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보았다. 그럼 오늘날에도 진짜 그러한가?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면서, 방언의 은사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한 신령한 은사로서 예언의 은사와 방언통역의 은사를 추천한다. 왜 바울은 이러한 2가지 은사를 추천해야 했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21-09-08(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1)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의 은사에 대하여(고전14: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AFyAGbodLQ  [혹은 https://tv.naver.com/v/22356999 ]

 

1. 들어가며

  모든 은사에도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가 모든 은사 사용에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신령한 은사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기본적으로 겸비된 사람에게 어떤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은사가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필요할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은사들 중에는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 내용이다.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잘못된 은사 사용에 대해서 알려주고 바른 은사 사용을 위한 실제적인 예로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비록 방언의 은사가 신비롭게 보이고 멋있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공예배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공예배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익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예언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이길래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는가? 그리고 대체 방언이 가진 한계는 무엇인가?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방언과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정의와 아울러 이 은사들의 유익성과 한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러한 3가지 은사를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교회에 예배 중 은사 사용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배 중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방언의 은사 사용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알고 사모하면서 그 은사를 예배 중 사용했지만 그것이 교회의 건덕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다 보면 방언이 자주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언의 소리를 분석해 보면 어떤 방언은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소리가 분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방언은 도무지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유치하게 들리는 방언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또한 사모하다 보니, 일종의 좋은 방언과 나쁜 방언이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방언이 지닌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방언이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3. 바울은 왜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가?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은사를 사용하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것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공중 예배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방언 자체가 지키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그것을 공중 예배에 사용한들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으며 그 방언을 듣고 '아멘'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일만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한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둘째,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이지만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덕을 세운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짓다. 세우다. 건축하다'의 뜻이지만, 이 단어에 대한 이차적인 뜻이 '다시 짓다. 다시 세우다. 다시 건축하다'는 뜻으로서 '복구하다, 복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의 쓰러지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 세우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그런데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사실 방언이 필요하다. 방언을 하게 되면 자신의 영을 건축하여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이미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도 다시 복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교회 자체를 그렇게 세워주고 복구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왕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셋째, 방언의 은사는 방언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깨닫고 돌이키고 배우게 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4. 방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것인가? 방언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는 곳은 사실 성경을 통틀어서 고린도전서 14장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곳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방언이라는 언어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는 않고, 그곳에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과 고린도전서 14:14~15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으로 발언하고 있는 자는 사람들에게 발언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415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으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나의 이성(생각=누스)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 15 그러면 무엇이 있느냐? 나는 영으로 [장차]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기도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찬송할 것이다.

  그렇다. 방언이란 2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말하는 언어이다(고전14:2). 곧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가 방언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에 다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목놓아 울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이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새롭게 모신다. 그때에 그는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자녀가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영이 죽어 있다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방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응애'하고 말을 하듯이 자신의 살아난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영이 말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대화하는 새로운 채널로 부여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말을 알아들으신다. 만약 그것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기도라는 것이다(고전14:14~15).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가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어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일상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 용어는 혼의 언어다. 배워서 하는 것이요,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다르다. 방언은 영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내 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는 것이다. 내 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래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가지고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역해 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말이 약 80~90% 정도가 되며,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의 기도는 약 10~20% 정도 된다. 나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아도 영은 자신의 소원을 알고 벌써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그리고 방언의 분량이 많아지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방언 찬양도 나온다. 방언에 음률이 붙어서 자신의 영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방언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방언은 '외국어' 중의 하나요 고린도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15)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하지만 방언이 영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방언이라는 은사는 신약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최초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고 있는 나오는 '방언'도 그때 예루살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지방에서 쓰던 지방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4장에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서 '방언'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아지경에서 지껄이는 일종의 귀신들의 속삭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린도지역에만 나타났던 고린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고린도전서 14장을 번역하고 있는데,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분들의 이름을 굳이 거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을 믿고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란 어떤 언어였을까? 정말 '지방말'이었던 것이었을까? 사도행전 2:4에 보면,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으로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다(행2:4). 그런데 이번에 우리말이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방언'이라는 용어가 '다른 언어들'로 뒤바뀌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언'이 '다른 언어들'로 바뀐 것이다. 명백한 성경 번역의 퇴보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 tongues)'라는 단어로서 완전히 종류가 다른 언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언어가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같은 종류의 이 세상의 언어였다면, 그것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알로이스 글로싸이스(another tongues)'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단어는 종류가 다른 언어로 곧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로서 영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인 방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오순절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120명 성도들의 말했던 언어를 들은 후에 "이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방언'은 분명히 '글로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표적으로서 주어지는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막16:17). 그리고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말해졌던 언어도 '글로싸'였고,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오셔서 베풀어졌던 방언도 역시 '글로싸'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안수할 때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그때 받은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 그리고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방언이라는 단어도 역시 '글로싸'라고 나온다. 모두가 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라고 하겠다. 

 

6. 방언 통역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렇다면 '방언 통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언 통역이란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킨다. 원래 방언은 그 사람과 하나님만 소통하는 대화 채널이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알게 듣게 되는 은사가 바로 방언 통역의 은사인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보통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상대방이 방언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를 영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통역은 상당히 실수할 때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통역하다 보면 방언의 내용에는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방의 방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즉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히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기 쉽게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듣고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잘 되신 분은 동시 통역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방언을 들으면서 바로 동시에 통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 통역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들추어 낼 때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가 그만 그 사람의 체면이 손상되고 그 사람의 숨은 죄가 드러남으로 성도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순화하는 말로 바꾸어서 통역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당사자만 알아듣고 회개를 할 수가 있다. 셋째, 방언하는 자의 입술에서 글자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글자가 되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영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입으로 나오는 글자를 읽어 주면 된다. 이것이 방언  통역이다. 이러한 사람은 지구상에 몇 명 안되는 방언 통역 은사라고 할 수 있다. 

 

7. 예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그것의 7가기 기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그것을 미리 말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리킨다. 그 대상은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고, 국가와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아가보'라는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는 얼마 후 나라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으며(행11:27~28), 개인적으로는 바울이 장차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손발이 묶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행21:11).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떻게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알게 되어 예언을 한다. 첫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어떤 영감을 떠오르게 함으로 알게 된다. 그때에는 그냥 그것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예언은 틀릴 수도 있다.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나 사탄 마귀가 넣어 주는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이전의 예보다는 더 분명한 것이지만 이것도 사탄 마귀가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모습을 글자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글자가 떠서 보이는 예언이 있다. 글자가 떠서 보이고 영의 상태가 환상으로 보일 정도라면 그분의 영성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언의 은사는 예언 뿐만 아니라 책망과 판단, 위로와 권면,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8. 나오며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고 성령의 은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그것을 귀신의 장난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2천년 전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이나 지금의 성령은 똑같은 한 분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주셨던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방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방언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자기 개인만을 세워주는 은사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은사는 다 남을 위해 존재하는 은사들이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이 외에도 2가지 단점이 더 있으니, 그것이 남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보니 그것을 공중 예배 때에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데 어찌 그 방언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방언은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그 말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좋은 은사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의 경우처럼 굳이 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 통역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언의 은사를 구하여서 그것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방언은 사실 자신을 세워 주고 복구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깨우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예배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오직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기도할 때에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다른 은사들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며, [회개한 후에] 방언을 말한다면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영적인 능력들이 계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의 은사(04) 능력의 은사와 귀신방언(눅9:1~2)_2020-06-23(화)

https://youtu.be/Nyt7yFUjDR4 [혹은 https://tv.naver.com/v/14422395 ]

 

1.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즉 성령이 제자들 위에 부어지심으로 그들이 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옷입혀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24:49, 행1:8).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제대로 복음을 전파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이미 악한 자 안에 놓여 있으며(요일5:19), 마귀가 이 세상 임금이 되어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을 꽉 붙잡고 내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요일3:8). 그러니 우리들이 가서 마귀와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에게 붙들려있는 사람들을 꺼내오려면 최소한 마귀와 귀신들보다는 능력이 있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것을 얻는 방법은 오로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사도행전에 성령세례가 부어졌을 때에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공통적인 은사는 무엇인가요?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공동체에 성령이 부어지신 사건이 총 4차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행2장), 사마리아에(행8장), 고넬료가정에(행10장), 에베소에(행19장)이 성령세례가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고넬료가정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빌립집사의 복음전파를 받은 후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하여, 에베소는 사도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가 부어졌고 또한 성령의 선물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방언의 은사가 다 공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사마리아도 그때 무엇인가가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기는 했지만(행8:20) 그것이 어떤 것인지 기록되지만 않았을 뿐 짐작컨데 그때 방언의 은사가 그들에게 나타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고로, 우리는 성령세례가 부어지게 되면 가장 기초적인 선물이자 공통적인 은사로서 방언의 은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방언의 은사는 능력의 은사인가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능력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도행전을 보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우선적으로 나타난 성령의 은사는 거의 대부분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 은사에 더하여져 다른 은사도 나타났는데, 고넬료가정에는 방언과 더불어 방언찬양의 은사가 나타났고, 에베소에서는 방언과 더불어 예언의 은사도 나타났습니다. 그럼, 방언의 은사가 능력의 은사인가요? 그렇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는 방언의 은사는 능력의 은사가 나타나기 전단계에 주어지는 은사요, 다르게 말하면, 능력의 은사의 시작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의 은사가 나타나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먼저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방언의 은사는 왜 거의 대부분의 성령세례 시에 다 받는 것인가요?

  방언의 은사는 좋은 것지만 모두가 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12:30에 보니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바울이 언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못 받는 사람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방언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거듭난 성도의 영이 말을 하는 은사이며(고전14:2) 거듭난 성도의 영이 기도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고전14:14). 사실 사람이 거듭태어난다는 것은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요14:16~17). 사람이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그 사람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 속에 분배되어집니다. 그러면 죽어있던 그의 영이 살아남으로 인하여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방언"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응애 응애"하면서 말을 하듯이, 새롭게 태어난 영도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을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거의 대부분이 다 방언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동시에 위로부터 성령이 능력이 부어지게 될 때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 방언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이지만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성도도 더러 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조상대대로부터 내려온 귀신들이 그 사람 속에 아주 많이 들어 있어서 그의 영이 말하는 것을 막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방언같은 성령의 은사들은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더 이상 필요가 없어져서 사라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루살렘 마가다락방에서 나타났던 방언의 은사는 외국어였으며, 이러한 은사는 성경이 완성되어 자기나라의 말로 퍼져나감에 따라 더이상 필요없게 되어 사라졌다고 굳건히 믿는 이들에게서 방언의 은사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자에게는 방언의 은사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방언의 은사는 기도를 더 잘하고 더 많이 하라고 주신 은사이니만큼 기도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통성으로 기도할 줄을 모르는 자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5. 귀신방언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방언은 사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고전14:2)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인지 사람 중에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귀신방언을 하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귀신이 악하게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방언이 귀신방언인지 아닌지는 방언통역을 해보야 합니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방언통역을 해보니, "이 목사새끼, 죽어라. 이 교회는 빨리 망해라" 등의 통역이 나온다면 그는 틀림없이 귀신방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통역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귀신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입술과 혀의 모양 그리고 그 말소리를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입술과 혀과 뱀처럼 모양을 하고, 혀가 쭉 빠진 상태에서 혹은 혀가 밖으로 나왔다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귀신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방언소리가 영락없이 뱀이 기어가는 소리를 내는데 소름이 끼치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귀신방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영적으로 영적인 것을 잘 모를 때 귀신이 사람(특히 사모님)을 사로잡아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빨리 바르게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제대로 된 방언을 받아서 말하도록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2020년 06월 23일(화)

정병진목사

 

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방언은 외국어인가 아니면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인가? 요즘 들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고린도현상이자 귀신이 하는 장난이며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들이 성경에 있다고 한다. 과연 성경에 그러한 근거가 있는가? 반대로 그렇다면 방언이 영의 언어이자 기도라는 근거는 있는가? 이제 방언논란을 종식시켜줄 만한 말씀이 여기에 있다. 한 번 시간을 내서 꼭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2020-06-19(금) 금요기도회
제목: 성령의 은사(02) 방언은 외국어인가 영의 언어인가?(2)(행2:1~14)
https://youtu.be/jnYuRgy27mg [혹은 https://tv.naver.com/v/14389159 ]

 

 

1. 들어가며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성령세계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또한 그들 위에 부어짐으로 말아맘아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다른 언어들(방언들)'이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는가? 방언의 은사는 배워서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사인가? 어떤 이들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던 성령의 은사는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날 그들에게 터져나온 방언의 은사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2. 사람 위에 부어진 최초의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갑자기 성령세례가 부어졌다. 그리러자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선물로서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언어들"이라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기들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이겠지만, 이미 다른 지방에서 말하여지고 있던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듣지 못했던 새롭고 신비한 언어였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날 120명의 성도들이 말하게 되었던 "언어(글로싸)"는 성경에서는 "혀"(막7:33,눅1:64,행2:3,롬14:11,고전14:9) 아니면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다. 단 한 번 "언어"(행2:11)라고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단어에 대한 사도행전2:4의 번역은 기존에는 "방언"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언어"라는 단어로 바뀌었는데, 이렇게 바뀐 곳은 오직 단 두 곳으로서, 행2:4과 행2:11에서만 "방언" 대신에 "언어"라고 바꾸어놓았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곳에서 이것을 표적이나 은사의 종류로서 번역할 때에는 항상 "방언"이라고 번역하였다(막16:17, 행10:46,19, 고전12:10, 13:1,8, 14:4,6,13,14,18,22,26,27,39). 그러므로 사람 위에 부어진 성령의 최초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였다고 우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3. 방언은 어떤 은사이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이란 대체 어떤 은사인 것이며, 그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 관하여는 대부분 2가지 견해로 서로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간단히 말해서 "외국어"라는 것이다. 자기나라의 말이 아니라 외국의 말이어서 자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또 하나는 그 말은 다른 나라에서도 말해지는 "외국어"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없는 그래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서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라는 것이다 

  먼저, 행2:4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다른 언어들"을 외국어라고 보는 입장부터 살펴보자. 이쪽 계열은 보통 장로교쪽 계열이 많이 주장하는 편이다. 물론 장로교에 속한 모든 교단들 모두가 다 방언을 외국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지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외국어"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그러나 또 한 쪽 계열이 있다. 이쪽에서는 "방언"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이쪽계열에는 오순절교단에 속하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주류를 이룬다. 이들 중에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방언을 말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외국어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가?

  우선, 행2:4에 나오는 "언어들(글로싸이스)을 외국어들로 보는 분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들은 대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최초의 성령세례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을 정리하면 딱 2가지다.

  첫째,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세례로서 말하게 되었던 "방언"은 당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나라의 언어(디아레크토스=지방어)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외국어"라는 것이다. 당시 해외파(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총 15개국에서 왔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서 방언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둘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이방신을  따라는 고린도인들이 겪을 수 있는 고린도현상으로서, 고린도가 해양도시로서 이방신을 많이 섬기는 곳이었기에, 고린도성도들은 자기기 딴에는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고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귀신들이 그들을 속이는 속임수의 의미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고린도의 특수현상을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잘못 번역한데서 오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분은 우리 통합측 교단의 노OO목사님이시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분의 책("방언을 검증하자")을 보니, 헬라어성경을 얼마나 왜곡되이 번역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신학을 연구하는 자로서 헬라어를 오랫동안 공부해왔기 때문이다.

 

4.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OO목사님은 왜 고전14장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분은 고전14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특히 3가지 말씀은 잘못된 번역으로서 사람들이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착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분의 주장(번역)과 실제 헬라어성경말씀은 어떤 것인지를 서로 비교해 보도록 하자.

  첫째, 그분은 고전14:2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가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설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더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고전14:2의 말씀에 대해 노OO목사님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방언을 말할 때에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말한다고 한디만 알아듣는 자가 없었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OO목사님의 번역은 크게 잘못되었다. 그렇게 번역한다면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거나 말했던 것을 인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는 사람에게 발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발설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14:2의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잘못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말이 아니라, 왜 방언이 신령한 은사인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둘째, 그분은 고전14:14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본문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고전14:14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기 대문이다. 그런데(그럴지라도) 나의 마음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열매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 다음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장차] 영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고전14:5)" 그렇다. 바울은 말한다.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자가 통역하기를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데(고전14:13), 그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마음으로는 아무런 열매가 맺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방언은 통역을 해서 마음으로도 열매를 맺도록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분은 고전14:18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외국어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노OO목사님은 이 말씀의 본래적인 뜻은 자신이 방언기도를 일반성도들보다 더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도 잘못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8 내가 너희의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계속해서] 더 발설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바울이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더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종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많은 것 곧 분량이 많은 것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여기서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다면, 그는 자신이 "다른(알라이스) 방언들(글로싸이스)"을 더 많이 말한다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방언들을 더 많이 말한 것에 대해서만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외국어로서, 성경이 쓰려질 때까지만 존속하다가 사라진 특별한 은사였다는 그분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근거를 성경에서 가져오려고 했으나, 오히려 성령을 더 왜곡되이 번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결코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번역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근거로 책을 내고 세미나를 개최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호도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지 말아야 행동으로 보인다. 

 

5. 방언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말이자 영의 기도인지를 증거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말 행2:4에서 최초의 방언이 과연 사람을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지 그 근거들을 살펴보록 하자. 참고로, 자신은 방언을 외국어로 알고 있고, 성경기록이 종료된 이후 더이상 방언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을 두고 이래야 저래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천국에 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제대로 알고 믿는다면 영적인 측면에서 매우 큰 유익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 것을 증거하는 성경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 10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방언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방언이란 "지방말"(디아레크토스)"이 아니라, "방언(글로싸)"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도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16:17).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표적들이 따라올 것인데 그것을 중의 하나가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마가복음 16:9~20의 말씀이 원래 마가복음에 있었던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말씀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렇게 믿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 손에 이러한 말씀에 들려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지 않나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새 방언"을 말씀하신다고 했는데, "새로운 지방말(외국어)"을 따르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외국어는 가서 배우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에 포함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새[로운]"이라는 말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카이노스"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언어를 믿는 자들에게 표적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질적으로 다른 언어를 두고, 자신은 현재 모르고 있지지만 당시 다른 지방에서 쓰고 있는 단어를 가리킬 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처음 방언(글로싸)이 나타났던 마가다박방에서 그때 함께 모여있던 20명의 성도들이 사용하던 "다른(헤테라이스) 언어들(글로싸이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행2:4). 그렇다. 최초의 방언은 그냥 "방언(글로싸)"가 아니었다. "다른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헤테로스, 원형)"이라는 단어다. 헬라어에서 "다른"이라는 단어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로스(another)"가 있고, "헤테로스(other)"가 있다. "알로스"는 같은 것들이 많은 중에서 조금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요, "헤테로스"는 질적으로 다르며 종류가 다를 때에 사용하는 "다른"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이라는 단어가 바로 "알로스"다. 이는 보혜사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제 영으로써 다시 오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2:4에 나오는 "방언"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며, 종류가 전혀 다른 방언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언어들로서 서로 연관성이 있는 외국이였다면 "알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쓰지 않았던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가 출현하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사도바울은 방언이란 거듭난 성도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로서, 인간의 혼이 말하는 언어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2). 그렇다. 이것은 이 세상 다른 나라에 가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말이 아니다. 특히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다. 심지어 방언을 말하는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 영이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결코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외국어일리가 전혀 없다. 

  넷째,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행2:4,10:44~46,11:15~18). 오순절성령강림사건부터 성령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오신다. 하나는 그 사람의 속에 오신다. 그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요14:16~17).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성령은 사람 위에도 부어진다. 이것을 "성령세례" 혹은 "처음으로 받는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때 성령의 내주를 경험한 자들에게 성령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분이 가지고 온 것은 생명이다. 아버지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런데 그 생명은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처음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바로 자신의 영이 출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어떤 울음과도 같은 소리다. 그것이 곧 방언인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진 것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 곧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질 때 대부분 방언(글로싸)를 말했던 것이다. 

  다섯째, 바울을 이것을 영의 기도라고 바울이 언급했기 때문이다(고전14:14~15). 바울은 방언을 영이 비밀을 말하는 것이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말이라고 했다(고전14:2). 뿐만 아니라 바울은 방언을 영의 드리는 기도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14:14).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는 영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이다(고전14:15).

  여섯째, 방언을 들었던 자들 중에는 갈릴리출신의 120명의 성도들을 향해 "새 술에 취하였다"곧 "미쳤다"고 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행14:13, 고전14:23). 오순절날 방언소리를 듣고 찾아온 15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소동하였다. 그리고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고 했다. 그리고 다 놀라 당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이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오전9시였으니, "이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했나?"라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다. 자신들이 토종언어로 그들이 말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아침부터 술에 취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또다른 증거가 고전14장에 나온다. 만약 교회가 다 함께 모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하게 된다면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을 해야 하고,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고 예언을 하라고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외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 혹은 "미쳤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식해졌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순절날 유대인들에게 터뜨리고 나왔던 방언과 가이사랴의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경험했언 방언(글로싸)은 서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행10:44~46, 11:15~17). 사도베드로가 이방인의 가정 고넬료의 집에 초대받아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들이 말씀을 듣다가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방언(글로싸)을 말하였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방언찬양)했기 때문이다(행10:46). 그러자 이것을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한 베드로는 자기들에에게 성령이 부어짐으로 성령세례가 있었던 것처럼 고넬료가정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러한 성령의 선물에는 동일하게 "방언(글로싸)"이 있었다. 그러므로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과 고넬료가정에서 말했던 방언은 동일한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넬료가정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누가 거기에 있었다고, 그들이 외국어로 말했겠는가? 아니다. 그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언어를 말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방언이다. 

  여덟째, 바울은 이것을 "영이 드리는 기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14:14). 바울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영의 기도라고 말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방언의 내용은 자신의 기도와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자신의 기도는 약 20%정도로 방언통역이 되며, 약 80%정도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하시는 책망이나 권면이나 위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은 영의 하는 말임과 동시에 영이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외국어를 사용해 드리는 기도를 가리켜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홉째, 바울은 통역을 할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기 때문이다(고전14:13). 바울은 신령한 은사들 중의 하나로서 방언의 은사를 언급했다. 그런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어 자신의 마음으로도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반드시 공중예배 즉 교회에서 예배 중에 그것을 말해야 한다면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가? 그것이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외국어라면 그 나라에 가거나 그 나라 사람에게서 배우면 된다. 하지만 바울은 통역하기를 배우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고전14:13). 이는 방언통역도 초자연적이며 신령한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도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일 뿐만 아니라, 방언통역도 동시에 초자연적이고도 신령한 은사인 것이다. 

  열째,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워준다(복원한다, 복구한다)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4). 바울은 방언은 뜻도 내용도 모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더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고전14:18).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14:39). 왜냐하면 방언은 자기를 세우주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전14:4). 왜 그런가? 사실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지만(건축하지만), 방언은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자신의 진정한 소원, 영이 아뢰는 진정한 소원이 들어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진정 권면하고 책망하고 인도하시는 음성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그의 영에 매우 유익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이며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자는 방언통역을 해보아야 한다. 만약 방언통역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기도를 계속 드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영의 기도가 먼저 선행되고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기도도 점차로 영의 기도와 일치를 이루게 되는 날이 오는데,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달라 몇 달, 몇 년, 몇 십년 뒤에 실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라시는 바람직한 모습이 들어있고, 자신의 영의 소원이 들어있기에, 자신을 세워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운다"는 말의 헬라어원문은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는 "짓다, 건축한다"는 뜻 외에도 "다시 짓, 재건축하다"라는 뜻도 있으며, "복구하다. 복원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너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다시 복원시켜주는 것이 곧 방언기도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기도가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방언,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은사임에 틀림없다. 구약시대에는 단 한 명도 방언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이것의 귀중함을 증명된다. 사실 고전12:8~10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 가운데 오직 2가지 은사만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바로 방언이요 방언통역이다. 그래서인지 최초의 성령세례로 나타났던 성령의 은사는 다름 아닌 "방언"이었다. 방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 사도행전으로 기록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신령한 은사로서 방언과 예언 그리고 방언통역에 관하여 고전14장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고전14장의 말씀을 통하여, 방언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끼치는 것까지 알 수 있다. 그렇다. 방언은 고린도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헛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귀신이 사람을 사로잡아 행하는 악령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일이다. 그것은 영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듭난 영이 성령에 의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비밀을 말하고 또한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러한 것도 말했다. "다 방언들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 그렇다. 성도들 중에는 방언을 못하는 자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의 기준을 방언을 가지고 말해서도 아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은사가 이미 종료되었다느니, 외국어라느니 말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방언으로 말함으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영적인 유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2020년 06월 19일(금)

정병진목사

 

[참고] 고전14:2, 14:14, 14;18의 헬라어원문과 노OO목사님의 사역(개인적인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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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의 은사(01) 방언은 외국어인가 영의 언어인가?(행2:1~13)_2020-06-19(금)

https://youtu.be/bhQYC947ksA [혹은 https://tv.naver.com/v/14368584  ]

 

 

1. 성령세례가 부어질 때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어떤 사람에게 성령세례가 부어지면 그 사람에게서 4가지가 나타나거나 주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능력이 부어집니다(행1:8,눅24:49). 둘째, 성령의 선물이 주어집니다(행2:38,11:17). 셋째,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고전12:8~10,31,14:1,12). 넷째, 믿는 자로서의 표적이 나타납니다(막16:17,고전14:22)

 

2. 최초의 성령세례사건은 어떤 것인가요?(행2:1~4)

  최초의 성령세례사건(행1:4~5)은 오순절날 성령께서 마가다락방에 오셔서 부어진 사건입니다(행2:1~4). 

 

3. 최초의 성령세례사건에서 나타난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나요?(행2:4)

  최초의 성령세례사건에서 나타난 성령의 은사는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4. 사도행전2:4에 나오는 여기서 "다른 언어들"은 무엇을 가리키나요?

  사도행전2:4에 나오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s tongues)"입니다. 이 단어를 헬라어 원형으로 보면, "다른(헤테로스)" "언어(글로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로싸"를 번역할 때에 어떠한 말로 번역하느냐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글로싸"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글로싸"를 헬라어단어로 직역하면, "혀"(막7:33,눅16:24,행2:3,2:26) "언어", "입"(빌2:11), "방언"(막16:17)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인데, 행2:4을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방언"이라고 번역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이 되면서 "언어(행2:4,11)"라고 바꾸어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논란을 자초하는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글로싸"라는 헬라어 단어를 "언어"라고 번역하기로 했다면, 다른 곳에서도 다 그렇게 번역했어야 했는데, 행2:4,11에서만 그렇게 번역하고, 다른 곳에서는 "방언"(행10:46,19:6,고전12:10,28,13:1,8,14:2,4,6,13,18,19,22,23,26,27,39)이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글로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행2:4에 나오는 "글로싸"를 해석하는 것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국어"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서 이러한 해석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은사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자 영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전14:2,14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외국어"라고 해석하는 분들은 고전14:2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린도현상으로서, 헛소리, 악령의 소리라고 평가절하합니다. 그것이 귀신 씻나락까먹는 소리, 헛된 지껄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최초의 성령세례로 인하여 마가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언어"(행2:4)를 당시 15개국에서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외국어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태어난 곳들의 "지방말(디아레크토스)"로 들었다는 것 때문니다(행2:6,8). 여기서 "디아레크토스"라는 말은 오직 사도행전에서만 6번 나오는 특별한 단어인데(행1:19,2:6,8,21:40,22:2,26:14), 개역개정판성경에서는 "방언"으로 2번 번역하였고(행2:6,8), 그냥 어떤 지방의 "말"로서 4번 번역하였습니다(행1:19,21:40,22:2,26:14). 고로 잘못 해석하다보면, 행2:4에서 말하여진 언어는 "지방말(디아레크토스)"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5. 행2:4에 나오는 "글로싸"가 의미하는 바는 진정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행2:4에 나오는 "언어(글로싸)"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첫째,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따라오는 표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는 "새 방언"과는 동일한 단어입니다(막16:17). 둘째, 이 방언(글로싸)이 고넬료가정의 성령세례 후에도 똑같이 주어졌습니다(행10:46). 그러므로 베드로 자신도 말하기를, 자기들도 처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주셨던 것으로 성령세례받을 때에 주신 선물(행2:1~4)이 바로 그 방언이었다고 언급했습니다(행11:15~16). 고로 우리는 행2:4에 최초의 성령세례로 주어진 "언어(글로싸)"와 행10:46에 고넬료가정에서 부어진 성령세례로 주어진 "방언(글로싸)"은 동일한 종류의 언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바울이 안수함으로 에베소성도들에게 받게 했던 "방언(글로싸)"도 행2:4과 동일한 "글로싸"입니다(행19:6). 넷째,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로서 말하는 "방언(글로싸)"과 행2:4과 동일한 단어(글로싸)입니다(고전12:10,28,13:1,8,14:2,4,6,13,18,19,22,23,26,27,39). 그런데 고전14:2에 보면, 이것은 성령세례로 인하여 은사를 받게 된 성도들이 말하는 언어로서, 그것은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으로서 아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 들 수가 없는데, 그것은 [자신의] 영으로 비밀을 발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행14:2). 그리고 고전14:14에서는 "방언(글로싸)"은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14:14)" 고로, 여기까지 우리는 잠정적으로 볼 때 "글로싸"는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주어지는 은사로서, 하나님의 선물이며, 또한 표적으로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지방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의미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2020년 06월 19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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