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인가? 모두가 다 면류관을 쓰고 살며, 좋은 대저택 같은 천국집에서 사는가? 만약 믿음만으로 그렇게 되어진다고 주장한다면, 신약성경에서 아주 많은 말씀들을 찢어내고 파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게 될 지위와 신분은 대체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또한 누가 면류관을 쓰며, 누가 좋은 천국집에서 사는가? 여기, 그것을 알려주는 핵심적인 말씀들이 빼곡히 들어있다.

2022-03-2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천국복음(25) 천국에서는 정말 차등상급이 존재하며 왜 있는 것인가?(마5:11~12,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t95AXLcSZw [혹은 https://tv.naver.com/v/25773014 ]

 

1. 들어가며

  산상수훈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이다. 산상수훈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이 '천국'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의 시작을 보라. 그것은 팔복으로 시작된다. 그러면 그 복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중의 복은 천국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에는 메시야의 탄생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육신적인 복을 허락하셨다. 건강하게 사는 것, 물질이 풍성하게 되는 것, 자손이 번성하는 축복을 더하신 것이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그 민족이 메시야가 이 땅에 탄생하도록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탄생하신 뒤에 이제 복은 달라졌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복을 선언하실 때에 그것은 이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이었다. 그리고 육신의 복이 아니라 '영혼'의 복이었으며, 일시적인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이었다. 이것은 결국 한 마디로 천국 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받을 복은 대체 무엇인가? 그러한 복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두가 다 똑같이 받게 되는 복이 천국 복인가? 아니면 차등이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천국에서 누릴 복은 어떤 것이며, 그 복은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으며, 왜 천국에서 복이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들려주신 천국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신 천국은 대체 어떤 말씀이었는가? 그것은 딱 3가지다. 첫째는 천국 입성 조건에 관한 말씀이었다(마5:20, 7:21). 즉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우리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는 더 풍성해야 한다고 하셨다(마5:20).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외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둘째, 천국에서 받게 될 상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천국에서 받을 상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마5:11~12). 셋째, 천국에서 얻게 될 지위와 신분에 관하여 말씀해 주셨다(마5:19).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다 똑같은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각기 다른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알려면,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는지만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받아 누릴 상과 그곳에서 받을 지위와 신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3.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면 얻게 될 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면 얻게 될 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것에는 다음과 같이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천국에서 얻게 될 지위와 신분에 관한 상이 있다(마5:19, 눅22:29~30, 마20:26~27). 여기서 천국에서의 지위와 신분을 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수고한 대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면 성도들은 어떤 지위와 신분을 가지는가? 그것은 크게 '다스리는 자'와 '섬기는 자'로 나뉜다. 여기서 '다스리는 자'는 다시 '왕 노릇하는 자'와 '다스리는 자'로 나뉜다. 천국에 가면 그가 어떤 신분을 지녔는지는 예배드릴 때에 확인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드릴 때에 보면, 어떤 사람이 어느 보좌(자리)에 앉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의 지위와 신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보좌 자리는 총 144,000석인데, 그것은 다시 70줄의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중에서 1~6번 줄까지는 왕 노릇하는 자이며, 7~70번 줄에 앉은 자는 다스리는 자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서 있는 모든 성도들은 섬기는 자들로서, 예배드릴 때 다 서서 예배를 드린다. 그렇지만 이들도 자기 집에 가면 섬기는 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얻게 될 지위와 신분은 어디에 나오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천국에 대해 들려주신 말씀 속에 나온다. 오늘 본문의 산상수훈에도 역시 나온다. 천국에는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마5:19). 그리고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8:4). 그리고 부자 청년을 책망하시면서 들려준 말씀에 따르면, 천국에 가면 왕 노릇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다(눅22:29~30). 그렇다면, 천국에서 성도들이 섬기는 자요, 종으로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20:26~27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말에서는 잘못 번역하고 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요,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문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장차 섬기는 자로 있을 것이다"인 것이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장차 종으로 있을 것이다"인 것이다. 한글성경 자체로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 번역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도 섬기는 자가 있고, 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동사가 아예 다르다. 즉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천국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 땅에서 섬기는 자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장차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다스리는 자로 있을 자도 있고 섬기는 자로 있을 자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 노릇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열 므나의 천국 비유에서도 나온다. 그 비유를 보면, 한 므나를 받았는데 열 므나를 남긴 착한 종에게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열 고을의 권세를 준다. 이것은 열 고을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는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지위를 가진 자가 있고, 섬기는 자 즉 일하는 자의 지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천국에서는 면류관(승리관)의 상이 있다(벧전5:3~4, 딤후4:7~8). 천국에는 자신의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는 사람도 있고, 면류관을 쓰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자신의 머리에 면류관을 쓰지 않는 자로서 섬기는 자로 살아간다. 왜냐하면 면류관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자만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 보면 천국 성도들 중에 어떤 이는 면류관을 20개 이상 쓴 자도 있다. 천국에서는 그 면류관을 머리에 쓰지만 겹쳐 쓸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무게가 이 지구의 무게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크기와 모양을 갖춘 면류관을 쓴 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천국의 면류관은 그 테두리에 박힌 보석의 크기와 모양과 갯수에 따라서 상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있다. 사도 바울도 사도 베드로도 역시 이러한 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을 책에 남겨 놓았다. 그 중에서 베드로는 '영광의 면류관'을 보았다(벧전5:3~4). 그리고 바울은 다양한 종류의 면류관을 보았는데(딤후4:7~8), 그는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9:25),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의의 면류관'(딤후4:8)을 보았다. 그리고 야고보와 사도 요한도 역시 '생명의 면류관'을 보았다(약1:12, 계2:10)

  셋째, 성도들이 천국에서 받을 상에는 천국 집도 있다(고후5:10, 요14:1~3).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살 곳을 가리켜 흔히들 '천국 집'이라고 부른다. 이 천국 집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그 건축 재료를 올려 보낼 수 있다. 이때 올려 보내는 건축 재료는 천사들이 가져다가 집을 짓는다. 그런데 이 집은 오직 이 땅에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 올려 보낸 건축 재료로만 지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면 더 이상 그 집은 지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을 때에 좋고 튼튼한 건축 재료를 그곳으로 올려 보내야 한다. 이 때 올라가는 건축 재료는 대체적으로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올라간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읽고, 성경을 묵상할 때에 그곳에 올라가는 것이다. 

 

4. 천국에서 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만히 믿고 있기만 하면 천국에서의 지위가 올라가고, 면류관을 쓰게 되고, 좋은 천국 집이 지어지는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에는 사실 은혜로 값없이 받는다(롬3:23~24).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죄사함을 받는 문제는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저 주신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후에 우리 대신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댓가를 지불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에게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주어진 것이기에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상도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상을 받으려면 이 땅에서 심어야 하는 것이다. 심는 대로 거두기 때문이요(갈6:7), 주님께서도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2).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받을 상은 우리가 이 땅에 살 때에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그 상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준비할 때에 천국에서 높은 지위와 많은 면류관과 좋은 천국 집을 받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경 전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깨끗해져야 한다(딤전2:20~21).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러운 그릇이 되어 쓰임받으면 별로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쓰임받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임받으면 천국에서 결코 큰 자가 될 수 없으며, 올려 보내는 천국 건축 재료도 좋지 않은 재료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쓸 면류관도 없게 된다. 

  둘째, 낮아져야 한다(마18:3~4). 이 땅에서 우리가 천국으로 좋은 건축 재료를 올려 보내려면 겸손해야 한다. 생색내기를 하거나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들은 좋은 건축 재료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좋은 지위를 갖게 하지 못한다. 이 땅에서 높아지기를 원하는 자는 천국에서 섬기는 자, 종의 지위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상얻기를 바라는 자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져야 한다. 

  셋째,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계2:10).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인가를 맡기셨다. 그러므로 은사와 달란트를 가진 자는 그것을 맡기신 분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종으로서 주인의 말씀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다.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자는 반드시 천국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많은 면류관도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넓고 좋은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헌신해야 한다(마10:41~42). 여기서 헌신한다는 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자신은 목사님들처럼 천국복음 말씀을 맡아서 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주의 일을 하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천국복음 전파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해도 그 상에 동참하는 방법을 일러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천국복음 전파를 위해 힘쓰는 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면 그 상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직접 복음을 전파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다. 선지자요 복음 전파자를 도우며 그 일에 참여하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을 도와 복음 전파에 힘썼던 사람들은 지금 천국에 들어가서 큰 자가 되어 있고, 면류관을 쓰고 있으며, 넓고 큰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 

 

5. 나오며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누가 천국에서 큰 자라 불리우게 되는가? 누가 천국에서 면류관을 쓰는 성도가 되는가? 누가 보다 더 하나님 보좌의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는가? 그것은 모두가 이 땅에서 수고하고 일하고 충성한 만큼인 것이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지만 천국에서 누릴 상과 지위는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일평생 죄짓다가 마지막에 가서 회개하여 겨우 천국에 들어간 사람과 일평생을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어찌 천국에서 똑같은 집에서 살겠으며, 똑같이 면류관을 쓰겠으며, 똑같은 지위를 누리겠는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 보라.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는 80평의 대저택에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저 멀리 성벽 가까이에서 0.8평 되는 텐트와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144,000석의 보좌가 놓여 있어도 자기가 마음대로 그 보좌에 가서 앉을 수 있는지 가서 한 번 확인해 보라. 천국 안에 섬기는 자와 종으로 참여한 자는 그 보좌에 결단코 앉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미 결정된 보좌 자리에서 단 한 줄도 앞으로 가서 앉을 수 없다. 이미 정해진 좌석에만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행한 대로 받는 보상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천국에서 받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우치라고 주님께서는 '달란트의 천국비유(마25:16~30)'와 '므나의 천국 비유(19:12~27)'를 들려주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어떡하나?" 하고 실망하지는 말라. 왜냐하면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에 관한 천국 비유(마20:1~16)'를 보면, 비록 오후5시에 부름받아 일한 자라도 그날 하루치의 품삯을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가는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후5시까지 주님께 쓰임받을 기회가 없어 쓰임받지 못했다는 것을 모른 채 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부터 시작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의 왕국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눅12:31~32). 그러나 그냥 주시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공의로운 분이시니까. 왜 주님께서 상이라는 것을 하늘에 준비해 놓으셨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 하늘에서 받을 상을 알고 지금부터라도 더욱더 각성하고 깨어 분발함으로 그 상을 다 받기를 진정 바라시기 때문이다. 

 

2022년 03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우리가 받아야할 진정한 복은 과연 어떤 것인가? '건강'의 축복인가 '물질'의 축복인가 '자손번성'의 축복인가?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복에 주목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궁극적인 복을 말씀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이란 대체 어떤 것이며, 누가 그러한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가? 우리는 오늘 산상수훈의 팔복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셨던 복의 실체와 그리고 그 복의 3가지 특징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022-03-13(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천국복음(19)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으로 보는 산상수훈의 8가지 복의 특징(마5:1~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dcAXTgEo6ac [혹은 https://tv.naver.com/v/25680285 ]

 

1. 들어가며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복은 어떤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복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리고 만약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르며,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복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복은 과연 누가 받는가? 오늘은 회개와 천국복음 가운데서 핵심 영역인 천국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천국에 관한 복을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주 예수께서 주시려는 복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살펴보려고 한다. 이 복은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받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내가 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살펴보려고 한다. 

 

2.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과 성경의 복은 어떻게 다른가?

  사실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비단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은 보통 5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보통 '오복'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오복(五福)'이란 수(壽), 부(富), 귀(貴), 강녕(康寧), 자손중다(子孫衆多)를 가리킨다. 오래 사는 것(장수), 부자로 사는 복(재물 복), 귀하게 사는 것(높은 신분), 건강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무탈함), 자손이 많아지는 것(자손 번성)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이란 어떠한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이란 크게 2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구약적인 복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낳아야 할 혈통적인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복인데, 이러한 복은 크게 3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물질의 축복이요, 또 하나는 건강의 축복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손 번성의 축복이다(출23:24~26). 그런데 이러한 구약적인 복은 이 땅에서 받는 복이요,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에 받는 복이요, 육신이 받아 누리는 복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에 들어와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이스라엘 자손인 교회에게 어떤 복을 약속하셨는가? 그것이 바로 오늘 마태복음 5~7장에 있는 산상수훈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약속하신 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복은 지금 이 땅에서 받을 복인가 아니면 장차 하늘에서 받을 복인가? 그 복은 육신이 받아 지금 누릴 복인가 아니면 영혼이 장차 받아 누릴 복인가? 

 

3. 예수께서 약속해 주신 팔복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받아 누려야 할 복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의 첫 번째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말씀이다. 이것을 보통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 산상수훈은 어쩌면 천국 백성의 헌법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는 천국이 어떤 것이며 누가 그 천국에 들어가는지 그리고 거기에서 누가 큰 자인지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대체 누군지를 정확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주님이 약속하신 복은 총 8가지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8가지 복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곧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복이 천국이라는 단어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이라는 것이 사람이 받아 누려야 할 진정한 복이라는 것이다. 곧 천국이 제자들의 소유가 되고, 그곳에서 땅을 상속받게 되며, 거기에서 하나님을 보다 더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거기에서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것에 대한 보상 곧 몫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천국 복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해 보자. 

마5:3~12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영에게 궁핍한(가난한) 자들은, 하늘들의 왕국(천국)이 [현재]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4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슬퍼하고 있는(애통하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장차] 위로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온유한 자들은, 그들 자신이(바로 그들이) [장차] [그] 땅을 상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6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의에게 굶주리고 있으며 그리고 목마르고 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바로 그들이) [장차]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7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자비로운(긍휼히 여기는, 동정심이 많은) 자들은, 그들 자신이(바로 그들이) [장차] 긍휼히 여김을(자비함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8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마음에게 깨끗한 자들은, 그들 자신이(바로 그들이) [장차] 하나님을 [가까이서] 지켜(주목하여) 볼 것이기 때문이다. 09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화평하게(평화롭게) 만드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바로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질(초청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복된 이들이어라(복들이 있도다). [이미] 박해를 받은 채 있는 자들은, 하늘들의 왕국(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11 그들이 너희를 [현재] 비난한다면(욕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박해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나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서, 너희에게 반대하여 모든 악한 것을 말한다면, 그때에는 너희는 복된 이들로 있는 중이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있어라. 그리고 너희는 즐거워하고(환호하고) 있어라. 하늘들 안에서 너희의 보상(보수=미스도스)이 많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그들이 너희보다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대언자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복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약속하신 복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천국 복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복과 구약의 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복을 받을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시고자 하는 복은 그것을 받는 시기가 지금이 아니라 장차 영혼이 들어가서 거하는 때 곧 장래에 받는 복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8가지 복은 이러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복된 이들이어라. 이러이러한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이 이러한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축복을 선언하신 뒤에, 누가 복을 받을 자인지를 말씀하시고 그러고 나서 그가 받게 될 복을 소개해 주셨다. 그런데 8가지 복 가운데 2복부터 7복까지는 다 동사가 미래형이다. 장차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1복은 현재 받고 있는 복이라고 하셨고, 8복은 과거부터 이미 받고 있었던 복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현재 받고 있는 복이나 과거에 받은 복이나 그 복의 실체는 '천국'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천국(하늘들의 왕국)은 이 땅에서 실현되는 나라가 아니다. 그 장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부터 천국이 제자들의 것이다라고 해도 그것은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직접 들어가는 시기는 죽은 후이므로, 천국 복은 우리가 미래에 받을 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복을 누릴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천국 복을 누릴 장소가 이 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장소가 하늘들의 천국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5:3,10). 즉 천국에 들어가서 받는 복인 것이다. 이때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면 거기에서 땅을 상속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5:5). 이는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천국에서도 좀 더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마5:8). 이는 천국에서 좀 더 보좌 가까이에 나아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초청함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셨다(마5:9). 이는 어린양의 신부로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주님 때문에 고난받고 핍박받은 것에 대하여 천국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천국에서 각종 면류관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 복들도 있는데 그것 역시 미래 수동태 문장으로 나타나 있다(마5:2,5,7,9). 그러므로 이것 역시 이 땅에서부터 받을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누릴 복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장차 누리게 될 복이 이 땅에서 육신이 누릴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장차 영혼이 부활체가 된 후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게 될 복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은 영혼이 받을 복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서도 물질의 축복이나 건강의 축복 그리고 자손 번성의 축복이 없다. 이것은 다 이 땅에 속한 육신이 받아 누릴 축복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축복이 하나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역시 받아 누릴 수 있는 축복에 해당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궁극적으로 누려야 복으로 이러한 것들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만약 육신의 축복이 주님께서 주실 복이었다면, 주님께서는 결코 가난하게 되고, 주리고 목마르게 되는 것을 복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5. 누가 과연 이러한 천국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가?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러한 천국 복을 누리게 되는가? 그냥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모두 천국에 들어가서 이러한 복을 누리고 사는가? 아니다.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복들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총 8가지로 말씀해 주셨다. 이 조건들을 채울 때에 천국에서 각자가 받을 복의 분량이 정해지는 것이다.

  먼저 1복부터 보자. 1복을 얻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영에게 가난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영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영에게 가난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육신에게 가난하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육신이 편히 놀고 먹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영혼에게 가난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잘 살 수 있도록 영혼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혼을 위해서라면 이 땅에 속한 것, 육신의 욕망까지도 내려놓고, 천국의 복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 2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죄에 대해서 애통해야 한다. 죄짓는 것을 좋아해서는 아니 된다. 죄를 짓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갈 수도 있으며 들어간다고 해도 누릴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3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는 반대자들에게도 온유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4복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의로워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5복을 얻기 위해서는 의에게 주리고 목마르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여기에서도 1복의 원칙은 적용된다. 자신의 육신이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알고, 그것에 대해 주리고 있어야 하고 목마른 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6복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에게 깨끗해야 한다고 하셨다. 마음에게 깨끗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7복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게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복을 얻기 위해서는 핍박을 받고 비난을 받고 거짓말로 악한 말을 듣게 된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 복을 누리는 비결들이다.

 

6. 우리가 천국 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천국 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세와 결단이 필요한가? 그것은 최소 2가지다. 첫째로는 나도 천국 복을 얻기를 사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 복은 이 땅에서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인내로서 그 말씀에 대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천국에서 누릴 복을 얻기 위해, 기꺼이 댓가를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열 처녀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종처럼 주인의 뜻을 알았으면 그 뜻을 알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또한 사명 맡은 주님의 종이라면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 둘째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받지 못하도록 미혹하고 방해하는 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사탄 마귀와 귀신들은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복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범죄하여 그곳에서 이미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자기들보다 능력도 없는 인간들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그곳에서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든지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짓게 만들고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서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 복을 누리고 살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몸안에 들어 있는 세력이든지 아니면 우리 몸 밖에서 우리를 감고 있는 세력이든지 다 내보내야 한다. 이것들이 떠나가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하는 일이 필요하다. 회개도 내가 지은 죄만을 회개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와 내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 숭배의 죄들까지 다 회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의 결과로서 이미 악한 영들이 우리 조상들의 몸속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있었고, 우리 조상들이 죽으면 그 속에 있던 악한 영들이 그의 후손들에게 들어가는데, 벌써 후손의 아기가 태중에 10달 동안 있을 때에 그 태아 속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엄마가 우상 숭배하는 동안 그 영들이 태중의 아기에게도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죄만을 회개했다고 해서 악한 영들이 다 내 몸에서 빠져 나갔다고 생각하지 말라. 특히 내 부모와 내 조부모가 지은 우상 숭배의 죄는 나에게 치명적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나와 우리의 조상들이 조상 제사를 지냈다고 치자. 그러면 절할 때에 악한 영들이 머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그 영들이 뇌를 누르고 있으므로, 그 사람의 지능이 떨어지고 공부를 못하게 된다. 또한 공황 장애가 오거나 늙어 죽을 때에는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더욱이 악한 영들이 뇌 속에 들어올 때 내 영의 주위를 둘러싸버린다. 그러면 영안이 열리지도 않으며, 영적인 감각은 떨어지며, 영적인 은사도 받을 수 없다. 그놈들이 우리의 영을 둘러싸버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천국 복을 얻기를 사모한다면 날마다 회개하여 이 악한 영들을 우리 몸에서 내보내야 한다. 

 

7. 나오며

  지금 우리는 자신의 영에게 가난한가? 세상에 속한 것을 내려놓았는가? 옛 욕심을 버렸는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받을 복을 거의 누리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육신에 속한 욕심을 내려놓고 천국의 복을 사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원수인 귀신들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천국 복을 사모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펼치고 있다. 천국에 가서도 우리도 좀 더 주님 보좌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에게 더 깨끗해져야 한다. 천국에서 면류관을 쓰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복음 전파를 위해 고난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박해할수록 더 기뻐하고 더 환호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악담하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도 온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 복을 더 많이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애통해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아도 미워하지 않으며, 기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더 큰 복을 누리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당하는 고난에 비해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회개하라. 그리고 천국 복을 사모하면서 천국 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가기를 바란다. 

 

 

2022년 03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현재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 중에 <산상수훈>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스님이 만든 기독교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2017년 올 해 러시아 소치국제영화제에 참가하여 남우주연상(백서빈)을 수상한 바 있다. 세계 4대 영화제에 참가하여 당당히 가치있는 영화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를 불교의 중진인사인 스님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대해스님(본명 유영의)이라는 분께서 경전으로서의 성경을 가지고서,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본질에 관한 의문점들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풀어보려고 만든 영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본다면, 기독교에서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3자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인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불교의 폭넓은 입장을 반영하려고 애쓴 흔적은 높이 살만한 영화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실제 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서보면, 이 영화는 오늘날 기독교가 원리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잘못 나가고 있음을 질타하는 영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는 실제 성경이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결론을 내리고 있어, 기독교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대해수님(유영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말씀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는 좀 거리가 멀어졌고 빗나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새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따라 참된 기독교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히 마음이 반영되어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대해스님은 정말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예수께서 가르쳐준 그 가르침에는 접근하지 못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의 타종교의 경전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실제적인 신앙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스님이 바라보는 기독교가 과연 인간의 본질의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진정 스님이 말하는 기독교의 관점과 실제의 성경적인 관점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스님은 기독교를 어떻게 보았으며 어떻게 이해했을까?

  스님은 이 영화에서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5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해결책을 나름대로 제시하려고 노력한다(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지 못한 탓에, 불교인의 한계가 여실히 나타난다). 스님이 알고 있는 기독교는 실제 기독교하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성경을 접하고 최대한 거기에 기록된대로 인생의 질문에 답해보려 노력은 박수를 쳐줄만하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스님이 이 영화를 통해서 풀어가고 있는 기독교적 해결책이라는 것은 실제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동안 인간이 갖고 있다는 하는 근본적인 5가지 질문 중에서, 네번째 질문과 다섯번째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첫째와 둘째와 셋째 질문은 사실 지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에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그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래서 오늘은 네번째와 다섯번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같이 나누려고 한다. 하지만 그래서 첫번째에서 세번째의 질문에 대하여 기독적으로 정확한 답을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간단하지만 그것을 조금 정리하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3. 인간의 실존에 관한 5가지 물음에 대하여 스님이 풀어내고 있는 기독교의 답안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해스님은 인간의 근본적인 5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짜 장소적인 어떤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것은 과연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에게 선악과는 무엇인가 정말 선악과는 꼭 있어야 할 것이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산악과를 만들지만 안했다면 사람은 죄를 짓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면 형벌로서 온갖 괴로움과 고통과 질병과 파멸과 지옥형벌을 받지도 않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괜히 선악과를 만들어놓아서 인간을 힘들게 하고 죄짓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이 왜 오늘날 나의 죄까지 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과 인간은 과른 다른 존재인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가. 과연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제 이 5가지 질문들 가운데에서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한 번 찾아보자. 과면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산상수훈에 보면,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뒷받침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마7:21). 다시 말해, 예수님더러 주여 주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 중에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그날 듣고 그분의 믿고 회개한 다음 그 당일날 공장 죽는다면 그 사람은 아마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날 죽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때에는 정작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을 잘못 받아들이면, 사람이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주장하는 것은 한 판의 도박과도 같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기독교의 이신칭의를 비롯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얄팍에 개인주의 신앙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해스님의 답안제시는 틀렸다. 왜냐하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믿고 회개함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막1:15) 행위로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는 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자인지를 확인해주는 도구이자, 심판의 잣대로서 그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신 일을 내 속죄를 위한 일로 믿어야 하고,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죽을 무렵에 되었을 때 자기의 뒷안길을 바라보았을 때, 열매들이 있는 것을 본다면, 그 사람은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 사람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과일이었는가?

  그리고 두번째 질문을 살펴보자. 사람에게 있어서 과연 선악과는 불필요한 요소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지 았다면 사람이 죄를 지었을 리가 없고 그러면 죄 인하여 온갖 괴로움과 질병과 죽음까지도 겪지 않았으리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까? 우선 불교에서는 선악과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놓고 있을까? 대해스님은 선악과는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버려야 할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인간의 "고정된 생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좋고 나쁘다고 하는 고정된 생각을 갖게 되면 인간은 거기에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문제를 두고도 "아, 이건 할 수 없어!"라고 고정된 생각을 가져버리면 절대 그것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선악과는 고정된 생각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를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는 꼭 있어야할 과일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 2가지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무한한 잠재적인 능력과 지혜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내가 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시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인간은 "내게 무한한 능력이 주어져 있지만,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자유의지는 내 맘대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이 져야하는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는 나무의 열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번째로 선악과는 인간이 비록 무한한 잠재적인 능력과 지혜를 가졌어도 여전히 하나님에 비해서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도구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 비해 뛰어난 존재이기는 하자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피조물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것을 인간의 자유의지를 따라 행할 수도 있고 행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선악과만큼은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선악과는 인간이 누군지를 알려줌과 동시에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귀한 도구다. 그러므로 인간에서 있어서 선악과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것은 어쩌면 꼭 필요한 도구인지도 모른다.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과연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이제는 세번째 질문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십자가의 희생이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얼핏 보면 당연히 그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니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되어서 내 죄를 용서할 수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자신의 수행으로 자신이 해탈을 경험할 뿐 남의 해탈까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받을 업보를 남이 지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처럼 죽어서 부활하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모든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법과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도를 닦고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할 것을 권면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우리가 도를 닦고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하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내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이 되어, 예수님의 희생으로 내 죄가 용서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사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가지 원리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대표성의 원리요 둘째는 공의(권선징악)의 원리요, 셋째는 대속의 원리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첫째는 대표성의 원리가 들어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죄는 아담이 지었는데 왜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알고 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날 아담이 범죄할 때 우리가 같이 그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아담의 범죄에 내가 동참했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히브리서에 나온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영접하고 축복하는 멜기세덱왕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된다. 이때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4대손자 중 네째 레위가 제사장이었는데, 아브라함이 제사장 멜기세덱에서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 제사장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는 것이다(히7:4~10). 왜나하면 아브라함의 허리에 레위로 씨로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는 곧 나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우리도 아담이 범죄할 때에 그의 허리에 씨로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5:12)" 그렇다. 아담의 범죄가 곧 우리의 범죄였던 것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적용된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롬5:18). 그것은 세번째로 말할 대속의 원리 때문이다.

  둘째는 공의의 원리가 들어있다. 여기서 공의를 원리라는 벌을 받을 행동을 한 자에게 벌을 주고, 상받을 행동을 한 자에게는 상을 주어야 한다는 원리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만약 하나님께서 반대로 행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다. 그러면 사탄을 심판할 수가 없다. 사탄이 반항할 것이고 자신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을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의롭게 행동해야 한다. 한마디로 권선징악의 심판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해도, 인간이 범죄했는데도, 인간을 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지도 만다. 아니 하나님께서 분명 선악과를 따먹으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죽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이 할 말을 뒤집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절대 눈감아 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의 범죄를 심판하여 그에게 죽음을 선고해야 한다.

  셋째는 대속의 원리가 들어있다. 인간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이미 아담과 함께 범죄에 동참한 공범죄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에 따라 반드시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고(일차적으로 육체의 죽음)과 그리고 이어서 영원한 죽음(이차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경험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고 나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서 형벌을 영원히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기회를 한 번 주시기로 작정하신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 스스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사탄과는 달리 뱀의 꾀임을 받아 범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로 제한하셨다. 그리하여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 인간은 영의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없다(예외적인 경우가 가끔씩은 있기는 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안으로 천국을 볼 수도 없고, 귀신을 볼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볼 수도 없다. 다만 결과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으며 천사가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을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는 인간의 몫이다. 어찌되었든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지은 죄는 다 과거의 일인데 어떻게 그것을 돌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다. 그것은 공의의와 원리요 대속의 원리를 통하여 죄를 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대신 누군가가 대신 벌을 받는 것이다. 죄는 내가 지었지만 남이 내 죄값을 대신 치러줌으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대속의 법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법의 형태로 가르쳐주셨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죄를 지었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인류의 죄가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 용서되는지에 관하여서는 다음의 설교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https://dongtanms.kr/xe/board_EMib14/25353, 제목: 천국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결국 인간은 대표성의 원리와 공의의 원리와 대속의 원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복음전파인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마땅히 죽어서 지옥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죄없는 사람이 되어 오셔서 그 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그때 인류의 대표자였던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고 그후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가 죄가 대신 처리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믿는 자는 대속의 원리에 따라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영화에서는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는 자기의 고행이나 수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다.

 

라. 인간은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가?

  넷째로, 인간은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해 "산상수훈"의 작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은 과연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인가? 특히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한다. 과연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는 살아서는 아니 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인간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강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어떻게 지옥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제대로 아는 자라면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를 돌릴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와 함께 이미 지옥형벌을 받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죄값을 받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죄값을 대신하셨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셔서 인류의 죄값으로 대신 죽고 음부(지옥)에까지 내려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 하신 일을 알게 된다면, 그분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고, 영원히 그분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에 감사하며 그분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준비해놓으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이니, 자신을 위한 가장 안전한 투자를 하는 셈이 된다.

 

마. 사람은 결국 신이 될 수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과연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불교에서 가장 바라는 것은 성불하는 것이다. 자신도 수행을 통해 인간의 생노병사와 업보와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도 부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예수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우리도 작은 예수가 되자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소외되고 약하고 병든 자를 돌보아주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삶의 일부분을 따라가는 것일 뿐 예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다르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참선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그런 자는 부처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도 그것을 알고 불교의 경우처럼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도 그것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고전6:17의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

  고전6:17의 말씀을 우선 한글성경으로 읽어보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이 말씀에 보면,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의 영과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러나 이 본문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그러한 뜻이 아니며, 또한 이 문장을 앞뒤의 문맥을 통해서 보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첫째로, 헬라어원문으로 보자. 헬라어 원문에 따라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다. "그러나 주님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결합되어지고 있는(분사현재수동태) 자는 하나의 영과같은 것이다(고전6:17)." 우선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주님과 결합되어진 채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 '콜라오'라는 동사는 '아교로 붙히다,결합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주님에게 아교풀처럼 붙는 것을 가리키는데, 현재분사수동태문장이다. 다시 말해 계속해서 붙어있되, 그것도 붙혀지는 것일 뿐 내가 붙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게 될 때에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둘째로 그 다음이 문제다. "한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한 영이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의 영과 같은 것이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영'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관사가 붙어 있으면, 이 영은 정확히 주님의 영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영은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다. 그러면 '영적 존재, 영과 같은 의미'라는 뜻이다. 이것을 해석해보면, 지금도 계속해서 주님에게 결합되어지고 있는 자는 주님의 영인 것처럼 그 사람도 주님처럼 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에 대한 문맥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구절을  보자. "창녀와 [현재 계속해서] 결합되어있는 자는 한 몸과 같은 것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왜냐하면 이르기를, 둘이 한 몸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6:16)"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기자는 이 다음구절에서 음행할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믿는 자라고 계속해서 음행을 하게 되면 당연히 그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에 속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러면 성령을 근심하게 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모르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안에서 성령을 따라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성령과 결합되어진 채 있는 우리의 영을 따라 살아갈 때에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전6:17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말씀도 아니며,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도 아니다. 사람도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각을 영 안에 두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육체(몸)에 두지 말고 영에 두고 살아가라는 권면의 말씀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영지주의적 해석과도 비슷하며, 뉴에이즈사상과도 접목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결고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니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너올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수행하여 득도하면 하나님이 된다는 사상은 무서운 잘못된 사상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이 되려다가 쫓겨난 것이 루시퍼사건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감사하고 찬양하여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존재이기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4. 나오며

  그렇다. 영화 "산상수훈"은 어쩌면 좋은 영화다. 불교가 타종교와 더불어 함께 공생하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으며, 불교는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대해서 배태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려줄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스님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신앙을 통해서 성령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영화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상반된 것을 향하도록 기독교를 권면하고 있다. 참된 진리의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최선의 해석을 가지고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훈계하고 있는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님이 잘못 이해할 것이다. 기독교는 스님이 이해한 수준의 그러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경전만을 가지고 연구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온전한 이해를 가질 때에, 전체가 보이고, 안이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스님이 정말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권면하고 싶다. 그래야 제대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한 다음에 진짜 기독교영화를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2017년 12월 29일(금)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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