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2) 사울 그는 왜 교회를 잔혹하게 멸절시키려 했을까?(행8:1~3)_2022-08-17(수) https://youtu.be/OftJ8WDWWA0 [혹은 https://tv.naver.com/v/28646960 ]

 

1.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했던 것일까?

  사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울은 잔인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그가 비록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아주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하나님의 경륜이 대체 무엇이며 그때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는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첫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영적 무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감히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믿어온 자신에게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하는 그의 성격과도 맞물려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진 혈기와 분노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요 빗나간 열심이었던 것이다. 처음 스데반을 죽일 때에 그의 마음도 약간은 꺼림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 사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담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다. 왜 그럼,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우상숭배자들이나 신성모독자들은 모조리 죽이라고 하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에부터 모든 경륜은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살리려 오셨고 죄인을 용서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부터는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되었다(마5:43).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후 믿는 이들이 자신과 사상적으로 혹은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핍박한다거나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의 경륜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도 빗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여버리면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3.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출세를 위한 최고의 기회가 그렇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이었다(빌3:5~6). 그래도 그의 지파는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켰던 베냐민 지파였고,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율법공부와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율법의 엄한 교훈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은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산헤드린공회원이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헤드린공회가 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여 그 일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출세에 최적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문제 대상 1호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눈엣 가시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4.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세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셋째로, 그가 사탄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울은 완전히 사탄에 붙들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이도록 미웠다. 왜냐하면 사탄은 파괴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요10:10). 사실 그때 사탄은 철저히 사울을 이용한 것이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울은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는데,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그로 하여금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일을 한다면 산헤드린공회원이 해야지, 청년 사울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산헤드린의 하수인처럼 예수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예수님을 비방하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했다(행26:11).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탄에 의해 그의 눈이 완전히 감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원문에는 비늘들)이 벗겨진 사실을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늘은 그냥 비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어찌 비늘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비늘은 뱀의 비늘이었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 단어는 물고기나 뱀의 비늘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로서 용과같은 큰 뱀의 비늘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의 눈은 완전히 뱀으로 충혈되어 있었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5. 오늘날에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이미 구약경륜에서 신약경륜으로 들어왔다. 구약경륜은 율법시대이니만큼 무엇이 죄인지를 알려주는 시대였기에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약경륜은 복음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우상숭배자라 할지라도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정죄나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해야 한다. 특히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핍박하거나 죽이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단사냥꾼 같은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교계에서 매장을 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살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경륜에 속한 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로마카톨릭은 자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가두었으며, 수 만 가지의 도구로 고문하고 죽인 숫자가 무려 6,000~8,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참으로 그들은 신약경륜 안에 들어온 자들인가? 진정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핍박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죽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는 자의 바른 삶이기 때문이다. 

 

2022년 08월 1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1) 순교하기전 스데반의 영성과 그의 마지막 기도(행7:54~60)_2022-08-16(화)

https://youtu.be/3iHe3EVvnfY  [혹은 https://tv.naver.com/v/28646882 ]

 

1. 공회석상에 선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공회석상에 선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복음의 정통성을 알리고 유대인들의 오류를 논증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스데반의 순교로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2. 영생으로 가는 사람과 멸망으로 가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전에 사도 베드로도 스데반과 거의 비슷한 설교를 여러 번상 하였다. 한 번은 오순절날 방언을 듣고 몰려든 무리들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성전 미문에 있는 나면서 못 걷는 자를 일어서게 했을 때 몰려온 사람들에게 솔로몬의 행각에서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베드로도 공회석상에서 증거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설교했을 때에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사실을 시인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반응했다(행2:36~37).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겸손히 시인하고 회개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영생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공회원들과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공회원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특히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에 그들은 격분했고 이빨을 갈았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밖으로 끌고가더니 거기서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이러한 차이가 난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참된 복음을 듣고 회개하라는 책망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차이다. 이때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이고, 이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멸망으로 가는 것이다. 

 

3. 죽음 직전의 스데반의 영성은 어떠했는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스데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것은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가 공회 앞에서 복음증거를 마치자,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공회석상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그들에게 증거했다.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8). 이것은 공회원들로 하여금 분노를 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공회 석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물었을 때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3~64). 그러자 대제사장이 자시의 겉옷을 찢으며 그가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공회원들 역시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렸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이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심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즉결처형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성밖으로 잡아끌어서 내치더니 돌로 그를 죽인다. 그런데 묻고 싶다. 누구든지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보좌를 볼 수가 있는 것일까? 당시 공회에는 72명의 공회원들과 고소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으나 그들 중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스데반의 눈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보인 것이다. 이는 스데반이 얼마나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랬다. 그는 공회 석상에서 변호하는 그 순간마저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증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증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가 알 수 있도록 그의 눈이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하신 것이다. 스데반은 사실 평신도였다. 그런데도 그의 영성이 이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어뗘했는가? 그들은 캄캄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영성은 그냥 '꽝'이었던 것이다. 

 

4.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 그는 2가지 기도를 드린다. 하나는 자신의 영혼을 주 예수님께서 받아달라고 위탁하기는 기도를 드렸다. 즉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기도하셨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예수께서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이라고 기도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의 죄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이는 그들이 지은 죄들을 예수님께서 용서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예수님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0"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예수님을 닮은 기도였다고 할 수 있이다. 그렇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갔고 그분이 하신 말씀대로 살아간 것이다. 

 

5. 스데반의 마지막의 기도가 끼친 놀라운 영향은 무엇인가?

  스데반이 돌아맞아 죽어갈 때에 그는 마지막으로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의 죄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숭고한 기도는 대체 무엇을 말해주는가? 만약 그때에 스데반이 그들을 놓고 "주여, 저들의 죄를 꼭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아마도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그 죄값을 치르며 비참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들 중에 한 명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그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때에는 그 어떤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스데반을 죽일 때에 거짓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는데, 그때 그들의 옷을 맡았던 청년 사울이 회심을 하여 세계적인 복음전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당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기며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던 사람이 그만 사탄의 포로에서 벗어나서 겸손히 주님께 붙잡힌 종으로 쓰임받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한 명의 순교자의 영혼을 받으시고 악한 사탄 마귀로부터 위대한 한 사람의 영혼을 건져내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022년 08월 16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4) 예루살렘 교회가 직면한 첫 번째 문제, 어떻게 극복했을까?(행6:1~7)_2022-07-19(화)

https://youtu.be/Fa-hWLKKTh4  [혹은 https://tv.naver.com/v/28025366 ]

 

1. 이 땅에 최초로 세워진 예루살렘교회, 과연 무슨 문제가 발생했는가?

  예루살렘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다. 성령의 강림하심과 은사를 부어 주심으로 인해, 이를 보고 듣고 놀라서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러한 예루살렘교회가 성장의 성장을 거듭한 끝에 이제는 2만 명 이상으로 구성된 견실한 교회가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 실제 거주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중의 약 1/5이 예수믿는 사람이 된 셈이다. 그런데 교회가 커지다보니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그것은 구제 문제였다.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에 비해서 매일의 구제에서 소홀히 여겨진 것이다(1절). 일종의 섭섭병이요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들 말하는 것으로 '시험'이 든 것이다. 그러자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을 원망하고 그들에게 불평을 쏟아 내었다. 그러나 실제는 이 직무를 감당하고 있는 사도들에게 불평을 쏟아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자기가 사는 지역이 원래는 이방 지역이어서 그곳에서 회당을 짓고 살다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와서 절기를 지키던 자들이거나 혹은 그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이사와서 사는 자들로서 이들은 히브리어(아람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고 헬라어를 주로 사용하는 다소 진보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이란 팔레스틴에서 대대로 태어나서 자란 정통 히브리인들로서 헬라어는 잘 모르고 히브리어(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2. 왜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 혹은 사도들에게 불평을 하였는가?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사실 유대인들만으로 구성된 교회였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비롯된 신비한 일들로 인해 3천 명이 믿었다. 이때에 복음을 들은 자들은 예루살렘에 오순절을 지키려고 왔던 디아스포라(흩어진, 해외 거주자인) 유대인들과 그 근방에 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40세나 된 자로서 나면서 걷지 못한 자를 낫게 한 놀라운 기적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왔고 그들은 다시 복음을 전함으로, 무려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의 재산을 바친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에 따라 식품과 일상 생활용품으로 나눠주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숫자가 적었을 때에는 12사도들이 그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했지만,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의 첫 번째 문제는 작게는 구제의 문제로 보이지만, 실제로 크게 보면 사도들의 직무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2절을 직역해 보자. "그런데 열두 사도들이 제자들의 무리를 가까이 부른 후에,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에 남겨둔(버려둔) 후에, 식탁들에게 [계속] 봉사하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행6:2)"

 

3. 예루살렘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시도했는가?

  그러자 사도들이 무리들을 모아 놓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남겨둔 채(버려둔 채), 식탁들에 봉사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놓고 그들은 공동회의를 하게 된다. 오늘날로 말하면 '공동의회'를 연 것이다. 그리고는 사도들은 이제 원래적인 직무 곧 '기도'와 '말씀'의 봉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 매일의 '구제'의 문제는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일곱을 골라 그 직무을 수행하게 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힌다. 즉 처음으로 직무의 분리를 시도한 것이다. 이전까지 사도들은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를 동시에 수행해 왔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 1시간 구제해야 할 일은 여러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들은 본래적인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기도의 직무(봉사)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하거나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각 집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드리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말씀의 직무(봉사)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을 가르치거나, 밖에 나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병든 자를 치유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지 못했다. 내부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사도들이 원래 주님이 그들을 세우신 목적, 곧 밖으로 나가서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사도들은 신속히 전체 회의를 열어서 2가지를 결정했다. 첫째는 사도들의 직무는 12명의 사도들이 감당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봉사의 직무는 충성된 일꾼 중에서 7명을 따로 안수하여 세워서 그들에게 맡기자고 결정한 것이다. 

 

4. 사도의 직무와 봉사의 직무를 나누는 기준과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그리하여 이제 두 가지 직무가 각각 분리되어 사역이 나눠진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의 직무와 안수집사의 직무로 나눠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직무를 나누는 기준과 근거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다. 즉 주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그 직무를 나눈 것이다.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들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직무(기도와 말씀 사역)를 감당하도록 한 것이다(마28:19~20, 막16:15). 그리고 안수받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구제와 같이 교회 내부의 문제 처리와 행정을 관리하는 일을 감당하게 한 것이다. 둘째는 그것이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역의 원칙은 주님의 부르심이며 그 다음으로는 그 사람의 은사와 달란트에 따른 것이다. 그래야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두 세력 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히브리파 유대인 그룹과 헬라파 유대인 그룹 간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그래서 그동안은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자로서 12명의 사도들이 중심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헬라파 유대인의 대표자로서 7명의 안수받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워짐으로 두 세력 간에 균형이 맞춰진 것이다. 

 

5. 사역의 분리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하여 사역이 분리됨으로 인하여 과부하로 인한 피로감은 사라지게 되었고, 각기 맡은 사역을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구제의 불평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의 분리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놀라운 좋은 결과들을 낳게 된다(7절). 첫째는 사도들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 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도들이 본연의 직무를 잘 감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를 더 많이 드릴 수 있게 되었고 기도회와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도들에게 구약의 율법 말씀을 가르치고, 나아가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관심을 보인 자들에게 메시야를 전해 주게 된 것이다. 둘째는 제자들의 숫자가 증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벌써 예루살렘 인구의 1/5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더 믿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행하는 구제보다도 교회의 구제가 더 잘 조직화되었고 더 아름답게 잘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핍박자들이 변하여 예수님을 믿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제사장 그룹이 회개하여 교회의 무리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핍박자들의 변화다. 그리고 동시에 직무의 분리로 인한 선행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은 비단 그때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도 과부하가 걸린 주의 종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우리도 그들로 하여금 본래적인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과 헌신으로 함께 사역을 돕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오직 주의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하여...

 

2022년 07월 19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7) 예수의 증인으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01)(행4;1~22)_2022-06-23(목)

https://youtu.be/tLMAFltWAfg  [혹은 https://tv.naver.com/v/27593830 ]

 

1. 베드로의 2차 설교 후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나면서 못 걷는 자 된 이를 치료하고 이를 보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두 번째로 설교를 했던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하여 남자만 5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고 전파함을 보고는 사두개인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성전 경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서 성전 경비대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사두개인을 보내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복음 전파 사역에도 처음에는 사탄도 영문도 모른 채 얻어 터지지만 두 번째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조직적으로 대항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자들은 이것을 대비해야 한다. 

 

2. 다음 날 베드로와 요한은 어디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가?

  다음 날 아침 이스라엘에 공회가 소집되었다. 공회는 '산헤드린'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대의 입법 사법 의결기구로서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을 끌어 가자 위협을 느끼고 모인 것이다. '산헤드린'은 공회원 70명과 의장인 대제사장 1명, 도합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의결기구로서 모든 안건은 만장일치로 의결되었으며, 그 구성성분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사두개인'이라 함은 제사장 '사독'을 잇는 엘르아살 후손의 제사장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유대 종파 중에서 바리새인과 더불어 양대 분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산헤드린 회의에 참석한 사두개인들을 보니, 전 대제사장 안나스(재위 A.D.7~15년) 그리고 현 대제사장 가야바(재위 A.D.18~36)가 있었는데, 가야바는 전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이자 양자이다. 그리고 요한도 있었는데 이는 안나스의 아들이다. 이 사람은 장차 가야바를 대신하여 1년간(A.D.38) 대제사장이 될 자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나오는데, 이는 당시 유대 철학의 거두였던 필로의 형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바리새인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도 있었다. 특히 '바리새인'은 솔로몬의 성전 파괴 이후 자신을 구별시켜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 시도했던 경건한 유대 종파였는데,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가 유명하다.

 

3. 무슨 명목으로 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했는가?

  그렇다면 이때 산헤드린 공회는 무엇으로 이들을 기소하고 심문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무슨 능력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한 일은 성전 미문 앞에 있었던 병자를 고친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을 시기하여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취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두 개의 종파는 대체 무엇을 싫어했을까? 먼저, 사두개인들은 자기의 경내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허락도 없이 예수님을 전했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율법을 공부한 랍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허락없이 백성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백성들을 가르치려면 정식으로 랍비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고 졸업을 한 자라야 했기 때문이다. 

 

4.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보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에 불과했는가?

  그렇다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보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것은 베드로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듣더니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마 전 십자가에 죽였던 예수님과 함께 있어 온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문없는 범인이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2가지 단어가 함께 쓰인 것으로서, 앞의 것으로 '학문없는'이라는 단어는 '아그람마토스'라는 말로서, 이는 '문서가 없는'이라는 원 뜻에서 '글을 모르는, 배우지 아니한'이라는 뜻으로 발전한 단어다. 그리고 뒤의 것 '범인'이라는 단어는 '이디오테스'라는 말은 '평범한, 일상의'라는 원 뜻에서, '무식한, 문외한'이라는 뜻으로 발전한 단어다. 그러니까, 공회원들이 볼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공부도 하지 않은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대답하는 것은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있었다. 

 

5.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병자에게 일어난 일에서부터 산헤드린 공회가 죽였던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병자가 고침받게 된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고 여기에 서 있다고 말한다. 건축자들이었던 그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면서,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특히 4장 12절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다른 사람"의 '다른'은 '알로스(같은 종류의 다른)'이므로, 유대인들 중에서 구원자가 나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다른 이름'의 '다른'은 '헤테로스(다른 종류의 다른)'이므로, 히브리어로서 '예수(호세아, 여호수아, 예호수아)외에는 다른 이방인의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2022년 06월 23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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