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3) 사울은 훗날 자신의 영적인 무지를 어떻게 고백하였나?(행8:1~3)_2022-08-18(목)

https://youtu.be/ME5nqv_Jn8Q  [혹은 https://tv.naver.com/v/28646544 ]

 

1. 청년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는가?

  청년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은 한 마디로 그의 영적인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훗날 과거 자신의 영적 무지를 시인하고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영적인 무지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고 회당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비방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이다(행8:3, 9:1~2, 22:4~5, 26:11). 

 

2. 그는 훗날 자신이 유대교에 있었던 때를 어떻게 고백했는가?

  그가 변화되어 첫 번째로 선교여행을 다녀와서 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그가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갈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파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동년배)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들]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며, 율법을 무시하는 그들은 분명 잘못된 자라들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니 하나님이 계시고 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조상들의 전통들에 대해서도 매우 큰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무시하고 정결법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들 곧 율법을 무시하고 전통을 무시하는 예수 믿는 이들을 처단하여 반드시 본 때를 보여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선교여행을 하면서 맨 처음에 세웠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게 자신의 과거의 고백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이다. 

 

3. 사도 바울이 몰랐던 첫 번째 영적인 무지는 무엇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훗날 자신이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잘못 행했던 것을 고백하였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중점적으로 나온다. 

  먼저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못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가기 위해 주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을 깨달은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 앞으로 나아가 그분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잘못된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430년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갈3:15~17). 고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범법함으로 중보자인 천사의 손을 빌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갈3:19). 다시 말해, 율법은 종인 천사를 통해 주어졌으니 율법은 종의 법이며, 믿음의 법은 아브라함의 씨인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니, 아들의 법인 것이다. 고로 율법을 지키면 종이 되는 것이고, 믿으면 아들이 되는 것이다. 셋째, 율법은 임시로 주어진 법이기 때문에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이다(갈3: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법을 주셨지만 믿음은 사라지고 육체적인 할례를 중요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죄를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넷째, 율법은 정죄하는 법이지 살게 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갈3:21). 하나님은 율법을 생명의 법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섯째로,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죄인으로 만드는 법이며, 믿음의 법은 예수님을 믿음을 용서받게 살게 하는 법이다(갈3:26). 여섯째,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지 장성한 자를 계속 율법 안에 가둬놓기 위해 주신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갈3:24). 고로 믿음이 온 후에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율법은 종노릇하게 하는 법으로서 정한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이다(갈4:1~3). 일곱째, 율법은 자체 의로운 것일지라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갈4:9). 율법은 종의 법이라 사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서워서 지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셔서는 상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믿음의 법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상이 뒤따라 온다는 것이다. 결국에 여덟째, 율법은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모형에 해당할 뿐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골2:17). 그렇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임시로 주어진 임시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임시법인 율법을 그만 실체인 줄 알고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 아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인 것을 깨달았으면 약속의 씨인 예수님을 붙잡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4. 율법이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율법이 '모형'이요 '그림자'라는 것은 율법은 실체이신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예표요 상징들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모세가 기록했던 모세 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은 다 예수님인 누군지를 알려주는 모형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말씀' 및 '빛'과 '생명'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은 둘째 아담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표상이며,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인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이나 성막법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실 예수님에 대한 모혐이요, 민수기 21장의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뱀은 자신은 죄가 없지만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시어 장차 십자가 위에 매달려 죽으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에 나오는 속죄일 제사의 아사셀 양은 우리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죽으실 예수님이신 것이다. 

 

5. 사도 바울이 몰랐던 두 번째 영적인 무지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사도 바울이 몰랐던 두 번째 영적인 무지는 그로 하여금 교회를 잔혹하게 핍박하고 파괴하였던 결정적인 이유였는데 그것은 그가 한 분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철저히 율법교육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또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신론으로 가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능욕하는 일이며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신으로 믿는 교회를 가만 놔 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냥 놔 두었다가는 유대교가 다신론화 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그가 바리새인 교육을 통해 구약성경을 달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박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눈은 여전히 구약과 유대교 안에 감겨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분이라는 것을 숫자적인 하나로 생각했기에 하나님은 결코 둘로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장차 아들로 갈 것이라고 말씀을 주셨다(창18:10,14).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것임을 분명하게 예언을 하였다(사9:6). 그리고 그가 와서 고난받고 죽으실 것도 예언되어 있다(사53장, 시22편). 그러나 그의 눈은 감겨 있었기에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롬9:5). 그러자 그는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신약성경의 절반의 기록들이다. 

 

 

2022년 08월 18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2) 사울 그는 왜 교회를 잔혹하게 멸절시키려 했을까?(행8:1~3)_2022-08-17(수) https://youtu.be/OftJ8WDWWA0 [혹은 https://tv.naver.com/v/28646960 ]

 

1.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했던 것일까?

  사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울은 잔인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그가 비록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아주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하나님의 경륜이 대체 무엇이며 그때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는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첫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영적 무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감히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믿어온 자신에게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하는 그의 성격과도 맞물려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진 혈기와 분노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요 빗나간 열심이었던 것이다. 처음 스데반을 죽일 때에 그의 마음도 약간은 꺼림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 사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담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다. 왜 그럼,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우상숭배자들이나 신성모독자들은 모조리 죽이라고 하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에부터 모든 경륜은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살리려 오셨고 죄인을 용서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부터는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되었다(마5:43).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후 믿는 이들이 자신과 사상적으로 혹은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핍박한다거나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의 경륜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도 빗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여버리면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3.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출세를 위한 최고의 기회가 그렇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이었다(빌3:5~6). 그래도 그의 지파는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켰던 베냐민 지파였고,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율법공부와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율법의 엄한 교훈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은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산헤드린공회원이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헤드린공회가 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여 그 일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출세에 최적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문제 대상 1호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눈엣 가시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4.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세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셋째로, 그가 사탄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울은 완전히 사탄에 붙들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이도록 미웠다. 왜냐하면 사탄은 파괴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요10:10). 사실 그때 사탄은 철저히 사울을 이용한 것이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울은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는데,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그로 하여금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일을 한다면 산헤드린공회원이 해야지, 청년 사울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산헤드린의 하수인처럼 예수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예수님을 비방하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했다(행26:11).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탄에 의해 그의 눈이 완전히 감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원문에는 비늘들)이 벗겨진 사실을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늘은 그냥 비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어찌 비늘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비늘은 뱀의 비늘이었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 단어는 물고기나 뱀의 비늘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로서 용과같은 큰 뱀의 비늘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의 눈은 완전히 뱀으로 충혈되어 있었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5. 오늘날에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이미 구약경륜에서 신약경륜으로 들어왔다. 구약경륜은 율법시대이니만큼 무엇이 죄인지를 알려주는 시대였기에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약경륜은 복음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우상숭배자라 할지라도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정죄나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해야 한다. 특히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핍박하거나 죽이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단사냥꾼 같은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교계에서 매장을 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살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경륜에 속한 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로마카톨릭은 자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가두었으며, 수 만 가지의 도구로 고문하고 죽인 숫자가 무려 6,000~8,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참으로 그들은 신약경륜 안에 들어온 자들인가? 진정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핍박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죽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는 자의 바른 삶이기 때문이다. 

 

2022년 08월 1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43) 길보아 산 위에서 이스라엘의 별들이 지다(삼상31:1~13)_2022-01-04(화)

https://youtu.be/PkP6w-3YOPs  [혹은 https://tv.naver.com/v/24470520 ]

 

1. B.C.1010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떻게 되었는가?

  블레셋의 5개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시작된 길보아 전투는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 군대는 이스라엘의 북쪽 이스르엘 평원에 진을 치고 있었고, 블레셋은 그보다 약간 서북쪽 방향으로 약 8km 떨어진 수넴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평지 전투에 능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진격해 들어옴으로 뒤로 밀리게 되었고, 결국 사울의 세 아들인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이 전쟁에서 블레셋을 막다가 그만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80세가 되었던 사울왕은 피신하다가 적의 궁수들이 쏘는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된다(삼상31:3). 그러자 사울왕은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 칼을 빼어 나를 죽여다오, 내가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구나" 그렇지만 무기든 자는 감히 왕을 해치지를 못했다. 그러자 왕은 자기의 칼을 뽑아 그 위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왕이 죽은 것을 본 무기든 자도 역시 자기의 칼에 엎드려져 한날한시에 둘 다 죽게 된다. 그러자 이스르엘 평지 건너편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요단강 건너편의 길르앗의 주민들은 자기들도 블레셋으로부터 공격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여 자기의 성읍을 버린 채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성읍에까지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도 하였다. 

 

2. 사울왕의 사후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사실 그때 블레셋 군사들은 사울왕이 전사한 것도 잘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죽은 자들로부터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왕의 목을 벤다. 그리고 그의 목을 자기들의 신인 다곤의 신전에 걸어둔다(대상10:10). 그리고 사울왕의 갑옷을 벗겨 내어 아스다롯 신당에 갖다 둔다(삼상31:10). 그리고 사울의 몸과 사울의 세 아들을 벧산 성벽에 매달아 놓는다(삼상31:10). 그러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무려 21km의 거리를 달려온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벧산 성벽에서 내려 야베스에 가지고 가서 화장하고 동네에 있는 에셀나무 아래에 묻어준다. 그리고 일주일간 금식하며 슬퍼한다. 왜냐하면 처음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암몬 사람들이 야베스를 쳐들어온 일이 었었는데, 그때 사울이 이스라엘 군대 33만명을 이끌고 와서 암몬 사람 나하스를 무찔러 자기들을 건져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장례를 고이 치러 준 것이다. 

 

3. 왜 사울은 비참하게 죽게 되었는가?

  왜 사울은 자연적으로 죽지 아니하고 자기의 칼에 엎드려 죽게 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목이 잘리고 몸은 성벽에 걸리는 등의 참사를 겪게 되었는가? 역대상을 보면, 사무엘상 31장과 거의 똑같은 본문이 나오는데, 그런데 역대상에는 사무엘상에서 말해 주지 않는 본문이 나온다. 그것은 사울이 죽은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대상에서는 사울이 죽은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그런데 우리말로 된 이 본문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을 따라 직역해 보았다. 

대상10: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를 대적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접한 자에게 물어서 구하고 여호와께 구하지 않았기에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그 왕권(왕위)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다. 

 

4. 사울이 비참하게 죽은 이유를 왜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사울이 그 전쟁터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을 들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결국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죽임당해야 했는가? 그것에 대해 역대상의 저자는 한 마디로 사울이 여호와를 대적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해 놓았다(대상10:13). 여기서 '범죄하다(원문: 대적하다)'라는 말은 '마알'이라는 단어로서, 그 뜻이 '대적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울왕이 하나님께 반역 행위를 계속해서 일삼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그는 하나님 앞에 늘 불성실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그랬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범죄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모든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판단 기준도 자기 자신이었고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위하여 행한 것들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름이 높여지고 자기의 명예가 향상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행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에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만약 사울의 명령을 어기기라도 한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반역 행위로 단죄하여 엄벌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그냥 넘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에 사울왕의 이야기는 비록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던 자라고 할지라도 죽어서 하늘나라에서는 왕 노릇할 수도 없다는 것과 더불어 아예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것을 샘플로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로 다윗왕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그는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한 자였지만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서도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한 자였으며, 자기를 높이는 데에 전념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5. 사울이 죽어서 왕 노릇도 하지 못한 채 버림받게 되었던 2가지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울의 이야기를 눈여겨 보아야 할 이유는 이미 1차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결국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는 자가 누군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사실 사울은 원래 천국에서 왕 노릇을 할 자로서 부름을 받은 자였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왕 노릇하는 신분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죽어서 왕 노릇을 하지도 못할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그가 지은 2가지 큰 죄는 대체 무엇인가? 역대상 기자는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지 않아서였다고 말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자기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였던 장본인이었다. 결국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시켜서, 그가 우상 숭배의 죄를 지은 것과 같다고 하셨다(삼상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불순종한 것은 사신 우상(드라빔)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3)"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에게 구하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물어보고 그에게 구하였기 때문이다(대상10:13~14). 그랬다. 사울의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에 블레셋이 쳐들어왔다. 그런데 그때에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물어 보았는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했더라면 그는 마지막에 가서 비참하게 죽는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인생 말년에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래도 명색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의 국왕인데도,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무당 점쟁이였던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그녀에게 물었던 것이 큰 죄가 되었던 것이다.
 

2022년 01월 04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23) 사울왕의 첫번째 불순종이 가져다 준 뼈아픈 결과는?(삼상13:1~23)_2021-12-13(월)

https://youtu.be/gT02aruasWs  [ 혹은 https://tv.naver.com/v/24060051 ]

 

1. 사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좀 특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택정함을 입은 소수의 사람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그에게 알려 준 바대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지도자(왕)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었다(삼상9:16~17). 

 

2. 그가 왕이 되어 치르게 된 두 번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

  사울은 맨 처음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구별되었고 미스바에서 제비로 뽑혀 왕으로 선출된 바 있다. 그리고 암몬 사람 나하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그는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암몬 족속과 치른 첫 번째 전쟁으로 인하여 사울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수가 있었다. 사실 사울이 치른 첫 번째 전쟁은 그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먼저 그는 자신의 조상 5대로부터 기도가 축적되어 있는 상태였으며(삼상9:1),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 위에 내려왔기 때문이다(삼상10:10).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전쟁을 하기에 탁월한 외모를 갖추었으며(삼상9:2), 전쟁하기 위해 모여든 장병의 숫자도 무려 33만 명이나 되었으며(삼상11:8), 그가 발휘한 기습 작전도 대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삼상11:9~11). 무엇보다도 정치 지도자로 세움받은 사울 자신과 그리고 종교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각기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감당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 이후 사울은 약 3,000명의 근위병들만을 남겨 놓은 채 다 집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때 2,000명은 자기의 병사로 남겨 두었고, 나머지 1,000명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아들이자 뛰어난 장수였던 요나단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사울은 요나단과 합세하여 이스라엘 진영까지 와서 주둔해 있던 블레셋 진영을 쳐버린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그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많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즉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철병거가 삼만 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말탄 기병도 6,000명이나 되었으며,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3,000명의 군인들은 여기저기에 숨느라고 바빴고 요단강 건너편까지 도망가느라고 바빴다. 이미 2,400명의 사울의 군사는 황급히 도망치고 말았고 겨우 600명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러니 사울은 더욱더 군급했다. 그러자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한 가운데 자신이 번제를 드리고 말았다. 결국 사울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사울왕은 이 전쟁을 계기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 사무엘의 책망을 들은 사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사울왕이었지만, 그는 600명의 군사마저 흩어지려 하고, 또한 벌떼처럼 달려드는 블레셋 군대를 보자, 사울왕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정한 시간이 다 되기까지 사무엘이 오지 않자, 사울은 번제와 화목제 중에서 먼저 번제제사를 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사무엘이 곧이어 도착하였고, 사무엘은 왕이 무엇을 행했는지를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때 사울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한 마디로 부득이하게 먼저 제사를 드렸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었는가? 그것은 첫째, 사울왕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블레셋 족속을 쳐부수기 위해 세운 사명자였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이 전쟁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의 숫자를 보고 두려워하였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다.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리기까지 기다려야 했으나 그는 그것을 참지 못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었다. 즉 그는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이다.

 

4. 사울의 불순종에 대한 사무엘의 책망은 무엇이었는가?

  그러자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에게 전달하였다. 우선 첫째로, 왕이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왕에게 명령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시려고 계획되었던 복이 떠나가게 했다고 말했다. 그럼, 사울왕이 말씀대로 실천을 했을 경우, 받기로 작정된 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의 나라가 영원히 굳건하게 서는 것이었다(삼상12:13). 그리고 왕의 왕국이 계속해서 연장되는 것이었다(삼상12:14).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참고로 이 말을 좀더 풀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시면서 이미 그의 아들인 요나단을 통하여 왕통이 이어지게 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울이 왕으로 선택받아 기름부음을 받았던 때의 나이가 40세였기 때문이다(이때 사무엘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러므로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던 해에 요나단의 나이는 적어도 10~20세 정도였던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요나단은 전쟁을 매우 잘하는 뛰어난 장군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이 예정하여 보내려고 했던 다윗은 아직 잉태도 되지 않던 시기였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때로부터 약 8년 뒤에 이새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사울 왕국은 좀더 지속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사울의 왕국은 단명의 왕국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 

 

5. 사울 왕이 정말 실수한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 사람들 중에 사울왕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들은 이후 3가지 치명적인 일들을 저지르고 말았다. 첫째, 그가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들은 후에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관하여 그가 들었을 때 그는 사무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것은 사무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 열왕기하 20장을 읽어 보라. 히스기야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병든 히스기야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이제 죽고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들었을 때 어떻게 했는가? 그는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회개하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해 주셨다. 그렇다. 사울왕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한 번만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연거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패를 통해 배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 이후에 아말렉과 또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에 또 한 번 반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 그러자 그 전쟁 이후 성령께서 그를 떠나 버리신다. 그리고 셋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제사하지 않고 오히려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사울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회개하자. 그리고 연거푸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무당을 찾아가지는 말자. 

 

2021년 12월 13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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