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4주동안 부르심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오늘은 부르심에 관한 말씀 중 마지막 시간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자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기록된 말씀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천국복음전파의 동역자로서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이 길 끝에는 과연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이 말씀으로 인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놀라운 혜안이 열리기를 바란다.

 

2022-05-22(주일) 주일낮부예배

제목: 나는 과연 어떤 복음전파사역자로 길이 길이 남을 것인가(딤후4:9~1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0BmAegCMty4 [ 혹은 https://tv.naver.com/v/26941129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사역자를 이 땅에 보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보내신 사역자를 돕도록 예나 지금이나 동역자들을 붙혀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의 사역자를 통하여 동역자를 찾고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해서 그냥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천국복음의 중요성을 깨닫기까지는 했으나 그것을 끝까지 붙잡지 못한 채 중간에 탈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야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소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 바울과 함께 천국복음을 전파했던 동역자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디모데후서 4장 9절에서 16절을 보면, 바울과 함께 일했던 동역자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의 미래가 나온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은 지금 어떤 사역자로 준비되고 있으며, 어떤 사역자로 쓰임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장차 어떤 사역자로 일하다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서 과연 어떤 충성된 상을 주님으로부터 받을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2. 바울은 어떤 복음사역자였는가?

  바울은 참으로 특별한 사역자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분명하게 복음전파사역자들로서 12명의 제자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는 직책을 주셨고 또한 그들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바울을 불러내서 그에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역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특별한 사역을 맡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로부터 어떤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그는 첫째로, 복음전파자로서의 사명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가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에 성령의 지시를 따라 복음을 전파하도록 특별히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행13:1~2). 특히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전편과 후편에서 똑같이 자신을 '복음전파자'라고 하였다(딤전2:7, 딤후1:11). 뿐만 아니라 그는 둘째로, 자신을 '사도'라고도 말했다(딤전2:7,딤후1:11). 왜냐하면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복음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하라고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셋째로, 율법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도 부름을 받았다(딤전2:7, 딤후1:11). 그것과 동시에 그는 또한 마지막으로 '선지자'로도 부름을 받았다. 즉 그는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현장에서 말하는 수준의 사람이었던 것이다(행13: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는 4~5가지 종류의 인도자 직분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이자 교사'다(엡4:11~12).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직책을 다 소유한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자는 대부분 이러한 4~5중직의 직분들 중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받은 자다. 즉 지교회에서 몸담고 활동하는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보통 사역자들과 달랐다. 그는 큰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의 성도만을 위한 사역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 지역에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고 또한 그 교회에서 시무할 목회자를 가르치고 양육하여 파송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3. 바울의 주변에는 어떤 동역자들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바울 주변에는 어떤 동역자들이 있었는가? 사역의 초기부터 바울에게는 복음전파를 함께 하는 사역자들이 함께 하였다. 그러다가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점차 확대하여 다른 사역자들도 배출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역자들이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이러한 사역자들을 분류해 본다면, 그거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그룹으로는 목회자적인 소임을 감당하는 그룹이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로는 에베소 교회에 파송받은 '디모데', 처음에는 고린도 교회로 파송받았지만 나중에는 그레데 교회와 달마디아 교회에서 시무하게 된 '디도', 그리고 디모데후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골로새 교회에서 파송한 '에바브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골4:10). 한편 지교회에서 목회자로서 파송받지 아니하고 바울을 도와서 일평생에 선교활동에 동참한 이들도 있으니, 그러한 사람으로는 의사인 누가, 마가가 있으며, 디모데후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리스다고 등도 있다(몬1:24). 그리고 두번째로는 평신도 그룹도 있었다. 이들은 바울이 선교하다가 만난 사람들인데,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던 성도들로서 바울의 지근거리에서 일평생 기도와 물질로 헌신하였다. 빌립보 교회의 자주장사 '루디아'나 고린도 교회의 천막만드는 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다른 분류가 나온다. 즉 바울과 함께 언제까지 동역했느냐에 따라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분류법에 따르면 디모데후서 4:9~16에 나오는 9명의 사람들은 다시 5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룹은 바울이 순교하는 그날까지 바울의 사역에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로는 디모데, 누가, 디도 같은 동역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바울의 2차전도여행 때에 만나 합류한 이후 단 한 번도 바울과 떨어지지 않고 바울을 도운 사역자가 있는데 그가 '누가'라는 사람이다. 그는 원래 의사였다. 그런데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에 북쪽에 있는 지역 곧 비두니아와 전도하러 가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 잠시 드로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눈을 치료하게 되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의사 '누가'다. 그런데 누가는 그때 바울을 만난 이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일평생 바울과 동행하며 사역을 도왔다. 이때 의사 누가는 식자층인만큼 바울의 곁에서 바울의 선교활동을 그대로 적기 시작하였고, 이전에 사도들의 선교활동도 함께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 사도행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에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신앙지도로 경건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헬라인이어서 할례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신앙의 경건성을 알아본 사도 바울이 그를 자신의 영적이 아들로 삼았다. 그래서 바울의 지도를 받았던 디모데는 에베소에 가서 목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회자인 그에게 보낸 편지들이 오늘날 목회서신으로 분류되고 있는 디모데전서와 미모데후서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그룹은 처음에는 바울선교팀과 함께 했지만 중간에 혹은 말년에 바울의 곁을 떠나간 자들도 있었다. 그러한 자들로는 '마가'와 '데마'가 있다. '마가'는 바울의 제1차전도여행 때에 바나바와 같이 출발했던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큰 고생을 해보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러다보니 선교활동을 하면서 겪게된 어려움을 보고는 곧 음식과 잠자리와 풍토병 등을 견디지 못하여 하였다. 그래서 그는 중간에 바울을 떠나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2차전도여행을 출발할 때가 되었다. 바나나는 자신의 조카였던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선교사가 함께 일하다가 자기 개인적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은 결격사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사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렇다. 이처럼 바울과 함께 사역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떨어져 나간 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 말기에 바울을 떠나간 자도 있었으니, 그는 '데마'라는 동역자였다. 딤후4:10의 말씀을 보니, 그는 이 세상(현재의 세대)를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쾌락을 부추기는 이 세상을 향하여 떠나갔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영적으로 막중한 사명을 받았는데도 그러한 사명을 저버렸다는 것을 가리키고, 천국에서 그가 받을 상이 이미 준비된 채 있었음데도 그것을 끝내 받지 못하는 길을 선택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바울의 제4차 전도여행인 로마 선교의 초기에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다는 사실이다(몬1:13~14, 골4:13~14). 그렇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자로서의 길을 선택한 자일지라도 이렇게 중간에 탈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데마와는 달리 좀전에 나왔던 '마가'는 영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 후 마가가 사울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딤후4:11). 그가 삼촌 바나바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한 이후 그의 행적이 잘 모른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베드로의 편지에 보니, 베드로에게 마가 요한은 그의 영적인 아들이 되어 있었다. 그가 회개하고 베드로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베드로를 통해 들었던 예수님의 행적들이 기록으로 남은 마가복음이 되었다. 그런데 바울이 쓴 옥중서신을 보면 마가가 옥중에까지 찾아온 것으로 나온다(골4:10).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울이 그를 동역자라고 부른다(몬1:24). 그는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신실한 주의 일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번째 편지를 보낼 때에는 그가 자신의 사역에 매우 유익하니 올 때에 그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딤후4:10). 그렇다. 사람이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영원히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마가 요한처럼 다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그룹은 바울 선교사역의 중요성은 깨달았으나 본인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 탓에 목회자나 선교사로서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선교를 기도와 물질로 끝까지 후원해썬 동역자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로는 아까도 언급했지만 빌립보 교회의 자주장사 '루디아'가 있고, 고린도 교회의 천막 만드는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있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이었는데, 로마 4대황제 글라디우디오가 유대인추방령을 내렸을 때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때 로마의 귀족이었던 브리스길라도 남편 아굴라를 따라 고린도로 이사를 가서 일하다가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금새 바울이 어떤 사명자인 것을 알아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때부터 바울을 돕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가 끝나는 그날까지 기도와 선교비를 후원했던 사람이 되었다. 어찌나 고마웠는지 바울은 이들 부부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그리고 넷째 그룹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에게서 목회자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훈련을 받아 지교회에 파송받아 시무한 동역자들도 있다. 그러한 자들로서는 '디도'가 있으며, '그레스게', '두기고', '에바브라', '빌레몬' 등도 있다. 이들이 바울 곁을 떠나간 것은 이들이 자원해서 떠나간 것도 아니며, 세상이 좋아 떠나간 것도 아니다. 이들은 바울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평생 사역지를 찾아간 것이다. 마지막 그룹으로 다섯째 그룹이 있는데, 이 그룹은 있어서는 안 될 그룹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목회하였던 교회의 성도였으나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계속해서 흠을 잡고 말로 공격하는 자도 있었다. 이러한 자들로는 구리 세공업자였던 '알렉산더'와 '후메내오'가 있다. 이들은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말로서 진리를 전하는 바울을 대적하고 공격하였기 때문이다(딤전1:19~20, 딤후2:19~20). 이런 자들은 한 마디로 진리의 원수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했다(딤후4:14).

 

4. 바울의 동역자들은 왜 각각 다른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었는가?

  그렇다. 바울이 선교하면서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함께 일하게 되었던 동역자들 중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바울을 버리고 떠나 세상으로 돌아간 자도 있었고,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바울과 함께 한 자들도 있었다. 한 편으로는 바울을 대적하고 해를 끼친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고생스러워 바울의 곁을 떠나갔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 충성스런 일꾼이 된 자도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비록 평신도였지만 죽는 그날까지 바울을 도와 기도와 물질로 후원했던 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천국과 천국에서 받을 상을 얼마나 소망하고 달려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일신상의 안녕이나 세상이 주는 기쁨도 같이 맛보며 살려고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이 땅의 것과 자기자신의 명예와 돈과 같은 것을 얻고자 하는 자는 이 천국복음 전파사역에 동참하여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뭐든지 욕심은 내지만 자신의 삶에 어려움과 역경 핍박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는 금새 돌아서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간절한 소망에는 천국이 들어있지 않으며, 이들의 간절한 소망에는 그가 천국에서 받을 상이 들어있지 않는 것이다. 

 

5. 나오며

  사실 천국복음 전파사역은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파사역에 주께서 쓰시려고 준비된 사역자나 또한는 그러한 사역을 돕도록 안배를 받은 자에게 이러한 기회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는 거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누구든지 한 번 쯤은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잘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만한 끈기와 인내력이 있어야 하며, 주와 복음을 위해서는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만만 굳은 의지와 투지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의 영의 나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영의 나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금새 힘들어하고 금새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보면, 성숙한 나이로서 이 땅에 파송을 받아 사역하는 사역자들이 더러 있다. 그런 자들은 아무나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누가 그를 건드린다고 하여도 그런 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이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사역자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붙여준 동역자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하고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누가나 디모데나 디도처럼 말이다. 주님의 복음전파사역자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참으로 천국에서 복된 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소망에 대하여 이제 서서히 눈을 뜨라. 그리고 신앙생활의 목적은 바로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딤후4:18).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을 소망하고 달려가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육신의 삶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벗는 그 순간부터 진짜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날이 우리에게서 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그날이 가까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동역자로서 복음전파사역에 동참하고 있는가? 이제는 나의 미래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정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의 선택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함께 하길 빌며, 그 길에 선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이 계속 함께 하기를 빈다. 

 

2022년 05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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