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23) 사울왕의 첫번째 불순종이 가져다 준 뼈아픈 결과는?(삼상13:1~23)_2021-12-13(월)

https://youtu.be/gT02aruasWs  [ 혹은 https://tv.naver.com/v/24060051 ]

 

1. 사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좀 특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택정함을 입은 소수의 사람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그에게 알려 준 바대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지도자(왕)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었다(삼상9:16~17). 

 

2. 그가 왕이 되어 치르게 된 두 번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

  사울은 맨 처음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구별되었고 미스바에서 제비로 뽑혀 왕으로 선출된 바 있다. 그리고 암몬 사람 나하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그는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암몬 족속과 치른 첫 번째 전쟁으로 인하여 사울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수가 있었다. 사실 사울이 치른 첫 번째 전쟁은 그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먼저 그는 자신의 조상 5대로부터 기도가 축적되어 있는 상태였으며(삼상9:1),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 위에 내려왔기 때문이다(삼상10:10).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전쟁을 하기에 탁월한 외모를 갖추었으며(삼상9:2), 전쟁하기 위해 모여든 장병의 숫자도 무려 33만 명이나 되었으며(삼상11:8), 그가 발휘한 기습 작전도 대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삼상11:9~11). 무엇보다도 정치 지도자로 세움받은 사울 자신과 그리고 종교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각기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감당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 이후 사울은 약 3,000명의 근위병들만을 남겨 놓은 채 다 집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때 2,000명은 자기의 병사로 남겨 두었고, 나머지 1,000명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아들이자 뛰어난 장수였던 요나단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사울은 요나단과 합세하여 이스라엘 진영까지 와서 주둔해 있던 블레셋 진영을 쳐버린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그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많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즉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철병거가 삼만 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말탄 기병도 6,000명이나 되었으며,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3,000명의 군인들은 여기저기에 숨느라고 바빴고 요단강 건너편까지 도망가느라고 바빴다. 이미 2,400명의 사울의 군사는 황급히 도망치고 말았고 겨우 600명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러니 사울은 더욱더 군급했다. 그러자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한 가운데 자신이 번제를 드리고 말았다. 결국 사울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사울왕은 이 전쟁을 계기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 사무엘의 책망을 들은 사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사울왕이었지만, 그는 600명의 군사마저 흩어지려 하고, 또한 벌떼처럼 달려드는 블레셋 군대를 보자, 사울왕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정한 시간이 다 되기까지 사무엘이 오지 않자, 사울은 번제와 화목제 중에서 먼저 번제제사를 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사무엘이 곧이어 도착하였고, 사무엘은 왕이 무엇을 행했는지를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때 사울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한 마디로 부득이하게 먼저 제사를 드렸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었는가? 그것은 첫째, 사울왕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블레셋 족속을 쳐부수기 위해 세운 사명자였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이 전쟁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의 숫자를 보고 두려워하였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다.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리기까지 기다려야 했으나 그는 그것을 참지 못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었다. 즉 그는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이다.

 

4. 사울의 불순종에 대한 사무엘의 책망은 무엇이었는가?

  그러자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에게 전달하였다. 우선 첫째로, 왕이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왕에게 명령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시려고 계획되었던 복이 떠나가게 했다고 말했다. 그럼, 사울왕이 말씀대로 실천을 했을 경우, 받기로 작정된 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의 나라가 영원히 굳건하게 서는 것이었다(삼상12:13). 그리고 왕의 왕국이 계속해서 연장되는 것이었다(삼상12:14).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참고로 이 말을 좀더 풀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시면서 이미 그의 아들인 요나단을 통하여 왕통이 이어지게 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울이 왕으로 선택받아 기름부음을 받았던 때의 나이가 40세였기 때문이다(이때 사무엘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러므로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던 해에 요나단의 나이는 적어도 10~20세 정도였던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요나단은 전쟁을 매우 잘하는 뛰어난 장군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이 예정하여 보내려고 했던 다윗은 아직 잉태도 되지 않던 시기였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때로부터 약 8년 뒤에 이새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사울 왕국은 좀더 지속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사울의 왕국은 단명의 왕국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 

 

5. 사울 왕이 정말 실수한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 사람들 중에 사울왕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들은 이후 3가지 치명적인 일들을 저지르고 말았다. 첫째, 그가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들은 후에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관하여 그가 들었을 때 그는 사무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것은 사무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 열왕기하 20장을 읽어 보라. 히스기야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병든 히스기야가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이제 죽고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들었을 때 어떻게 했는가? 그는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회개하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해 주셨다. 그렇다. 사울왕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한 번만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연거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패를 통해 배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 이후에 아말렉과 또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때에 또 한 번 반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 그러자 그 전쟁 이후 성령께서 그를 떠나 버리신다. 그리고 셋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제사하지 않고 오히려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사울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회개하자. 그리고 연거푸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무당을 찾아가지는 말자. 

 

2021년 12월 13일(월)

정병진목사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고, 교회 안에 출석하고 있다면 다 구원받은 것인가? 여기 사사시대의 말기에 이스라엘의 법궤와 관련된 사건들이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이 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나무그릇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법궤는 결국 심판의 잣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되는가? 왜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5만 70명이나 죽임당하고 말았던 것인가? 여기, 우리가 미래에 받을 구원의 당락을 말해주는 놀라운 말씀이 있다.

2021-12-03(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상강해(15) 그날 법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삼상6:19~7:2)_2021-12-3(금)
https://youtu.be/jh0hSWV7sCA [혹은 https://tv.naver.com/v/23928984 ]

 

1. 들어가며

  이스라엘의 신의 궤였던 법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까지는 잘 몰랐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았고 그것을 그대로 보관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재앙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빼앗겼던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큰 슬픔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곱 달 전에 블레셋과의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던 것이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법궤는 진정 축복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재앙의 도구라고 불러야 하는가?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법궤의 이동 경로에 따라 나타났던 사건들을 종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에는 우리의 구원의 당락을 좌지우지하는 놀라운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블레셋에 들어간 법궤는 어떻게 되어 블레셋을 초토화시켰는가?

  아벡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서 법궤를 빼앗아 전리품으로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왜냐하면 애굽신들을 쳤던 이스라엘의 신과의 전쟁에서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에 들떠 법궤를 자기들의 신이었던 다곤신에게 바치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다곤신이 그만 넘어져 코가 땅에 닿은 채 법궤에 절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일으켜 세워 놓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다곤신은 또 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상의 목이 부러져 있었고 손목이 부러져 있었다. 더욱이 부러진 것들이 저만치 날아가서 문지방에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악한 종기가 발생하더니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블레셋의 군주들 5명에게도 종기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이 법궤를 빼앗아옴으로 여호와의 손이 자기들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이 혹시나 우연이 아닐까 싶어서, 한 번만 더 시험을 해 보기로 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아직 멍에를 멘 일이 없는 젖나는 암소 두 마리에 수레를 달고 그 위에 법궤와 속건제물을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새끼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암소 두 마리는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곧장 가고 만다. 

 

3. 벧세메스로 돌아온 법궤 때문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지만 오히려 슬픈 사건이 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날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 추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법궤는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감격하였다. 그래서 수레는 번제물을 태우는 장작으로, 두 마리의 암소는 번제와 다른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수21:13~16).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실로까지 가서 성소를 황폐화시켜 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는 이제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는 집이 없었다. 그러자 성소를 섬기던 제사장들은 자기가 분배받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 성읍 중의 하나가 바로 벧세메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엄청난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것이다. 그들이 법궤를 덮은 보자기를 열어 젖혔는지 아니면 법궤의 뚜껑을 열어 보았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5만 70명이 죽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숫자는 이스라엘의 한 개 지파의 숫자였다. 당시 대도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7만 명이었다고 하니, 5만 70명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죽은 자들은 벧세메스의 제사장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경하러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죽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큰 살륙이 일어난 것이다. 

 

4.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심판의 도구인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지 아니할 수 없다. 대체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인가 하는 것이다. 원래 법궤는 하나님 자신이 그 공간에 있겠다고 만들라고 한 것이요, 그곳에 십계명의 두 돌판을 넣어 두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법궤의 뚜껑 곧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계셨다. 그러므로 법궤는 확실히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전쟁에서 법궤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과거 요단강 강물이 마르게 하고, 여리고성을 한꺼번에 무너지게 했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오히려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만다. 왜 그랬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에 관하여 주님이 주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멸시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터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가지고 갔어도 그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어도 역사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법궤와 함께 아니 계시지는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법궤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했던 블레셋 사람들을 쳤고, 그들의 다곤신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레셋 전역에 악한 종기가 나게 했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창궐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가 아무리 신령한 성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심판의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요3:16~18). 그러나 법궤는 원래 천국의 모습 그대로를 이 땅에 재현한 것이므로, 법궤 자체는 하나님의 임재의 도구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통로인 것에는 분명하다. 나중에 그것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사건으로 인해 알 수 있는 법궤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런데 법궤가 스스로(인간이 보기에)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제사장의 성읍으로 되돌아왔다. 이는 제사장들이 다시 법궤를 모시고 성막을 짓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표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큰 살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찌기 그들에게 법궤를 모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법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악한 종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벧세메스에 몰려온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 법궤 안을 들여다보는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법궤는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지지도 말아야 하며, 지성소에 보관하여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민4:15, 20).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이러한 규정에 주의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그러한 규정을 배우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알고도 방치했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으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업신여긴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자신들이 이겼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라도 결국에는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벧세메스의 사람들이었지만 이들도 죽어 나가는 일은 블레셋과 똑같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 예법을 무시하면 결과는 역시 불신자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죽임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사망에 이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결국에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믿는 이들이 법궤의 사건을 통해서 주목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벧세메스의 5만 70명이 죽게 된 것은 분명 심판의 사건인 것이지 구원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똑같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께서 가르쳐 준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지 못했든지 아니면 그것에 주의하지 않았든지 결과는 똑같이 나타난다. 다 똑같이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라도 자기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죽을 때에 성 바깥으로 쫓겨난다든지 아니면 불타는 영영한 불못에 들어갈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멸망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해서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경우에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에서 탈락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께서 직접 들려준 말씀을 종합해 보면(공관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죄를 짓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이다(계21:8).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죄된 본성이 우리 안에 있고 귀신이 우리 육체속에 들어 있으며, 악한 영들은 자꾸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 넘어갈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이 말씀이 더 중요하다. 둘째, 자기의 더럽혀진 두루마기를 빨지 아니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계22:14~15).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진정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더렵혀진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계3:5). 오직 회개하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상태를 보라. 예수님을 믿었다면 자신의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가 많다. 자신의 구원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미끄러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지은 죄들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줄 알고서 회개하고 있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성 밖이나 불못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요일1:9).

 

7. 나오며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완전한 담보가 될 수는 없다. 믿는 자들에게는 지금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채 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법궤가 자기 마을에 들어온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 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 결국 블레셋 사람들처럼 죽어 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 안에 들어왔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무효가 되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믿는 자라도 사망에 이르는 규정이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것을 말해 주지 않는 것도 한몫을 한다고 본다.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하루아침에 죽어 나가는 이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다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이 무효화되는 규정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믿는 자에게 구원의 최종 관건은 회개를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2021년 12월 03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