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4(금) 금요기도회

제목: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은?(딤후2:20~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n5jSjP6de0  [혹은 https://tv.naver.com/v/30215415 ]

 

1. 들어가며

  사람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물처럼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살고 있는 것이고 때가 되면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천국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사람은 육체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함께 가진 존재로서 다음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사람은 영원히 살 곳을 이 땅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모른 채 살고 있는 이들은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갖고 누리게 될 지위와 신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문제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찌하든지 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날마다 준비하되 그곳에서 누릴 우리의 지위와 신분을 잘 준비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잘 쓰임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이 뜻한 바대로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에 우리는 저 나라에서 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는 3가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은 저 천국에서 영원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2.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3가지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을 잘 갖춰야 한다. 첫째,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조건으로서,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회개'를 통해 가능하다. 둘째, 내가 가진 능력만으로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 없으므로 주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주권적인 안배로 사명을 주셨는데,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은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조건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사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3.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소극적인 조건으로서,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준비를 잘 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주실 것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을 수 없는 조건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우리가 받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이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그 결과를 내가 누릴 수 없다거나 그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그 세력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악한 영들로서 귀신과 뱀들을 가리킨다. 특히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의 몸은 뱀의 차지가 되었다(창3:14). 그러므로 뱀은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우리 몸 속을 치고 들어온다. 특히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되면 우리 몸 속에 치고 들어온 뱀들이 3~4대까지 내려간다(출20:5).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악한 영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악한 영들은 우리의 몸 안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주로 3가지 일들로 역사한다. 첫째는 그 영들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물질이 들어온다고 해도 새어 나가게 만들고, 물질을 쌓지 못하게 한사코 방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들은 주로 우리의 '손'에 붙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들은 주로 제사를 여러 번 그것도 정성다해 음식을 융숭하게 준비하여 바칠 때에, 부처에게 많은 물질을 바칠 때에 그리고 미신과 잡신을 섬겨 무엇인가를 많이 바칠 때에 쑥 들어온다. 둘째는 그 영들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들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우리 몸의 각 부분을 붙잡는다. 예를 들어, 제사드릴 때에 절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리에 들어온다. 그래서 두통, 공황 장애, 치매 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제사 음식을 먹게 되면 위장에 그것들이 들어와 병에 걸리게 한다. 그러면 위경련이 자주 발생하고, 위암 등이 생긴다. 그리고 무당과 점쟁이를 섬기면 무당과 점쟁이에 붙어 있는 시기와 질투의 영, 혈기와 분노의 영, 억압과 착취의 영, 살인의 영 등이 들어와 정신적인 영역에 병이 걸린다. 그리고 이때 자신의 감정을 분노로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게 하고 자살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굿할 때에 끈으로 허리를 묶게 되면 척추 질환에 걸리는 자들도 있다. 셋째는 그 영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이때 그 영들은 주로 우리의 다리를 붙잡고 있다. 그리고 부처 불교를 섬기면 이러한 영들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미신 잡신을 많이 섬기게 되면 늘 손해를 입게 하고, 환경은 막히게 되며, 도움받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받으려면 우선 이러한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일이 시급하다. 그런데 이 일은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그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나와 내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고로 내가 예수님을 믿었어도 나와 내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살아도 넉넉하게 살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 늘 병원 신세를 져야 하며, 하는 일마다 어려움과 역경에 봉착할 것이다. 그러므로 맨 처음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본 교회에서 '회개기도문'을 구하여 기도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여러 은사들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여러 은사들이 필요하다. 은사에는 일반적인 은사도 있고 초자연적인 은사도 있다. 목회자의 경우는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는 일반 은사가 필요하며, 성도들을 잘 돌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환상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등이 필요하다. 거기에다가 치유의 은사와 더불어 영분별과 영판단의 은사, 세력을 느끼고 짓밟으며 세력을 쫓아내는 은사도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구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더욱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하였고(고전12:31), "사랑을 추구하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전14:1)"고 했다. 그렇다. 이런 것들은 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지 않으셨던가?(마7:7)

 

5.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조건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고 우리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그릇으로 빚으실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의 주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렇다. 큰 집에는 주인이 쓰려고 여러 가지 용도에 합당한 그릇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금그릇, 또 하나는 은그릇, 그리고 나무그릇과 질그릇 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금그릇이라고 해서 귀한 용도로 쓰이고, 나무그릇이라고 해서 천한 용도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물을 무쳐낼 때에는 나무그릇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시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그릇으로 우리를 만드신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러한 그릇으로, 어떤 사람은 저러한 그릇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사용할 사람으로 그리고 할례자의 사도로 만드셨다(마16:19, 갈2:8). 그리고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기 위해 만드셨다(갈2:8, 행9:15). 그리고 바나바는 위로자와 권면하는 자로 쓰시기 위해 만드셨다(행4:36). 그러므로 저마다 자신의 빚어진 그릇의 용도에 따라 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그릇의 용도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빚어진 그릇이 작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로운 용도로 그를 쓰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으면, 영적인 분들에게 물어보아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뚜렷한 사명이 없는 자라도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도에 얼마든지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했다.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면 어떤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주인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 그는 더욱 더 거룩해질 것이며,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가 어떤 그릇으로 빚어졌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어떤 그릇으로 빚어졌든지 자신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하다. 

 

6. 나오며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으려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더러운 그릇이라면 아무리 그것에 귀한 것을 담는다 할지라도 결국 그 안에 담긴 것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우리를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악한 영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죄들이나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여 악한 영들을 내보내고, 우리가 하나님께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되면, 온갖 더러움과 부정들이 함께 묻어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때로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기에 우리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특히 우리가 감당할 일에 합당한 은사들을 구해야 한다. 은사에는 일반 은사와 영적인 은사 둘 다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때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1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7) 예수님이 택한 자 바울, 그는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가?(행9:1~9)_2022-09-08(목)

https://youtu.be/YP0CsjM2uoE  [혹은 https://tv.naver.com/v/29089511 ]

 

1. 하나님은 왜 바울을 찾아오셨는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실 때에는 사람이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바울이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쓰실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기 위해 처음부터 그를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에 당신의 사람을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를 불러내시고 그를 들어 쓰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은 바울을 어떻게 쓰시려고 찾아오셨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를 3가지 용도로 쓰시려고 찾아오셨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한 가지다. 그것은 그를 복음전파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인데, 그 대상이 다만 3가지였을 뿐이다. 하나는 이방인들 또 하나는 임금들(왕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다(행9:15). 그렇다. 바울은 그릇 자체가 큰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그릇 자체를 그렇게 크게 만드셨고 그리고 그런 자로서 이 땅에 보내셨던 것이다. 

 

3. 바울의 예정은 구원예정인가 사역예정인가?

  어떤 이는 바울의 예정에 대해서 그에 관한 개인의 구원 예정을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한 사람의 구원을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의 예정은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 하는 사역의 예정인 것이지 개인의 구원의 예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다(행9:15). 그는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정해서 보내신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서 사용하시려고 보낸 것이다. 이를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자로서 미리 지명하여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하지만 미리 정하심을 받고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어떤 용도로 쓰임을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이 정하신다. 그를 큰 그릇으로 쓰실 것인가 아니면 작은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를 우리에게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렇다.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택한 그릇이 있으며, 택한 그릇들도 용도에 따라 그 분량이 다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바울과 베드로의 분량이 각각 다른 것이다. 아나니아는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었고 환상을 보았으며, 주님의 지시를 받을 만큼의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릇으로 택함받지는 못했다. 또한 베드로는 어린양의 12사도의 대표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받은 계시 중에 재림에 관한 계시는 바울의 계시를 따라가라고 말했으며(벧후3:15), 어느 때에는 바울로부터 엄히 책망을 받기도 했다(갈2:11). 이는 바울의 영성이 베드로보다도 높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해준다. 

  

4. 바울은 그날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는가?

  바울이 혈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결박하여 감옥에 쳐넣어 예수믿는 자들의 씨를 말라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한 정오쯤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러자 거기에 있는 자들도 어떤 빛은 보았으나 바울은 그때 2가지를 더 체험하게 된다. 그것의 하나는 예수님을 본 것이다. 사도행전 9장의 기사만을 보면 그때 예수께서는 음성으로만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의 두 번의 간증이 뒤에 나오는데, 그 간증에 보면 그는 그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된다(행26:14~16). 그때 바울은 빛 속에서 직접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을 보았던 것이다.

행26:14-16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그리고 또 하나는 그때 사울은 주님으로부터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똑똑하게 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어떤 소리는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때 주님으로부터 똑똑히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이었다(행9:4). 그런데 이 세상에 현재 살고 있고 또한 살았던 사람치고 이렇게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은 자는 많지 않다.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사울을 특별한 그릇으로 선택하시고 또한 쓰시려고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가 받은 계시는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겠는가? 그가 전한 메시지는 사실 그 누군가에게 배워서 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주님이 직접 가르쳐준 계시를 전했었고(갈1:11~12), 성령의 초자연적인 9가지 모든 은사를 다 받았으며(고전12:8~10), 심지어 표적과 기사도 행했고(행14:8~10, 19:11~12), 귀신도 쫓아내었으며(행16:18), 죽은 자도 살려냈으며(행20:9~12), 환상도 보았고(행18:9), 삼층천(셋째하늘)고 낙원까지 갔다가 온 자였다(고후12:2,4). 

 

5. 평신도로서 가장 큰 복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평신도로서 가장 큰 복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역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행하는 실수도 줄어들고 허송세월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되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 무엇보다도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 들어가서도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제대로 알고 준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모른 채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때에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따랐던 분의 가르침이 실은 너무나 얕은 수준이어서 내가 무엇을 위해 내 인생을 드려야 가장 가치 있는 삶이었는지를 모른 채 살았었구나 하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평신도에 있어서 가장 큰 복의 하나는 과연 어떤 사역자를 만나서 어떤 가르침을 받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끝까지 그 사역자와 동역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상을 받아 누리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고전3:8). 예를 들어보자.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사역들이 와서 일한 바 있다. 바울, 아볼로, 베드로(게바) 등이 그들에게 와서 사역했다(고전1:12).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들은 주께서 각각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인데, 그들은 각각 자기의 일한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고전3:5,8). 그리고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형제 소스데네는 하나님의 동역자들로서 훗날 주님께로부터 자신이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고전3:9).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고 또한 천국에 들어가서도 상을 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사역자를 만나서 그 사역자와 동역하고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09월 08일(목)

정병진목사

 

 

2022-07-27(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8)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한 영적인 의미(01)(요1:19~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Z158Ara-Qg  [혹은 https://tv.naver.com/v/28241589 ]

 

예수께서는 과연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그의 부모의 이름과 그의 이름과 그의 미래와 과거를 말씀하실 수 있었는가?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부르심에 대한 하늘의 비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늘의 부르심에 관한 영적인 비밀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섯 명의 첫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12가지 신앙고백 가운데, 세례 요한이 말했던 첫 번째 신앙고백 곧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고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만 알아도 속죄제의 비밀이 풀린다. 

 

1. 들어가며

  예수께서 누군지를 아는 것은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인 작업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 그것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20:31, 17:3).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에서는 과연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일곱 번의 요한복음 강해를 통하여, 요한복음의 서론을 살펴보았고(6번에 걸쳐), 이어서 요한복음 1:19~51절에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론을 통하여는 예수께서 '말씀'(로고스)이자 '하나님'이시며, '독생자'이자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웠다(요1:1,14,18).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하여 들었고(요1:19~34), 이어서 예수께서 부르신 갈릴리의 첫 5명의 제자에 대해서도 들었다(요1:35~51).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덜 다뤘던 제자들의 부르심에 관한 부분과 아울러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 신앙고백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며, 부르심은 어떻게 정해지며 본인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보내는 속사람(영)의 나이와 더불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시키는 방법에 대해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 신앙고백으로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항상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잘못하면 엇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20:31).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이러한 관점으로 서로 배치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크게 서론(1:1~18)과 본론(2:1~20장)과 결론(21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요한복음의 본론부는 또다시 전반부(요2:1~12:50)과 후반부(요13:1~20:31)로 나뉘게 되는데, 전반부에는 유대 안에서의 3년 반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룬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총7가지의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본론의 전반부는 첫 번째 표적으로서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이 시작되는데, 마지막 표적으로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7가지 표적이 끝난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가나의 포도주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나사로의 부활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7가지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분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본론의 후반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가 다락방의 강화에서 시작하여 예수께서 붙잡힘을 받으시고 고난받고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또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쓰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요한복음 1장의 19~51절에서도 여전히 이것은 반복되고 있다. 요한복음 1:19~51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1:19~34)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역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는데, 그것은 세례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면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1장의 35~51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다섯 명의 첫 갈릴리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안드레와 나다나엘을 통하여 고백되어지고 있다(요1:41,49).

 

3. 예수님의 첫 다섯 명의 제자들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그들의 이름과 부모 그리고 그들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요한복음 1:19~51의 후반부(1:35~51)는 예수께서 부르신 첫 갈릴리 다섯 명의 제자들의 이름과 그들을 불러내신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예지적인 감각이다. 즉 예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처음 보면서도 그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지와 또한 나다나엘을 처음 보면서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후에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안드레의 형 베드로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을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선견지명이 있으니까, 베드로의 가족과 이름을 다 알고 있었으며, 장차 베드로가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반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나다나엘의 경우도 예수께서 그를 만나기 전에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자, 나타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12사도들을 어떻게 사도로 삼게 되셨는지를 하늘의 광경에서부터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누가 12사도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주님 오실 때가 다 된 것이다. 그러니 영성이 있는 자는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어서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이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한 광경이라도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환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영성이 그만큼 받쳐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개인의 삶을 누군가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하여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그것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4. 이 땅에 태어나는 사명자들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떻게 부르시는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하늘의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된 것은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서 그를 이 땅에 보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하여,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15:16). 즉 자기가 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고 사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때가 되자 미리 정하신 대로 그들을 불러내어 제자들과 사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이 땅에 태어난 사명자들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떻게 부르시는가? 그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참고로 이러한 과정은 대부분 알 수 없는 영적 세계의 비밀이지만 영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영역이다. 곧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후에 결혼하고 부부 생활을 하다 보면 보통 아이를 갖게 되는데, 이때 잉태된 아기가 약 2~3개월 정도 자랐을 때 이 아기의 육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육체 속에 하늘에 있는 영혼을 집어넣어 준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태어날 나라와 가정 그리고 성별과 직책 사명까지 정해서 내려보내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되도록이면 당신의 사명을 주어서 보내는 아이를 축복받은 나라와 가정에 보내신다. 과거 같으면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에 보내셨다. 그리고 기왕이면 몇 대째 믿고 있는 가정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영혼을 보내실 때에, 북한에 보내시겠는가 아니면 남한에 보내시겠는가? 북한에도 보내실 수 있겠지만 대부분 남한에 보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남한은 자유롭게 믿을 수 있고, 몇 대째 예수믿는 가정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 중에는 세 종류가 있다. 먼저는 24장로들이 있고, 이어 144,000명의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그밖에 무수히 많은 허다한 성도들이 있다. 이중에서도 24장로나 144,000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천국의 보좌 자리가 정해진 채 이 땅에 영혼이 보내지는 것이다. 특히 천국에서 144,000명은 70줄의 좌석에 앉게 되는데, 그중에서 첫째 줄에서 셋째 줄까지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앉을 자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러한 보좌 자리에 앉을 자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보통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불러서 사용하신다. 구약의 성도들 중에는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은 경우는 성부 하나님이 직접 불러서 쓰셨던 경우이고, 신약의 12사도들은 예수께서 직접 부르신 것이고,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불러내신 경우에 해당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쓰실 자는 처음부터 목회자로서 하늘에서 보내신다. 그리고 평신도로 쓰실 자는 평신도로 보내신다. 심지어 어느 가정에서, 남여로 태어나게 될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주님이 배려하여 이 땅에 내려보내시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자라는 환경까지도 다 안배해서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때 만난 베드로의 아버지를 모르시겠으며, 베드로의 장래를 모르시겠는가?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분이 정말 모르시겠는가?

 

5. 사람은 얼마 정도의 속사람(영혼)의 나이로 보내어지며 얼마만큼 성장해 가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속사람(영혼)을 어떤 육체 속에 보내시는가?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속사람의 나이는 다 똑같지 않다. 최소 천국의 나이로 볼 때, 3살에서 최대 15~16살까지의 영혼을 이 땅에 보내신다. 어떤 아이는 갓 태어난 아기의 나이에서부터 3~4살 정도의 나이로 보내어지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평신도의 경우 3~4살 이하의 아이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거의 없이 보내어진다. 그리고 보통은 5~6살의 나이로 이 땅에 보내어진다. 이때부터는 예수께서 천국의 낙원에서 그 아이를 만나 물어보고 답을 받고 보내는 나이가 이때부터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자신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온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한 가정을 전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한 가문을 기독교 가정으로 만들기 위하여,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로 보내거나, 기도하는 자로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평신도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의 종들과 같은 사명자들에게 해당되는데, 이때는 7~9살 정도의 나이에 보내어진다. 그리고 속사람의 나이로 7~9살 정도의 나이를 태어난 자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을 얻는 성도가 될 수가 있다. 사역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신도든 주의 종이든 상관이 없이 면류관을 얻게 된다. 그리고 10~16세까지는 대부분 주의 종들로서, 이 나이에 이 땅에 보내어진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보내어지는 사람은 많이 있지 않다. 특히 15~16세의 나이로 보내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세상에 보내어지는 나이의 최고령은 16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자기의 속사람의 나이를 얼마나 성장시킬 수 있을까? 보통은 10년에 1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0년의 기간이라도 빨리 자라는 사람은 2~3살 정도까지도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지 20년이 되었을 때 영의 나이가 무려 6살이나 먹는 사람은 드물게 하나씩 있다. 그런데 50년을 신앙생활 했어도 영의 나이가 1살도 못 먹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럼, 무엇에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영의 양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의 영혼이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속사람(영혼)이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2가지만 잘 지키면 된다. 첫째, 영혼의 양식은 성경 말씀을 잘 먹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성경 말씀을 보고 성경을 공부할 때에 영혼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절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둘째, 고난과 역경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의 그릇의 두께가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 자꾸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는 자는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그릇이 작아 보여도 금그릇이나 은그릇으로 쓰임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혼의 나이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나이가 25세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장할 수 있는 최대의 나이 곧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것이다. 그때까지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 영혼(속사람)은 그때 천국에 들어간 나이로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죽인다거나 자살하면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기 때문이다. 

 

6. 내가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사명자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럴수록 처음부터 좀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구별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의 큰 사명을 담당할 자가 어릴 적부터 막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믿지 않는 집안에 태어난 자라도 크게 쓰임받을 자는 막 살지 않는다.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며, 효도하고 살며, 징징거리지 않고 대견스럽게 살아간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노는 것이 다르며, 하는 짓이 대범스럽고 구별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일찌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나는 절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전 순결을 지킬 것이다", "나는 절대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순종할 것이다" 등을 스스로 정하고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천국의 144,000석의 보좌 앞쪽에 있는 자는 주님이 직접 부르시지만, 대부분은 성령을 통하여 부르신다. 그때에는 성령의 은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꿈과 환상을 통하여 알게 된다. 그러면 자신을 구별하면서 살아간다. 사무엘의 경우를 보라. 잉태되기 전부터 그의 엄마 한나가 잉태될 아기를 위해 얼마나 기도에 힘썼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복된 영혼을 그녀의 자궁 속에 보낸 것이다. 그러니 사무엘은 어릴 적부터 나실인으로서 주님께 드려진다. 그리고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각별한 개인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영광을 받고 자라났던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면, 그 아이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자는 다음과 같은 3~4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 사명자는 더이상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천국을 사모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꿈이 되는 것이다. 둘째, 영적인 세계를 알고자 매우 갈망한다. 영적인 세계를 알고자 하고, 영적인 일에 자신이 더 크게 쓰임받기를 사모하고, 영적인 은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셋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자신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난 풍파가 찾아와도 항상 이것도 지나가리라 생각한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며,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명에 목숨을 바쳐 끝까지 충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하지 말라고 막을 수도 없다. 그것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삶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도였던 사도 바울의 삶 역시 그랬었다.

 

 

7. 세례 요한이 말했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신앙고백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요1:19~51절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고백을 한 것일까? 세례 요한이 요1:19~34에 말했던 것을 요약하면 총 5가지다. 그리고 나머지 7가지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말했던 다섯 가지 신앙고백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29절). 둘째는 '먼저 계신 이'라고 했다(30절). 셋째, 예수님을 '성령이 머물러 계시는 이'라고 했으며(33절), 넷째,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고 했다(33절).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34절). 이중에서 오늘은 그의 첫 번째 고백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예수님은 "어린양"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린양'이란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어린 양'이란 헬라어로 '암노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몇 번 안 나오는 단어다. 요한복음에서 2번, 나머지 2번 나올 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1장 29절과 이 고백을 반복해서 짧게 말하는 36절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리고는 스데반이 언급했던 바, 사도행전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데, 그때에 스데반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에 관한 예언의 말씀 중에서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이라는 인용문에서 세 번째로 언급한다(행8:32).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도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 믿는 이들이 구속받는 것이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했다(벧전1:19). 그리고는 더이상 '암노스' 어린양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혹시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요한계시록에 30회나 등장하는 '어린양'은 모두가 다 '아르니온'이라는 '어린양'을 말하는 것이지, '암노스'라고 하는 '어린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아르니온')은 모두가 다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진노'(계6:16),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7:7,9), '어린양의 아내'(계21:9), '어린양의 생명책'(계21:27), '어린양의 보좌'(계22:1,3) 등의 용어가 나온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예수께서 제2위의 하나님으로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으로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시며(계17:14), '목자'와 같은 분으로 나온다(계14:4~5). 그러니까 풀이나 뜯어 먹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어린양을 가리키는 표현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암노스'로서의 어린양은 다르다. '암노스'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자 재림주로서의 어린양('아르니온')이 아니라, 희생 제물로서 바쳐지는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어린양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요1:29).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어린양이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어린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어린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여기에서 '지고 간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로'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은 '들어올린다'의 뜻에서 더 나아가서 죄를 '없이 한다. 제거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번역은 '세상 죄를 없이 하는(제거하는) 어린양'으로 번역해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8. 예수께서는 어떻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셨는가?

  그럼, 어떻게 되어서 예수께서는 하루아침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신 것일까? 사실 요한복음 1:29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튿날". 그렇다. 그것은 그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앞 구절(요1:25~28)을 보니,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던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러므로 '이튿날'이란 표현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 다음 날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을 응시하여 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없이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렇다면 그와 예수님에게 전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은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고 선언한 것일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주었던 세례의 비밀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 전날이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으로 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말리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허락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성취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마3:15 직역)" 그러자 세례 요한이 그분에게 안수하면서 침례를 준다. 그의 머리에 안수하여 예수님의 몸을 물속에 풍덩 넣었다가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했는가? 여기에는 이러저러한 해석들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만이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3:14). 여기서 '의'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인류의 죄를 그에게서 전가받아서 당신이 대신 죄인이 되고 그 죄를 해결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죄를 전가받은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민21장의 놋뱀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것이라고 하셨다(요3:14). 이는 그분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서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다 죄없는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인류의 모든 죄는 어떻게 예수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안수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안수할 때에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그에게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속죄일 제사법에 그 과정이 들어 있다. 레위기 16장은 모든 백성이 지은 죄를 한꺼번에 용서하기 위한 속죄일 제사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에는 두 마리의 속죄제 염소가 사용된다(참고로 염소나 양은 제물에서는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로 드리고, 또 한 마리는 광야에 있는 아사셀(광야의 마귀?)을 위한 속죄제로 사용된다. 이때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는 그냥 잡아서 그 피를 성소와 회막와 분향단에 뿌리거나 발라서 속죄하면 된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는 과정이 좀 있다. 먼저 대제사장이 자기의 두 손으로 안수하여서 살아 있는 속죄제 염소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둔 후에 미리 정한 사람을 통해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불의를 짊어지고 불모지의 땅에 이르렀을 때에 정한 사람은 그 염소를 광야에 놓고 돌아온다. 그러면 목이 말라서 아사셀 염소가 죽게 된다(레16:20~22).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백성의 속죄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세례 요한의 안수가 대제사장 아론의 안수와 같은 것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들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주자라고 언급하셨다.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1:13). 그리고 세례 요한은 둘째, 선지자들 중의 선지자 곧 선지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마11:9). 왜 그런가? 그가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수고하는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그는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했다(마11:14). 이는 그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오실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 존재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실제로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의 24반차 가운데 8번째 아비야 반차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눅1:5~7,24). 그리고 그 시기에 사가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눅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는 여자가 낳은 자들 중에 제일 큰 자라고 했다(마11:11). 예수님 당시에 여자로서 세례 요한만큼 더 큰 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날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는 "보라!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오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대체 어떤 자들이며, 이들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또한 쓰임받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쓰실 수 있지만 아무나 쓰시지 않는다. 대부분은 이미 하늘에서 정해서 내려보내는 자를 쓰신다. 그래도 가룟 유다처럼 결국 천국의 보좌 자리에서 탈락하는 이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하신 자로 하여금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보다 더 성숙한 자를 내려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불러서 사용하시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것들을 결코 즐거워하지 않으며, 영적인 세계를 깊이 알고 있고, 또한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끝까지 목숨을 다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 나간다. 이런 자들이 있어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예수께서 누군지에 관하여 세례 요한의  다섯 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의 것을 살펴보았다. 그는 예수님 더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그가 하루 전날에 인류의 죄를 그에게 전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3년 반 동안 세상 죄를 짊어지신 후에 때가 되자 영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를 뒤집어 쓰신 채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실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죄가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 스스로 놋뱀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2022년 07월 26일(수)

정병진목사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아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 나라에 누군가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대체 그 길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그러한 길이 있다는 것에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는가? 그런데 지금 이 길은 누가 걷고 있는 중이며, 여기에 나는 어떻게 동참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부르심과 택하심에 그 비밀이 들어있다. 오,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 그것은 무엇인가? 2021-12-26(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우리가 주 예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려면?(벧후1:10~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nsMbgnracGg [혹은 https://tv.naver.com/v/24313002 ]

 

1. 들어가며

  오늘은 송년주일이다. 일년을 마감하는 주일이다. 일 년 열두 달 사실 중요하지 아니한 주일은 하나도 없지만 송년주일은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송년주일의 때가 되면 지난 일 년을 돌아보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일에 반성과 결산이 없다면 발전은 어렵고 더딜 것이다. 세상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재정을 결산하고 인적 자원을 결산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일도 이러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일은 더더욱 그렇제 않겠는가? 그러므로 올 해 우리의 신앙도 잘 결산해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마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당신의 종들을 불러모아 반드시 결산하는 모습을 일러주셨다(마25:19). 그렇다면 과연 그날 우리의 신앙은 어떤 기준과 잣대로 평가받게 될 것인가? 무엇이 과연 우리의 신앙을 결산하는 기준이 되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 가운데 그 심판의 기준의 하나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들려준 신앙결산의 기준에 따라 올 한 해를 잘 결산하고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사도 베드로가 신앙의 결산의 기준과 잣대로서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 보니,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신앙을 결산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이 기준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기준대로 살기만 한다면 우리도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준대로 살기만 하면 우리들도 주 예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 하면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 주의 나라 곧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오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벧후1:10-11[직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더욱[더] [단호하게] 힘써(열심을 내라).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확실하게) [계속해서] [자기자신을 위하여] [행]하라(실행하고 있기 위하여) [왜냐하면] 너희가 이것을 [실]행한즉(실행하고 있다면) 언제든지(어느때든지) [너희가]실족하지(비틀거리지,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리라(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1 [왜냐하면]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안으로) 들어감(입장함)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급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성도가 자신을 향한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열심을 품고 확실히 실행한다면 그는 이 땅에서 걸려 넘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에게 넉넉히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심판받을 때에 우리가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제시되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3. 부르심과 사명 그리고 택하심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의 경우 자신을 향한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성도들기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일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오늘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사항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이제 구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면, 그는 반드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부르심(소명)'이란 의미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어떤 특별한 직무를 맡기려고 그를 불러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에게 맡겨진 임무(직무)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그가 달려갈 길 곧 '사명(소명)'이라고 부른다(행20:24, 딤후4:7). 이처럼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특별한 직무을 맡겨 세운 자들이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역을 맡기려고 특정한 사람을 택하시며 어느날 그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자는 반드시 자기가 무엇 때문에 부름을 받았고 또한 보냄을 받았는지를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자신이 어떤 부름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는 일반 사명이란 무엇이며, 어떤 특정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별 사명이란 무엇인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공통된 부르심을 가진 자들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막16:15). 우리가 복음을 들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도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곧  자기가족에서부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친구와 이웃들에게 그리고 자기의 민족과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는 다른 민족과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특별한 사명을  주시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던 자였다. 왜냐하면 그도 일반 사명을 가진 자이지만, 그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의 나이가 34살 정도되었을 때였다. 그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오직 여호와만 하나님이 유일한 절대자라고 믿고, 사람이었던 예수님은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대낮에 그에게 나타난 것이다. 죽어서 이미 없어진 줄 알았던 그분이 살아서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지시를 하였다. 이제 더이상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을 핍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할 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 도성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아나니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신을 향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하도록 주님이 택한 그릇이라는 것이다(행9:15). 그렇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가 있있었으니 그는 '베드로'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로서 '바울'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명은 보통 어떤 개인이 받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어떤 공동체나 민족이 받는 경우도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구약시대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개인 사명자였다. 그러나 모세나 다윗같은 자는 개인적인 사명자이기도 하지만 그 사명은 그가 속해 있는 민족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신약시대로 치자면, 빌립집사의 경우는 혼자 개인적으로 사명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바울은 개인이 받은 사명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교회과 선교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와 그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붙혀준 바울선교단의 일행은 바울로 인하여 함께 부름을 받은 사명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민족 중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민족의 사명도 있는데, 그것은 메시야를 이 땅에 산출하라는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그토록 못된 짓을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도 아마 그러한 사명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5. 하나님의 부르심은 보통 어떻게 나타나게 되고 이루어지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보통 어떻게 사람을 불러 그를 들어쓰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지만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지정해서 주신 사명도 있다. 이러한 사명을 가진 자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어느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된다. 그러한 사람 중에는 하늘에서부터 그가 영혼으로 있을 때에 이미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아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들도 있으며, 이 땅에 태어난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여 그를 불러 쓰시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성경 사무엘서를 읽어본다면, 전자의 해당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바로 '다윗'이라는 사람이며,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울왕'이라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역을 위해 어떤 특정한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특정한 직임을 맡기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를 어떻게 불러내시는가?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시는 경우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경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서 직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경우는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경우다. 베드로는 육신을 갖고 계셨던 예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예이고, 바울은 부활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 직접 오셔서 불러서 그에게 직임을 맡긴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르심은 극히 드문 사례의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대에 하나나 둘이 있을까 말까 하는 경우다. 둘째, 천사를 시켜 불러내르시고 그에게 직임을 맡기는 경우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의 경우이고, 신약시대에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모세에게는 여호와의 천사(가브리엘로 추정됨)가 나타나서 그를 불러내어 사명을 주셨고, 사가랴나 마리아의 경우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사명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셋째, 꿈과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그에게 직임을 맡기기도 하신다. 넷째, 영적으로 깨끗하고 경건한 사역자들 곧 방언통역 사역자나 예언 사역자를 통해서 일을 맡기기도 하신다. 오늘날 목회자가 되신 분들은 어느날 부흥성회 때에 기도를 받았는데 예언이 나와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주의 종이 되었다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특별 사명자는 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찌감치 그러한 소명을 받아서 알게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아는 경우도 종종 있다. 

 

6. 특별 사명자가 아닌 일반 평신도의 경우는 어떻게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 세운 사명자가 아닌 일반 성도들의 경우는 어떠한 사명이 있는 것인가? 사실 사명자가 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고 소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요동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사람을 어떤 그릇으로 쓸 것인지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자신의 뜻을 따라 결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딤후2:20~21).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반문할 수는 없는 것이다(롬9:20~21). 성경을 다시 한 번 보라. 과연 하나님께서 쓰셨던 인물들 중에서 자신이 그러한 사역자가가 되겠다고 선언해서 된 자가 있는지를 말이다. 성경의 기록은 전부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을 불러내어 그를 들어쓴 것들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보라. 자기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제자가 된 경우가 있는가? 없다. 예수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불러서 쓰신 것들 뿐이다. 사도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특별한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운 사명자를 협력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구약시대로 치자면, 이는 마치 아론이나 훌이 모세를 도와서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과 같다. 신약의 경우라면 바울을 도와서 바나바, 실라, 디모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아볼로 등이 쓰임받은 것과 같은 이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 것이요, 의인으로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는 것과 같다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0:41~42).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를 돕게 된다면 그 사역자가 받을 상을 그도 함께 받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계의 법칙 중에 하나다. 그러므로 적어도 하나님께서 불러 세운 사역자를 돕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엄청난 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중들에 상당수가 '충성'의 면류관이나 '섬김'의 면류관 더 나아가서는 '겸손'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7.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아 사명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다. 그러한 일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한 자를 알아볼 수가 있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불러내어 사용하는 사역자들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특징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명자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징으로는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는 자신이 어떤 사역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러한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여러가지 경로로 그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한 사명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하여 열정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명자는 어떠한 어려운 난관에도 굴하지 않으며, 받은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 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개인의 야망과는 다른 것이다. 야망이란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주인 되어서 추진하는 열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야망과 소명은 다른 것이다. 셋째, 이러한 사명자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아무도 그를 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초자연적으로 그를 지키시키고 보호해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늘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붙혀주시고 재정까지도 붙혀주시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이 땅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주님이 불러서 세운 자들이다. 여기서 '둘'은 증인의 숫자로서 두 명인 것이지 딱 두 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마치기까지 어떤 사람도 그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계11:5). 고로 만약 그 사명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그의 사명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기 때문이다. 

 

8.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2가지 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주어지는 사명을 완수하는 자에게는 어떤 복이 주어지게 되는가?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다음과 같은 2가지 복을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첫째는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결코 실족하지 않으며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벧후1:10). 그러한 사명자는 내적이든 외부적인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거나 다른 길로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반드시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주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러한 사명자와 공동체에게 넉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벧후1:11). 오 그렇다. 믿음을 지키고 회개를 해도 천국에 들어가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이러한 종류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가기가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우리 인간의 들이 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제부터라도 개인이나 공동체에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러한 자들에게는 새 예루살렘 성에 입장하는 것이 넉넉하게 준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베드로와 바울에 의하여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또 다른 교회를 낳고 또 낳았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어떤 특정한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불러내시고 그들을 들어 사용하신다. 누구를 들어쓰시는가 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그분이 바로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특정한 사람이나 공동체를 불러서 그에게 과업을 맡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중에 작지만 동탄명성교회와 회개와천국복음연구소도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기관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지적인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늘 이 두 기관을 들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기관이나 혹은 개인사역자는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중에 어느 한 구석을 이 두 기관이 지금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보면, 정확한 것은 앞으로도 이 두 기관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 뿐이다. 구약시대 사울왕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직무에 성실하지 않았다. 그것을 오히려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버림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임을 맡은 사명자나 단체라 할지라도 혹 잘못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누군가를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다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뿐이다. 고로 사명도 일종의 '은혜'인 것이다(갈1:15). 그분의 은혜, 자격없는 자라도 들어쓰시는 그분의 은혜, 가난한 자를 들어쓰시어 부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그분의 은혜. 만약 이러한 은혜를 받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끝까지 충성한다면 그들이 하는 사역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 사역에 동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나라에 입장하되 넉넉하게 입장하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2021년 12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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