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5) 사마리아의 성령세례와 가짜 회심자 시몬을 위한 사도의 처방(행8:14~25)_2022-09-01(목)

https://youtu.be/bLizjW1ZaV8  [혹은 https://tv.naver.com/v/28957528 ]

 

1.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관계였는가?

  '유대인들'이란 남북분열 왕국시 남유다의 2개지파(유다와 베냐민)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의 10개지파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상극이었다. 왜냐하면 B.C.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때 앗수르가 혼혈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만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북이스라엘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긴다. 그렇지만 신앙과 혈통의 정통성을 잃어버린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는 남유다 사람들이 그들을 좋게 보아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남유다도 역시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지만 그들은 신앙의 지조와 혈통적인 지조를 지켰으며, 포로된 지 70년만에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유다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개 취급하듯 하였으며, 북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그렇게 자신을 대하는 남유다인들을 좋아하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남유다인이었던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할 때에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것은 행로에 곤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했을 때에,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요4:9).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 여자가 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상종하지(서로 교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유다의 유대인들이 북쪽 갈릴리로 왔다 갔다 할 때에는 대부분 직선 거리였던 사마리아를 버리고, 다들 요단강 동편길을 돌아서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 둘 사이를 이제는 형제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 

 

2. 사마리아 교회가 사도들이 오기전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런데 사마리아 지역에도 이렇듯 복음전파가 있었다.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거대한 핍박 때문에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빌립[집사]가 사마리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말을 듣고 그리고 그가 행하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에서도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파송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곳에 내려간다. 하지만 가서 보니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사마리아의 성도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한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아예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성령 자체는 받았으나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인가?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것이 불분명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성경의 원문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실제가 어떠한가도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성령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사도행전 8장의 기록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16절에 나온다. 이 말씀을 개역성경으로 보면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은 것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와 다르다.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 아직 그들 중에 아무 위에도 성령이 [그들] 위에 내려온 채로 있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은 채 있어오고 있었다"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마리아 성도들은 그들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곧 성령의 은사)을 받지 못한 것일 뿐 성령자체를 받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들이 내려가서 그들에게 성령세례를 받게 하심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  둘 사이의 소원한 관계를 형제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3.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과 성령세례는 받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마리아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빌립[집사]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자신의 구주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2절). 또한 그들은 빌립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왕국)에 관해서도 들었었다(12절). 그러므로 그들이 들었고 믿었던 복음은 완전한 복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언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시는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회개하고 믿을 때에 성령이 동시에 들어온다고 말한다(행2:38, 10:44). 하지만 어떤 이는 믿고 난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성령께서 들어온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보면 둘 다의 경우가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믿을 때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갈 때 그 사람이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가리켜 '회심'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그러므로 믿는 것과 회심은 같은 시간대에 일어날 수도 있고 다른 시간대에 일어날 수도 있다. 살펴 보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1년 안에는 다 '회심'을 경험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성도들이 믿을 때에 성령세례를 다 받았을까를 질문한다면, 그들은 믿을 때에 대부분 성령자체는 받기는 했지만 위에 부어지는 성령세례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렇다. 사마리아의 세례받은 성도들 중에는 아직 회심이 안 된 자들도 섞여 있었으나 대부분은 성령자체는 다 받은 것이다(고전12:3).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부어지는 성령세례는 아직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4. 시몬은 과연 회심한 자였는가?

  그렇다면 사마리아 교회의 세례받은 성도들 가운데 아직 회심을 경험하지 않는 자는 대체 누구였는가? 우리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바로 마술사 '시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을 믿었고 그리고 세례를 받았던 목적은 처음부터 잘못 되었었고 아주 나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도 빌립 집사처럼 귀신도 쫓아내고 중풍병자나 못 걷는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싶어서 그렇게 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듣고 싶어서 세례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이러한 자들에게 성령께서 들어가서 그를 거듭나게 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사마리아 성도들 중에 거듭나지 않은 성도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는 믿는 이들을 안수할 때에 하나님의 선물 곧 성령의 은사가 그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또다시 깜짝 놀란다. 그러자 그는 사도들에게 은화를 갖다 주면서 자기도 그러한 권세를 행할 수 있도록 그것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함으로 그의 실체가 드디어 드러나게 된다. 그가 예수님을 믿었던 목적이 여느 사람과 달랐던 것이다. 자신이 빌립이나 사도들로부터 능력과 권세를 더 받아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5. 가짜 회심자 시몬에 대한 사도의 처방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가짜 회심자 시몬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처방은 어떠했는가? 빌립은 아직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마술사였던 시몬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정확히 보지를 못했다. 단지 시몬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였고 또한 세례를 받기를 원했기에 그에게 세례를 준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눈에 그는 악한 자였다. 마음이 올바르지도 않았다(21절). 돈을 주고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획책했기 때문이다(18~19절). 그의 속에는 악독이 가득하였고 불의의 공동결박으로 꽁꽁 묶여있었다(23절). 이는 여러 귀신들이 그를 결박으로 묶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그는 다른 사람과 원래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그는 귀신의 힘을 힘입어 자기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자인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속여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의 눈에는 그가 어떤 자였던 것이 보인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엄히 책망한다. 베드로는 그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면서 그로 하여금 회개할 것과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촉구한다(22절). 그래서 자신의 악함을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예수 믿기 전에 이방신을 열심히 섬겼거나 그러한 일에 종사한 자는 자기 속에 악한 영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런 자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상숭배 죄를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악한 영들이 다시 그를 제자리로 되돌아가게 만들 수도 있고, 일평생 그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자들 중에 우상숭배를 많이 행한 자는 보다 더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여기서 '철저한 회개'라는 말은 자신이 우상숭배자였던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여러 번이고 계속해서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영은 섬길 때마다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우상숭배를 행던 죄의 숫자만큼 여러 번 반복적으로 회개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는 후에 시몬이 그렇게 회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들 중에 그러한 자가 있다면 그는 보다 더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2022년 09월 01일(목)

정병진목사

 

초대교회가 처음으로 직면해야 했던 핍박과 위협의 어려운 상황에서, 대체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우선 피신시켰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나중을 기약하자고 결의를 했을까? 그런데 그들이 선택했던 선택지는 다름 아닌 '합심기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보니, 우리가 보통 드리는 기도와는 달랐다. 그러면 그때 그들의 중보기도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우리도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대처와 중보기도는 우리의 갈 길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은 그 기도를 분석해보자.

 

2022-06-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19)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서 드린 첫 번째 기도는 어떤 기도였나?(행4:23~31)_2022-06-26(주일)

https://youtu.be/438S6AMWq6c  [혹은 https://tv.naver.com/v/27620853 ]

 

1. 들어가며

  세상에 이제 갓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와 복음전파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 못걷게 된 자를 고쳐 준 일이 있게 된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군중들을 향해 그 이유를 전하게 되었는데,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친 것과 예수님이 누군지를 전하는 것을 두고 불법이라면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어 그들을 심문해 보았지만 잘못한 일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하고 위협하면서 내보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바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면서 공회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곧장 성도들이 모여있는 장소(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됨)로 이동하여 그동안에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랬을 때에 과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 대책회의를 세웠던 것일까? 아니면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자들이 최고로 긴장을 하고 있으니 지금은 자제하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결의했을까? 아니면 죄없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또한 취조했으니 산헤드린 공회를 심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을까?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의 교회가 최초로 직면한 위험 앞에서 과연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루살렘 교회는 당면한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보고를 듣고 결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어디로 피신시키는 일을 논의했을까? 아니면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니 만큼 복음전파를 자제하자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루살렘은 복음전파를 하기에 합당한 곳이 아니니, 복음전파의 기수를 사마리아나 이방인에게 돌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고 했을까?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것은 놀라운 결정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합심으로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는 대책회의를 강구하지도 않았으며, 차기를 기약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 하나님께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을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은 과연 어떤 기도를 주님께 드렸을까? 

 

3.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고 또한 찬양했는가?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주께 기도할 때에 그들은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기도했을까?

  첫째로, 그들이 기도하면서 불렀던 하나님의 명칭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기도의 대상을 향하여 "대주재여!"라고 기도하였다(행4:24). 헬라어로 보면, '데스포테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그 뜻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호칭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앙이란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대주재'라는 명칭은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며, 그분의 뜻과 섭리를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이다. 참고로, 신약성경에서 '대주재'라는 표현은 사도 베드로가 한 번(벧후2:1), 사도 바울도 한 번(딤후2:21), 사도 요한이 한 번(계6:10),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한 번(눅2:29), 사도행전에서 한 번(행4:24),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한 번(유1:4) 사용한 적이 있는 흔히 않는 호칭이다. 

  둘째로, 그들은 대주재에게 어떤 찬양을 먼저 드렸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먼저 어떤 찬양을 드렸는가?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던(만드셨던) 분이십니다. 또 당신의 종(파이스) 우리 조상 다윗의 입으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렇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섭리대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것을 찬양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것은 시편2:1~2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행4:25~26). 왜냐하면 시편의 예언을 따라 예루살렘의 도시 안에 헤롯 안디바(B.C.4~A.D.39 재위)와 본디오 빌라도(A.D.26~36 재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드린 중보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그들은 무슨 기도로 중보기도를 드렸을까? 그들은 3가지 기도를 드렸다.

  첫째, 그들은 지금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적대세력을 지켜보아달라(주목해달라)고 기도했다(행4:29a). 그들은 "이제도 그들의 위협들 위로 그것들을 주목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좀 감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고, 고난을 아예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대세력을 없애달라고도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을 위협하고 대적하고 있다고 할지라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는 것이니만큼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 대로 행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적대세력에 대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겠다는 기도였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핍박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행4:29b).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당신의 종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계속 말할 수 있도록 담대함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옵소서" 그랬다. 그들은 대적들이 함께 모여 복음전파를 대대적으로 방해하고 있고, 또한 복음을 전파한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적들의 위협에 겁먹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셋째, 치유와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일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행4:30). 그들은 "당신의 손 안에서 고침을 위하여 당신에게 사람들이 손을 내밀게 하옵시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당신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계속 일어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것들 곧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기적들이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제공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께서도 공생애 시절에 제자들을 파송하여 천국복음을 전하게 할 때에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파송하셨다(마10:1, 눅9:1~2). 12사도들와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박해로 인해 좌절하거나 결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들과 동행하여 일하시는 교회가 되어, 천국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5.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이 내려졌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땅을 진동시켰다(행4:31). 그들이 기도하고 있던 장소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는지를 잘 대변해주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들과 계속해서 동행하시겠다고 하는 싸인을 그들에게 주신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기들이 비는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생활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핍박과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많은 이들이 그만 핍박에 주눅이 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과연 어떠했을까? 고난을 피해 도망을 쳤는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맞딱뜨리게 된 핍박과 위협 속에서 차후 대책회의를 강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놓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는 자신의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주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간구한 것이다. 그리고 다만 그들에게 누르고 있는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잘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 곧 천국복음을 계속해서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특히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일어나기를 간구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음과 더불어,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옳게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도응답을 받았고, 더욱 더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06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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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5)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은 어떻게 고침받았는가?(행3:1~10)_2022-06-21(화)

https://youtu.be/uwUOGYxf3Xo  [혹은 https://tv.naver.com/v/27592997 ]

 

1.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와 요한에게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세례 사건이 있은 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번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으로 있다가 태어나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40여세나 된 남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그만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술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이것을 지켜 본 사람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는데,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행3:10).

 

2. 나면서 못 걷는 자가 고침받은 일은 언제 어디에서 일었던 사건인가?

  그렇다면 나면서 못걷는 사람이 고침받은 일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을까? 때는 오순절 성령강림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그리고 장소는 성전의 미문(美門, Beautiful Gate)에서였다. 그렇다면 성전의 미문은 어디에 있는 문일까? 성전의 미문은 성전의 동편에 있는 정문 쪽의 문이다. 아래의 사진으로 보면 그 문의 위치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크게 4개의 뜰이 있다. 제일 처음으로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것은 성전의 제일 바깥쪽에 있는 ㄷ자 형태의 뜰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전의 동쪽에 있는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것이 바로 '여인의 뜰'이다. 그리고 여인의 뜰에서 '니카노르의 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의 뜰'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뜰 앞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와 지성소의 바깥쪽의 양쪽 공간을 가리켜 '제사장의 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드론 골짜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수산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면서 못걷는 자가 구걸하다가 고침받은 장소인 '미문'은 어떤 문을 가리키는가? '수산문'인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인가? 아니면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는 '니카노르의 문'인가?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가장 신뢰할만한 것으로는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의 기록인데, 그는 자신의 책 "유대전쟁사" 제3권 제17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해 뜨는 쪽을 향하여 있는 내부 성전(제사장의 뜰)의 문인 동문(銅門):bronze gate)[㈜ 고린도의 청동문(전쟁.5권. 5:3(201))은 아마도 여인들의 뜰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며, 행 3:2의 미문(美門)과 미쉬나(Mishna)의 나카노르(Nicanor)문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로 우리는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는 문인 니카노르의 문이 성전 미문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에 들어갔던 자는 여인의 뜰의 맨 앞쪽 니카노르의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이 남자를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3.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인 채 태어났던 청년은 어떻게 고침을 받게 되었는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던 어떤 남자가 고침받았던 사건은 왜 그리 충격적인 사건이었을까? 그것은 이 남자의 신체의 어떤 부분이 다쳤거나 고장났던 것이 치료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리를 쓸 수 없게끔 태어난 사람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하반신 장애인으로 태어난 자가 고침을 받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옷으로 빗대어 말하자면, 사용하던 옷의 찢어진 것을 수선한 것이 아니라, 없던 옷의 일부를 새로 만들어 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병고침의 사건이라기보다는 창조의 기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 온 예루살렘이 소동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전의 미문(아름다운 문) 앞에서 항상 구걸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수십 년을 그렇게 해 온 것이다. 그의 나이가 당시 40여세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랫동안 성전 앞에서 구걸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도 그는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베드로와 요한이 그 친구를 눈여겨본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를 향해 일어나서 걸어갈 것을 명령했을 때, 그 친구가 정말 일어서더니 걷고 뛰어버린 것이다. 

 

4.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렇다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어떻게 해서 걷게 되었는가? 그의 믿음이 좋아서였는가? 아니면 베드로의 능력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그 장애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맞는 이야기라면 베드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날 베드로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 장애인의 믿음으로 나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베드로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낫게(창조의 기적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첫째, 베드로의 믿음 때문이다(행3:16).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하여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베드로의 기도 때문이다(행3:1). 왜냐하면 그날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의 하나인 오후 3시의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행3:1). 1절을 헬라어로 읽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제 9시(오후 3시) 기도 시각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안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는 것은 그때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하고 있던 습관처럼 그날도 오후 3시가 되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에 몰두하는 일을 계속해 온 것이다. 사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은사를 받으려면 하루에 6~7시간씩 6개월을 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고로 병든 자의 치유의 관건은 기도의 유무와 그 분량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나면서 못 걷던 이가 낫게 된 사건은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가?

  나면서 못걷던 이가 낫게 된 사건은 사실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도 남았다. 첫째는 그 사람을 늘 지켜보았던 이들 때문이다. 그 반응은 한 마디로 경악했다는 것이고 자신이 현재 꿈꾸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까지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시 베드로에게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세례가 부어질 때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 가운데 일어나며 그와 같은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해명을 한 끝에 성도의 수가 3,000명이 늘었듯이 이번에도 베드로가 또 일어나 설교했을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믿는 이가 무려 5,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는 산헤드린 공회가 베드로를 비롯하여 12사도들을 감옥에 가둬 버린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보초가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뒤에 해방시켜 주신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시다. 

 

2022년 06월 21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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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강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역적으로 본다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지역과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퍼저나갔다. 그리고 사람으로 본다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자들로부터 불신했던 자들에게로 퍼저나갔다.
  이 중에서 사도행전 3장의 이야기는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이름을 사용해 치유를 선포하자, 그 명령 한 마디로 인해 예수공동체에 속하지 않던 자가 치유를 받았고, 그 일로 인해 온 성이 발칵 뒤집혔으며, 무려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공동체에 들어왔기 때문이다(행4:4).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십자가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였고, 그것은 미혹이 아니라 진짜였다는 것이 판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해서 불가능한 치유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걸인은 어떻게 되어서 창조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을까?
  먼저, 첫번째로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사역부터 살펴보자. 이 두 사도는 초기예루살렘공동체의 대표격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까지는 기적같은 일을 행해 본 일이 없던 자들이었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 본 일도 없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날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예수이름의 능력을 적나나하게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해서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첫째, 행2:1-4에 보면 그들은 우선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기에 예수이름을 사용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행3;1에 보면,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에 힘써왔고 그 날도 기도하러 가다가 그 행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이름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믿었기 때문이다(행3:6). 넷째, 처음 접해보는 일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담대함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행3:6). 그들은 자신이 명령했는데도 앉은뱅이가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당신도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충만을 받은후 예수이름을 사용해보라. 즉각 자신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두번째로,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어떻게 치유받았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비참했지만 그것을 비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이 사람은 거지에, 앉은뱅이 환자에, 하나님의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는 영적 소외자였다. 그것도 나면서부터 지체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였다. 날마다 불평불만하며 부모를 괴롭힐 수도 있었건만 그는 누군가의 손을 빌어서 날마다 예루살렘의 성전 미문이라는 곳 앞으로 나왔던 자이다. 둘째, 그는 듣는 귀를 통해서 믿음을 키워나가던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와 소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분은 못고칠 질병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병마저 고쳐줄 것을 예수님에게 부탁할 즈음에 그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 이후의 소문에게도 귀를 기울였다. 예수께서 죽었으나 3일만에 살아나셨고, 승천하셨으며,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도 들었다. 그때 제자들이 받은 성령은 예수님의 12사도와 예수님의 가족과 여러 믿는 이들이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는 예수공동체의 핵심인물인 베드로와 요한을 직접 만난 것이다. 그리고 셋째, 그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려고 작정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 성령받은 예수공동체가 그 힘을 발휘하여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해서 구원자를 얻어야 하는 시기였고, 하나님께서도 첫신앙공동체인 예루살렘교회의 복음전파에 활력을 불어넣어야할 아주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날 그 자리에 나면서 소경된 자가 있었어도 그 소경은 눈을 떴을 것이다.
 
  그렇다. 믿는 성도들이여, 이제는 당신도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라. 성령충만받고 기도하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분의 이름으로 명령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일어나버렸다. 이제 당신도 예수의 이름을 청원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사람의 몸과 대자연을 향해서 회복과 치유를 선포하는 이름으로 사용하라. 예수의 이름은 청원하면 응답받게 해주는 이름이지만, 믿음으로 명령하면 기적을 가져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도 혹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 걸인의 치유를 보라. 그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귀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믿음을 키워왔다. 그리고 주의 종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즉각 반응했다. 발과 발못에 힘을 들어간 적은 작은 것이었지만, 더 믿음으로 반응했다. 그랬더니 그는 벌떡 일어설 수 있었고,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당신에게 있어도 기적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큰 것으로 확대되어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라. 그러면 당신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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