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9(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희어진 곡식 추수에 대한 주님의 놀라운 말씀(요4:31~3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GBM3uDRZbo  [혹은 https://tv.naver.com/v/29823567 ]

 

1. 들어가며

  가을 들녘에는 산들거리는 코스모스와 함께 황금 물결이 뒤척인다. 다 익은 노오란 벼들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익은 벼들이 수확기가 되면 모두 다 희게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익은 곡식을 보면서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벼를 재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물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보리'와 '밀'을 재배한다. 보통 10월에서 11경에 파종하여, 4~5월경에 수확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어느 때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앞으로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했으니(요4:35), 그때는 12월 중순경으로 보인다. 그때는 보리가 땅에서 올라와 파릇파릇할 때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사마리아성의 사람들을 보면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요4:35). 그러므로 이것은 곡식의 추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혼 추수에 관한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신다. 대체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으며 추수는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추수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어떠한 상을 내리시는가?

 

2.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던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가고자 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특별히 사마리아로 통과하는 길을 일부러 선택하셨다(요4:3~4).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에 잠시 쉬고 계셨다. 그때에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그곳으로 왔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드실 것을 구하기 위해 그 성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셨고 대화가 끝난 후 그녀는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은 이제 음식을 사와서 예수께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을 가지고 있다"(요4:32)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다 드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이 먹는 양식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셨던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이었다. 곧 그분은 이미 잡수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그분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때 어떤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으로 이미 만족하고 배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혼의 영역에서 말이다. 특히 그녀가 성안에 들어가서 외칠 때에 그녀로 인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시면서 벌써 만족해 하셨던 것이다. 

 

3. 희어진 곡식을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앉아 있아 있었던 시기는 추수 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들녘에는 이제 보리와 밀이 갓 올라와 자라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12월경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전파함으로, 예수님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시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아직 넉 달이 더 있어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너희들의 눈을 들어 보라. 그리고 그 밭을 보라. 그것들이 희어져서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요4:35). 고로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추수란 '곡식'의 추수가 아니라, '영혼'의 추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벌써 사마리아성 사람들은 곡식이 다 익어서 희어 있었다. 추수 때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추수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이어서 주님께서는 추수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들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 그것은 크게 2가지다(요4:36~38). 그것은 첫째, 영혼의 추수는 뿌리는 이가 있고 거두는 이가 각각 따로 있어 사역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곡식의 추수는 보통 뿌리는 이가 거두게 된다. 그러나 곡식을 거두게 될 때에는 빨리 한꺼번에 수확해야 하기 때문에 일꾼을 고용해서 수확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사람은 뿌리지만 다른 사람이 거두게 된다'고 말씀하셨다(37절). 즉 영혼의 추수는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고 또한 그것을 수확하는 사람이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이다. 둘째, 수확하는 이는 자신이 뿌리는 수고를 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수확하는 자가 되면 그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38절).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사오려고 사마리아성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음식을 사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에서 나오고 있었을 때에 그 성안에 살던 사람들이 제자들의 뒤를 따라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그 누구도 성 사람들에게 예수께 나아오도록 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 주심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기쁜 소식을 성안에 들어가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성 사람들에게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 것은 먼저는 예수님이고 또한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성 사람들이 제자들의 뒤를 이어서 주님께 나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씨 뿌리는 자가 따로 있고 거두는 자가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두는 자는 자신이 씨 뿌리는 수고를 아니하였어도 그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5. 왜 예수께서는 어떤 사마리아 여인에게 씨를 뿌리셨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누가 씨를 뿌리는 자인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기쁨의 좋은 소식 곧 그들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던 메시야가 왔다는 소식을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그 성 사람들 중에서 물을 뜨러 온 여인에게 가장 먼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는가? 그것은 그녀가 그 성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익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성 사람들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만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녀의 굴곡진 인생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잘못 알려진 바 창녀는 아니었다. 창녀는 결코 남편을 다섯이나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란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으며 현재 살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것에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그녀의 남편이 일찍 죽었기에 다시 결혼하여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을 가능성이다. 이런 경우라면 그녀는 상당히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남편 잡아먹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또 한 경우는 그녀의 다섯 남편들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고 이혼했을 경우다. 무엇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남편들이 그녀를 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참 안 됐다"는 말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후자인 것 같다.

  그러므로 사실 곡식을 익게 만드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 처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남유다 땅인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늘 자기들 북쪽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수확해 놓은 많은 식량을 빼앗기고 살았으며, 자신의 자녀들을 노예로 빼앗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꿋꿋이 신앙을 지켜왔다. 그래서 자기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B.C.322년 자기 동네의 산 곧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웠다. 하지만 약 200년이 지난 B.C.129년에 유대인들에 의해 그 성전이 헐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섞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따돌림을 받고 있었고, 동시에 이민족에게는 침입을 받아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든 상황에서 그들은 간절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신앙을 인정해 주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전은 오직 모세오경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오경의 성경 기록 가운데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그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신18:15에 나온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예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들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좀 다른 분이 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과거를 모두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그분을 향하여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분이 진정 모세가 예언한 바로 메시야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예배의 처소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할 때에는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 영 안에서 진리로 예배하면 된다고 답해 주셨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우리에게 메시야가 오면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네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니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도 버려둔 채 성안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그 성 사람들 중에서 첫 번째 추수의 열매 곧 '첫 열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성 사람들은 모진 세파 속에서 모두 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최종 주자로서 예수께서 오셔서 기쁨의 좋은 씨를 뿌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성 사람들에게 모세도 역시 씨 뿌리는 자에 해당하며, 하나님이 안배하신 모진 세파도 역시 씨 뿌리는 자이며,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에게 씨 뿌리는 최종 주자였던 것이다. 

 

6. 주님께서 가르쳐 준 영혼의 추수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영혼 추수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의 추수에는 씨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씨 뿌리는 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자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진 세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씨 뿌리는 자는 오직 '하나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천국 말씀을 씨 뿌리러 오신 자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씨를 뿌리는 자는 우리들이 아닌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어떤 특별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영혼을 추수하려 할 때, 씨 뿌리는 수고까지 우리가 다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온 장소는 어디였는가? 그곳은 '야곱의 우물'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깊어서 물을 긷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야곱도 굴곡진 인생 속에서 결국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눈코 뜰 새 없이 20년을 보내었고 추위와 더위를 이겨내야 했다. 그렇게 간신히 처자식을 얻게 되었지만, 그 집을 나온 뒤 얼마 못가서 이제는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외삼촌과 형을 안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오늘날 다른 영혼을 추수할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씨 뿌리는 수고는 내가 할 것이니, 너희는 다만 거두는 수고만 하거라"라고 말이다. 

 

7. 희어진 곡식을 추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희어진 곡식을 우리가 추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한 일에는 2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추수에 관하여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 씨 뿌리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다만 거둬들이는 수고만 해도 된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4:37~3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4:37~38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씨뿌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수고)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파송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수고한 채 있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수고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참여한 채 있다)

  그렇다. 영혼 추수를 위해서 우리가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다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추수하는 자로 선택하셨으며, 우리가 씨 뿌리는 수고를 아니했더라도 그것을 거둬들이는 자로 선택하여 주심에 감사하면서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동안 여러 차례 씨 뿌려 놓으신 수고에 동참하면 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영역은 주님께서 모진 세파를 그 사람에게 안배하여 그리고 당신이 특별히 세운 종들을 통하여,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지금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이 익은 곡식인지를 확인하여 천국 창고에 들여보내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익지 않은 곡식을 우리가 추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주님께서 그러한 곡식이 익게 하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곡식이 자라고 익는 모든 과정은 사실 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보리와 밀이 사실 토실토실한 알맹이가 되려면 그들이 추운 영하의 겨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벼가 토실토실한 알맹이를 내려면 역시 30도가 넘는 날들을 무려 30일이나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 씨 뿌리는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다만 그 곡식이 다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를 확인해 보고 익었다면 그 영혼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잘 안내해 주면 되는 것이다. 

 

8. 곡식이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한 영혼이 익은 곡식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 시대 마지막에 전해 줄 복음 곧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 보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기는 마지막 시기로서 알곡을 천국 창고에 들여보내고,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자를 만드는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전파하고 있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 보면 그들이 익은 곡식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천국복음을 들었는데도, "무슨? 회개? 예수만 믿으면 되었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직 익은 곡식이 아닌 것이다. 그때에는 속으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아, 이 사람은 이제 갓 올라온 보리로군". 그렇다. 아직 파릇파릇한 새싹인데 어찌 그 보리를 추수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익게 해야 한다. 그런데 또 누군가에게 "이제는 천국을 준비할 때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예수 믿는 자라도 못 들어갈 수 있으며,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신분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천국을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고 그것을 더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속으로 말해야 한다. "아, 이 사람은 다 익은 곡식이로구나"하고 말이다. 이처럼 그 사람이 다 익은 곡식인지 아닌지 우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인가?

 

9. 영혼을 추수하는 자가 받게 될 상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영혼을 추수하는 일을 감당하는 자가 받게 될 상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것을 일부러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3가지라고 하셨다. 첫째는 추수하는 자는 품삯(임금)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요4:36a). 이 보상은 이 땅에서 받는 품삯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일을 시작할 때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미리 저장하는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을 추수하는 자는 미리 장만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는 '천국 집'이 있고 '면류관'이 있고 '보좌 자리'가 있다. 그리고 둘째는 영생 곧 다음 시대에 누릴 열매를 우리가 모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4:36b). 우리는 추수를 통하여 천국의 열매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벌써 이 땅에서부터 추수를 통해 천국에서 받을 나의 열매를 모으고 있다. 셋째는 이 땅에서부터 우리가 받을 복으로서 추수하는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요4:36c). 사실 추수하는 기쁨은 추수하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놀라운 기쁨이다.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란다. 

 

10. 나오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면 과연 어떤 복음이 전파되고 있을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바로 '천국복음'이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거주지) 안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렇다. 천국복음이야말로 이 마지막 시대에 전파될 최종적인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복음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많은 익은 곡식을 붙여 주실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수많은 영혼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천국 창고에 들여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 아니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실 그 일을 행하려고 주님이 오시지 않았던가? "내 양식은 나를 보냈던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았던가?(요4:34) 우리도 이제는 꿈을 꾸자. 우리를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꿈을 말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영혼들이 그 나라에서 받을 상을 준비하는 것을 말이다. 이런 자들에게 하늘의 상이 날마다 주어질 것이며, 이런 자들이 결국에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2020년 10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10-0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5) 생수와 예배에 관하여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요4:1~42)_2022-10-05(수)

https://youtu.be/EMzCkOuNO40  [혹은 https://tv.naver.com/v/29743485 ]

 

1. 들어가며

  사마리아 여인, 그녀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고 있던 어떤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물을 뜨러 왔다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왜 베뢰아를 거쳐서 가는 우회 길을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그날 따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직행로의 길을 선택한 것인가? 혹시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더 큰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일까? 그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신 '생수'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여인이 질문했던 '예배'의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동네의 창녀였던 것일까?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 관련지어 참으로 질문할 것도 많이 가지고 있고 알아볼 것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혼의 갈증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난다"는 제목의 설교의 본문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전도법 강의에 주요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요한복음 4장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의 주제를 한 번 살펴보고, 그동안 풀지 못했던 궁금증들을 풀어봄으로서 주님이 주신 위대한 말씀의 진면목을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복음 4:1~42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요한복음 4:1~42절에는 사실 3가지 중요한 작은 주제가 나온다. 첫째는 '생수'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예배'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추수에 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 이어 나온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1~42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생수'인가, '예배'인가, '추수'인가? 오늘 본문을 다 공부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추수'라는 거대한 주제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제자들과의 대화 및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대화가 등장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른 길을 통해서 갈릴리로 갈 수도 있으셨는데, 일부러 사마리아 길을 통과하여 가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그분의 양식이 다름이 아니라 이 땅에 '자신을 보내셨던 이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요4:34)이라는 말씀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곧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신 것이다(요4:6).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와 같은 사실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4절 말씀에, "그런데 그분은 사마리아를 통하여 통과하여 가는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하셨다(원문)"는 말씀에 들어 있다. 그렇다. 그분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제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셨다. 그러고는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을 향해 일부러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가장 먼저 사마리아 전도의 첫 시작점으로 주님의 눈에 들어온 사람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우물가의 한 여인이다. 

 

3.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창녀였는가?

  그렇다면 그날 물을 뜨러왔던 여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과연 '창녀'였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녀의 신분을 창녀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때에 신부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그녀가 창녀였다고 설교함으로 대부분의 주석들이 이 여자를 창녀로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장에서는 그녀를 어떤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창녀가 아니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여자를 주님께서도 '귀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요4:21). 이것은 주님께서 그녀를 귀부인으로 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여자는 낮 12시에 물을 뜨러 온 것이 아니라 오후 6시에 물을 뜨러왔던 평범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요4:6). 왜냐하면 오늘 본문 6절에 의하면, 그 여인이 물을 뜨러 온 시각이 '대략 6시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오후 6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시간은 로마의 시간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힌 시간을 요한복음 19장에서도 로마시간법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시간이 '제 6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아침 6시였기 때문이다(요19: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이기 때문에 공관복음의 시간 기록 방법처럼 유대인의 시간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시각은 예수께서 여행 중에 피곤해서 지쳐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요4:6). 즉 예수께서 낮 12시부터 피곤하여 물가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온종일 걸으신 후에 비로소 저녁 6시쯤 되어 사마리아 동네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피곤하신 것이다. 셋째, 만약 이 여자가 창녀였다면 나중에 그녀가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간증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창녀가 말한 것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올 사람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4:28~30). 그런데 보라.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이 여인은 남자를 여러 명 거느린 여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남편을 다섯 명 두었지만 기구한 운명 때문에 그때 같이 살고 있던 남자와는 결혼도 못한 채 지내왔기 때문이다. 남편을 다섯 두었다는 것을 통해 그 여인을 창녀라고 볼 수 없다. 창녀는 남편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는 기구한 운명 때문에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사별을 했거나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불쌍한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 만난 남자와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여인을 비롯한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 전체가 당시 메시야를 매우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동네 사람들도 메시야를 만나러 물가로 나아온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여인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었는가?

  예수께서는 이미 선험적인 지식으로 사마리아 동네의 영적인 상황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군가가 그곳에 가서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번 기회에 직접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일부러 사마리아 동네를 향하여 간 것이다. 그래서로 그곳 마을의 입구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그분이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동네 사람 누군가는 물을 뜨러 그곳에 올 것이라고 예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그리고 손에는 두레박을 가진 채 물을 뜨러 오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물을 달라고 하는 청을 한다. 그러자 일반적인 일이었다면 그것은 너끈히 청을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보였기에 그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의 청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녀가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는 말씀을 그녀에게 들려주신다. 그것은 만약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또한 그분이 줄 수 있는 선물 곧 생수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에게는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고, 그 우물은 매우 깊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생수를 가지고 있게 되었기에 그러한 말씀을 하는 것이냐면서 반문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우물 물을 마시는 자는 또다시 목마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물을 마시는 자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구치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한 물이 정말 있다면 자기에게도 주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게 하고, 물을 긷기 위해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일상적인 화제를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이끌어내시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대화법을 통하여 그 여인을 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는 '생수'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수(생명의 물)'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아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답이 들어있다. 첫째로, 그것은 그것을 한 번만 마시더라도 다음 시대까지 결코 목마르지 아니할 물이라고 하셨다(요4:14). 그리고 둘째로, 그 생수는 그것을 받은 자의 속에서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4:14).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라는 것은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줄 그러한 물은 이 세상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이 이 세상의 물이 아니라 천국에서 오는 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계22:1). 고로 이 물은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결국 생명을 가지고 사람 속에 들어오실 '성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성령'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행8:20, 11:17). 또한 성령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것은 '생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7). 그리고 예수께서도 초막절 끝날에 생수의 강에 대해 설교하시면서, 그것은 믿는 자의 뱃속에서 솟아올라오는 성령의 물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7:37~39).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렇다.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생명의 물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이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영의 배에서부터 물이 올라와서 가슴을 채우게 된다. 그러면 그시로 그냥 만족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더이상 이 세상의 것을 가지지 않아도 부요한 마음으로 가득차게 되고 세상 것이 하나 없어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왜 뜬금없이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을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그 여인에게 갑자기 자신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죄의 문제 해결없이는 예수께서는 결코 성령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때 그 여인은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녀는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그녀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실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할 이유가 그녀에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것을 직접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예수님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그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고백하자, 그녀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들려준다. 그것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다시 재혼했는지 아니면 남편이 그녀를 버렸기 때문에 재혼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이처럼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말씀드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모진 인생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라고 말한다. 

 

7. 여자는 왜 갑자기 예배할 장소를 물어본 것인가?

  자기의 눈 앞에 있는 유대인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적으로 알게 된 여인은 예수께서 진정 선지자라면 알 수 있는 어떤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자기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예배하는 곳은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예배에 관한 진실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을 예배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예배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심산에서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할 때가 오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때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영 안에서 진리로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예배의 핵심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면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영 안에서'라는 함은 유대인들이 예배드릴 때에 너무나 형식에 치우쳐 있었을 뿐 마음은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함이요, 둘째, '진리 안에서'라 함은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예배 방식도 잘못된 것이요, 말씀에 없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예배하는 사마리인들의 예배 방식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 그것은 형식에 따라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것을 가리키며, 자기의 정한 방식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예배한느 것을 가리킨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가 오시게 되면 그분은 전체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이다'라고. 그러자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이해해버린다. 즉 자기와 말씀하고 있었던 바로 그이가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선지자'(신18:15)로서,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주실 메시야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둔 채 동네로 들어간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외친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9. 그 여자가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놀라은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분에게 감사하고 찬양하고 드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둘째는 그분을 전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자 그녀는 즉시 예배에 관해 질문한 것이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행했던 만큼 많이 모든 것을 다 자신에게 말했던 사람을 와서 보라고 외친 것이다. 이분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또 누구겠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그녀의 외침을 듣고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야곱의 우물가로 몰려나온다. 그렇다. 한 여인의 능동적이고도 열성적인 외침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야가 왔다는 외침을 듣고는 메시야를 보기 위해서 우물가로 몰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이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메시야에게로 나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된다(요4:42).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몇 년이 지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다. 그리고 생수와 같은 성령을 오순절날 마가다박방에 모인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보내주신다. 그리고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 중에 일곱 집사의 하나인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다(행8:4~13). 하지만 그때에 그들은 성령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이 소식을 들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된다(행8:14~17). 그리하여 생수와 같은 성령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가 된다. 

 

10. 나오며

   예수께서는 왜 다른 길들을 놔두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길을 선택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사마리아가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가서 그들을 추수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처음으로 그 문을 열어젖히고자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우물가를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주님은 그녀가 메시야를 만나지 못해서 그때까지 자신의 영혼에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녀에게 생수에 관한 말씀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신다. 하지만 생수로 비유하신 성령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받을 수 없기에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한다. 부끄러운 자신의 실상이지만 그녀가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가 찾고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신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과 그동안 대화를 나눴던 분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차리고는, 동네 안으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난 소식을 기쁘게 전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마리아에도 추수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는 훗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성취가 된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역과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누구나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값없이 생수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 주님을 진정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2022년 10월 05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찾는다고 말씀하신 경우가 거의 없다. 신약성경에는 오직 요4:23~24이 유일무이하다. 그것은 예배하는 자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예배하는 자를 지금도 찾고 있다. 그렇다면 주일이 되었으니 11시에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면 그것이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요 주님이 원하는 예배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아니하신고 하셨다. 마치 가인의 제사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하고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정이 높아 말씀이 잘 울려퍼지며, 각종 악기로 무장된 멋진 성가대를 갖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되는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그러한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더불어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어떻게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준 예배의 방법을 모른 채 예배드린다면 우리의 예배는 거짓예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예배가 드려지고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1. 들어가며

  누가 참된 예배자인가?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에서 멋진 성가대와 함께 예배하면 수만명이 운집해서 예배하면 멋진 예배자가 될 수 있는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모적인 조건이 참된 예배자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들려주신 참된 예배자의 조건에는 어떤 물리적인 장소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요청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누군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4:23~24에서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자가 되기 위함이다. 그분의 눈에 발견되기 위함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선행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시든지, 십계명과 같은 율법을 지키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시지 않고 말이다. 이제 몇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요4장의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 답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사람을 만나시고, 그때에 사람의 죄들을 용서해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여 생수를 공급해 주시며,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지금도 찾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어떻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어떻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가? 그것은 딱 2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자신의 영 안에서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진리 안에서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3. 참된 예배의 장소와 참된 예배의 방법은 무엇인가?

  하지만 사마리아여인은 예배의 장소가 어딘지 그리고 예배의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첫째로 그녀는 예배의 장소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그리심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어떤 장소로서, 그곳은 그리심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당시 그녀는 과연 어디에서 예배드리느냐가 중요한 관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자기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장소 곧 율법말씀에 나와있는 산 즉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신11:29). 하지만 남유다사람들은 예배하는 장소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처소인 예루살렘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주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 질문한 것이었다. 

  그때 주님께서 가르쳐준 말씀에 의하면, 예배는 어떤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배의 장소는 예루살렘도 아니며, 그리심산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다. 오히려 자신의 영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을 사용하여 예배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대상과 관련하여 예배의 방법에 관해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 B.C.722년에 앗수르제국에게 멸망당하면서 혼혈족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계속해서 그들의 신앙도 혼합적인 종교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실 통일왕국이었던 이스라엘 나라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두 조각났을 때, 북이스라엘에는 예배의 처소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남유다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가짜 처소를 북쪽에 만들어 넣고 거기가서 예배하도록 했다. 그곳은 저 북쪽에 있는 단과 남쪽에 있는 벧엘이었다. 하지만 혼합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북이스라엘 벧엘과 단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우상)을 만들어놓았다. 즉 송아지우상을 만들어놓고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해주셨던 신이라고 했다. 그러자 참으로 진리를 알고 있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드릴 때에 북쪽 단과 남쪽 벧엘로 가지 않았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의 제일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서 돌로 제단을 쌓아놓고 하늘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신들이나 이방신들을 섬기는 자들이 생겨나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신앙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분이 누구신지가 분명하지가 않다. 어떤 경우에는 여호와라고 했다가고, 어떤 경우에는 바알신, 아세라신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사마리아사람들)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요4:22)" 그랬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속에 하나님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진리 안에서 예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도 흐릿한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여인에게 예배드릴 때에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섰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녀는 사실 그때에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배란 자신의 영을 사용해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진정한 예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하여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그녀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회개하도록 이끄셨다.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우선적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서있던 그녀도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도록 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녀의 대답이 옳다고 말씀하시면서, "너에게 과거에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으나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너의 남편은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그녀는 훌륭한 선지자를 만났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깊은 내면의 질문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4.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여인에게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들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예배의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 말씀은 한 마디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되 반드시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것이었다. 거짓 지식을 붙들고 예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거짓을 말하는 지도자의 말씀을 들어서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배의 핵심은 2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영을 사용하여 영이신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배의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서 그분에게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예배자가 영 안에서 예배하느냐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요17:17에 의하면,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요14:6에 의하면, 예수님 자체가 진리다. 그리고 요15:26과 16:13에 의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곧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이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것을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이 보내주신 진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게 되며,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5. 나오며

  우리는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배하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무엇이며, 어떤 예배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는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영을 사용해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 찾으신다는 것이었고 또한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이었다(요4:23~24). 결국 예배는 어떤 물리적인 장소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즉 참된 예배는 보이는 멋진 건물이나 외모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영 안에 있고 진리를 붙잡고 예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성으로부터 800m나 떨어진 아래의 야곱의 우물도 얼마든지 예배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 거기에 거짓이 아닌 참 진리이신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요, 그분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자신의 영을 사용해 영이신 하나님과 접촉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닌 것들은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불순물이 0.0000001%도 들어있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만을 아멘으로 화답으로 삶속에서 실천해 갈 때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2018년 6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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