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2(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상강해(41) 사울 왕의 경우처럼 교만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10가지 특징은?(삼상28:15~2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skdXwu_crE [혹은 https://tv.naver.com/v/24416813 ]

 

1. 들어가며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비운의 인물을 한 사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사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40세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국의 초대왕으로 등극하였지만 비참한 생애를 마친 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악한 조짐은 왕이 된지 2년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국이 튼튼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다시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의 나이가 62세 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는 또 한 번의 명령에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 왕을 세운 것을 매우 후회하신다고 하셨다(삼상15:11). 그리고 그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18년동안이나 더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이는 그가 혹시 회개하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말년이 되자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를 떠나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결국 전쟁이 터졌고 그 전쟁의 승패를 알아보려고 신접한 무당을 찾아간 다음날 그는 길보아 전쟁에서 전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울왕이 이렇게 버림당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교만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 왜 그는 교만해진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울왕의 교만이 얼마나 발전했으며, 그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고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2.'교만함'의 죄란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하는 이 용어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겸손하거나 온유함이 없이 자기 생각과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시대에는 '교만'은 죄의 목록에 들어간다(막7:22, 롬1:20, 딤후3;2). 그러나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교만함이 죄라고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만은 모든 죄의 출발이요 씨앗과도 같다. 교만함에서 많은 죄들이 가지를 치고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교만함의 대명사는 역시 '사울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자신을 높이려고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울왕의 경우를 보면, 그의 교만함은 이내 더 많은 죄를 산출하였으니, 다윗을 보고는 시기질투심이 터져 나왔고 이내 혈기분노의 죄가 합쳐져서 '미움'의 죄로 싹트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움의 마음은 '살인'의 감정으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이 죄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자신이 교만했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 사실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 벗는 죄의 문제가 교만함의 문제요 음란함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못 되었으면 즉시 회개함으로 이러한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의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 구약시대에 율법에는 교만한 마음이 죄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사울왕으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의 범죄가 결국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는 우상 숭배의 죄라고 말씀하셨다(삼상15:23). 즉 교만함은 권위를 무시하는 데에서 그 죄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의 판단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의 죄는 자기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처럼 우상시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교만함을 드러낸 사울의 예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죄가 곧 점치는 죄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셨다. 즉 교만함의 죄는 십계명에 나오지는 않아도, 십계명 중에서 1계명과 2계명을 어긴 죄와 동일한 죄라고 평가되는 것이다. 

 

3. 사울왕에게서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울왕에게 나타나는 교만함의 10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만한 자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히 죄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꾸 변명을 한다. 그는 42세 때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으며(삼상13:13), 또한 62세 때에도 역시 아말렉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둘 다 회개하지 않았다(삼상15:13~15). 

  둘째, 교만한 자는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자존심이 매우 강해서 자기의 행동으로 모든 사람을 끌고 들어가려 한다. 자기를 지지해주는 자를 위해서는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지만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결단코 가만 두지 않는다. 사울이 그랬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도 섬기려고 하였다. 그러므는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였다(삼상15:20). 

  셋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이 저지른 행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사울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제사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바라신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삼상15:22). 

  넷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적하면서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가 위임된 권위자의 말도 무시해버린다. 사울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자기가 왕으로 가진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까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삼상15:30).

  다섯째, 강포하고 폭력적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만함은 보통 혈기와 분노와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만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혈기와 분노가 장난이 아니다는 것이다. 사울은 처음에는 아주 겸손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출 줄도 알았으며, 자신의 아랫사람의 말도 경청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왕으로 등극하자 그는 안하무인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의 아들이라도 가만 두려고 하지 않았다. 다윗을 돕는다고 장자 요나단도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삼상20:33). 그리고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미명하에 놉 땅에 있는 제사장들을 다 죽이는 파렴치한 일도 자행하였다(삼상21:16~19). 

  여섯째,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도 자기가 잘나서 한 것이라고 자랑한다.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가 이러한 사람이라고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늘 잊고 산 사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일평생 동안 하나님을 높였다는 대목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광돌려야 할 그 순간에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했던 것이다(삼상15:12). 

  일곱째, 자기를 높히려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어떤 일에서나 자기가 높아져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싫어한다. 지는 것을 싫어한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싫어한다. 이 사람에게는 오직 자기의 체면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름이 명예스럽게 된다면 거금도 거뜬히 내는 편이다. 심지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는 하나님도 이용한다. 교만의 특성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기에 교만한 사람은 대개 시기와 질투심도 매우 강하다. 사울은 그랬다. 사울은 모든 백성 앞에 자기가 높아지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다윗이 전쟁에 승리하여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자기에게는 천천을 돌리자 다윗을 죽여야겠다고 마음 먹는다(삼상18:7~9).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자신의 두 딸 메랍과 미갈까지도 이용한다(삼상18:17~27). 

  여덟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리지 않는다. 특히 하나님의 책망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특히 자기를 꾸중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니 주의 종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늘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귀가 닫혀져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사울은 40세에 왕위에 올라 80세에 죽는다. 그런데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했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62세 때에 치른 아말렉전투 이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그에게 오게 된다. 그뒤로 18년동안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살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 블레셋이 다시 쳐들어오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 엔돌에 신접한 무당을 찾아가서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에게는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음성으로도 계시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삼상28:6). 

  아홉째,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것은 비굴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언제라도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겸손함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사울이 그랬다. 사울의 평생에 진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대목이 없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었고 자기가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것이다. 교만한 자는 항상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행세만 했을 뿐이다(삼상15:30)

  열째, 늘 남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판단받아야 할 대상이요 연약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다. 내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남은 비판하는 데에 아주 익숙하지만 자기를 판단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그러나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사울이 그랬다. 그는 자기 부하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그리고 자기 아들 요나단의 이야기를 귀감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강요할 뿐이었다(삼상20:30~31). 

 

4. 나오며

  베드로도 사실은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혈기와 분노도 있었고 시기와 질투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기가 앞장서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날에는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자신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다짐했지만 자기가 위험해 처해지자 그는 그만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만약 주님께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시험에 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남긴 첫 번째 편지 속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매우 강조해서 말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벧전5:5-6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렇다. 어디 교만한 자가 사울뿐이며 베드로 뿐이겠는가?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교만한 마음이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만함의 선봉자이었던 사탄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하와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외식하려고 하고, 생색내려 하고, 자기 이름내기를 기뻐하는 자를 사탄은 가만 두지 않는다. 그 사람 속에서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고, 혈기와 분노를 일으켜서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교만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만의 영들이 역사해서 교만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교만한 가문에서태어난 사람이 교만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늘 자신을 낮추는 것에 더욱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를 즐거워해야 한다. 늘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생활을 더 많이 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이 우리를 일생동안 지배하려고 웅크리기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만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때로 금식도 해야 한다. 그래야 교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주 안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어 주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우리는 다만 묵묵히 우리가 감당할 일을 해야 한다. 남의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 속에는 들보가 있음을 알고 남을 판단하기 전에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2022년 01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4) 놉 땅의 제사장 학살사건이 들려주는 영적인 교훈(삼상22:1~23)_2021-12-24(금)

https://youtu.be/WEr6r1v5Fl4 [혹은 https://tv.naver.com/v/24312273 ]

 

1.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악령에 속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께 속한 다윗과 악령에 속한 사울은 갈수록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곰곰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속한 사람과 악령에 속한 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경에 기록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양과 목자의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렇다. 악령 곧 사탄마귀가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명시키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였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신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자초지종도 파악하지 않은 채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집을 반역의 공모자로 만들어 하루 아침에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젖먹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을 죽이는 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라 오히려 사람을 살리게 된다. 그리고 생명이 더 풍성하도록 만들어 준다. 다윗은 언제나 그랬다. 그는 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 사람은 왜 달라지지 않고 구원받지 못하는가?

  사람은 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달라지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데 이때 변화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아니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꾸 변명을 하거나 남을 탓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당신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징계를 내리다가도 금방 그것을 철회하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끝내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때 사람이 달라지지 아니하는 이유에는 명예욕과 권력욕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일 수도 있고, 시기질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사무엘상하의 말씀이 사울왕과 다윗왕을 비교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 회개하는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의도에서다. 그런데 사울왕이나 다윗왕이나 범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다윗왕이 더 큰 죄를 범했다. 하지만 사울왕은 이유를 대면서 변명하였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 회개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도 등장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삶에 무엇이 잘못되었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항상 하는 행동이 있었다. 그것은 그 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 잘못으로부터 돌이켰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똑같은 죄를 또 다시 범하지 않았다. 

 

3. 사무엘상 22장에서 다윗과 사울의 행동이 보여주는 각각의 특징은 무엇인가?

  다윗은 도망치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부모와 소외되고 환난당한 자를 챙기는 사람이었다(삼상22:1~2). 왜냐하면 그의 부모는 사울이 다윗을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보복살인을 할 대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시대에는 의외로 압제를 당하는 자들도 있었고, 원통한 일을 당한 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문이 났을 때 모두들 그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왕에게 희망을 걸어본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달랐다. 자기 밑에 사람들을 기용한 후에는 그들을 늘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자는 자기를 반대하는 자요 역적이라는 것을 계속해셔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자기 밑에 신하들을 임명할 때 베냐민 지파의 사람 일색으로 배치한 다음, 그들을 향해서는 왜 나에게 충성하지 않느냐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삼상22:7~8). 사울은 이전에 이미 백성들의 밭과 포도원을 빼앗아 베냐민 사람에게 주었다. 그리고 천부장 백부장도 베냐민지파 사람으로 임명을 한 것이다. 그러므므로  자기를 돕지 않고 다윗을 돕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4. 악한 자 도엑이 저지른 죄는 대체 무엇인가?

  그때였다. 사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사울의 신하들 중에 한 명이었던 에돔 사람 도엑이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다윗의 공모자고 고발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윗이 혈혈단신으로 아히멜렉을 찾아왔을 때에 일어난 일을 그가 보았는데, 그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것만 보고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은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자기에게로 불렀다. 그리고 사울은 그가 다윗과 공모하여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을 여쭈어본 것은 자신을 대적한 일이고 반역한 일이라고 몰아부쳤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그간에 돌아가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아는 바에 따라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공모자로 몰아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실제로 아히멜렉 자신은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은 호위병들을 시켜 돌아가는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아히멜렉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도엑을 지켜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자 도엑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였으니, 그날 에봇입은 자 85명을 죽였고, 더 나아가 제사장의 성읍이었던 놉 땅에 가서 그들의 자식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아기까지 싸그리 죽이고 말았다. 그것도 가축까지 말이다(삼상22:18~19). 그러자 훗날 다윗은 도엑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노래를 지어 남겨놓았으니, 시편 17편, 35편, 64편, 109편, 140편 등은 도엑의 일로 인하여 다윗이 지었던 시편들이다.  

 

5. 다윗은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임당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다윗은 얼마후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했고 놉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는 아히멜렉의 아들이었던 아비아달이 난을 피하여 다윗에게도 도망쳐 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의 집의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나의 탓이로다(내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삼상22:22~23)" 그렇다. 다윗은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게 된 것을 그들의 잘못만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판단하였고 그 일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다윗이 지은 죄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증거의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날 다윗은 사울왕의 특명을 받고 아히멜렉에게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거짓증거는 이것보다도 사건의 위중성에 있는 바, 다윗이 저지른 완전한 범죄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부득이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거짓증거의 죄를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셨다. 그렇다면 실제로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임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얼핏 보기에는 사울왕의 잘못된 판단, 다윗의 빌미 제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실은 아히멜렉의 4대 조상이었던 엘리제사장 때에 있었던 바, 엘리와 그리고 그의 두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장차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에서 노인이 없게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삼상2:31~32). 그렇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려면  그에게 회개가 동반되지 않았을 때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자기도 몰랐지만 결국 다윗을 돕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엘리 제사장 때에 이미 예고되어진 말씀이 정말 비참한 상황에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의롭게 성취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은 순교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죽었다고 해보자. 얼마나 비참한 죽음이었겠는가? 그러므로 혹시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었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회개하고 의롭게 살아간다면 나중 심판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것이기 분명하다. 

 

2021년 12월 2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0) 사울 왕처럼 시기질투심을 키워가면 어떻게 될까?(삼상18:6~30)_2021-12-20(월)

https://youtu.be/SjVkyL3ssP8  [ 혹은 https://tv.naver.com/v/24172517 ]

 

1. 사울왕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넘어서 이제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하게 된 것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사울왕이 65~70세 되던 해에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었다(삼상17:1~58). 그런데 적의 장수는 2m 80cm의 거인 골리앗이었다. 그런데 소년(15~20세 정도) 다윗이 나타나 물매로서 적을 쓰러뜨린 후 그의 목을 베어 버리자, 사울은 크게 기뻐하면서 다윗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는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쳐죽이고 돌아올 때에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는데, 영광을 사울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다윗에게 만만을 돌리게 된다(삼상18:7). 그러자 사울은 여인들의 그 말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대노를 한다. 결국 사울은 앞으로 다윗에게로 앞으로 돌아갈 것은 자신의 왕국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그의 속에서 시기 질투심이 끌어올라오기 시작한다. 

 

2. 시기심과 질투심이란 어떤 것이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기 질투심이란 나보다 남이 더 잘 되는 것을 보거나 남이 다른 사람에게 더 사랑을 받고 인정받는 것을 볼 때에 자기 속에 갖게 되는 미워하는 감정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시기 질투는 과연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시기 질투심이 죄라는 것은 시기 질투할 때 악한 영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에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했으니(요일3:8), 시기 질투를 할 때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시기 질투심도 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시기심과 질투심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시기 질투심은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일한 뜻이다. 하지만 시기심은 전적으로 죄라고 할 수 있어도, 질투심은 전적으로 죄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질투심은 다른 말로 좋게 표현했을 때에는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부러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투심이라도 그것이 좋게 나타나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부러움으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투지와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적당한 질투심(부러움)은 때로는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질투심을 전적으로 죄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만약 질투심이 나쁜 쪽으로 나타나 상대방을 미워하고 또는 해하려하고 그리고 죽이려는 쪽으로 가면 그것은 죄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시기심과 질투심을 분별해 보자면, 시기심은 내가 그냥 상대방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제 삼자가 끼어 있지 않지만, 질투심은 제 삼자가 끼어 있어서 상대방 때문에 제삼자에게 자신의 인기와 명예와 칭송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늘 사울왕의 경우는 질투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 사울은 왜 다윗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사울은 다윗을 시기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높이지 않았더라면 그가 다윗을 미워하는 감정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울과 다윗 사이에 일반 백성이 없었더라면 사울은 다윗을 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백성들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게 된 것은 자신의 질투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은 둘 다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보고 미워하는 갖는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4. 시기 질투심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시기와 질투심은 대부분은 나쁜 쪽으로 발전해 간다. 왜냐하면 거기에 미워하는 감정이 달라붙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으로 보았을 때 사람이 시기 질투심을 나타낼 때면 악한 영들(귀신들로서 시기 질투의 속성을 가진 영들)이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들어오는 시기 질투의 영은 보통 배꼽 주변에 머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편 시기심과 질투심을 좀 더 나눠서 살펴보자면, 시기심은 전적으로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삼자가 끼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기하였던 사람들은 다 징계를 받았다. 예를 들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했을 때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린 예가 있다. 그리고 고라 일당이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다가 고라의 가족들은 징계를 받아 땅속 음부에 빠지게 되고, 그를 따르던 250명의 족장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태워 죽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제삼자가 없이 다 자기가 상대방을 시기하다가 징계받고 멸망받은 예인 것이다. 그런데 질투심은 제삼자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 사울왕의 경우다. 만약 여인들이 다윗을 더 높이 칭송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여인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니까 사울이 배가 아프고 질투심이 난 것이다. 

 

5. 시기 질투심이 계속 올라오는데도 그것을 놔두면 어떻게 되는가?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심이 올라왔을 때 그것을 통제했어야 했다. 그때는 다윗이 여인들로부터 칭송받을 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사울은 자기을 향한 인기가 다윗에게로 옮겨가자 다윗에게 시기 질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첫째, 악한 영이 사울을 잡아 쓰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삼상18:10~16). 악한 영이 다윗을 죽이도록 사울을 부추겼고 그러자 사울은 자기 곁에 놓여 있는 창을 던져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삼상18:10~11). 둘째, 사울은 이제 더 사악한 일을 도모하게 된다. 즉 다윗에게로 인기가 돌아가자, 사울은 시기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자 악한 영이 사울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는 교묘한 술책을 써서 다윗을 제거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시기 질투심은 처음 나로부터 올라올 때에 그 시초부터 싹을 잘라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냥 놔두면 시기질투심은 미움으로, 다시 미움은 살인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울은 이제 자신의 두 딸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그것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자기에게 시기 질투심이 올라온다면 즉시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를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서는 시기 질투의 영을 연거푸 꾸짖으라. 그리고 잘되는 사람을 볼 때에는 "정말 저 복을 받기에 합당한 일이 과거에 있었겠군"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가 복받는 것을 인정해 주라(실은 그것은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진정 그를 축하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혹시 그것이 그 복이 사람에게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축복해 주었으니 그 복이 나에게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 

 

2021년 12월 20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70)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호전적 기질의 베냐민과 그의 후손들(창49:27)_2021-08-05(목) 

https://youtu.be/tj43j4-CAO0  [혹은  https://tv.naver.com/v/21714599 ]

 

 

 

 

1. 베냐민은 누구며, 그의 부친 야곱으로부터 어떤 유언적인 예언을 들었나요?

  베냐민은 야곱이 낳은 12번째의 막내 아들입니다. 베냐민의 어머니는 라헬인데,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 후에 죽게 됩니다. 그녀가 죽어가면서 지어준 이름은 "베노니"였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의 이름을 바꿔 불렀습니다. "벤 야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막내가 강한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새롭게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베냐민은 막내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난폭하고 호전적인 기질을 다분히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죽기 전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준 환상에 따라, 베냐민과 그의 후손의 장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창49:27)" 그렇습니다. 야곱은 정확히 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냐민의 후손들은 매우 난폭한 용맹성을 가진 사람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 사사시대에 베냐민 지파가 저지른 망령된 일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사사기 20~21장을 읽어보면, 베냐민 지파가 저지른 망령된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던 기브아에서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자기 집에 도착 후 그 여인을 12동강이를 내어 이스라엘의 전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벌 떼처럼 일어난 11지파의 대표자들이 이 일을 의논한 후에 베냐민 지파를 만나 그 불량배를 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11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1지파의 40만명이 베냐민 지파의 2만6천명에게 두 번씩이나 패한 것입니다. 그러자 11개 지파는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에게 법궤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뜻을 묻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넘겨준다는 약속을 받고 다시 전쟁하여 결국 베냐민 지파 사람 2만 5천명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이스라엘의 11지파가 후회를 합니다. 갑자기 이스라엘의 한 개의 지파가 없어지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600명의 용사들을 위해 간신히 길르앗 야베스의 처녀 400명과 실로에 절기를 지키러 온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게 합니다. 

 

3. 그 어떤 다른 지파보다도 호전적인 용맹성과 기질을 가졌던 베냐민 지파는 어떻게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을까요?

  무모한 싸움인데 자신들의 용맹성 하나를 가지고 밀어 붙였다가 그만 씨가 없어질 뻔한 지파, 그 지파가 바로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 훗날 3가지 엄청난 일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에는 나라를 건져내었으며, 둘째는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간 후 바사(페르시아)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자기의 민족을 살릴 때가 있었고, 셋째는 예수님의 시대 직후에는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서 나왔습니다. 

 

4. 베냐민지파 사람 사울 왕과 모르드개가 행한 일은 무엇인가요?

  용맹성과 더불어 전쟁에 능했던 베냐민 지파 사람들, 그렇지만 기브아의 윤간사건으로 인하여 그 지파가 씨가 마를 뻔 한 일이 중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연약해진 베냐민 지파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이 나오게 되었으며, 민족을 구한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자기 민족을 넘어 이방인까지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과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와 사도 바울입니다. 첫번째 인물은 기스의 아들 사울(재위, B.C.1050~1010)입니다. 그는 씨가 마를 뻔 하였던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더욱이 기브아 사건의 중심지였던 바로 그 지역인 기브아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삼상9:21)"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2개 부족 공동체로 있었던 이스라엘 나라를 주변 이방민족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왕으로 선택받은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나라를 구한 사람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인물은 '모르드개'였습니다. 그는 B.C.563년경 바사(페르시아)제국에 살던 유다 민족의 하나였습니다. 그때 모르드개의 민족 즉 유다인들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 의해 전멸당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자기 민족을 건져내었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삼촌의 딸인 에스더를 당시 바사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게 하였고, 민족이 전멸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에는 에스더 왕비에게 고하여 민족을 구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베냐민 지파의 모르드개와 하만과의 전쟁은 2차전을 치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차전은 사울왕이 아말렉왕 아각과 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아각왕을 살려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유다의 후손과 아각왕의 후손들이 서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2차전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용감했던 모르드개와 더불어 "죽으면 죽을 것"이라는 각오로 왕을 알현하였던 에스더 왕비에 의해 하만의 궤계는 드러나게 되었고 아각자손들은 전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포로로 잡혀가 살던 소수민족인 유다 민족을 살려낸 인물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람 모르드개였던 것입니다. 

 

5. 신약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대체 누구며, 그가 행한 일과 야곱의 유언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신약의 위대한 두 사도를 들라고 하면 단연코 그들은 '베드로'와 '바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어린 양의 12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게 된 또 다른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면 그는 바로 "사도 바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3:5)". 그도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롬11:1).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아주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저지르고 마는 아주 잔인하고 냉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충복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1:13-14)"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베냐민 지파의 기질이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과거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간증할 때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행26:10-11)"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물어뜯는 이리의 기질이 고스란히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오로지 그는 그때부터 오로지 복음과 예수님만을 붙잡고 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예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물어뜯는 이리처럼 달라붙어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서여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힘을 다했습니다. 아니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모든 이방인들도 다 베냐민 지파 사람인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전달받게 되었고 구원받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적인 유언에서 저주를 받은 야곱의 세 아들들(시므온, 레위, 베냐민) 가운데,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던 레위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유다지파를 제외하고는 예수님 당시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두 지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저주는 얼마든지 끝내고 축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의 예표가 레위와 베냐민입니다. 우리도 이제부터라도 아브라함처럼 저주를 끝내어 내 후손들은 한량없이 축복을 받고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회개하는 일에 더욱 더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8월 05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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