결과물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 사람의 상급(천국집, 면류관, 보좌 자리)을 결정짓는데 작용하는 요소인 것이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게 해 주는 요인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해 주고 있는 기름은 첫째, 꺼져 가는 등불이 계속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해 주는 어떤 것, 즉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 주는 어떤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둘째, 이 기름은 그냥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댓가를 지불하고서 사야 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기름이 부족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그냥 빌려다 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기가 확실히 값을 주고 산 것이라야 한다. 셋째, 이 기름은 언제든지 신랑이 나오면 그분 앞으로 나아가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계22:14~15)에 따르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언제라도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알려주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렇다. 기름은 회개하여 자신을 멸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어떤 것이다. 넷째, 이 기름은 혹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할지라도 언제라도 주님이 오시면 곧바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3. 자신은 그 기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 기름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힌 후에 열어 달라고 외치는 열 처녀의 비유 말고도,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집주인인 예수께서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한 채 있다"라고 하는 또 다른 본문(눅13:25~27)에서, 우리는 기름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눅13: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집주인'은 26절에 나오는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그때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이 말씀의 핵심은 이렇다. 겉으로 볼 때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그분과 교제하였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은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 주님께서는 그를 알아온 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그렇다,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역시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평소의 삶 가운데에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 밖에 남겨질 자들은 그 날과 그 시까지 자신이 그러한 존재가 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과거가 당연히 자신을 구원받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그들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고로 그 '기름'이 아닌 것은 겉으로 볼 때에는 그동안 줄곧 주님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은 기본이었을 것이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드리고, 제자 훈련도 받고 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그는 버림을 받는다. 

 

4. 열 처녀가 갖고 있었어야 했던 '기름'은 대체 무엇인가?

  고로 열 처녀가 가지고 있어야 했던 기름이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자하는 개인의 계속적인 몸부림이요, 회개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자신의 마음 가운데 부딪혀 오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을 고치고자 하지만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 자신을 보고서 금식하며 작정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면서도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반응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기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소절의 찬양도 기름이 될 수 있고,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기 위해 주님께서 고통 당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여 이렇게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는 눈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다짐으로만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졌을 때에 비로소 그것은 진실한 한 방울의 기름이 되는 것이다. 

 

5.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내게 기름만 있으면 되는가?

  그런데 여기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기름만으로는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름과 함께 등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마25:4). 내가 회개하면서 주님의 책망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지만 성령과 무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 어떻게 해서든지 거룩한 성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몸부림을 성령께 드림으로서 등불이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한다. 고로 성령과 무관하게 스스로 행하는 회개나 금식이나 순종은 사실 헛된 것일 수 있다. 성령과 함께, 성령의 음성과 함께, 성령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보시고 흡족하게 하는 회개가 되고, 금식이 되며, 순종이 될 때 그것은 기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충된 기름으로 인하여 성령께서 활활 타오르게 될 때에 그는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2021년 09월 03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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