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8(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진정한 소망(벧전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M2sh7IvBxwc  [혹은 https://tv.naver.com/v/29303960 ]

 

1. 들어가며

  우리에게 '바울'이라는 사도와 그리고 '베드로'라는 사도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왜냐하면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 선택받은 사도였으며,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선택받은 사도였다. 그러므로 굳이 그들을 시간차로 구분한다면 한 약 8년어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복음전파의 대상이 조금 달랐다. 베드로는 주로 할례받은 이들 곧 유대인들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며, 바울은 주로 할례받은 이들 곧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갈2:7~8). 그렇다면 이 두 사도가 전파했던 복음전파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지난 주에 바울이 말년에 기록된 에베소서를 통하여 바울이 드린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베드로가 말년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가 진정 바라고 소망했던 성도들의 산 소망이 무엇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도들의 편지를  통하여 그들이 진정 성도들을 향하여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소원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왜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가 되었고 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을까?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한 번 베드로를 어린양의 12사도들 가운데 대표자로 세웠으면, 그를 끝까지 사용하시어 이방인의 선교까지 담당하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를 그대로 놔둔 채로 또 다른 사람 곧 바울을 선택하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한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에 대해서 유연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 그랬던 것일까? 그것은 두 사도들의 탄생과 성장배경에서 찾을 수가 있다. 바울은 이방지역인 길리기아 성의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곳은 로마의 속주였다. 그리고 어찌되어서 그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의 아버지는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바울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다 더 여행이 자유로웠고 로마시민으로서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헬라어, 히브리어(아람어), 로마어(라틴어)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헬라파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율법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났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된 것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그는 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는 순간 그가 해야 할 복음전파의 사명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행9:15~16).

  그러나 베드로는 좀 달랐다. 베드로는 히브리파 본토박이 유대인이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 나라로 치자면 서울이 아니라 부산과도 같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근거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벳새다에서 태어나 자랐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율법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음식법대로 음식을 먹어왔고 정결법을 잘 지키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과 식사 한 번 하지 않았으며, 이방인의 집에 방문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는 이방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환경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고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좋지 않은 선입관은 그에게도 게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 상당기간 동안 그는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 가서 이방인교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가 한 번은 사울의 사역지인 안디옥교회에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본토박이 유대인들이 온다고 하자 식사자리를 쓸쩍 피해버린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바울로부터 면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하던 베드로가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3. 베드로전서는 대체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그렇다면 베드로는 끝까지 이방인 복음전파에 있어서 소극적으로 임했던 것일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베드로전서는 그가 죽기 약 1넌 6개월 전이나 2년쯤에 로마에서 쓴 편지다(그의 나이는 70대 중반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때도 여전히 유대인들 특히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는 이제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어버린 예수님의 사역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는 오늘 읽었던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다. 그런데 1절 말씀에 보니, 그들은 로마의 속주인 소아시아지역에 위치한 여러 주들에 흩어져 거주하는 나그네들(체류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은 본도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을 통해 혹시 우리는 그것이 흩어져 거주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의 여러 속주로 흩어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읽어보면 그들이 누군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벧전1:18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들이 헛된 행실을 물려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벧전2:10에 의하면 그들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벧전4:3에 의하면, 그들은 무법한 우상숭배를 자행해 왔으며, 이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을 즐겼다고 말한다. 고로 우리는 이들은 로마에 거주했다가 흩어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베드로가 말년에 되었을 때에 그는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누구든 다 형제자매로 받아주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4.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 편지의 수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고 있었을까?

  베드로가 편지를 보낼 당시 편지의 수신자들은 흩어진 지역에서 많은 고난을 겪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의 신들이나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요, 우상숭배 후에 벌어지는 술취함과 방탕함과 음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불신자들로부터 엄청 비방을 받았고 인격적으로 모독적인 말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일터에서 해고를 당하기 일쑤였고, 폭행과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은 살 곳을 찾아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들어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히11:38). 실제로 이들이 동족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도망가서 산 지역 중에서 '가바도기아'를 가보니,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은 바위에 구멍을 파고 집을 만들어 살았고, 거기에서 수백년을 거주했던 것이 확인이 된다. 그랬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대인도 아니었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나니, 말씀대로 살아야 했고 죄를 거부하고 살아야했기에 사회적으로 따돌림과 불이익을 당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5. 베드로는 핍박과 고난 중에 있던 흩어진 나그네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라고 칭했을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비록 땅에 살고 있어도 그들의 신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편지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3가지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피뿌림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벧전1:1~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거듭난 자로서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하였다(벧전1:3~4). 그들은 이제로 하늘의 상속자로서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로서 잘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믿음을 통해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된 구원을 받은 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받은 이들이라고 했다(벧전1:5). 이들은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원받은 이들로 있었던 것이다. 고로 우리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상속자로 잘 준비되고 있던 자들인 것을 알 수가 있다. 

 

6. 베드로가 언급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베드로가 언급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지난 주에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성도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에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고, 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로부터 풍성한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의 핵심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그것은 곧 베드로의 간절한 소망과도 같은 것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럼, 베드로가 ㅁ라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놀라운 사실은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성도들이 가져야할 살아있는 소망은 하늘에서 우리 성도들이 받을 유업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으로 받을 자들인 것이다. 

 

7.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을 확실히 일치한다. 그것은 곧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서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말하고 있는 하늘의 유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차지하게 될 하늘나라의 기업의 속성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동일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크고' '풍성하고'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엡1:17~18), 베드로는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유업의 3대 특성을 그것의 '영원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의 속성을 3가지로 말했다. 첫째는 그것이 썩지 않는다고 했다(벧전1:3a). 즉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의 받을 유업은 불멸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더럽혀지지도 않는다고 했다(벧전1:3b).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악한 영들의 공격도 없으며 죄지를 일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쇠하지도, 시들지도 않는다고 했다(벧전1:3c). 이는 하늘나라에서 유업으로 받은 상은 결코 약해지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받게 될 유업의 상은 결코 썩거나 더럽혀지거나 시들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은 유업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예를 들어 하나의 건물을 내가 유업으로 받는다고 하자. 그 건물이 처음에는 빛나고 화려하고 멋있게 보일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은 낡아지고 더럽혀지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유업은 영원무궁토록 빛날 것이라는 것이 베드로가 말한 하늘나라의 기업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8.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게 될 유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게 될 유업이 3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영원히 거주할 처소로서 천국집이요 또 하나는 빛나는 면류관이며, 마지막 하나는 성도들의 보좌에 앉아서 왕노릇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러한 유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을까? 역시 그도 바울과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도 역시 하늘에서 성도들이 받을 유업이 3가직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첫째로, 하늘에 장막집이 있다고 했다(벧후1:14). 그리고 둘째로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벧전5:3~4).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로, 왕같은 제사장직분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벧전2:9). 고로 우리는 두 사도 역시 유업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곧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간절한 소망은 서로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9. 나오며

  아무리 성도라 할지라도 사람은 무두가 땅에서 산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땅에 사는 이들로부터 때로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들과 같이 죄를 지어야 하는데 우리는 죄를 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둠에 속한 일도 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을 하려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기 일쑤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로부터 핍박과 멸시를 당하기도 하며,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죽임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우리는 죽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서 받을 유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은 껍데기를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니다.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땅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의 고난은 영광으로 변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핍박받으며 흘린 눈물은 보석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련이 깊어질수록 그것에 낙심하고 넘어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쇠하지도 아니하는 기업이 영원토록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1) 사도행전, 어떤 책인가?(01)(행1:1~11)_2022-06-06(월)

https://youtu.be/AnUItRfQzko  [혹은 https://tv.naver.com/v/27209740 ]

 

1. 책 제목이 들려주는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

  사도행전은 헬라어로 '프락세아스 아포스톨론' 즉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어떤 행적인가?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후계자가 되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기록한 책이다. 한 마디로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인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단 두 사도에게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며 또 한 사람은 '바울'이다. 베드로는 육신을 입고 33년간 이 땅에 사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선택한 12사도들의 대표자이며,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선택한 사도들 중의 대표자다. 여기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를 뜻한다. 다시 말해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곧 사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첫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첫 사도들의 대표는 '베드로'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도 딱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는 사도행전의 전반부인 1~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인 13~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이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에게해를 건너서 마게도냐(그리스)와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2. 사도행전의 기록은 어떻게 끝마치고 있는가?

  보통 성경책들은 내용상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서론과 본론은 있지만, 결론이 없다. 그냥 진행형으로 끝이 난다. 즉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고 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럼, 잠깐 사도행전의 끝 부분을 살펴보자. 

행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그렇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2년을 로마에 있는 자기의 전셋집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가르쳤다고 마무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열려있는 책이요, 미완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경향은 사도행전 내내 계속된다. 즉 복음전파가 계속해서 열린 문을 통하여 더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1차적으로 베드로에 의한 복음전파가 12장까지 나온다. 그리고 그 뒤에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고 그냥 숨겨둔다. 계속해서 어딘가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15장에 가서 갑자기 나타난다. 최초의 기독교 예루살렘공회의 때에 그가 예루살렘교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기록이 없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바울을 부르실 때에 언제 어디에서 부르셨는지가 분명하다.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의 부르심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13장에서부터 전도여행을 떠나난다. 그래서 1차전도여행과 2차 그리고 3차전도여행을 다녀온다. 그리고 로마여행(4차전도여행)을 하여 로마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2년동안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끝을 맺는다. 그 뒤에 그가 로마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서 여전히 그리고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마치 그 뒷부분은 우리들더러 "너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3. 복음전파에 있어서 사도행전이 알려주는 아주 중대한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복음전파의 그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복음전파의 현장들을 기자가 취재하듯이 사도행전의 저자가 잘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을 볼 때에는, 사도행전의 최대의 분수령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9장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9장은 첫 번째로 복음전파의 기수였던 베드로가 여전히 살아았고 여전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두 번째 복음전파의 기수로서 사울(후에 바울)을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께서 공생애 가운데 불러내어 사도로 삼았던 베드로를 제쳐두고 또 다른 사람을 불러내어 복음전파의 새로운 기수로 삼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우리는 이 부분에 아주 주목해야 한다. 나중에 사도행전 각 장 강해에 들어가서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베드로를 놔두고 왜 바울을 부르셔야 했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복음전파의 '개방성 여부'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전파의 '유연성 여분' 때문이다. 베드로는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적인 한계를 벗어나려 해보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 방문하면서 거기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어떤 할례자들이 온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만 이방인인과의 식사 자리를 피해버렸기 때문이다(갈2:11~12). 그러자 사도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를 책망을 엄히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할례자들의 사도'였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갈2:7). 그러나 그렇더라도 베드로가 그때 처신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에 있어서 개방적이었던 헬라파 유대인인 바울을 불러내어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였던 베드로가 복음전파에 있어서 여전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복음전파의 깃발은 바울에게 이어졌고 그로 인하여 복음을 유대인을 넘어서 이제 이방인에게까지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복음이 팔레스타인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어 가게 된 것이다. 

 

4. 사도행전이 말하는 교훈을 회개와 천국복음이 이어받으려면?

  이렇듯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뜻과 방향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의 뜻과 의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천국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더 이상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의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를 쓰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로 복음전파의 깃발을 옮기시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회개와 천국복음"과 같은 엄청난 메가톤급의 복음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아니 이것이 마지막 때에 전파해야 할 최종적인 복음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답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천국복음'이 땅끝까지 증언되는 때라고 하셨다(마24:14). 그러므로 동탄명성교회와 같은 규모가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회개와 천국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증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복음전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우리만 듣고 우리만 천국에 들어오라고 주님께서 먼저 알려주신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여 "회개와 천국복음'을 또한 폐쇄적으로 간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주어 흩어버리신 것처럼 우리들도 산산히 흩어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회개와 천국복음의 말씀을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와 천국복음이 얼마나 가치 있고 능력있는 복음인지를 먼저 자신이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그것을 다른 사람과 지역 그리고 다른 나라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이야말로 참된 복음을 먼저 깨닫고 먼저 믿은 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5. 사도행전 1장의 서두에 등장하는 12사도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사도행전 1장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거기에서 예수께서 승천하기 직전 그 앞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왕국)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는 것이었다(행1:6).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아닌가?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때와 기한은 그들이 알 바가 아니라고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해야할 사명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성령이 곧 그들 위에 내려오시면 능력을 받아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천국복음이 전해진 이유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순간에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이 언제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들려주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천국백성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고 이어서 이제는 그들이 모든 민족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자기 나라의 독립만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모습인 것일까? 회개와 천국복음도 언젠가는 전세계으로 전파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지 복음을 듣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들어가서도 존경받는 위치를 차지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하여 이 마지막 때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알곡을 추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끼리만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고 우리끼리만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빨리 그러한 생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도록 나도 열린 마음으로 물을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6월 06일(월)

정병진목사

 

사람이 사물과 사건을 바라볼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첫인상이 그중에서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처음 어떻게 들었느냐는 자신의 신앙관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처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가? 그 관점은 크게 2가지였을 것이다. 베드로의 관점과 사도바울의 관점의 경우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의 청년 예수로 만났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주님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만났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관점자체가 다르다. 오늘은 우리가 만났던 예수님을 과연 어떤 관점으로 보았는지를 살펴보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17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기도 그 놀라운 능력과 우리의 미래

 

[제목]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찬송]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말씀] 사도행전 20:24~28(신약 223)

2017.8.30()

1. 들어가며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서 듣는가에 대해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달해주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가 한 말에 대해 이의나 토를 달고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진 분들로부터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바울에 의하여 신약성경이 무려 13권이나 쓰여졌고 그것이 우리들 손에 쥐어져 있음에 늘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적인 편협된 사고에 갇혀 있지 않는 열려진 사고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바울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믿고 따랐는지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믿고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두 사도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기록물로서 일종의 역사서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사도들이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했던 살아있는 선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베드로의 사도를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부분(1~12)이며 또 하나는 사도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부분(13~28)이다. 그런데 이때 베드로가 주로 할례자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면, 사도바울은 주로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2:7~8).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바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그런데 이들의 복음전파의 기록들과 이들이 남긴 신약의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사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도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나사렛출신의 사람이신 청년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람으로서 먼저 만나 뵈었지만, 사도바울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남긴 기록에서는 항상 육신을 입고 있으셨던 아들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 짙게 남아 있다. 그러기에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된다(16:16). 그렇지만 나중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 곧 하나님이 되셨다고 증언한다(2:36). 하지만 사도바울에게는 한 때 육신을 입으셨지만, 이미 부활승천하신 상태에 있는 예수님을 만났기에 항상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관점으로 성경을 기술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가장 잘 기술하고 그리고 완벽히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아 사역했던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는 과연 어떻게 되어 예수님의 실상을 정확히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기를 바란다.

3.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첫째로, 바울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예수님이 바로 주님 곧 구약의 여호와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사역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바울은 눈이 멀어 삼일동안 금식기도하고 있는 중에 선지자 아나니아를 만났다. 그때 아나니아는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만났던 그분이 곧 주님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고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었으니, 다메섹도상에서 만났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 사도바울은 사도행전에서나 13권이나 되는 그의 서신서들에서, 오직 예수님을 주님(퀴리오스)”이라고 칭하였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가 하나님을 두 분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과도기의 사람이었기에 조금은 달랐다. 그는 주님이라는 호칭을 하나님에게 사용하다가(2:38~39,벧전5:6~7), 이어 예수님에게도 동시에 사용하였다(벧전1:3,벧후1:8,2:20,3:2).

벧전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들었고 그분을 만났기에,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구주(구원자)’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에도, 예수님에게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에게도 동시에 그 호칭을 사용하였다(딤전1:1,1:3,2:10,3:4). 하나님이 곧 예수님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구주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뿐이다(벧후1:1,11,2:20,3:18).

2:10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둘째, 바울은 성육신에 대해, 만세전에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이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증거하였다(딤전3:16).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셋째,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피라고 증거하였다(20:28).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피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도바울에 있어서 예수님은 이미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요 하나님이셨기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장로들을 초청하여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 피는 아들 그리스도의 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피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그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왜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죄가 한 번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다 용서받을 수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의 피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의 피였지만, 사실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흘리신 피이기 때문이다. 골고다언덕의 피흘리심은 단번의 제사이지만 완전한 제사였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를 당신의 핏값을 주고 사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들의 몸값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들을 자신의 목숨값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것을 매우 시기하고 질투한다. 자신이 모든 피조물 중에 최고로 아름답고 지혜롭게 지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 값을 지불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지은 죄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죄는 이미 골고다언덕에서 흘리신 핏값 때문에 언제라도 우리가 회개하는 순간 눈같이 다 녹아 없어질 것이며, 양털같이 희게 될 것이다.

4. 나오며

우리들의 손에는 베드로의 사도행전과 서신서 외에도 사도바울의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함께 쥐어져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베드로가 비록 천국열쇠를 사용해 교회시대를 열기는 했지만, 그것의 꽃을 피운 자는 바로 사도바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바울에 의해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수받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께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정되어 전파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베드로의 복음으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도바울의 복음으로 적셔져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전능자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주 예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곧 하나님의 피인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오직 한 분 전능자이신 예수님만 붙들면 된다. 그리고 무슨 죄이든지 그분께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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