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0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시다(01)(계1:1~8)_2022-04-26(화)

https://youtu.be/DmISlHynFz0  [혹은 https://tv.naver.com/v/26518040 ]

 

1. 우리는 왜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는 2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하고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때 회심으로서 회개를 하고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모른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과 끝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상은 사탄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은 지혜와 능력이 출중하여 인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상대할 때에는 그것들보다 더 뛰어난 지혜와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 그분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며 섭리하시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2. 지상을 거니셨던 예수님 곧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공관복음에 나온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께서 누구신가?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만을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님은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 정도일 뿐이다. 좀더 말하자면 기적을 행하던 선지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에 그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을 어떻게 믿었을까? 처음에 그들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는 뛰어난 선생님(랍비)이나 혹은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민족을 구원해 주신 분, 그리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병든 자를 치료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분의 공생애 기간이 다 끝날 무렵에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훌륭한 선생님이나 선지자 정도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제자들의 신앙 고백 가운데 매우 중요하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서 예수님을 "당신은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은 매우 탁월한 고백으로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그분의 신분에 대한 계시적인 고백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구약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엄청나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에게는 최소 2가지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권세가 주어지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천국 열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마16:18~19). 이 중에서 '음부의 권세'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음부의 문들'이다. 그럼, 음부는 무엇인가? 사람이 죄값으로 인하여 죽게 될 때에 죽은 영혼을 빨아 당기는 세력 있는 문들이다. 이 문들은 지구의 곳곳에 있기에 복수로 나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육체를 벗을 때면 사망이 죽은 사람의 영혼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의 영혼을 집어 삼키는데,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은 그 권세가 더 이상 그 영혼을 이기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계2:11). 그렇다면 '둘째 사망의 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곧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는 것'을 가리킨다(계21:8). 그러므로 누군가가 예수님을 진실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면 그의 영혼은 최소한 둘째 사망의 해 곧 불못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실제로 천국에 가 보면 천국에 진짜 들어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성밖 곧 새 예루살렘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성밖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불못에 던져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가 보면 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천국 열쇠를 받는 복을 받게 된다. 자신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남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4. 요한계시록에서 계시하고 있는 예수님 곧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누구신가?

  요한계시록에서 계시하고 있는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지상을 거니셨던 바로 그 예수님 수준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신 것이다. 그분은 죽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계3:21). 다시 말해 그분은 '보좌에 앉아 계신 이'인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그분이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천국에 올라가셔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때부터 그분은 주 하나님이신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본래부터 주 하나님이셨다. 다만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해 육체를 입고 오셔서 목수로 30년 동안 사시고 3년 반 동안 공생애를 사실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주 하나님이셨다. 다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뿐이다. 그럼, 언제 그분이 주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분의 부활 사건이다. 그분이 죽고 난 이후에 그분을 믿고 따르던 제자부터 시작하여 그분을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분이 진짜 누군지를 잘 몰랐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정도로 생각했다(눅24:19). 만약 제자들이 진짜로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에 다 도망갈 리가 없었을 것이요, 풀이 죽어 마가 다락방에 숨어 지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 사건 이후에 그분이 '주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왜냐하면 문을 닫아 놓았는데 그분이 그냥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또한 분명 그분은 죽고 무덤에 묻히셨었는데 살아서 다시 돌아오셨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절대 다시 못 오는데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께서 사람이셨지만 사람만이 아니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중요하고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이 자신이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지만, 더욱이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그분이 주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40일 동안 그분을 여러 번 뵈온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마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도하였고 오순절날에 성령을 받게 되자 그때부터 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채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5.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최초의 고백은 누가 고백한 것이었으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최초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디두모(쌍둥이)'라 불리는 도마였다. 도마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거기에 있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그 사실을 믿지를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흐르자 주님께서 일부러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그때도 역시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주님이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빌었다. 그때였다. 주님께서는 일부러 의심 많은 도마에게 가시더니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그러자 즉시 도마가 대답하였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나의 그 주님이시요 그리고 나의 그 하나님이십니다(혹은 '나의 유일한 주님이시요 그리고 나의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음)"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나의'라는 말을 뺀다면, 그분은 '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것도 둘 다 정관사가 붙어 있다.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The my Lord and The my God)". 참고로, 요한복음에서 '주'라는 호칭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쓰이며,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주'라는 용어 앞에 정관사('호')가 붙지 않지만, 부활 후에는 '주'라는 용어 앞에 정관사('호')가 붙는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그분이 유일한 주가 되시며 유일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오직 한 분 하나님에게 '주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한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으로 22장에 가서 '주 하나님'(1:8, 4:8,11, 11:17, 15:3, 16:7, 18:8, 19:6, 21:22, 22:5,6)이라는 용어를 '주 예수'(계22:20,21)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예수님이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 

 

2022년 04월 26일(화)

정병진목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신앙고백의 대부분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일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혹시 마르다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들어보았는가? 결론적으로 그녀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신앙고백은 그녀로 하여금 예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라는 것을 현장에게 직접 체험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그날 주님에 대해 어떤 신앙고백을 한 것인가?

2021-04-0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생명과 부활이 주어지는 신앙고백은 어떤 고백인가(요11:21~2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Zerz5Rl2xY [혹은 https://tv.naver.com/v/19380638 ]

 

1. 들어가며

  회개에는 크게 두 방면이 있다. 하나는 구원을 얻게하는 회개의 방면이 있고, 또 하나의 저주를 없애주는 회개의 방면이 있다. 그런데 저주를 없애는 회개에도 두 방면이 있음을 최근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둘 다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그 방법이기는 하나, 하나는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할 때 주어지는 것이고(출20:5), 또 하나는 조상들 중에 남을 억울하게 하거나 죽인 일을 회개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첫번째는 십계명 가운데 주셨던 말씀이고(출20:5),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과 세운 언약 중에 주신 말씀이다(창9:5~6).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웠던 언약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과 맺은 언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한 골자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죄값을 그 사람에게서 묻겠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가기 전까지는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만약 그것이 짐승이라면 그 짐승에게 보복할 것이며,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보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얻기를 바라고 계시는데, 만약 누군가가 어떤 다른 사람을 죽여버리게 된다면 그에게는 더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어지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죽음의 노정에 들어선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구원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주시기를 원하시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한 사람만 살려주시기를 원하시는가?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와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사람게 생명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우리가 과연 어떤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마르다 앞에 당면해 있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마르다는 베다니의 사람으로서, 마리아의 언니요 나사로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의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그러자 마르다가 사람을 급히 보내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거기에 도착하실 때에는 이미 장례를 마치고 마무리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이미 죽고 무덤에 묻힌지 벌써 4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오신 예수님이 오신자를 말을 듣고는 마중나가서 그분 앞에서 아쉬움을 토로하시 시작했다. 주님께서 조금이라도 일찍 오셨더라면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푸념섞인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사실 누군가가 병들었다고 한다면 고쳐주실 수 있겠지만 이미 죽어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말이다. 참으로 죽음은 모든 희망을 앗아가버리는 최고의 악한 능력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누군지를 그에게 들려주신다. 그것이 바로 요11:25~26에 나오는 말씀이다. 

요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3.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르다가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닌가? 

요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러한 신앙고백은 꼭 마르다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이미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고백한 신앙고백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다른가? 우선,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가짓수가 다르다. 베으로는 2가지로 신앙고백했고, 마르다는 3가지로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것이었다면,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금] 세상 안으로 오고 계시는 이이십니다"라는 것다. 그런데 한글성경만을 보면, 마르다의 신앙고백 역시 2가지 뿐이라고 읽힌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그녀의 신앙고백은 정확히 세 가지인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정관사가 3개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떠했는지 헬라어 원문성경으로 살펴보자. 

요11:27...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ὁ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ρχόμενος.

  요11:27에 의하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세 가지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You are the Christ)"이고, 둘째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σὺ εἶ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You are the Son of God)"이며, 셋째, "당신은 세상 안으로 지금 오고 계시는 이이십니다(σὺ εἶ ὁ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ρχόμενος.)(You are the who is coming into the world)"이기 때문이다. 앞의 2가지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만 마르다의 신앙고백에는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하나님을 수식하는 용어 "살아계신"이라는 말만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핵심사항은 똑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마르다는 베드로가 하지 않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그때 추가로 하였다. 그것은 "당신은 세상 안으로 지금도 [들어]오고 계시는 이"이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마르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에게는 붙힐 수 없는 고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세상 밖에 있든지, 아니면 세상 안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간과 공간 너머에 계시는 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두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자기들의 구원자나 하나님아들 혹은 하나님으로 믿지 아니하는가?
  그렇다면 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라는 고백을 했던 것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은 왜 지금도 예수님을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으로 믿지 않은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선지자들 중의 하나 정도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5~6가지 이유 정도가 있는데, 그 중에 핵심은 딱 2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한 분이지 절대 두 분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둘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기독교인들은 신성모독자다. 하나님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둘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은 오직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에게 또한 아들이 있는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다신론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은 사람은 절대 하나님(신적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찌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그들은 반문한다. 그러나 실로 그들은 성경을 사실 그대로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7:14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장차 처녀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오시는 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사야 9:6의 말씀을 통하여는, 장차 아기이자 아들로 태어나시게 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선지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아왔다. 지금도 그들은 메시야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들 즉 이사야 9장과 53장같은 말씀을 소상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슬쩍 넘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대로 가르쳐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비록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직접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보고 그분이 누군지를 알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님을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5. 마르다의 신앙고백의 의의는 어떠한 것인가?
  그렇다면, 마르다가 말한 세번째의 신앙고백 곧 "당신은 세상 속으로 지금도 들어오고 있는 이"라는 고백은 어떤 의의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르다는 예수께서 당신을 자기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날 직접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베드로도 결코 고백하지 못했던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그렇게 고백하게 해주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그녀의 신앙고백은 어떤 의의를 가진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서 이제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끌어올리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시간과 공간 밖에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시면서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은 과거에 있든지 아니면 현재에 있든지 아니면 미래에 있든지 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도 역사속으로 들어오시면서 계신 이라고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님을 "호 에르코메노스(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살아서 역하시는 이, 지금도 하나님으로서 나 자신 곁에 오셔서 일하시는 이, 영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지금 내 곁에 오셔서 나를 만나주시는 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이미 하나님으로 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누군지에 관하여 스스로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마르다의 신앙고백이 하나나님의 자기선언 속에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요한계시록 1:8의 말씀이다.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그렇다. 주 하나님(여호와 엘로힘)께서는 계1:8의 말씀처럼 자기를 5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둘째 이제 있는 이다. 셋째, 전에도 있었고 아직도 있으며 계속해서 있는 이다. 넷째,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다. 그리고 다섯째, 전능한 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문을 직역해놓고보니, 마르다의 신앙고백에 등장하는 일정 부분이 하나님의 자기선언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오고 계시시는 이(호 에르코네노스)"라는 고백이다. 우리 한글성경에는 "장차 올 자"라고 번역해놓았지만, 헬라어원문을 보면, 동사 현재 분사 능동태 구문으로서,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날 고백한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고백한 신앙고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그때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분은 역사속으로 들어오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예수님을 구원자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분에서, 하나님으로 끌어올린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기적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놀라운 신앙고백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놀라운 일을 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지 나흘씩이나 된 나사로를 살아나오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날 예수께서는 왜 마르다에게 오셔서 먼저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소개하신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직 끝는 것은 아니니, 네 오빠가 죽은 상태에 있다고 결코 절망하지는 말거라" 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있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의 문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다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이가 그날 그 자리에 오셨다. 그런데 그분이 그날 누군가를 다시 살려준다면 그는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날, 나를 믿고 있는 자는 죽어도 장차 다시 살겠지만 무릇 살아있고 그리고 나를 믿고 있는 자는 그 시대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나사로가 죽을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탄마귀가 강제로 그를 죽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를 죽도록 허락한 일이 없는데 누가 감히 그를 죽일 수가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이다. 도로 그를 원래의 자리에 갖다 놓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그분만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그날 마르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정말 놀라운 신앙고백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일하시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현재 속에서 일하시면서 기적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직접 우리 눈으로 보기는 어렵다. 음부의 문들(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비로소 죽을 때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다르다. 그 고백은 이제 시간의 역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사로가 세마포에 의해 동동 감긴 채 통통하고 뛰면서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르다의 신앙고백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현재의 시간 속으로 끌어당길 수가 있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하나님은 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과거에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던 분으로 끝나버린 하나님인가? 아니면 앞으로 우리를 음부의 권세로부터 이기게 해 주실 미래의 하나님으로 알고 그대로 끌려가고 있는 것인가? 물론 우리 주 하나님은 과거에서 역사하셨고 미래에도 ㅇ역사하실 하나님이시기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그분을 또한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다가 단 하나의 신앙고백을 더함으로써 말이다. 그 고백은 "당신은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이십니다."라고 고백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 오셔서 바로 우리 눈 앞에 계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와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그것은 오늘도 내가 그분을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믿을 때에 역사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여러분과 저에게 이러한 큰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한다. 
 
2021년 04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귀신은 영물이다.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가 귀신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나이는 적어도 6천살은 넘었다.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사람의 약점도 잘 알고 있고 근성도 잘 알고 있어서,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죄를 짓게 만들고 우리 속에 거하려 한다. 그래서 지옥으로 끌고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귀신들을 우리 몸 안에 그냥 두어서는 절대 아니 된다. 쫓아내버려야 한다. 그럼, 그놈들은 어떻게 해야 확실히 쫓아버릴 수 있는가? 여기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소극적인 방법이요 또 하나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우리가 가진 믿음 특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인지 새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0-02-14(금) 금요기도회
제목: 귀신들이 떨면서 떠나가게 만드는 올바른 신앙고백은 무엇인가?(약2:19)
https://youtu.be/khUyNglzkzE


1. 들어가며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왔지만 쫓겨나가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귀신이 우리 몸 속에 들어왔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어 상관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 속에 들어오려고 하는 귀신이란 대체 어떤 존재이며, 우리는 귀신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될 일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대로 두어도 되겠지만, 귀신을 쫓아내라고 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귀신을 좇아내야 한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는데도 안 쫓겨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그 놈을 제압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귀신을 쫓아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말씀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 문제해결에 대한 소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사실 귀신축사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지금 얼마나 적극적인 방식을 취해왔는지를 점검해보고, 모든 귀신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귀신은 어떤 존재이며 귀신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냥 두어도 되는 것인가?

  귀신은 죽은 조상이 아니다.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다(계16:13).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날 때(눅10:18), 천사들이 그의 편에 섬에 따라 같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귀신이 되었다(계12:7~9, 눅10:18~19).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사탄을 자신의 왕으로 섬기고 있으며(마12:24,26), 귀신들은 그의 부하들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마귀가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도록 했기에 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빼앗기고 말았으며(계1:17~18), 지금까지 음부 속에 갇혀 지내고 있다(천년왕국이 끝날 무렵에 잠깐 내보낼 줄 것이다). 그렇지만 사탄마귀는 자기의 부하들에게 자신이 가진 권세와 능력을 주어서, 지금도 음부의 문들(마16:18)을 통해 지구로 올려보내어, 일을 행하게 하고 있다.

  그럼, 사탄마귀와 귀신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이다(요10:10).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으며, 12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셨고(마10:1, 눅9:1), 이어서 70명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명령하셨다(눅10:1,17).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막16:17~18). 왜냐하면 귀신은 백해무익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방햇꾼이며,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3. 귀신이 내 안에서 완전히 쫓겨나가게 하려면 어떻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귀신은 어떻게 되어서 사람 속에까지 들어오게 되는가? 그것은 어찌되었든 귀신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 속에 들어오실 때 막무가내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서 우리가 들어오도록 허락할 때에 비로소 들어오신다(계3:20). 그런데 하물며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올 때 무턱대고 들어오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들이 우리 사람들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 그것이 충족될 때 들어오는 것이다. 그럼, 언제 귀신이 들어오는 조건이 성립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다(요일3:8). 요일3: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고 했다. 그럼, 죄란 무엇인가? 죄는 율법말씀을 어긴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다(고전15:56). 그러므로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능력으로 역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B.C.1446년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그러므로 귀신들도 누군가 율법이 있기 전에는 결코 사람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율법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도덕법(십계명)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법은 예수께서 한층 더 강화시켰으니,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고, 마음으로 미워하고 욕하게 되면 살인죄가 성립된다고 하셨다(마5:21~22, 27~28). 그러므로 우리에게 귀신이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면 나는 십계명을 어긴 것이 없나를 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십계명 중에서도 특히 제2계명 즉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면 그 죄값은 3~4대까지 내려간다고 했다(출20:5). 그러므로 그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잘 믿으면 상관없겠으나, 예수님을 믿는둥 마는둥 하면서 죄짓고 살면 영락없이 귀신들이 그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귀신이 그 후손에게 들어가서 거주한다. 그러면 귀신은 저주받은 영이니 저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십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해야 한다. 십계명을 어겼는데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때에 귀신들이 합법적으로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 안에 들어온 귀신을 쫓아내려면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여서 내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파리가 나쁘다가 동파리(귀신)만을 맨날 쫓아내려고 열심내지 말고, 우리 안에 들어있는 더럽고 냄새나는 똥 자체(죄)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날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조상이 지은 죄까지도 대신 회개하기도 하는데, 귀신이 쫓겨나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귀신이 쫓겨나가지 않는 것에 대한 두번째 문제 해결의 열쇠다. 마17장에 보면,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가 나온다(이때 아이의 의지가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귀신이 아이로부터 나가지 않았던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산아래 있었던 9명의 제자들은 그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 산위에서 예수께서 3명의 제자들과 함께 내려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의 아버지를 향하여 엄히 꾸짖고 책망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마17:17)"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없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비로소 예수께서는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아내준다. 나중에 제자들이 와서 조용히 물었다.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했나이까?" 그러자 주님은 "너희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마17:20)"고 하셨다. 그 아버지는 믿음이 없었고, 제자들은 믿음이 작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귀신축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내게서 귀신이 잘 안 나가는 것은 내게 믿음이 작거나 없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4. 귀신이 두려워서 떨고 떠나가게 하기 위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귀신이 떨고 나갈 수 있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가? 오늘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였던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행]하는도다. 귀신들도 [역시] 믿고 떠느니라(약2:17)". 귀신들이 떠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을 때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또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들음에서(으로부터)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고로 믿음이 생겨지려면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리스도의 말씀(레마)을 들을 때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내 마음에 레마(딱 꽃히는 말씀)가 될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귀신들린 사람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예수님이 누군지에 관하여 들었던 말씀이 적었거나 없었다는 것이다. 대체 예수님은 누구신가? 귀신들이 두려워서 떨고 나가게 하기 위한 믿음이란 대체 어떤 믿음인가? 그것에 대해 오늘 주의 동생 야고보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귀신축하에 매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 분 하나님을 아는 성도들을 보고 귀신들도 떨기 때문이다(약2:19).

 

5.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이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조금은 생소하기는 것이다. 단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계시다는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귀신들이 떨 수밖에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약2:19)이 오늘날에 정말 요청된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가?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늘 이야기하였다(특히 요한복음을 읽어보라). 그러므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다. 맞다. 틀린 말이 아니다. 더불어 예수께서 인성으로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태어나셨기에,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도 되신다. 어찌되었든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셔서 이 땅에 들어오셨고, 동정녀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태어나셨으니,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반응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정도로는 생각했으나,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여호와증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피조된 하나님의 아들(피조물) 내지는 미가엘 천사장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아니 이단적인 주장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믿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딤전3:16에서 그분(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도 없도다. 그(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나난 바 되시고...(딤전3:16)" 그리고 사도요한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고 말했다(요1:14). 그렇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기 전에 이미 하늘에서 존재하시던 분이시다. 다시 말해, 동정녀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될 때 생겨난 분이 아니다. 그분은 피조물이 아닌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하늘로부터 오셔서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이다((요8:42,13:3). 그러므로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피조물의 형상을 잠시 빌려쓴 것뿐이다. 그것을 조성해준 자가 마리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 전에 어디에 계셨으며 누구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으로 계셨다는 것이다(요5:58).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나는 나니라"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나니라"라는 말씀은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이 누군지를 가르쳐주실 때에 처음으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자기선언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 그렇다. 이는 예수께서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구약성경을 통들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이 누군지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많지는 않다. 남에 의해서 불려진 이름은 많지만 당신 자신이 자기가 누군지를 소개해주는 것은 많지 않았던 것이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기칭호는 딱 2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출애굽기3:14의 말씀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자기선언이며, 또 하나는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으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는 자기선언이다(사41:4, 44:6, 48:12).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두 가지 선언만큼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말씀하실 때에 사용한 아주 독특한 자기선언이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자기선언을 고스란히 자기에게도 적용하여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첫째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는 선언은 요한복음에 보면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헬라어원문참조)(요8:24,28,58). "만일 내가 ~인 줄 믿지 아니하면(요8:24)",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에 내가~인줄 알고(요8:28)",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나는 ~이니라(요8:58)" 그리고 둘째로,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하신 후에 사도요한에게 주신 계시록의 말씀에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다(계1:17, 2:8, 22:13). 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누군지를 소개하는 자기선언에 있어서 구약의 여호와께서나 신약의 예수님이 다 똑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며, 신약시대에는 예수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와 "예수"라는 이름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그토록 많이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라는 이름이 신약성경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임마누엘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마1:23).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고로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사실은 한 분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분은 주 하나님이시요, 전능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경험해 본 도마는 예수님 앞에서 "당신은 나의 주이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사도들도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줄 잘 몰랐다. 그분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자신을 아들이라고 하시니까,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로서 오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더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무소부재하신 상태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셨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깨닫고 하나님으로 섬기게 된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자기를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이 땅에 오셨으며,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주셨는데(빌2:6~8), 알고 보니 그분이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기이자 아들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사9:6). 그분은 죽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3:21, 7:17, 20:11, 21:5~6). 그분이 하나님이시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한 개 뿐이지만 그분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단수)"라고 불린다. 그분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오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이면서 동시에 어린양의 보좌인 것이다(계22:1,3). 고로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볼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따로 만나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동시에 세 개의 보좌에 세 분이 앉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는 삼신론자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한 분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삼위로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동시에 삼위로 존재하시나, 여전히 한 분이신 하나님 그분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주의 동생 야고보는 귀신은 어떤 경우에 떤다고 말했는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알고 떤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셨으나 사실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분이 곧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이후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성령을 보내주셨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또다른 표현으로 우리 안에 계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고로 우리가 성전삼고 거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죄도 없는데 우리 몸 안에 더러운 영이 꼽싸리끼려고 한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레벨이 안 맞다. 크기가 너무나 많이 차이난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안에 계신 이(예수)가 세상에 있는 자(마귀)보다 크심이라(요일4:4)",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예수)가 그(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성도들)를 지키시매, 악한 자(사탄마귀)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그렇다. 우리 안에 계신 이(예수)는 한 분 하나님으로서, 주 하나님이시요, 전능자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요,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시다. 그런데 어찌 감히 귀신이라는 것이 우리 몸에 하나님과 짝하여 거주하려고 한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믿으면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래야 귀신이 떨면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고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지은 죄도 회개해야겠지만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을 공부하고 믿어서 전능자의 이름으로 꾸짖어 쫓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2020년 2월 14일(금)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교회는 과연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튼튼할까?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마16:16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은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교회는 "이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16:18). 그렇다면,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그 반석이란 무엇일까? 단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가 세워져야 할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해 구약시대에 나타난 예표를 찾아가 보려고 한다. 거기에는 숨겨진 또 하나의 교회의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2. 우리 주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며, 그 교회는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일까?

  우선 우리가 알 것은 주님은 과연 어떤 교회를 세우고자 했으며, 그 교회가 되려면 무엇이 교회의 기초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는 "내 교회(마16:18)"을 세우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사람의 교회가 되어서는 아니 되고 꼭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세우시고 자하는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였을까? 그것은 음부의 권세(문들)가 이기지 못하는 바로 그 교회였다. 다시 말해,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순간 음부의 문들도 어쩔 수 없는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잘 하는 자들 중에서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 이게 웬 일인가?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 중에서도 음부에 떨어지는 자들이 생기는 것일까? 거기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구약의 인물 중에서 한 사람이 찾아내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가 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숨겨진 교회의 기초는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3. 두 번의 범죄를 통해 다윗이 알아낸 놀라운 영적 비밀은 무엇이었는가?

  다윗은 크게 두 번 죄를 지었다. 하나는 왕의 초반(B.C.994)에 지었던 간음죄와 살인죄였다(삼하11장). 그리고 또 하나는 그의 말년에 있었던 인구조사를 한 죄다(삼하24장). 첫번째 죄들을 통해서 다윗은 율법으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것이었다(삼하12:13). 그런데 다윗이 또 한 번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말년에 인구조사를 명령했던 죄다(B.C.976). 왜냐하면 사실 그의 명령은 인구를 조사하려는 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움에 나갈 만한 군사들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악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않고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다윗은 또 금방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음을 자백하기에 이른다(대하21:8). 하지만 그것에 따른 징계는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갓 선견자를 보내어서, 그로 하여금 3년간 기근을 겪을 것인지, 석달동안 전쟁에서 쫓겨다닐 것인지, 3일동안 전염병을 겪을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백성이 고통당하게 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곧장 전염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루만에 무려 7만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왕궁에서 보니 그 전염병을 일으키고 있는 천사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서 있지 아니한가? 다윗은 굵은 베옷을 입었고 즉시 장로들과 더불어 그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려 탄원하는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된다. 죄를 지은 것은 자기이니만큼, 백성에게는 그 징계를 거두어주십사고 간청하였고 정녕 재앙을 내리시려면 자기와 자기 아버지의 집을 치라고 요청을 드린 것이다(대상21:17).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모습을 보셨다. 그리고는 다윗으로 하여금 재앙을 받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회개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그 터를 전부 사들이고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서 응답해주셨다. 그러자 곧장 재앙은 떠나갔고, 그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다. 그러자 다윗은 그동안 약 25년간 기브온에서 드렸던 제사를  그쳐버리고, 오르난의 타작마장에서 제사를 드리기로 결정하게 된다.


4.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교회의 기초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역대하 기자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얽힌 놀라운 비밀 하나를 알려준다. 그것은 역대하3:1에 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예비한 곳이라(대하3:1)" 다윗이 회개의 제사를 드렸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단순한 타작마당이 아니었다. 그곳은 전에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쳤던 바로 그 장소였다(창22장). 이미 천년전에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것이다. 그때 제물은 결국에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숫양이었다. 그 숫양은 훗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번제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한 양 곧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제사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똑같은 장소에서 다윗도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회개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것은 전염병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위한 기도를 응답받기 위함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의 번제제사와 다윗의 회개의 제사가 한 장소에서 만나서, 온전한 성전의 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 나타난 성전이 곧 신약의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이미 그러한 계시를 우리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이다(고전3:16). 다시 말해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신약의 교회의 예표였던 것이다. 고로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지에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리아산 곧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드린 제사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번제제사와 다윗의 회개의 제사가 합쳐진 개념인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해주시는 메시야에 대한 믿음의 제사를 그곳에서 드렸고, 다윗은 회개의 제사를 그곳에서 드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메시야에 대한 믿음이 곧 교회의 공개된 기초라고 한다면, 다윗이 회개의 제사를 드린 것은 곧 회개가 교회에 숨겨진 또 하나의 기초인 것을 알 수 있다.


5. 교회의 2가지 기초는 무엇인가?

  오늘날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려면 우리도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바른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준비한 독생자이자 어린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신약의 베드로는 "당신은 그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는 제자 도마가 "당신은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도 음부의 문들을 이기는 교회를 세우려면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준비한 어린양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일찌기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를 드리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사람이 음부의 문들을 완전히 이기고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곧장 또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했다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의 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철저하고도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겸손하고도 철저한 회개의 제사가 자신의 신앙고백의 뒤에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우리가 준비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회개하는 겸손하고도 간절한 마음이다. 이것을 다윗이 실천함으로써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음부의 문들이 해할 수 없는 성전을 세우게 허락하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과 아울러 철저하고도 겸손한 회개가 함께 하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알게 하신 것이다.


6. 나오며

  오늘날 당신은 과연 어떤 교회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단순히 하나님이 준비해주시는 어린양에 대한 믿음이 교회의 기초의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거기에다가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그것은 철저하고도 겸손한 회개인 것이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할 때 이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입술로만 회개한다고 말하지 말고, 다윗처럼 좀 더 진정성이 있는 회개를 하라. 그래야만이 음부가 건드리지 못하는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도 변함없는 것이어야 하겠지만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라. 우리는 이미 공개된 교회의 기초에다가 더불어 숨겨진 교회의 기초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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