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관한 7가지 비유들 가운데, 딱 2가지는 오늘날까지 두 가지 성경해석이 존재한다. 그러한 비유에는 '겨자씨 비유'이며, '누룩'의 비유가 있다. 이 둘은 천국와 확장성과 확장되어가는 능력을 말씀하신 것인데, 어떤 분들은 이것이 가라지를 포함하는 부정적인 천국의 확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가 비정상적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과연 어떤 해석이 맞다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은 비유에 관하여 어떤 성경해석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 비유에 대한 주님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022-03-13(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천국복음(20)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마13:31~3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CCM50V1AP0 [혹은 https://tv.naver.com/v/25680430 ]

1. 들어가며

  천국비유들 가운데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비유들이 더러 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비유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름하여,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다. 이 두 비유는사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비유를 듣는 대상을 따라 똑같은 주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겨자씨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알로스')'이라는 표현은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두 비유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다른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비유들이 오늘날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들어보면 어느 한 가지만 맞고 어느 한 가지는 틀리다고 말하기도 사실 곤란하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만 옳은 해석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운 것이 이 비유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이 비유들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중에 무엇이 더 바른 해석인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비유해석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면어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를 풀어가고자 한다. 이 말씀에 놀라은 지혜의 영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이 놀라운 비유에 따른 성령의 역사하심이 늘 함께 하기를 빈다.

 

2.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겨자 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이 두 비유는 '천국'에 관한 비유이다. 이중에서 '겨자씨 비유'는 아주 작은 것인데 이것이 큰 것으로 성장한다는 비유이다. 그리고 '누룩의 비유'는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지만 나중이 되면 그것이 골고루 퍼져나가 모든 것을 다 점령한다는 비유다. 그렇다면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자. 

마13:31~33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를 그분이 그들에게 내어놓으셨다. 말씀하고 있기를, 하늘들의 왕국(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남성)이 자기의 밭 안에 그것을 취한 후에 뿌렸던, 겨자의 씨앗 하나와 같다. 32 이는 모든 씨들보다 가장 작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라났을 때에는 채소들보다 더 커진다. 그래서 나무가 된다. 그 결과 하늘의 새들이 올 정도이며 그리고 그것(나무)의 가지들 안에 [계속] 둥지를 틀 정도이다. 33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로 그분이 그들에게 발언하셨다. 하늘들의 왕국(천국)은 마치 어떤 여자가 그것을 취한 후에 가루의 세 말들(사톤들) 안으로 숨겨 두었던 누룩과 같다. 그것이 전부 발효되었던(부풀어지게 되었던) 때까지. 

 

3. 이 두 비유에 대한 상반된 해석은 무엇인가?

  이 두 비유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이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하나는 둘 다 천국의 확장성과 천국이 퍼저나가는 능력에 대한 비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해석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비유는 천국에 대한 잘못된 확장이라는 것이다. 겨자씨는 천국에 대한 잘못된 외연 확장의 비유이고, 누룩은 천국에 대한 잘못된 내면 확장의 비유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겨자는 일년생 풀인데 그것이 절대 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새들이 와서 그 나무의 가지들에게 깃들인다고 하는데,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비유에서 '새들'은 '악한 자' 곧 사탄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룩도 마찬가지로 누룩의 대부분은 다 부정적인 것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의 제물에 누룩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예수께서도 누룩을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나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말씀하시면, 제자들이 그들의 잘못된 교훈들(가르침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해석이 타당한 해석이 될 수 있는가? 우리 주님께서 비유하셨을 때에는 과연 이러한 두 가지를 다 포함한 것으로 비유하시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 비유가 2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비유였다면 틀림없이 설명을 해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으셨다. 그냥 들으면 그냥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유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럼, 주님은 과연 어떤 의도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가?

 

4. 비유들을 해석하기 위한 2가지 성경해석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왜냐하면 천국을 사모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비유는 꿀송이와 같은 말씀이겠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듣지 않으려고 귀까지 틀어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참으로 심오한 것이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딱 2가지 종류로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의 하나는 그냥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이고, 또 하나는 알레고리 비유 곧 풍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비유인가 아니면 풍유인가?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서 7가지 천국의 비유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 2가지는 알레고리 비유(풍유)말씀이다. 그리고 나머지 5가지는 그저 단순한 비유다. 그러면 비유란 무엇을 가리키고, 풍유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이 둘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7가지 비유들 중에서 그냥 단순한 '비유'는 무엇이고, '풍유'는 무엇인가? 먼저, 비유('파라볼레')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비유란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에 곁에 갖다 놓음으로써 비교하는 방법인데, 이는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례로 쉽고 그리고 명쾌하게 설명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기법을 가리킨다. 그런데 알레고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유이기는 비유이기지만 한 번 더 꽈버린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통 비유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옆에 있는 다른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설명한다면, 알레고리 비유(풍유)는 그 실체의 그림자를 다른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알레고리 비유는 어떤 것을 빗대어서 실체를 설명하는 측면에서는 비유와 같지만, 그것의 실체가 아닌 그림자를 다른 대상을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에,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화자(비유를 들려주는 자)가 말해주지 않는한 절대 알 수 없는 비유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았다고 치자. 그리고 그가 묻는다. "이 그림은 과연 무엇을 보고 그린 그림일까요" 그랬을 때,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어떤 이는 그냥 '동그라미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원뿔'이라고 대답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원기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은 '태양'이다, 그것은 '축구공'이다, 그것은 '둥그런 접시'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질문을 던진 자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풍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고리 비유는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약 말하는 자의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더욱어 그 해석은 많아질 수밖에 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알레고리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해설을 해 주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7가지 비유들 가운데 해설이 있는 비유가 바로 풍유였떤 것이다. 그리고 해설이 없는 비유는 그냥 단순한 비유였던 것이다. 고로. 제자들을 따로 불러 비유를 설명해주셨던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리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가 바로 풍유의 비유였던 것이다. 

 

5. 왜 비유풀이와 짝풀이로만 성경을 해석하는 신천O의 해석법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 비유와 알레고리 비유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호리는 이단이 있다. 대표적으로 신천O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든 성경말씀을 다 비유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비유풀이와 짝풀이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천O는 그들의 교주인 이만O의 의도에 따라 모든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뭐를 말해도 그 끝은 이만O를 향하게 된다. 어떤 성경을 해석하든지 신천O의 교주인 이만O를 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까지 신천O 교주 이만O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찬찬히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해석법을 보라. 그것이 바로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인 것이다. 곧 그들의 말로 '짝풀이'식 성경해석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말씀은 이긴 자요 보혜사로 온 이요 재림주가 이만O라고 하는 것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이만O가 자신을 재림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다들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믿도록 빠지게 하기기 위해 그들은 모든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푼다. 사실 알레고리 성경해석 방법은 기독교 초기 교부였던 오리겐(A.D.185~254)이 사용하던 방법이였다. 하지만 결국 이 방법은 이단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교회는 이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단 하나 허용되는 성경해석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이다. 이것은 구약의 성경말씀은 신약의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알레고리 성경해석법의 위험성을 없애고,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기에, 사도 바울도 이 해석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전10장을 읽어보라). 사실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요5:39), 구약성경인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글이 다 자기를 가리켜 말씀하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24:44). 그러므로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가능한 방법이지만, 그것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각각의 낱말에 교주가 원하는 말씀으로 짝을 맞추어 설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성경해석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결국 이것을 말하는 화자의 의도대로 성경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거짓의 영이 들어간 이단 교주가 이 방법을 사용하면 많은 선량한 성도들이 미혹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해석 방법은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천O가 얼마나 교묘하게 이 방법으로 기존의 선량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맨 아래의 부록의 메시지를 참고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6. 주님은 원래 어떤 의도로 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가?

  그러하면, 예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과연 그냥 단순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풍유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 이상에서 우리가 알게 된 성경해석 방법에 따르면 이 비유들은 단순한 비유에 해당한다. 이것은 풍유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비유인 것이다. 만약 이 비유들이 풍유였다면 주님께서는 이 비유들도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해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들은 설명이 하나도 없다. 고로 고로 이 비유는 단순한 비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그냥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비유인 것이다. 그것을 억지로 꽈서 들어야 비로소 들리는 그러한 말씀이 아닌 것이다. 고로 이 비유는 천국의 확장성과 확장되어가는 능력을 말씀하신 것이지, 이것은 천국의 부정적인 확장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천국의 확장성과 확장되어가는 능력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오늘 '비유'에 관한 해석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천국을 말씀하실 때에는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들 중에는 알레고리 비유들이 가끔씩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경계하기 위해 그러한 비유들은 다 설명을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레고리 천국 비유 말씀을 예수께서 들려주신 설명 이외의 다른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성경에는 짝이 있다고 하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성경말씀을 가져다가 끼워맞춰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단 교주의 교묘한 사상을 주입 받아서 결국 이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해석 이외에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렇게 하려는 단체가 있다면 그곳은 십중팔구는 이단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었던 두 가지 천국의 비유 말씀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결코 그림자를 비유로 언급한 알레고리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이것은 그냥 이해되는 바로 그것을 붙잡으면 된다. 이 비유들은 천국의 확장성과 점령 능력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천국말씀이 처음에 사람들에게 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절대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국 말씀에는 확장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어느 날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는 다이나마이트처럼 그들을 뒤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자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나 좋은 진주 장사의 비유이서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이다. 천국은 그 정도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만 우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전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는 자는 깨닫고 점차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혹시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자신도 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2022년 03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부록] 신천O에서는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눅10:25~37)"를 어떻게 알레고리로 풀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을 사용하여 알레고리적으로 풀어보겠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죄인인 인간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려간다"는 말은 범죄나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품을, "여리고"는 세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 죽어가는 사람 곧 죽지는 않았으나 가만히 두면 곧 죽을 사람은 "상한 갈대"이자 "꺼져가는 등불"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본 "제사장"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요, "레위인"은 종교지도자들을 돕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둘은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여행하는 중에 있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여기서 "여행 중에 있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사마리인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셔서 다시 하늘로 가시는 여행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상처에 부었던 "기름과 포도주"는 성령(생명)과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를 돌보아주기 위해 데려간 "주막"은 교회요, "주막주인"은 교회의 목회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달라고 준 "두 데나리온"은 예수께서 2천년 뒤에 다시 재림하시겠다는 뜻이요, 부비가 더 들면 그때 갚아준다고 한 것은 교회의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죄인을 양육하고 봉사하고 섬긴 것에 대하여 그날에 보상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한 비유 말씀인 것이지 알레고리적인 비유는 아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모형론적으로 푼다면 그렇게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들려주신 주님의 원뜻은 누가 진정한 이웃인지 물어보는 율법사에게 이웃이 진정 누군지를 가르쳐주는 비유인 것이다. 즉 이 본문은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진정한 이웃이다. 너도 이와같이 행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신천지에서는 어떻게 알레고리 방식으로 풀고 있는가? 이런 식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기존 교회 성도들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간다"는 뜻은 기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신앙생활은 계속해서 내려가는 신앙생활일 뿐이다. 그러면 강도와 같은 사탄마귀를 만날 수밖에 없다.또한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은기존교회에서는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기존교회의 목자들인 "제사장들"이나 그 목자를 돕는 전도사님들인 "레위인"은 본 체 만 체 할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지금은 비록기존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으며,이단삼단 하면서 사이비 이단 교주라고 비난하는 신천지의 약속된 목자(이만희)를 가리킨다. 그가 와서 비로소 강도 만난 자를치료해주기 시작한다. 그때 사용한 것이 바로 "기름과 포도주"다. 그런데 기름과 포도주는 잔치할 때에 고기를 잡고(눅15장의 둘째 아들의 비유)포도주(요2장의 가나혼인잔치)를 즐기는 것이니, 신천지에 와서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날마다 천국잔치가 열리는 것과 같다. 또한 그 잔치가 열리는 장소로서 "주막"은 신천지증거장막성전을 가리키고, "주막주인"은 신천지 각 지파의 지파장과 사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초림의 예수께서 떠나가셨다가 다시 오실 이천년의 시간이 다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때 주막주인에게 사마리아인이 보상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예수께 영으로 오셔서 이만희의 육체와 합일되고, 이만희가 인치는 자로서 신천지 성도들을 인치면 그들은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는 세상의 열방사람들이 재물을 싸들고 와서 신천지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하심을 들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완전한 영적인 해석이다.
  그러면 이 해석을 듣는 사람들은 이렇게 심오하고 깊이 있는 영적인 해석이 어디 있느냐면서 신천지만이 천국잔치를 열어 알려주는 유일한 단체요 거기에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알레고리적으로 푸는 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이단교주가 자신의 사상을 주입하고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푼다면 그것을 당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온 비유라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해석해주지 않는 비유는 알레고리적으로 풀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단이 속임수로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글 전체보기] https://dongtanms.kr/91958 2022년 03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종말론자들이 알레고리적으로 잘못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마24:32~39)_2020-03-04(수)

https://youtu.be/HN-Vsr-KOyE

 

1. 비유와 알레고리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비유"란 어떤 실체를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어떤 것으로 빗대어서 설명하는 수사법입니다. 그것의 특징으로는 비유는 실체의 어떤 한 면만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비유 자체를 가지고 또 다른 의미를 또 찾아가면 안 됩니다. 그 본문에서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뒤에 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비유를 썼는지를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이와 다릅니다. 알레고리는 화자(저자)가 원래 생각하고 있는 실체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그 비유에 대한 그림자를 다른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자가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으면 결코 알기 어려운 수사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비유는 반드시 설명에 첨가되어 있습니다(마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등). 그러므로 설명이 나와있지 않은 비유는 단순한 비유일 뿐 알레고리가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2. 예수께서 당신이 재림하실 때를 위해 사용하신 "무과과나무의 비유(마24:32)"는 비유일까요 알레고리일까요?

  어떤 비유가 단순한 비유인지 아니면 알레고리적인 비유인지는 사실 처음 볼 때에는 문맥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어떤 요점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화자의 설명이 부가적으로 나올 경우에는 알레고리적인 비유인 것입니다. 그럼, 마24:32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어떤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단순한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이 다시 오시마고 약속한 때가 되면 여러가지 징조들이 나타나게 될 것인데, 만약 주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쭉 나타나는 것을 볼 때면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드신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 비유는 이렇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것의] 가지가 연하여지고(부드러워지고) 잎사귀를 내면(잎사귀들이 움트고 있을 때에는)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마24:32), 이와같이 너희도 [역시] 이 모든 일[들]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있다는 것을) 알라(알고 있으라)(마24:33)" 그렇습니다. 이 비유에 있어서 실체는 "이 모든 것들"이며, 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가 "무화과나무"일 뿐입니다.

 

3. 그럼, 무화과나무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실체는 "이 모든 일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는 것은 곧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는 "무화과나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들의 성취"를 통해서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데에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것을 자연현상을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성취가 되는 것을 보면 인자가 문 앞에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에 대한 비유가 바로 "무화과나무가 잎을 내는 것"입니다. 고로, 이 본문은 우리는 무화과나무에서 어떤 심오한 뜻을 찾아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이 모든 일들"의 성취를 살펴봄으로서 그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모든 일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문의 윗부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마24:5~29)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징조들로서는 "거짓그리스도의 출현(5절)", "난리와 난리의 소문(6절)', "민족간, 국가간의 전쟁, 기근과 지진(7절)","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9~10절)", "거짓선지자의 출현과 미혹(11절)", "불법의 성행과 사랑의 식어짐(12절)', "천국복음의 온 세상 전파(13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15절)과 "유대인들의 도망(16~20절)", "큰 환난(21~22절)", "재림예수의 출현(23,26절)", "거짓그리스도, 거짓선지자의 출현과 미혹(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는 것)(24절)",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시체들(28절)", "해와 달과 별들의 이상 및 하늘의 권능들의 흔들림(29절)". 고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왔다고 알라는 것입니다.

 

4. 그럼,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들이 다 일어나리라(마24:34)"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요?

  그럼,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들이 다 일어날 것이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이 세대"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안타까운 일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무과화나무가 싹이 나는 것"을 알레고리로 해석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화과나무"의 단어에 대한 짝을 찾아서 무화과나무의 실체를 밝히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렘24:5~7의 말씀을 가져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라고 되어 있으니,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라고 해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한 세대"를 계산합니다. 고로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했으니, 그때로부터 한 세대를 계산하는 방식이죠. 지금까지 해석해온 바 한 세대는 "첫째는, 광야40년이다(1988년). 둘째는, 희년50년이다(1998년). 셋째는, 남유다의 바벨론포로생활 70년이다(2018년). 넷째는, 노아의 홍수 100~120년이다(2048~2068년)"라고 해석한 것입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33절에 나오는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는 것에 대한 비유로서, 무화과나무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무화과나무"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비교되는 단순한 비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한 것을 가지고, 누군가 한 세대를 계산하였으니, 문맥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는 것"은 자연현상을 비유로 든 것일뿐 "무화과나무" 자체에 어떤 뜻이 숨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무화과나무"에 어떤 뜻이 숨겨져 있었다면, 누가복음의 평행본문의 말씀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즉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눅21:29~30)". 그럼, "모든 나무"도 알레고리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자연에 있는 나무들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summer)이 가까이 온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그 모든 일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5. 알레고리의 해석의 위험성은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단순한 비유의 말씀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버리면 이렇듯 큰 낭패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재산과 생명과도 관계된 것이라면 더 큰 일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천지가 바로 성경말씀을 알레고리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리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너무나 위험스러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알레고리 해석은 과거에도 살펴보았지만 해석하는 자가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신천지 이만희는 그것을 잘 알고서, 알레고리적인 해석인 "비유풀이"와 "짝풀이"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천지식의 알레고리 해석이 오늘날 기독교 내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말론"성경해석입니다. 이것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교리로 만든 자들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이요, "환난전 휴거론자"입니다. 이들은 환난전휴거는 마24장에는 나오지 않지만 숨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환난 후에"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마24:29), 이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도둑이 은밀하게 와서 보석을 훔쳐가는 것처럼 은밀하게 공중으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알레고리 해석을 가지고 교리를 만들면 이와같은 대참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참된 길을 가려는 우리는 결단코 이러한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2020년 03월 04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경에 나오는 비유와 알레고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마13:34~43)_2020-03-02(화)

https://youtu.be/DXfJUhwUmWM

 

1. 오늘날 신천지에서 사용하는 "비유풀이"와 "짝풀이" 성경해석방법의 원류는 무엇인가요?

  오늘날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과 같은 사이비이단에서 사용하는 "비유풀이와 짝풀이"는 사실 오래된 성경해석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것을 "알레고리적 성경해석방법"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초기교부 오리겐(A.D.185~254) 때에 꽃을 피웠는데, 오리겐도 사실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150~215)로부터 베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해석방법이 우리나라 이단교주들에게서도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비유풀이와 짝풀이"는 한국식의 토종 알레고리 성경해석방법이었던 것입니다.

 

2. 알레고리 성경해석방법은 어떤 성경해석방법인가요?

  알레고리 성경해석방법은 비유를 해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알레고리도 비유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서로가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알레고리도 "비유"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기에, 알레고리 성경해석방법은 비유성경해석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알레고리"란 무엇인가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비유"가 무엇인지부터 잘 이해해야 합니다. "비유"란 헬라어로 "파라볼레"라는 단어인데, "파라(=옆에, 곁에)"와 "발로(두다)"가 합쳐진 것으로서, 이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서로 비교하여 뜻을 밝혀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실례에 빗대어 명쾌하게 설명하려는 이야기진행방법의 하나가 비유 성경해석방법인 것입니다.

 

3. 비유 성경해석방법이란 무엇을 가리키나요?

  비유 성경해석방법이란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누구든지 알기 쉬운 일상의 실례를 통해서 설명해주는 성경해석방법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먼저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체를 설명하기가 복잡하고 어려우니까 그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서 빗대어 사용하는 어떤 것이 비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란 어쩌면 알레고리와는 정반대되는 논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알레고리는 실체는 화자(말하는 자)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화자는 이야기할 때에는 그것의 그림자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 실체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 혹은 청자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 비유는 말하는 자가 그것이 무엇이라고 나중에 설명해주지 않는 한 그 의미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는 그것을 암호화된 "수수께끼"라고 불렀습니다.
 

4. 비유를 알레고리로 잘못 해석한 용례는 대표적인 용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비유와 알레고리를 잘 구별하여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우선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마24장(종말장)에서 당신이 언제 오실지에 관하여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것입니다(마24:43). 그러면 여기서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가져다 쓰신 것인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갑자기(느닷없이, 갑작스럽게) 혹은 예기치 않게" 오신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재림의 돌발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뒤 문맥을 통해서 보다 더 명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예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들어닥칠지 모르니까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시 악하고 게을러서 동료들을 치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다가 갑작스럽게 주님을 맞이하면 책망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알레고리로 푸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것은 "은밀하게 오신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도둑이 예고하고 그 시각에 오는 도둑이 보았으냐면서, 도둑은 알 수 없는 시각에 은밀하게(몰래) 오는 것인만큼 예수께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오실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도둑이 오는 것은 집 안에 있는 보석을 살짝 훔쳐가기 위해서 온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께서 어느날 은밀하게 오셔서 보석만 몰래 훔쳐간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은 공개적인 재림(지상재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오시는 재림(공중재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환난전에 공중에 은밀하게 오셔서 몇몇 알곡신자만을 휴거시켜서 공중에서 7년동안 혼인잔치를 할 것이고, 나머지는 버려둠을 당한 채 지상에서 환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이 버려져서 환난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갑자기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는 날마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 것인가(시간만)만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7년 대환난은 예루살렘 제3의 성전이 새워져야 시작된다고 했으니(그러나 이는 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지 안았으니 아직은 아니로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제3의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은밀하게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 자신이 남겨지지 아니하고 주님의 공중재림 때에 꼭 휴거되기 위해 날마다 종말의 징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잘못된 성경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유는 실체의 어떤 한 국면을 설명하기 위해 빗대어서 가져온 개념이므로, 비유의 단어 안에 감추어진 모든 의미를 본문의 성경해석에 다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비유는 오직 한 가지 의미 곧 주님은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때에" 온다는 뜻이지, "은밀하게 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가 "도둑같이 오신다"는 비유는 예수께서 은밀하게 오셔서 알곡만을 공중으로 데려가 거기서 혼인잔치를 한다"고 설명하면, 그만 "이것은 참으로 심오하도다.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에 이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숨어있었구나"하고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감추어진 비밀한 뜻이라고 여기고는 그 해석에 깜빡 속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까지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환난전휴거설"이요, "세대주의종말론"이라는 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말씀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말씀의 본래적인 의미를 망쳐놓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5. 비유와 알레고리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비유에는 오직 한 가지 의미 내지는 한 가지 요점만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말하는 화자가 어떤 의미로 말을 했는지 독자나 청자는 그림자만 보고서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화자가 말하려는 의도에 맞춰 그 의미를 찾아내면 좋겠지만, 만약 화자가 말하려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해버리면, 그것은 원래의 뜻과 완전히 다른 뜻의 또 하나의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 비유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해석을 잘못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 해석방법을 이단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성경해석방법이며, 그것을 통해 사이비이단의 교주에게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기교부 오리겐은 알레고리 해석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 해석할 때에 진짜인 것이지, 그것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때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비유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신 처음 두 가지 알레고리 비유("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가지 비유는 오직 한 가지 주제(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비유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또다른 의미를 도출하려 시도한다거나, 거기에 나오는 낱말(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뜻을 도출해내려 한다면 이단이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천국에 관한 다양한 방면은 다 하나의 비유를 통하여 한 가지 요점만을 말씀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의 비유로서 그 단어 안에 숨겨있는 다른 뜻까지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면 그것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며, 만약 다른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 않는 것이라면 매우 위험한 해석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2020년 03월 02일(월)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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