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9)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던 한 분 하나님이시다(1)(계1:4~7)_2022-05-20(금)

https://youtu.be/MkQ-uO2JXNk  [혹은 https://tv.naver.com/v/26940566 ]

 

1.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의 인사말(계1:4~6)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사실 계시의 책이자 묵시의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예언의 책이자 또한 편지의 책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바로 요한계시록 1:4~6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누가 누구에게 편지하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요한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서,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때 요한은 성자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계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2.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사도 요한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언뜻 보기에는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을 쓸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다르다. 다른 이유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 첫째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원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표현도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둘째,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순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성령'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편지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있기만을 기원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편지의 인사말에 바울의 편지 속에는 결코 성령 하나님이 들어 있지 않는 데에 비해, 사도 요한의 편지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를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3~4에서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분의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표현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다고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처음에 표현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것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장차 오실 이'는 분명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근거가 바로 7절에 나온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 이 말씀에 나오는 '그'는 분명 그 앞 구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인 것이지 성부에 대한 소개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라는 표현도 성령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표현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며(계5:6), 구약 시대로 치자면 이 표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슥4:10). 다시 말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것들을 감찰하는 분이 곧 하나님이신을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4.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로 말하지 않고 있다.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앞뒤가 서로 바뀐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성자에 대한 소개가 너무나 길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간단하게 성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이유가 될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의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고 나타내시어 일하시는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사44:24). 그분은 성자와 성령과 협의하거나 회의하지 않으시고, 홀로 하늘을 펼쳤으며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이 홀로 땅을 펼치셨다. 그리고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다시 4,000년이 지난 후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요16:27~28).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지 처음부터 따로 있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고로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 인사말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5.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3가지 신분을 가진 자이자, 3가지 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첫째, 그분은 세 가지 신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참된 증인'이자, '죽은 자들의 먼저 나신 이(첫 열매, 원형)'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시다. 둘째, 그분은 세 가지 활동가로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분'이자, '우리를 그분의 피 안에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이'이시다. 그리고 더불어 그분은 '우리를 왕국으로, 하나님이신 그의 아버지에게 제사장들로 만드신 이'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일은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은 실은 과거의 일이며, 더불어 우리를 왕국과 제사장들로 만들고 있는 일은 과거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며 그 일은 아마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과거에 인간이셨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에, 그분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 신성이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예수님을 인성을 배재한 분으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을 신성만을 가진 분으로도 소개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2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03)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02)(계1:4~8)_2022-04-28(목)

https://youtu.be/0AtNjqrKXSs  [혹은 https://tv.naver.com/v/26519059 ]

 

1. 요한계시록에 1장 4절에서는 주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 4절에는 주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소개되고 있는 분이 8절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 주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시며,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자이신 것이다. 

 

2.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지상에 계실 때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계시된 예수님의 칭호 이상으로 소개되어 있다. 사실 지상에 계실 때에 그분에 대한 최고의 칭호는 그분이 그리스도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마16:16).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이상으로 소개된다. 다시 말해, 그분은 지상에 계실 때에 불려졌던 바로 그 칭호 외에도 한층 고양된 칭호가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인데, 주 하나님이신 그분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분은 "전능자이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줄곧 '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그분이 '주 예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계22:20,21). 주 하나님이 곧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보좌에 앉으신 이 곧 주 하나님이라고 소개되어 있다(계21:5~6, 19:4). 그런데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가면, 주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마침이다"고 말씀하고 있다(계22:13).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참고로, 요한복음에서도 주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한층 더 고양된 형태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사도 도마의 신앙 고백에 나타나 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후에 그분에게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요20:28).

 

3.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를 성부 하나님에 대한 소개라고만 알고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그렇게 해석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바로 그 책에서만 표현되어 있는 독특한 하나님의 칭호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이다. 그런데 이 칭호는 구약 시대 때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에게서 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칭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계시하셨다(출3:14). 그런데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아흐예 아쉐르 아흐예'로서, '나는 내가 ~라고 하는 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헬라어의 70인역에서는 '나는 지금 있는 이이다.'라고 번역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조금은 암시가 되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요한계시록에서 비로소 표현된 독특한 하나님의 칭호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누구신가?

  그렇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대체 누구신가? 많은 주석학자들이 해설하고 있듯이 이 칭호는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인가? 아니면 다른 칭호이기도 하는가? 얼핏 보기에는 이 표현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표현처럼 보인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만 보아서는 아니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하나님 칭호는 성부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요한계시록에서 딱 3번 나올 뿐이다. 요한계시록 1:4,8과 그리고 4:8이 그것이다. 1:4과 1:8에서는 동일한 표현으로 나오고, 4:8에서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여서 첫째와 둘째가 순서가 뒤바뀌어서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구의 순서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 다 동일한 표현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과 16장에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축소되어서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이'라고 나온다(계11:17, 16:5). 즉 '장차 오실 이'라는 부분이 삭제되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사도 요한이 모른 채 빠뜨리고 기록한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함부로 실수한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표현들에는 의미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 왜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날 때다(계11:15). 이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께서 공중으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위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표현된 예수께서는 이제 두루마리를 사도 요한에게 넘겨주시고 재림하신 것이다. 즉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으로부터 큰 두루마리를 취했던 예수께서는 일곱 인들 중에서 여섯째 인까지 떼시고 또한 일곱째 인을 떼신 후에 여섯째 나팔까지 주관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재림하셔야 하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예언의 말씀인 두루마리(그래서 작은 두루마리가 됨)를 사도 요한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0장에 막간 계시로서 나온다. 그렇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모두를 지칭하는 칭호였던 것이다. 정리한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칭호인 것이다. 

 

5.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 전체의 기록을 통하여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성자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시다'는 말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만약 우리가 그분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분은 더 이상 성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내용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신앙 고백으로 알려지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에 고스란히 나온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100%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와 서로 구별되시기 때문이다), 100% 맞다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 곧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세기와 이사야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의 놀라운 자기 선언이 나온다.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무려 3번씩이나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8:24,28,58). 이는 예수께서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을 직접 자신에게 적용하신 사례이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유대인들이 그만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몰아붙이면서 네가 아브라함보다도 크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대답하신다(요8:56). 그러자 유대인들은 "네 나이가 아직 50도 아니 되었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나는 ~이다"라고 하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심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제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주 하나님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실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탄생하실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협의를 하여 성자가 아들로 내려오셨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에만 나올 뿐 실제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성경에서는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당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던 한 분 하나님께서 훗날 인간에게 다시 오실 때에는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만세 전부터 아들로 따로 있다가 아버지와 협의를 한 후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될 때에 비로소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분은 결코 아버지로부터 독립되어 따로 나타나 있다가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요16:27~28).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의 체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다가 드디어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한다(사9:6). 고로 만약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하셨던 예수님의 명령을 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행2:38, 8:16, 10:48, 19:5)" 바꾸어서 세례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도 되고, 아들의 이름도 되고 성령의 이름도 되는 것이지만 그분이 우리에게는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기에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아들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세례를 줄 때 어느 누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이 없고, 모두가 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로 세례를 주었다고 나온다. 이는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4월 28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50) 곧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분은 예수님인가 주 하나님인가?(계22:6~21)_2022-04-21(목)

https://youtu.be/wA9qK2U3Dds  [혹은 https://tv.naver.com/v/26371478 ]

 

1.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속히 곧 오시겠다고 하신 분은 누구신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내가 속히 온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오는데, 총 5차례가 나온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세 차례 나오고(계22:7,12,20), 그 외에도 두 차례 더 나오기 때문이다(계2:16, 3:11).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한다면, "내가 신속히 오고(가고) 있다"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장차 신속히 갈 것이라는 미래 시제가 아니라, 지금 현재 오고(가고) 있다는 현재 시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밖에서 항상 현재로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분은 대체 누구인가? 계2:16, 3:11에는 그분은 '예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리고 계22:7,12,20의 말씀에서도 그분이 '주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속히 오실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신 것이다.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분은 예수님인가 주 하나님인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분은 분명히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던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분에 대해 사도 요한은 놀라운 정보를 우리에게 공개한다. 첫째로,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이다(계22:20,21). 그리고 둘째로 그분이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을 '주님'이라고 칭했다는 말은 그분이 곧 주 하나님이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라는 칭호가 요한계시록 21장까지는 전부 다 '하나님'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계시록 22장에 와서 '주님'이라는 칭호를 '예수'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계22:20,21). 또한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나'이신 '예수'께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셨다(계22:13). 이는 실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이전까지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라고 하는 자기 선언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계1:8, 21:6). 더불어 "나는 시작과 마침이다"라는 자기 선언도 역시 오직 주 하나님이시자 보좌에 앉아 계신 분에 대해서만 사용한 용어이다. 다만 요한계시록 22장 이전까지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선언하셨을 뿐이다(계1:17, 2:8).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 와서, 주 하나님의 칭호('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 '나는 시작과 마침이다')라는 용어가 주 예수님의 칭호('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라는 용어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분을 가리켜 '주 예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분은 사실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3. 구약 시대에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누구이셨는가?

  구약 시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는 딱 2가지로 말씀하셨다. 하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나는 ~라고 하는 바로 그 자신이다)"(출3:14)라는 자기 선언이요, 또 하나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자기 선언이다(사41:4, 44:6, 48:12).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자기 선언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자기 선언은 구약 시대에 오직 한 분 하나님이셨던 여호와에게만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욱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표현을 예수께서 똑같이 자기 선언으로 사용하셨다는 사실이다. 첫째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3번이나 말씀하셨다(요8:24,28,58).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표현은 헬라어 성경에만 나올 뿐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자기 선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계1:17, 2:8, 22:13). 그것도 무려 세 번씩이나 그렇게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양단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한 분 하나님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도 아니며, 처음과 마지막이신 이도 아닌데도 자기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그분을 사기꾼으로 볼 수도 있다(이는 그분이 참람죄,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니면 그분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으로서 구약에 나타났던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거짓이 전혀 없는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단 한 구절이라도 버리거나 제쳐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야말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신 분이자 동시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말씀하신 분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신약에 아들로 나타나셨던 예수는 구약의 여호와로 나타나셨던 분과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4.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총 7번 나온다(계1:8, 4:8, 11:17, 15:3, 16:7, 19:6, 21:22). 이것은 한 분 하나님을 지칭하는 고유한 명칭이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 하나님'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그것은 이렇다. 첫째, '알파와 오메가'라고 2번 나온다(계1:8, 21:6). 둘째, '전능하신 이'로서 9번 나온다(계1:8, 4:8, 11:17, 15:3, 16:7, 16:14, 19:6, 19:15, 21:22). 셋째, '시작과 마침'이라는 표현은 한 번 나온다(계21:6). 넷째,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3번 나온다(계1:4, 1:8, 4:8). 그렇지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신 이"라는 표현만으로 보면 총 5회가 나온다(계1:4, 1:8, 4:8, 11:17, 16:5). 다섯째, "보좌[위]에 [스스로] 앉으신 이"라는 표현은 12회 나온다(계4:2, 4:3, 4:9, 4:10, 5:1, 5:7, 5:13, 6:16, 7:10, 7:15, 19:4, 21:5). 단, 1회는 그리스도에 쓰였다(계20:11).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주 하나님으로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분이요, 전능하신 이시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보좌에 앉으신 이'시다. 그런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자기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했으니, 장차 재림하실 분은 예수님이지만, 주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5. 요한계시록이 들려주는 놀라운 한 분 하나님의 실체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에서 들려주는 한 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가 있다. 그분은 만세 전부터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셨던 분으로서, 구약 시대에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려 주셨으며, 그분의 자기 선언으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만세 전의 계획과 경륜을 따라 자기에게서 아들의 이름으로 이 세상으로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를 대신하는 한 분 하나님의 표현이자, 아들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혹은 야훼)'라고 칭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구약의 여호와와 동시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고로 '주님'이라는 칭호는 신성한 한 분 하나님의 칭호였던 것이다. 고로, 구약 시대에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셨던 분은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 후에 역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이자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류 구원을 위해 삼위로 역사하셨던 한 분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경 맨 마지막 장(계22장)에서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예수님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림하시는 그분을 뵈올 때에 '예수님'으로 보겠지만 그분을 이제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2022년 04월 21일(목)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삼위일체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자리에 있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자가 한 자리에서 일하시고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증거로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표현을 언급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해석은 바른 해석인가? 혹시 틀렸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2021-03-14(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창세기강해(43) 창1:26에 나오는 "우리"가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인지 경륜적으로 살펴보자(창1:26~27, 3:22, 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x-0yVgTNFM [혹은 https://tv.naver.com/v/19018365 ]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성경과 다른 부분들이 끼어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나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적인 신앙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룬다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이며, 또한 많은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런데 천국에 가 보았더니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께서 앉아계시다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성도들은 과연 어떤 충격에 빠지게 될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온대로 믿어야 한다. 거기에다가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가 믿는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성경대로 믿는 것이 답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신앙은 그동안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영역처럼 여겨져왔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건드리면 그냥 이단이라고 정죄해버린다. 성경대로 믿지 않는 것이 이단이겠는가 아니면 교리대로 믿지 않을 때에 이단이라고 하는가? 이단이란 결국 그렇게 믿었더니 지옥에 떨어질 때에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성경에 증거하고 있는대로 믿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시대에도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 따로 활동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천지창조사역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는 표현에 등장하는 1인칭 복수형이 과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성경책에 나온 말씀과 그리고 구약의 신학자의 논문을 통해서 이를 정확히 살펴보고자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계시의 영이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2. 창1:26에 나타난 하나님의 1인칭 복수의 표현은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용어인가? 

  창1:26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는 용어를 사용하실 때에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그 말씀은 이렇다.

창1:26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말씀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그리고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셨을까 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많은 초기교부부터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라고 주장해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공히 개입하시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하는 매우 중요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것이 논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히브리어로 보면 "엘로힘"인데, 이것은 "엘, 엘로하"에 대한 복수형태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주장과 해석은 정당한 것인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엘로힘)께서 자신을 대명사로 받을 때에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4번 정도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4번 사용한 그 용례들은 과연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들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첫째로, 창1:26에 나오는 "우리"부터 살펴보자. 이 말씀은 이 말씀만을 따로 떼어서 보면 그렇게 해석할 개연성이 조금은 있어 보인다. 물론 창1:27에 가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증명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창1:26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창3:22의 "우리"가 있으며, 셋째, 창11:7에도 "우리"가 나오며, 넷째, 사6:8에도 "우리"가 나온다. 우선 그 사용용례의 성경구절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창3:22 여호와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11:6-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6:8-9 내가 또 주(아도나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위의 경우 셋 다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먼저 창3:22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주어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분이 하나님(엘로힘)은 하나님인데, 여호와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구약의 "엘로힘"은 여호와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이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이것은 명칭에서만이 아니라, 창조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조금 있다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창11:7을 보면, 여기서 주어 우리는 "하나님(엘로힘)"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도"도 아니다. 여기서 주어는 "여호와"다. 그런데 구약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여호와"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유일하신(홀로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킨다(출3:14~15, 신6:4). 그러므로 창11:7에 나오는 "우리"는 결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창11:7의 "우리"는 누구인가? 그것은 한 분 하나님과 그의 옆에서 시중들고 있는 비교적 높은 계급의 천사들이라고 추정해낼 수가 있다. 그렇게 해석할만한 증거는 다양하다. 우선 사6:8~9에 나오는 "우리"가 한 분이신 여호와와 그 옆에 있는 스랍천사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맥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사6:1~9). 그리고 왕상22장에 나오는 천상회의의 장면 속에서도 그것은 증명된다. 누가 아합을 꾀어 길르앗라못에서 죽게 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하는데, 그때 여호와께서는 보좌 위에 앉아 계시고 그 주변에 있는 하늘의 만군(군대=천사들)이 그분과 함께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상22:19~22). 그때 거짓말장이자 거짓말의 아비(요8:44)인 사탄마귀라고 추정되는 한 영이 나와서 자기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조정하여 아합왕을 꾀이겠다고 말하였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욥기서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과 천상의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사탄마귀가 욥을 고소하기 시작한다. 그때만 해도 사탄마귀가 아직 하늘에서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고 온 사탄마귀가 천상의 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고로 우리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신약시대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호와이신 한 분 하나님과 그의 옆에 시중들고 있는 꽤 높은 계급의 천사들과의 회의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구약의 외경의 하나인 "야살의 책"을 보면, 창11:7에 나오는 "우리"는 언어를 혼잡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상의 존재들인 천사들과 말씀을 나누는 것인데, 그때에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앞에 서있는 70명의 천사들이었다고 증거하고 있다(야살의 책 9:32).

  이상의 사실을 요약하면, 창1:26에 나오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 옆에 있는 천사들 중의 몇 명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창3:22의 "선과 악을 알고 있는 우리들 중의 하나"는 아마도 사탄마귀(루시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선과 악의 실체를 알고 있어서 하와를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창세기 1장만을 가지고서는 천사들이 왜 인간창조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창2:1을 히브리어원문으로 보면, 해답이 나오기 시작한다. 창2:1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지구) 그리고 하늘들의 군대(천사들을 지칭함)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욥38:7을 보면, 하나님께서 땅(지구)의 기초를 놓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기뻐 노래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천사들은 첫째날에 창조된 듯 보이며, 적어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에는 이미 천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두목급에 해당하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옆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창18~19장에 나오는 여호와와 그리고 두 명의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러 온 사건도 여호와 하나님과 그 옆에 있던 천사들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창1:26에 나오는 "우리"가 여호와 한 분 하나님과 그분 옆에 있는 두목급의 천사들이라는 것을 추정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증거들이 있다. 그것은 창조사건에 대한 묘사에 들어 있으며, 신학자의 논문에도 들어 있다. 

 

3. 천지창조와 인간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가 아니면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것인가?

  창세기 1장만을 읽고 있노라면 천지만물은 하나님(엘로힘) 곧 복수 형태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엘로힘이 그 형태는 복수형이지만 그것은 한 분 하나님(단수)이라는 것을 창세기 1장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누군지를 설명해주는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도 나온다. 먼저, 창세기 1장의 말씀들을 살펴보자. 창1:1에서는 태초에 엘로힘이 하늘들과 땅(지구)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창조하다"는 동사("빠라")는 주어를 3인칭 단수로 받고 있다. 만약 엘로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분명히 동사도 복수형태로 받아야 하는데, 동사는 단수형태로 받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창1:26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실 때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만들자"라고 하셨지만 실제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 홀로 창조하셨다고 곧장 1:27에 나온다. 즉 창1:27을 보면, 창1:26의 논의에 따라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는데, 창조했다는 동사의 주어가 3인칭 단수이다. 이는 인간창조에 천사가 개입한 것이 아니라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창조기사를 다루는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천지만물의 창조는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께서 혼자 창조하시고 만드셨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의 구절들을 살펴보자.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엘로힘)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그분의 지혜와 말씀으로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출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우리'가 아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들]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2:5 하늘[들]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 신약시대에 예수께서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실 때에 사용하신 "우리"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께서도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분이 공생애를 3년반을 마치시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밤이었다. 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시고는 혼자 기도하시는 장면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7장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우리"라는 용어를 3번씩이나 사용하셨다.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21-22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우리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 삼위일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위일체인 셈이다. 그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맞다. 이것은 정확하게 삼위일체(적어도 이위일체)의 증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는 하나님으로서 아니라 인간으로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때는 아들과 아버지는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우리"라고 사용한 대명사는 성부와 성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여기서는 그렇다고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아들이 밖으로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밖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시간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공유할 수 있으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가지는 속성으로서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만세전에 아들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하는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요16:17~18). 그 전에 그분은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다(요1:18). 아버지의 품 속에 이미 아들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들어오심으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이 땅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셨고, 이 땅에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시대 창조 때부터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으니, 이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의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받는 모습이다. 거기를 보면, 세례받는 아들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려오고 있으며,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4:17)" 고로, 요17장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은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닌 것이다. 그때는 동시존재하신 아들이 동시존재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존재방식으로 계시는가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는가?

  그렇다면, 2021년 3월 지금 현재 천국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천국에서 하나님은 활동적으로 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좌에는 앉아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도 그 옆에 있으며, 보좌 앞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삼위로서 활동하시는 것을 묘사하는 것일 뿐, 존재 자체를 셋이라고 보아서는 아니 되는 말씀들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을 실체라고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일곱 눈들과 일곱 뿔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실체라고 하면 예수님은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성령은 영이 7개나 되기 때문에 다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한 분 하나님의 활동이시며, 어린양은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의 간증으로서 상징적인 묘사이며, 그것은 아직도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것도 상징적인 표현이다)에서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을 하고 계시며,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우주 만물 특히 사악한 영들은 사탄의 왕국까지 통치하고 계시며, 또한 장차 재림하시어 사탄마귀의 세력을 쳐부수어 그들을 무저갱에 보내고, 성도들을 구원하여 상을 주셔야 하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예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21장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원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에 앉아계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증거한다(계3:21, 7:17). 그러므로 천국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존재 자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곤란하다고 할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6. 전통신학교 교수는 "우리"라는 용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정통신학교 교수는 창1:26의 "우리" 즉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1인칭 복수형태의 낱말인 "우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교수들은 그것을 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보고 있다. 그럼 그들은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그것은 대부분의 초기교부들도 그렇게 해석하였고, 종교개혁자들도 그렇게 해석하였으며, 여러 신앙고백서들(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등등)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만을 경전으로 믿고 있는 유대 랍비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그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100% 다 구약성경의 다른 용례를 따라서 한 분이신 여호와와 그 옆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정통신학교 교수들 중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분이 없을까? 다는 조사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총신대 전 구약학교수이신 김정우박사님은 그것을 하나님과 천사들간의 천상회의로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분의 논문이 본교회 홈페이지 신학자료실에 있음).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잘못 해석한 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논문으로 증명했다는 데에 그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며, 하나의 해석이 정확한 해석이 되려면 성경의 다른 본문과도 위배되어서는 아니 될 터인데, 창1:26의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보면, 다른 많은 성경구절을 성경에서 지워야 하는 애로점이 발생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의 끝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 예언의 말씀을 누군가 빼버린다면 그는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거하실 것"이라고 하셨다(계22:19). 이것은 천국에 못 들어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을 것이냐 과거 유명한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했으니 그대로 따라갈 것이냐를 말이다. 

 

7. 나오며

  창1:26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 없는 말씀 중의 하나다. 그동안 있어왔던 교리나 신앙고백을 따르자니 성경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고, 그렇다고 성경대로 따르자니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틀린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해야 하고, 이제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 두 사람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만해도 5만명의 목회자가 있다는데, 초대교부 때부터 굳어져 있는 교리라 할지라도 잘못 해석한 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삼위일체 교리가 잘못 되었다고 하면 이단 삼단 소리를 듣는다 해서, 그냥 입을 닫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아니한가? 주님 오실 때가 머지 않았다. 이제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바로 잡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지금 활동하실 때에는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활동하신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보지 못하면 어떤 일이 계속 발생하는가? 아버지 하나님이 있고 아들 하나님이 있으니, 어머니 하나님(장길자)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단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머니(마리아)가 있다고 하는, 이상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곳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한 분으로 보지 못한 채 늘 삼위로 나뉘어져 있는 것만으로 보려고 하는 자들의 함정인 것이다. 이제는 한 분 하나님이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그분을 믿고 의지하자.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할렐루야!

 

2021년 03월 1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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