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지켜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밤에 제자들과 체결하신 '새 언약'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오늘날 유월절과 새 언약을 왜곡시켜 사람을 미혹하고 있는 이단들은 이 단어들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그들은 무엇을 잘못 알고 있으며, 잘못 믿고 있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이며, 오늘도 우리들은 어떤 의미로서 유월절과 새 언약을 준수해야 하는가?

2021-11-2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이단들이 말하는 유월절과 새언약, 무엇이 문제인가?(눅22:14~2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t9PzWkvMRU [혹은 https://tv.naver.com/v/23740239 ]

 

1. 들어가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새 언약'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육신을 가지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저녁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를 마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서 그것을 당신의 몸과 피라고 하시면서 그들과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무교병의  떡을 가지고서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주는 당신의 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고서는 그것은 그들의 속죄를 위하여 흘리는 바 당신의 피로서, '새 언약'을 체결하신다고 하셨다. 이 언약은 구약시대에 세우셨던 '옛 언약'과는 비교할 수 없기에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천오백년동안 지속되어온 유월절을 끝내셨다. 그리고 주님의 몸과 피로서 당신을 믿고 따라오는 제자들과 새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종 이단들은 유월절과 새 언약의 개념을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적용하고 있다. 그럼 그들은 대체 유월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새 언약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특별히 오늘은 '성찬주일'을 맞이하여 이단들이 사용하고 있는 '새 언약'과 '유월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성경을 왜곡시키어 사용하고 있는지, 왜 그들은 그렇게 중요한 성찬식을 행하지 못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는 왜 오늘날도 여전히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3. 하나님의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4. 신천지에서는 왜 이만희를 '새 언약의 사자'라고 말하는가?

 

 

 

5. 신천지, 무엇이 문제인가?

 

 

 

6.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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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

 

오늘은 성찬주일을 맞이하여 왜 이단들이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는 성찬식이 갖고 있는 새 언약으로서의 놀라운 능력과 그것의 효능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았다.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에 불과하지만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이 들어 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왜 그러한 증상이 발생하는가? 여기 그 해답이 있다.

2021-11-21(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왜 우리는 오늘도 계속해서 성찬식을 행하는가?(눅22:19~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RAF9akRE1s [혹은 https://tv.naver.com/v/23695702 ]

 

1. 들어가며

  한국에서 자생한 토종 이단인 '신천지[증거장막성전]'와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에서는 성찬식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특히 신천지는 성찬식이라는 자체가 아예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에서도 역시 성찬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성찬식을 하지 않는 대신 유월절을 지킨다. 유월절 식사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이단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상은 바로 자기들이야말로 '새 언약'을 지키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이라는 단어가 바로 예수님께서 성만찬 때에 약속하신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며, 이것은 예수님의 성만찬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의 성찬 주일을 맞이하여, 성찬식이 곧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아보고, 새 언약은 어떻게 세워졌으며, 그 도구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새 언약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새 언약'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새 언약'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처음 등장하는 단어다. 장차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눅22:20, 고전11:25). 

  그렇다면, 첫째, '언약'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언약'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사실 많이 나오는 단어다(164회).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리트'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협정, 조약, 체결, 약속'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운 협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운 언약(무지개 언약)이 있고,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횃불 언약, 할례 언약)도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과 세운 언약(유월절 언약, 시내산 언약)도 있다. 

  둘째, '새 언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옛 언약을 갱신하고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옛 언약이 약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과 다시 언약을 체결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과 세우는 언약을 가리켜 '새 언약'이라고 명명하신 것인가? 그것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제자들과 체결하시겠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라는 단어에 사용된 '새(로운)'는 단어가, '이전에 없었으나 지금 새롭게 생겨난'이라는 뜻의 새로운('네오스')라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보다는 더 훌륭한' 혹은 '이전에 이미 예표되어 있었으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이라는 뜻의 새로운('카이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신약성경에서 '카이노스'의 '새로운'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새 교훈, 새 포도주, 새 계명, 새 방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사도 바울도 이 단어를 사용했으니, '새 사람, 새 피조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와 고린도전서에 보면, '새 언약'이라는 단어가 있으며,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기에는 '새 이름, 새 노,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하는 말은 이전에 없던 전대미문의 언약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이미 사용된 언약을 계승 발전시키고 갱신시켜,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3. 옛 언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이전에 하나님께서 체결하셨던 '옛 언약'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노아나 아브라함과 더불어 세운 언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세운 언약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약에는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언약'이 있고(렘31:31~32), 출애굽기 19~24장에 나오는 '시내산 언약'이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러한 언약을 체결하신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유월절 언약을 체결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어 구출하시고, 그들을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시 애굽 땅 전역에 장자 죽음의 재앙을 내릴 것인데, 이 재앙을 피하고 결국 애굽의 속박에서 탈출하려면 유월절 예식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1월 14일 해질 때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인방과 설주에 뿌렸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알게 하려고 도덕적 계명들 그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고, 그래서 죄를 범한 것을 깨우침을 받은 자로 하여금 속죄 제사법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의 핵심은 유월절 양의 죽음과 속죄양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 언약 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4. 왜 예수께서는 옛 언약을 끝내고 새 언약을 체결하시려고 하신 것인가?

  그렇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유월절은 거의 준수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 조상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구출되었는지를 그들은 곧 잊어버리게 되었다. 몇 명의 왕들(히스기야왕 요시야왕)과 포로 귀환 시대의 에스라 때에 유월절이 지켜지기도 했지만, 그때에 지켜지는 유월절은 피까지 바르는 유월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제받기 위해 치러한 어린양의 값진 희생을 그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유월절을 제외하고 유월절은 오직 절기의 식사를 하는 것으로만 지켜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가는 제물의 값진 희생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장치를 고안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막법에 나오는 속죄 제사다. 그러나 이것도 제사의 특성상 자신이 자기의 죄를 깨달아 드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많았고, 백성의 지도자들도 처음에는 죄없는 짐승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고 아파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그러한 마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화되어 거의 형식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이상 옛 언약 하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구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이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더불어 새 언약을 체결하게 되신 것이다. 예수께서 구약 언약을 갱신하여 새롭게 새 언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했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요8:24~25, 28, 5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구약의 유월절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보다 더 강력한 언약을 세우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제 참된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고(고전5:7), 참된 속죄 제물로 죽으셔서(요1:29), 유월절과 속죄 제사의 뜻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언약보다 더 강력한 혜택을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5.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의 피는 왜 구약시대 언약의 제물과 피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구약의 언약을 그대로 놔두어 그것을 수정하여 사용하지 않으시고 새 언약을 체결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새 언약'이라는 말 속에 이미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실 때에 사용하신 제물 및 그 피가 이전에 구약시대에 사용했던 제물 및 그 피와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첫째, 제물이 달라졌다. 구약시대에는 흠없는 양과 소 같은 짐승이 유월절 양과 속죄 제물로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새 언약에 사용되는 제물은 그러한 짐승이 아니었다. 죄 없는 예수님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제물이 된 것이다. 그것도 사람의 몸만이 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그 몸이 제물로 사용되신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요한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1:14). 그러므로 한 번의 죄에 한 번 사용되는 제물과 예수님의 몸은 그 효력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구약시대에 짐승의 제물은 하나의 죄에 한 번 바쳐진다면 그 제물은 두 번 사용할 수 없었다. 제물은 살아 있는 것으로만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제물의 피가 달라졌다. 구약시대 사용된 피는 다 짐승의 피였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계속해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 피를 다 쏟고 나면 짐승은 죽는다. 또한 한 번 흘려진 피는 그때 그 제사에 한 번 사용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짐승의 피를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달랐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었기에 그 피 또한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 제한받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자신 안에 생명이 있어서 부활하실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피 또한 한 번 사용하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몸과 피는 이 물질세계에 제한받지 않으시고 항상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몸은 지난 2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제물로 한 번 드려졌지만 두 번 다시 드려질 필요가 없다. 그분은 항상 살아 있어서, 그분의 제물되심은 계속 유효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피 흘림은 한 번 흘리신 것이지만 계속해서 살아 있는 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분을 의지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의 피가 계속해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의 제한이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언약의 백성들 곧 오직 할례받은 히브리 유대 민족만이 유월절을 지키고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제한을 철폐하셨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예수께로 나오면 받아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양 뿐만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워졌다고 언급하였다(엡2:17~18).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물과 제물의 피의 효능이 탁월하게 향상된 것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할례받은 민족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고, 제물도 반복해서 쓸 수 없었으며, 피 또한 새로운 짐승의 피가 계속해서 흘려져야 했지만,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의 피는 한 번 드린 것이었으나 영원히 유효한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이 이 물질세계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피 흘림은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이 된다. 또한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리려면 꼭 성전에 나가서 제물을 드려야 했으나, 예수님 때부터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아도 어디서든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유월절 양과 속죄 제물로 죽으신 이후부터 모든 믿는 이들은 옛 언약보다 더 강력한 새 언약 하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6. 왜 오늘날 예수믿는 사람들은 성찬식을 행하는가?

  왜 오늘날 예수믿는 사람은 성찬식을 행하는가? 그것은 새 언약을 우리가 잊지 않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몸과 하나님의 피로 세워 놓으신 새 언약을 우리와 맺으음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분이 참 유월절 양과 참 속죄양이 되시어 죽으셨기에 우리는 죽음의 재앙을 면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악한 사탄 마귀에게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즉시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속죄하여 더 이상 죄의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되게 해 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값진 희생을 높이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도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 언약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당신이 오시는 그날까지 행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도 있다(눅22:19).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이미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이루어 놓으신, 엄청나고 위대한 희생 언약을 계속해서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것을 기념하며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다(고전11:26). 

 

7. 왜 이단들은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가?

  이제는 왜 이단들이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말할 때가 되었다. 이단들은 겉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실은 이단의 교주가 재림 예수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진짜로 성찬식을 행하게 되어버리면, 그 예식을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일이 발생하게 될 것이고, 그분의 피로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단에서는 결단코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성찬식은 모름지기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과 그분의 피를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단들은 성찬식을 통해서는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에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로 성찬식을 행하게 된다고 하면, 그들은 자신에게 더 엄청난 큰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다. 이제 고린도전서 11:27~30을 읽어 보라. 만약 누군가 성만찬을 합당하지 않게 행하게 되면 성만찬을 행한 사람들이 약하게 되고 병들게 되고 죽는 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므로 어찌 이단들이 자기의 죽음을 각오하고서 성찬식을 행하려고 하겠는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신천지는 결단코 성찬식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유월절을 지키자고만 할 뿐, 성찬식을 행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8. 나오며

  루터교를 제외한 모든 개신교에서는 사실 성찬식을 많이 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행하는 것이 이 성찬식이다. 성찬식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들어 있고 영원한 속죄를 가져다 주는 혜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을 효과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오늘도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람되시어 죽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때에 예수께서도 성령을 통하여 당신이 2천 년 전에 골고다에서 행하신 일이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더욱 깨닫게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에서 이 땅에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하는 것이 셋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하였다(요일5:5~8). 이것들 중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신 영이기 때문에 그분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도록 도와주신다. 그리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시다가 죽기 전에 다 쏟아 놓으신 '물'과 '피'도 역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 흘려 죽으셨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요19:34). 왜냐하면 그분의 육신이야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에 하늘로 가지고 가지만, 그분이 이 땅 위에 남겨두신 피와 물은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들은 엄청나게 축복받은 세대다. 민족의 제한이 철폐되고 어디서든지 회개하만 하면 속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우리는 나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더욱 돌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게 되도록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꼭 회개하여서 속죄함을 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분이 들어오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시는 천국에 꼭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분에게 영광돌리는 가장 귀하고 가장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2021년 11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

 

이 땅에 유일한 신정국가가 한 번 과거에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왕정시대로 들어가기 직전에 한 번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 위에 왕으로 다스렸다. 하나님은 부패한 본성이 가득한 왕정국가보다는 하나님께서 친히 왕으로 다스는 신정국가를 원하셨다. 이것을 위해 애굽에서 종로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자연적으로 이끌어내신 다음 시내산에 불러내어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신다(출24:1~11). 그것은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자가 되어주시고 인도자가 되어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 그들에게 천국을 예표하는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이후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고 거역하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렘31:31~34). 그것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으면 되는 일이었고 성령을 자기마음 속에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신구약성경에서 언약체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동역자들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이런 등등의 문제를 오늘 다뤄볼 것이다.

2019-02-20(수) 수요기도회
제목: 출애굽기강해(24) 시내산 언약체결 및 시내산 금식산상기도(출24:1~18)
https://youtu.be/Odu0x8qXymU


1. 들어가며

  출애굽기의 최대의 분수령은 출24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는 24장을 기준으로, 1장부터 24장까지를 전반부라고 하고 그리고 25장부터 40장까지를 후반부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반부는 또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출애굽기12장을 기준으로, 1장부터 12:36까지는 출애굽준비과정이라고 부르고, 12:27부터 24장까지는 출애굽여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출애굽여정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은 출20장으로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어서 2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받은 율법말씀을 지키겠다고 서약하는 언약체결식이 나온다. 오늘은 드디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간에 언약식이 공식적으로 체결되고 있는 장면을 살펴볼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체결을 위한 기념제사를 드리게 하고 언약서를 낭독하게 한 뒤, 피뿌림의식을 통해서 언약을 체결하시고 이후 공동식사를 통해 언약체결을 마무리지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민족과 하나님 간에 체결된 언약체결식의 의미와 중요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74명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고 하는데, 과연 74명의 이스라엘지도자들은 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 그리 모세는 여호수아 그리고 아론과 훌과 같은 동역자들과 어떻게 동역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시내산 언약체결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십계명에 이어서 재판법과 의식법을 일러주셨다(출20~23장). 그러자 모세는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그것을 다 들려주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일제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겠노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모세는 십계명을 제외한 재판법과 의식법 모두를 책에 기록했다. 그리고 모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에 언약체결식에 참여했다. 먼저,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 아침 일찍 제단을 쌓고 열두개의 돌기둥을 세운 뒤에, 소로 번제와 화목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희생제물의 피를 가져다가 반은 제단에 뿌렸다. 그리고 반은 언약식에 참여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렸다. 그리고 선언하기를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출24:8)"라고 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함께 그리고 아론의 두 아들들(나답과 아비후) 및 장로70명과 함께 시내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먹고 마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간에 언약을 체결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신정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는 국가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영토(가나안땅)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하나님과 하나의 민족간의 언약은 이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하나의 민족을 얻으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제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고 인도받게 되는 확실한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언약식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큰 부담거리로 작용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이후 사람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함과 약함으로 인하여 이 언약은 얼마든지 깨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약을 체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를 그들에게 뿌리심으로 만약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리게 된다면 피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하지만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고, 결국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되었고, 남유다 역시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3. 이스라엘이 멸망망하기 전에 새 언약을 약속하신 하나님과 그것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 및 오순절의 성령님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새 언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렘31:31~34).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성질상 많이 다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는 율법말씀을 돌판(십계명)이나 언약책(재판법과 의식법)에 기록하게 하고, 그것을 밖에 두어 왕과 제사장으로 하여금 읽게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새 언약을 맺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 속에 집어넣겠노라고 하셨다. 이것의 성취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한 "성령의 내주"사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무엇이 죄인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회개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들로 오시어 인류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시작에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서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 하루 전날에, 12제자들을 모아놓고는,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그러므로 출24장의 사건이 이스라엘백성과 하나님 간의 언약체결식이었다고 한다면, 마26장(눅22장)에 나오는 성만찬 제정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교회들)과 예수님 간의 언약체결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평생 그분으로부터 지키심과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죽어서는 천국에까지 들어가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고로 신약의 성만찬의 제정은 곧 구약의 시내산 언약체결을 훨씬 뛰어넘은 새 언약체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키심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가나안땅에 들어가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약을 새롭게 제정하셨으니, 아들의 피와 성령을 보내어 새 언약의 놀라운 축복으로 초청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언약에 참여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새 언약의 중보자(히9:15,12:24)"라고 칭했다.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요14:6,딤전2:5).

 

4.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이스라엘백성과 하나님 간의 언약체결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73명의 이스라엘백성의 대표자를 시내산으로 불러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그렇다면, 모세와 73명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대체 그때 시내산에서 무엇을 본 것인가?

  성경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보좌 위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다. 구약시대 사람으로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73명의 지도자들이 있으며, 이사야선지자, 미가야선지자, 다니엘 선지자, 에스겔선지자, 스가랴선지자와 같은 선지자들도 있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는 스데반집사와 사도요한 등도 하나님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출33:20,23). 그렇다면 성경의 인물들은 대체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먼저, 오늘 본문의 언약체결식에 등장하는 모세와 73명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은 그분의 발만을 보았다(출24:10). 그리고 그분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펴놓은 듯한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에 있는 높이 들려져있는 보좌와 하나님의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옷자락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미가야나 다니엘, 에스겔이나 스가랴 선지자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환상 중에 가서 보았는데, 그들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신약의 스데반집사도 하나님을 본 인물에 속하는데, 놀랍게도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을 뿐 스데반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며 다만 하나님의 보좌 우편들로부터 서 계신 채 있는 예수님을 보았을 뿐이다(행7:55~56). 그리고 신약의 사도요한은 환상으로 하나님의 보좌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계1:13,4:2~3).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뒷모습까지 보았던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다(출33:22~23). 그는 또한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보니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출34:33~35).

  그렇다면 장차 우리가 죽어서 내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서 보게 될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라도 보좌 위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이 당신의 보좌에서 내려오실 때에 그분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그때 그분은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가 승천하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요1:18). 그러므로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두 분 혹은 세 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천국에서 하나님은 항상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 두 인격(아버지와 아들) 혹은 세 인격(아버지와 아들과 보혜사 성령)으로 나타나셨을 뿐이다.

 

5.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써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오른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불러내신다. 왜냐하면 그에게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들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랐다. 그리고 40일 낮과 밤을 금식하며 하나님을 기다렸다(출24:18,신9:9). 처음에는 모세도 기다리기가 힘들었으리라. 어쩌면 그에게 40일은 시련과 고난의 기간이었을 수도 있고, 연단의 기간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그에게 40일은 온전히 경건으로 채우는 시간이었으리라. 그러자 40일째 되는 날, 구름과 맹렬한 불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했을 때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거싱 바로 "성막의 제도"다. 그리고나서 이윽고 하나님께서는 두 돌판에 10계명을 새겨서 모세에게 주신다.

 

6. 모세는 백성들의 다른 지도자들과 어떤 동역의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에 오를 때에 그는 혼자 가지 않았다. 한 명의 수종드는 자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다. 일찍이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아말렉과 전쟁터에 나가 싸우던 자였다(출17:8~16). 아마도 이때 그의 나이가 약 55세였을 것이라고 본다. 적지 않은 나이였에도 불구하고여호수아는 모세를 자신의 영도자요 스승으로 철저히 믿고 따른다. 그리하여 모세를 대를 이은 후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여 들였으며, 그곳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각 지파에서 땅을 기업으로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산에 오르기 전 모세는 아론과 훌에게 백성들을 부탁한다. 아론과 훌도 아말렉과의 전투시 모세의 양 팔을 들어올린 자들로서 모세의 신임을 받고 있던 자들이다. 이때 아론은 모세보다 2살 위의 형이었으며, 훌은 아마도 모세의 매형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어찌되었든 나이많은 아론과 훌은 모세를 대신하여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70명의 장로들에게 부탁한다. 모세 자신이 없는 동안에 일이 생기거들랑 아론과 훌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받도록 말이다.

  그렇다. 모세에게는 자신의 후계자인 여호수아 외에도 아론과 훌과 같은 사람들과 주변에 신실한 70명의 장로들이 있었다. 그가 없을 때에 그를 대신하여 일해줄 동역자들이 그에게 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혼자서 일할 수 없다. 동역자가 없으면 지도력이 미치는 범위와 능률성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동시에 여러가지를 대처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어느 대표 한 사람이 일하는 것이지만 그와 협력하여 일할 여러명의 동역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들의 동역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귀하게 쓰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도왔던 자들에게도 후한 상급을 주신다.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라. 그에게는 처음에는 바나바와 실라라는 동역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천막만드는 자로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고 그들 부부는 바울이 죽는 날까지 물질적으로 도왔다. 그리고 2차전도여행 때에는 의사 누가가 바울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방인 의사였던 누가는 바울이 순교하는 그날까지 곁에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 이외에도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빌레몬 등 다수의 동역자들이 바울을 섬겼으며, 그와 함께 일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와 전유럽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7. 나오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에는 확실히 어떤 질서와 체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와 체계는 군림하고 지배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서로 맡겨진 임무에 동역하라고 주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직분은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모두가 최선을 다하여 하모니를 이루며 교회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할 때에 온 세상이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신다. 죄인이지만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하고 보호해주시기를 원하며,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기업을 상속으로 나눠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오늘도 하늘나라에 들어와서 살 사람을 기다리며 지금도 찾고 계신다. 어떤 사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출24장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 중에서 누군가가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언약백성이란 구약시대에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이후에는 인류의 속죄를 위해 영원한 언약의 피를 뿌리신 우리 주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언약백성이 될 수 있게 만드셨다. 누구라도 믿고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 신약시대 이후 우리는 예수님만을 나의 구주요 나의 주 하나님으로 끝까지 믿어야 한다.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믿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흠없는 속죄제물로 오셨고, 골고다언덕에서 속죄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율법을 준행하지 못하는 자가 받아야 할 모든 수모와 형벌과 저주까지 다 담당하셨다. 그리고는 하늘에 오르셨고 그 이후 모든 믿는 자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고, 그분이 보내주시는 성령을 자기의 마음 속에 모시어, 그분을 나의 통치자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어느 때든지 그분이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하면 되고, 그분이 충성하라 하시면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이 나가가야 할 방향이며 목표다. 지금 진정 당신은 언약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2018년 2월 20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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