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56) 바울에게 있어서 마가 요한의 시작과 마침(행13:13)_2022-10-14(금)

https://youtu.be/EZkhn3IMFEg  [혹은 https://tv.naver.com/v/30214985 ]

 

1. 마가 요한은 누구인가?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외조카이다(골4:10). 왜냐하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행12:12)와 바나바는 누나와 남동생이기 때문이다(반대로 오누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은 베드로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옥에 갇혔을 때 예루살렘교회가 함께 모여 기도하던 집이었다(행12:5,12). 그러므로 마가 요한의 집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한 장소와 같은 장소이며, 예수께서 12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성만찬을 했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A.D.40년경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으로 인하여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 구제 헌금을 전달하게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안디옥으로 데려온다(행11:30). 그리하여 마가 요한이 안디옥교회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러자 이 선교여행에 마가가 보조자로 참여하게 된다(행13:5). 그렇다면 그의 이름이 '마가'라고 하는 '요한'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하면 '요한'이지만, 로마식으로 하면 '마가'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요한'은 히브리식으로 말하면 '요나'에 해당한다. 

 

2.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할 때에 바울은 왜 그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 했는가?

  A.D.47년경 성령의 지시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때 바울은 A.D.49년까지 약 2년 동안 2,300km나 되는 전도여행을 한다. 그런데 그때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보조자(수행원)로 데리고 떠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가 요한은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 시기는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섬에 대한 전도를 마치고 밤빌리아의 버가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다(행13:13). 그러니까 전도여행 초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나중에 바울의 말을 통하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이방인을 선교하는 일에 같이 동참했던 마가 요한이 갑자기 상의도 없이 그들을 떠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교지에서의 고생과 심적인 부담 그리고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한 걱정 등이 함께 그에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고로 바울이 보기에는 아무리 보조자로 참여하고 있다 할지라도 마가는 선교사로서는 부적격자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선교라는 것이 애들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은 거룩한 씨앗을 뿌리는 사역이며, 악한 영들과 전쟁하는 것인데, 거기에 어찌 어려움이 없겠는가? 그리고 누가 따라다니며 선교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겠는가? 어찌 선교여행이 그리 편한 여행이 되겠는가? 그러나 마가 요한은 미성숙한 자로서 그러한 어려움들을 이기지 못한 채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에 일어난다. 바울이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했던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를 방문하자"고 선교여행을 다시 시작할 것을 제안했을 때에, 바나바는 또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일에 반대했다. 결국 A.D.49년경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는 피차 갈라져서 각각 따로 선교여행을 떠난다. 이때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다시 구브로로 떠났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육로를 이용하여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3. 마가 요한은 사도 바울과 영영 헤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마가 요한은 바울과 영영 헤어진 것인가? 그럴 것 같지만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A.D.60년경, 바울이 로마에 압송되고 거기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을 때에,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한 통 써 보냈는데, 그때에 바울은 마가를 '나의 동역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몬1:24). 어느새 로마에서 마가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동역자(쉰에르고스)'라는 말은 복음전파를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로 10여 년 뒤 바울과 마가는 아주 친밀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추측컨대 마가 요한은 2차 전도여행을 떠난 후에 뭔가 많이 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로마에 갔었고 로마에서 그는 복음전파에 있어서 아주 귀중한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A.D.64~65년경 로마에서 기록한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 곧 베드로전서를 보면, 베드로는 그를 "나의 아들 마가"라고 언급한다는 것이다(벧전5:13). 이는 마가가 A.D.49년경 바울과 헤어진 뒤 15년 정도 지난 후 이제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이자 제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자료에 따르면, 마가 요한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베드로의 통역자의 일을 했다고 한다. 즉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마가 요한은 그의 통역자로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는 바울이 먼저 갔었는지 아니면 마가가 먼저 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바울과 베드로에게 마가 요한은 복음전파의 보조자로서 톡톡히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바울이 죽기 일보 직전에 기록했던 디모데전서에 따르면, 바울은 A.D.66~67년경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네가 올 때에 [에베소에 있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라고 했다. 그렇다. 마가 요한은 어느새 바울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어떻게 되어서 마가 요한은 바울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고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마가 요한에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합리적인 추론에 따르면, 1차적으로는 바나바와 2차 선교여행을 같이 떠남으로써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고 추측이 된다. 그리고 선교여행 이후 마가 요한은 베드로를 따라 로마에 갔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곳에서 또한 베드로를 섬기면서 많은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즉 그의 일생에 있어서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바나바'와 '베드로'였던 것이다. 그러니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교회의 두 명의 지도자들로부터 특수 과외를 받은 셈이다. 마가 요한은 처음부터 예루살렘교회의 일원이었으며 바나바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마가 요한은 바나바와 베드로를 통하여 순종이라는 훈련을 톡톡히 받았을 것이다. 자기에게 바나바는 외삼촌이요 베드로는 하늘 같은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5. 마가 요한의 변화된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마가 요한은 시간이 지나면서 베드로의 통역관으로서, 그리고 바울에게는 정말 중요한 동역자로서 탈바꿈하였다. 그렇다. 누구나 경험이 없거나 인생의 경륜이 짧을 때에는 남들이 보기에 철이 없어 보이고 책임감 없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 그러한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바나나의 행동은 마가 요한을 격려하고 다독거리는 차원에서 볼 때는 옳아 보인다. 하지만 선교에 있어서 주도권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만큼, 바나바는 어찌하든지 바울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했었다. 고로 바나바의 계속된 주장도 바른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젊은 사람 키워보자는 바나바의 의견을 무시했던 바울도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가 요한을 훌륭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셨다. 결국에 마가 요한은 바울에게는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베드로에게는 아들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말씀을 통역하면서 마가 요한은 예수님의 일대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은 결국 '마가복음'이라는 최초의 복음서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 이후, 마가 요한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묶여서 끌려다니면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그렇다. 처음에 마가 요한은 유약한 사람의 모습이었으나 점차 성장하여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여 교회의 큰 사역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싶다. 우리는 부족하다. 그리고 연약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자신에게 주어지든지 그것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시련과 역경이라도 이겨낼 줄 아는 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2022년 10월 14일(금)

정병진목사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분이신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구원까지 이를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배움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람은 배워서만 아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턴가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지는 앎을 가질 때가 오기 때문이다. 배워서 아는 것을 "기노스코'적인 앎이라고 한다면, '오이다'적인 앎이란 알아지되 돌이킬 수 없이 알아지는 앎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너는 오이다적인 앎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누구에게 배웠는지 그리고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붙들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보면 교회에서는 오이다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성경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 말씀을 지도자는 자가 꼭 갖추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경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신약성경 디모데후서는 A.D.66~67년경 당시 사도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로마감옥에서 자신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유언처럼 간곡히 부탁하는 말씀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말세를 당하여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그것은 디모데가 그동안 배웠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들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딤후3:14). 그래야만이 자기도 구원할 수 있고 남들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2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데에 무엇이 제일 중요한 요소일까?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2가지를 부탁하는데, 하나는 디모데가 누구로부터 배웠는지를 잘 생각하, 자신이 배웠던 것들과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들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권면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듣고 배웠던 성경안에 꼭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사도바울은 지금 2가지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그동안 배웠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성경만이 디모데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줄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는 모든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반드시 2가지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누구로부터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왔는데 또한 그가 사도바울 자신으로부터 배웠던 가르침에 더욱 주의하고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했다.

 

3. 디모데는 누구로부터 배웠으며 성경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렇다면 디모데에게는 과연 누가 성경을 가르쳐주었을까? 첫째는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였다(딤후1:5). 그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배웠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기때부터 성경말씀을 배웠고 암송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어느정도 성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전도하러 자기동네를 찾아온 사도바울을 만나게 된다. 이때 사도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전도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거쳐 루스드라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2차전도여행이 시작되자, 사도바울은 일부러 루스드라에 들려 디모데를 자기의 제자로 삼는다. 그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디모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둘째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갖게 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4.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성경을 공부했으며 무엇 때문에 성경을 가르쳤을까?

  그런데 당시에 유대랍비들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훨씬 더 율법말씀을 배웠고 공부했다. 아마도 정규적으로 배우지 못한 디모데보다는 훨씬 더 많이 배웠을 것이고 더 많은 지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를 못 알아보았다. 오히려 배척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왜 그랬을까? 그들도 성경을 공부하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했지만 성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곧 메시야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권익과 지위를 유지하지 위한 수단으로서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를 보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는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성경(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해도 거기에서 예수님 곧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배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구약성경 곧 모세의 글(율법,토라)와 선지자들의 글(예언서,느비임)과 다른 성경들(성문서들)을 풀어서 알려주셨다. 그것이 곧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이다.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에 메시야를 꼭 발견해야 바른 공부라고 가르쳐준 것이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렇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공부하든, 신약성경을 공부하든 거기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잘못된 배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가르쳐준 성경을 보는 각도를 분명하게 다시 일깨워주고 있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며, 그것을 끝까지 힘써야 한다고 유언처럼 말하는 것이다.

 

5.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알아본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목회적인 지침을 주면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디모데가 자신의 가족과 사도바울에게 배웠던 말씀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놀라운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디모데가 알고 있던 것이 '기노스코'적인 앎이 아니라, '오이다'적인 앎이었기 때문이다. 딤후3:15~16에 보면 "알다"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런데 두번 다 '기노스코'가 아니라 '오이다'라는 사용하고 있다. '기노스코'란 헬라어 동사로서, 배워서 아는 것이며, 체험해 가면서 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이다'라는 동사는 똑같이 '알다'이기는 하지만 선험적으로 아는 것이요 완전히 아는 것을 가리킨다.

 

6.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사람들이 모든 사물과 이치를 알아가는데 어떻게 알아가는지 아는가? 처음에는 배워서 아는 것이요 체험하면서 아는 것이다(요17:3). 기노스코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기노스코'의 범위를 벗어나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진다. 알되 완전히 알아지는 것이다. 다시 뒤돌아갈 수 없는 앎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더이상 배우지 않아도 부인할 수 없는 앎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이다'적인 앎이다.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항상 오이다적인 앎을 가지고 계셨다. 예를 들어보자.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오이다)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오이다)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오이다)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오이다)(요8:19)" 그렇다.  요8:19에 나오는 '알다'는 동사는 전부가 다 '오이다'라는 동사다.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비록 율법선생이기는 하였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오이다적으로 알려고 했다면 예수님도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진정 알기 위해 율법을 배웠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기를 원해서 배웠을 뿐이다. 그러니 성경을 그렇게 날마다 읽고 암송하고 가르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또 한 구절의 예를 살펴보자. "너희는 그(그분,하나님)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되 나(예수)는 아노니(오이다) 만일 내가 알지(오이다)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오이다)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5)" 그랬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이다적인 앎으로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를 오이다적인 앎으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분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이다적인 앎으로 아버지를 알고 있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열심히 배워서 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앎은 안타깝게도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지 못했다. 성경을 이용해서 다른 욕심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처음부터 오이다적인 앎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기노스코적인 앎으로 배워서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순간에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7. 우리 모두가 '오이다'적인 배움을 가지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온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성경을 배우고 설교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끝내 하나님을 알지(오이다) 못한다.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결과들은 비단 나쁜 마음을 품은 초신자들에게만 해당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십년을 교회를 다녔어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출석하고 열심히 봉사할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결국 기노스코적인 앎의 단계에서 끝나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만약 죽는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그는 이미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를 일부러 다시 찾아가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사역을 위임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오이다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도 오이다적으로 알고, 예수님을 증거하여 다름 사람에게도 오이다적으로 그분을 알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진정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8. 나오며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을 오이다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전해줄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는 오이다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성경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찾아내고 어디서든지 그분을 발견하여 그분을 전해줄 수가 있는가? 만약 이것이 되지 않는 자라면, 그는 절대 목회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둘 다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먼저 오이다적인 앎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성경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처음에는 기노스코적으로 성경을 배우다가 어느순간에 오이다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곡히 간곡히 바란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