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2) 사울 그는 왜 교회를 잔혹하게 멸절시키려 했을까?(행8:1~3)_2022-08-17(수) https://youtu.be/OftJ8WDWWA0 [혹은 https://tv.naver.com/v/28646960 ]

 

1.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했던 것일까?

  사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울은 잔인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그가 비록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아주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하나님의 경륜이 대체 무엇이며 그때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는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첫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영적 무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감히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믿어온 자신에게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하는 그의 성격과도 맞물려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진 혈기와 분노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요 빗나간 열심이었던 것이다. 처음 스데반을 죽일 때에 그의 마음도 약간은 꺼림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 사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담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다. 왜 그럼,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우상숭배자들이나 신성모독자들은 모조리 죽이라고 하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에부터 모든 경륜은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살리려 오셨고 죄인을 용서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부터는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되었다(마5:43).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후 믿는 이들이 자신과 사상적으로 혹은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핍박한다거나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의 경륜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도 빗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여버리면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3.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출세를 위한 최고의 기회가 그렇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이었다(빌3:5~6). 그래도 그의 지파는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켰던 베냐민 지파였고,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율법공부와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율법의 엄한 교훈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은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산헤드린공회원이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헤드린공회가 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여 그 일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출세에 최적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문제 대상 1호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눈엣 가시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4.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세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셋째로, 그가 사탄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울은 완전히 사탄에 붙들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이도록 미웠다. 왜냐하면 사탄은 파괴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요10:10). 사실 그때 사탄은 철저히 사울을 이용한 것이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울은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는데,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그로 하여금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일을 한다면 산헤드린공회원이 해야지, 청년 사울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산헤드린의 하수인처럼 예수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예수님을 비방하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했다(행26:11).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탄에 의해 그의 눈이 완전히 감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원문에는 비늘들)이 벗겨진 사실을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늘은 그냥 비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어찌 비늘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비늘은 뱀의 비늘이었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 단어는 물고기나 뱀의 비늘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로서 용과같은 큰 뱀의 비늘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의 눈은 완전히 뱀으로 충혈되어 있었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5. 오늘날에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이미 구약경륜에서 신약경륜으로 들어왔다. 구약경륜은 율법시대이니만큼 무엇이 죄인지를 알려주는 시대였기에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약경륜은 복음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우상숭배자라 할지라도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정죄나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해야 한다. 특히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핍박하거나 죽이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단사냥꾼 같은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교계에서 매장을 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살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경륜에 속한 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로마카톨릭은 자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가두었으며, 수 만 가지의 도구로 고문하고 죽인 숫자가 무려 6,000~8,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참으로 그들은 신약경륜 안에 들어온 자들인가? 진정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핍박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죽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는 자의 바른 삶이기 때문이다. 

 

2022년 08월 17일(수)

정병진목사

(부제: 사마리아 사람들이 비록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까지 받았지만 왜 그들에게는 성령의 선물들이 하나도 나타나지 아니했던 것일까?)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  하나였던 빌립집사, 그는 예루살렘교회가 세운 일곱집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일명 해외파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마리아로 가더니 그곳 주민들에게 거침없이 하나님의 왕국복음을 전파했다(행8:12). 그러자 그곳 사람들에게 붙어있던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고 떠나가기 시작했고 중풍병자와 못걷는 자들이 낫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났는지,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 주민들 사이에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자라 불리우고 있던 마술사 시몬까지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사마리아성에 살고 있던 수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기에 이른다그런데 정작 그들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 즉 성령세례의 증거들이 단 한 가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고넬료의 가정에서는 말씀듣는 중간에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의 선물들이 부어졌다. 하지만 사마리아에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가 그리 많았는데도 왜  한 사람에게서도 성령이 그들 위에 내려왔다는 증거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일까?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들을 접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한 본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본문이다(행8:14~17). 빌립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세례까지 받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성령이 내리신 일이 전혀 없었다고 누가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성령께서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인가? 

  우리는 여기서 '성령세례'에 대해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어떤 이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가 있기도 하지만, 평생 교회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딤전2:4). 그러므로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사람이 아무리 타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마12:20). 이는 인간이 비록 상한 갈대이지만 아직 완전히 꺾인 상태는 아니며, 꺼져가는 등불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꺼진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순간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자유의지가 발동하기 시작한다. 과연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내쳐버릴 것인가  하는 것을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 순간 자신에게 다가와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회개케 하시는 역사와 믿게 하시는 역사를 수용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자신이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이다(고전12:3).

  그런데 그때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의 영 안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사람의 죽은 생명에 하나님의 영원한 산 생명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역사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듣고 인간이 화답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복음을 수용할  수도 있으며 거부할 수도 있다. 이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때에 자신의 영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지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빌립집사가 그곳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8:5).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왕국)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8:12).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8:12).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성령께서 역사한 것인가 아닌가? 고전12:3에 의하면, 사람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수는 없다. 물론 거기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도 포함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파송한 것일까? 또한 그들에게 파송된 베드로와 요한은 왜 하나님의 생명을 이미 소유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받기를 기도했을까? 그리고 이어서 안수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했던 것일까?

  먼저 정리할 것은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받게 하려고 했던 것은 인격적인 성령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빌립집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글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성령(행8:15,17,19)'이라는 말은 인격적인 성령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성령이 사람속에 들어오신 후에 나타나는 어떤 증상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행8:20)"이라고 말했다. 행2:38에서는 "성령의 선물"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이 받지 못한 것은 성령 자체가 아니라 성령의 어떤 것 즉 성령의 선물 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지 못했다고 기록된 '성령'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은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유사한 것이다. 요1:1에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데오스)'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앞에 나오는 '하나님(데오스)'는 정관사가 붙어있는 '하나님'이고, 뒤에 나오는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앞에 나오는 정관사가 붙은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며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지만, 뒤에 나오는 정관사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을 포함하고 있지만, 말씀이 창조주 하나님을 전부 포함하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인 말씀은 하나님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행8장 사마리아인들이 받지 못했다는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은 성령은 성령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

  한편, 지금도 오순절교단에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때에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 그 표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순절교단에서는 방언을 말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틀린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다 방언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2:30). 즉 사람이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중에는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구원은 자신의 죄를 회개한 뒤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시작되며,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죄들을 하나하나씩 회개하고, 마지막 숨이넘어갈 때까지 회개함으로써 죽은 후에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을까? 그것은 헬라어원문을 읽어보면 답이 나온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파송되어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것은 그들 마음(영) 속에 성령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성령을 받은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응당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어떤 것들이 그들에게는 나타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경영)"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고 지냈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족이라고 하면서 개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빌립집사가 모든 사람이구원을 얻을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는 바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구원의 소식을 듣고 믿게 되었다. 아마도 그가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이 빌립집사의 전도를 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미 몇 년 전에 예수께서 그곳에 가서 그리스도에 대해 알려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리라(이것은 요4장에 나옴).

  당시 사마리아인들이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빌립의 전도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외인취급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믿는 사마리아인들 속에 들어가 거듭나는 일을 하였어도 성령의 표적으로서의 어떤 것(하나님의 선물이자 성령의 선물)이 나타나지 않도록 차단해 놓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사람들이 복음으로 화목케 되어 한 형제와 자매가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어떤 것들은 본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올 때까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참된 복음을 들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곳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 즉 성령의 선물을 받도록 해 주었다. 이때에 비록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방언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던 사마리인들이 복음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성령의 은사들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을 얼싸 안으며 기뻐했을 것이며 기뻐 뛰며 춤을 추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드디어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사마리아인에게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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