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가운데에 말의 은사에는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의 은사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소나무 몇 개의 뿌리를 뽑으면 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무엇에 주의하며 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은사는 받았지만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바깥 어두운데 떨어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2021-09-29(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2) 방언과 예언의 은사 받는 법과 그것의 활용(고전14:20~4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NUiRQRaTzU  [혹은  https://tv.naver.com/v/22704033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 중에서 은사에 관한 부분은 12장부터 시작하여 14장까지 게속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은사의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 속해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자기의 덕만을 세운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방언을 마치 자신의 영성을 자랑하기 위한 잣대로 삼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방언의 은사 사용을 교정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12장부터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더불어 직분의 은사를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 14장에 들어와서 비로소 방언의 한계와 그것을 사용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언도 좋은 은사에 해당되지만 방언은 예언에 비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공중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과 예언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은사인지를 살펴보고, 방언이 지닌 한계점과 그것이 교회의 공예배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린도전서 14:20~40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들어와서 드디어 은사들 중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방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바울은 방언 통역이나 예언도 방언과 함께 다룬다. 이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말하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방언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면서,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방언 통역과 예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견주어 비교하고 추천할 많은 은사가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방언의 은사보다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19의 단락을 통하여, 방언이란 어떤 것이며 교회의 덕을 세움에 있어서 방언은 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방언보다는 예언이 상대적으로 유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20~25절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상반된 역할에 대해서 다룬다. 즉 이 두 가지 은사가 성령의 은사를 믿지 않는 자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26~40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할 때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사도는 그것들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까지도 같이 알려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 사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서와 품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은사에 대한 말씀을 마치게 된다. 

 

3. 방언과 예언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이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사실 방언과 예언은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서 '방언 통역'의 은사와 더불어 '말'의 은사에 속한 은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방언'과 '예언'은 그 목적에 있어서 거의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교회를 세워 주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방언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남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과 예언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먼저, 첫째로 방언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자. 방언은 한 마디로 개인의 덕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할 수 있다(고전14:4). 왜냐하면 방언을 통역해 보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주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약 80~90%정도이며, 자기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약 10~20%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3가지 정도로 나온다. 하나는 위로과 격려의 말씀이 나온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모든 사람이 내 교회를 버리고 떠날 때에 너 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아 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너의 진심 어린 기도를 내가 들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앞 길을 친히 인도해 주마." 라는 말이 나온다. 또 하나는 책망(꾸짖음)과 폭로의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너는 왜 나의 종을 쫓아내는 일에 앞장을 섰느냐? 내 종은 내가 판단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종은 내가 세웠으니 내가 판단할 일인 것인데, 네가 네 손으로 그 종을 쫓아내었으니 네가 만일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와 너의 집을 향한 나의 징계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니라."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사명과 과업에 대한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이 땅에 보낸 것은 너만 믿고 구원 받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네가 회개함으로 네 자식과 네 집안까지 일으켜 세우라고 내가 너를 보낸 것이다. 너는 네가 했던 일에만 만족하지 말고, 이제는 너의 눈을 들어 너의 가족과 너의 가문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고로 이렇듯 방언의 내용이 위로와 격려, 책망(꾸짖음)과 폭로, 사명과 과업에 대한 메시지인 것을 가정해 보면, 그것이 예언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방언은 이러한 말씀을 방언하는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을 믿지도 않은 자나 불신자가 방언을 듣는다면, 아마도 그들을 미쳤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로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자. 예언은 사실 방언과 비슷한 은사이면서도 방언과는 좀 성격이 다르다.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방언 통역이란 방언하는 자의 말을 통역자가 듣고 그것을 해석해 주는 것이지만, 예언은 성령께서 내 영에게 주신 말씀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예언도 마찬가지로 주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만을 뚝 떼어놓고 본다면 그것이 통역되어 나온 방언인지 혹은 예언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예언에는 상대방의 영이 드리는 기도가 들어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정말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예언으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6가지 측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첫째는 권면과 위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전14:3). 그리고 둘째는 책망과 판단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고전14:24). 또한 셋째는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도 같이 수행한다(고전14:25,31). 왜냐하면 예언을 통하여 상대방이 감추고 있는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사람을 책망하여 결국 그를 회개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예언을 모든 회중이 같이 듣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를 제일 싫어하시고 또한 어떤 일을 매우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예언은 많은 사람을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게 된다(고전14:25). 

 

4. 공적인 예배시 방언과 예언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바울은 이제 공예배시에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첫째로 공중예배 때에 등장하는 예배의 요소들 곧 찬송시나, 가르치는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이 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에 팔요한 것임을 지적한다(고전14:26).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공중예배시 방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설명해 준다(고전14:27~28). 즉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에는 첫째, 방언하는 자를 두 명 내지는 세 명 정도만을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중구난방식으로 방언하게 하지 말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차례대로 방언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교회에서 방언을 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하는 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온 회중이 들어서 알게 하라고 하였다(고전14:27). 만약 교회에 이렇게 통역할 수 있는 자가 없다면 방언은 결단코 공중예배시에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혹시 방언을 하고 싶다면 그때에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에게만 말하라고 하였다(고전14:28).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공중예배시 예언을 할 때에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했다(고전14:29~32). 이때에도 역시 방언 통역 때와 마찬가지로, 첫째, 예언을 두 명이나 혹시 많으면 세 명 정도만을 선별하여 예언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 역시 이것도 차례대로 질서있게 해야 하며, 셋째, 예언이 끝나면 예언의 내용을 100%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 마귀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하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언이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보통 상대방을 보면서 그때 자기의 마음에 주님께서 떠오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예언하는 자의 마음과 발성 기관을 거치면서 예언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언하는 자가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았다든지, 하나님 앞에 불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은사를 사용하게 되면 예언이 잘못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언할 때에도 성령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사람이 예언을 할 때에 다른 이에게서 또 예언이 나오면, 그때에는 전에 예언하고 있던 자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지만 그 예언이 틀리게 전달될 경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 예언을 막으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뒤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에 제제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고전14:32).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 중에 부르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5. 모든 교회에서 여자는 항상 발언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은사 사용에 있어서 질서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고전14:33). 그러므로 공중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할 때나 예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차례를 따라 순서대로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고전14:27~28). 이어서 바울은 모든 성도가 교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창3;16),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어떤 질서를 정해 주셨으니, 그것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으로서 질서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고전11:3). 그러므로 여자가 교회에서 자꾸 말하다 보면 교회가 소란스럽게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태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을 보더라도 여자는 뱀에게 계속해서 말을 한다. 이때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함으로 인하여 여자가 먼저 꾀임을 받아서 죄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굳이 여자가 말을 하려고 한다면 직접 나서서 말하기보다는 자기의 집에서 자기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소란스럽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에게 묻지 않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대원칙과도 같은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참고로 이러한 명령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강요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성을 갖기를 위하여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자는 어떤 생각으로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은사의 사용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두고서 자기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서 그것을 정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권면한다(고전14:36). 그리고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직접 개척하고 세웠던 사도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교회에게 좀 더 강경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영적인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거나 모르는 자가 자기를 선지자나 영적인 자로 자처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라고 말했다(고전14:38). 그는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7. 방언과 예언 및 은사 사용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 이렇게 마무리 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있으며,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고 있어라(고전14:39)" 그렇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영적인 것을 사모하려면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더 사모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것일 뿐 교회의 덕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은사를 구하는 대원칙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방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금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방언이 마치 구원의 확실한 표적인 것인 양 떠들어대는 교단도 있으며, 반대로 방언을 지나치게 무시한 나머지 방언을 고린도 현상 내지는 귀신들의 장난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양쪽 다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이다(고전14:18). 왜 그런가? 방언이야말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다른 은사들을 받게 하는 일종의 첫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요, 방언을 많이 말할 때에 다른 은사들도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에는 2가지 태도를 꼭 지켜 줄 것을 권면하였다(고전14:40). 그것은 품위있게 은사를 사용하고, 질서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내가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그 은사를 최고로 여긴 채 함부로 사용하여서 교회를 소란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때로는 가진 은사라도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으며,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될 때까지 때로는 기다릴 필요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더 성숙한 은사자의 통제가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귀신의 밥이 될 확률이 매우 크며,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 바깥 어둔 데에 내던져지는 이들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8.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신령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영적인 것들을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 그런데 너희들은 더욱더 예언하기를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고전14:1)". 그렇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으려면 이러한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은사를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인가? 그것에 관하여는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니, 첫째,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의 은사는 다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시는 은사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신 은사들이 대부분인데 기도도 많이 하지 않으려 하면서 은사들을 사모하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은사는 예언의 은사의 경우처럼 그것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로 혼합되어 밖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진 상태에 있으면서 은사를 사모하여 은사를 받게 된다면 그 더러움은 누가 과연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회개를 하지 못해 청결하지 않는 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성령과 함께 동시도 귀신도 역사하여, 귀신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나게 한 것을 성령이라고 함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들은 누가 또 책임을 지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청결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모든 은사는 섬기기 위해 주어진 은사이므로 주신 하나님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은사를 다른 지체를 섬기라고 주어진 은사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을 제외한 모든 은사들은 다 남을 섬기라고 주신 은사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려 하고, 그것을 남을 위해 섬기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것을 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는 반드시 자신을 주님께서 헌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은사가 좋다하며 간구했다가 결국 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묶어 둔다면, 결국 주님 앞에 책망받을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은사를 받기 사모하는 자는 남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섬기는 은사이기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남을 섬기기를 더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남 섬기기를 자기를 섬기는 것보다 우선할 수 있는 자가 은사를 간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이 은사가 과연 최고의 은사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는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고로 바울은 모든 은사들은 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주어지는 은사이니만큼,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그래도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데에는 그만한 은사가 없기 때문에 방언 말하기를 금해서도 아니 된다고 하였다.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신령한 은사는 방언 통역의 은사요 예언의 은사이니 이러한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특별히 조금 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 경우에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은 거의 비슷한 은사라는 것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달랐다. 어떤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없고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을 유창한 발언을 따라 신령함의 정도로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결국 바울에 의해 크게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교정을 받아야 했다.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공예배시에 사용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을 세우라고 하였고,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때에는 잠잠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큰 소리로 내뱉는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제일 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최초로 나타났던 예루살렘교회가 그랬고, 이어서 이방인 최초로 믿는 자였던 고넬료 가정에서도 그랬으며, 베드로의 뒤를 이어 이방인 선교에 집중했던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렇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언이 만사 형통의 방법은 결코 아닌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는 아무런 유용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방언은 결코 회개를 대신할 수 없으며, 방언은 결코 자신의 성품을 바꾸어 주지도 못하며, 방언으로서는 감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언을 비롯한 신령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하기 위해 그러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더불어 진정 남보다도 더 십계명을 지키면서 성결한 삶을 살려고 하면서 은사를 구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시간을 다른 지체를 섬기려는 의도에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어찌되었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는 사역자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다운로드(1)] 고린도전서강해(22) 방언과 예언의 은사 받는 법과 그것의 활용(고전14,20_40).pdf

[첨부파일 다운로드(2)] 고린도전서강해(22) 방언과 예언의 은사 받는 법과 그것의 활용(고전14,20_40).pptx

 

2021년 09월 29일(수)

정병진목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삼위일체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 창조사역을 하실 때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당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 그리고 구원자로서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구약 4천년간 350번 이상이나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의미는 당신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진짜로 메시야를 보내주셨는데 그분은 아들이자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구속에 관한 모든 약속을 성취하시고 하늘로 다시 가셨다. 그리고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오시는 성령님은 오직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결코 우리 자녀의 합격이나 남편의 진급, 집을 사거나 팔거나 하는 것을 지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금이빨이 되게 하거나 뒤로 쓰러지게 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께서 이 땅에 무엇하러 오셨는지 그리고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분이 사람 속에 들어오신 증거와 표적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2019-08-14() 하계수련회 셋째날
제목: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가?(03) 그가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으로(19:1~7)
https://youtu.be/bemezjboorA


1. 들어가며

    예수님은 우리가 과연 믿고 따라갈만한가?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실재하지 않았으며 그 이야기는 신화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교도들의 신화를 모아서 엮은 소설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는 신화다(미지북스,2008)"라는 책의 주요내용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도 이 책을 논문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부분도 그 진실성을 보장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다빈치코드와 같은 소설 책으로만 읽히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 자체가 허구였으며 짜집기였고 조작이었기 때문이다("예수는 신화가 아니다" 도서출판 누가, 2008년) 그렇다면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대체 누구신가? 과연 그분은 믿고 따를만 한 것인가? 그것을 우리는 지금 3일동안 다루고 있다. 오늘은 세번째로서 마지막 시간이다. 오늘은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그분은 하늘에 오르신 뒤에 보좌에 앉아서 쉬고 계시지 않는다(어떤 분은 더러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와 상의하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그분은 승천하신 뒤에 곧바로 자신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으며, 지금도 인류의 구원사역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요5:17). 그래서 오늘은 성령님은 누구시며,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며, 지금도 그분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성령님은 누구신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는 성령님을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세번째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교회 전통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이라고 가르쳐온 것을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A.D.381년 큰스탄티노플신조에서 처음으로 첨가한 신앙고백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믿고 있다(이 세상에 있는 신학자는 단 한 명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계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66권을 다 읽어보라. 하나님의 우편에 또 다른 보좌가 있다는 말씀이 있는지를 말이다. 신구약성경은 다 하나님의 보좌는 한 개 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도 그렇게 보았고, 이사야도 그렇게 보았으며, 에스겔도 그렇게 보았고 스가랴도, 미가야도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 보니, 죽기 직전에 스데반도 그렇게 보았고,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그렇게 보았다. 특히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밝혀놓은 천상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아계신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보좌요 하나님의 보좌 위에 바로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것이다(계3:21, 7:17, 22:1,3). 어떤 분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었더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말한다. 삼위일체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성경66권을 다 읽어보라.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단 개 뿐이며, 거기에 승천하신 예수께서 앉아계시는지를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찬송27장은 천국에 가 보고온 사람같아 지은 찬양같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대체 누구신가? 계5:6에 보면, 성령님이 누군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사도요한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것에게는 일곱 뿔들이 달려 있었고 일곱 눈들도 가지고 있었다(다 상징이다. 실제 일곱눈과 일곱뿔을 지녔다면 괴물일테니다. 숫자 일곱은 완전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눈들은 "온 땅 안으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영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한편 구약의 선지자였던 스가랴가 본 것에 의하면, 그 눈들은 여호와의 일곱눈들(숙4:10)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 성령님은 어린양으로 예표되는 예수님의 영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을 감찰하기 위해 내려보내신 당신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 성령인 것이다. 그런데 "일곱영"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완전하게 감찰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그렇다. 성령님은 예수님과는 다른 세번째 하나님이 아니시다. 예수께서 완전한 영으로서 이 땅에 보내신 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별설교(요14~16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시면 보혜사를 그들에게 보내어 줄텐데, 그러면 보혜사가 와서 무소부재의 방식 안에 존재하심으로 제자들을 언제든지 돌보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라고 했다(요14:18~19). 이는 앞의 문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 뒤의 문장은 그분이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임을 예언하신 것이다(사실 오늘 전하는 이 말씀만 제대로 듣는다고 하여도 영안이 확 열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성령님은 세번째의 또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또다른 자기자신이시다. 성령님은 예수께서 당신 대신 보내신 예수님의 눈들로서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지만 믿는 이들 속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렇다고 구약시대에 성령이 없었느냐? 그것은 아니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시어 꾸준히 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리었다(창1:2,출31:3).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후에는 "여호와의 영"이라고도 불렸다(삿3:10,6:34).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3.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제 아들로 오신 하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또다시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럼, 예수께서는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셨는가? 그것은 이제 믿는 자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마다 개인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주시기 위함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다. 천자창조사역 등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의 영을 보내어 일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께서도 승천하시어 무소부재의 하나님이 되셨는데, 그리고 구약시대부터 성령께서도 역사하고 있었는데 굳이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실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믿는 이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했다(요16:7). 왜냐하면 오순절이후 예수께서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은 믿는 이들 속에 거주하시어 성도들을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4. 성령님은 오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구약시대에는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이 지금과 달랐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후부터는 사람 밖에서는 성령으로 역사하셨고, 사람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심으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오기를 바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우상과 이방신들을 섬겼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다. 그러자 결국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북이스라엘의 경우 앗수르왕 살만에셀에게 B.C.722년에 멸망당해야 했고, 남유다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B.C.586년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남유다가 멸망당할 무렵 하나ㅣ님께서는 당시 선지자였던 예레미야(사역시기 B.C.627~580)와 에스겔(사역시기 B.C.593~571) 그리고 조금 후대의 요엘선지자(사역시기 B.C.835~796)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방식을 장차 바꿀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첫째, 성령을 사람 속에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렘31:33~34, 겔36:26~27). 둘째,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역사하는 방식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역사하는 방식으로 바꾸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욜2:28~29,행2:17~21,10:45).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실 때에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믿는 자는 곧바로 지은 죄들을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요3:5~6,고전12:3)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믿는 성도 각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서 도와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순절이후 성령께서는 구체적으로 첫째, 믿는 자들을 위로격려해주시고(요14:26,15:26), 둘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며(요16:13), 셋째, 예수님 누구신지를 증언해주시며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기억나게 하시고(요15:26,14:26), 넷째, 다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시고(요14:26,요일2:27), 다섯째, 믿고 영접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증언해주시고(롬8:16), 여섯째,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치시고 보증해주시며(엡1:13~41,4:30,고후1:21), 일곱째, 지은 죄를 책망하여 회개하도록 도와주시고 있다(요16:8).

  더불어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로 하여금 복음을 담당히 증거하여(행1:8) 다른 사람들도 회개하여 예수믿고 천국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가지 선물들을 주신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오실 때에 그분이 주시는 선물들을 성경에서는 "은사(카리스마타)"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에는 기본적으로 9가지가 있으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의 은사,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분별함, 각종방언말함, 방언들통역함(고전12:7~11)"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옷입혀질 때까지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다(눅24:49).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셔서 11명의 제자들에게서는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공식적으로는 부활후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날에 120명의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활 40일동안 지상에 계셨던 예수께서 승천하신후 약10동안 제자들은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성령받기를 기도했으니, 마침내 오순절날이 이르자 성령이 내려오셨고 믿는 자들 속에 거주하셨으며, 그때에 선물을 각자에게 나눠주셨다.

 

5.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오셨다는 증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영은 사실 보이지 않는다(요4:24). 그러니 만질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왔는지 아니 들어왔는지 사실 잘 느끼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영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불어도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3:5~8). 고로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은 "바람(공기,숨)같은 성령"이시다. 그런데 성령을 비유하는 말씀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러가지가 있다. "불과 같은 성령(행2:1~4)", "비둘기같은 성령(마3:16)", "물과 같은 성령"(요7:37~39), "기름같은 성령(고후1:21,2:27)" 이라는 표현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영이시니 그분이 우리가 믿고 회개할 때에 분명히 들어왔을 텐데(고전12:3),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어도 그분이 내 영 속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어떤 표적이나 증표, 현상들이다. 예를 들어, 성령을 받는 순간 몸에 매우 뜨거움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 성령은 뜨거운 분이 아니지만 성령이 오셨을 때에 증상으로서 그 사람의 체질과 성격과 영의 특수성에 따라 그렇게 나타날 수도 있다. 모든 뜨거운 것이 성령이 오셨다는 증상은 아니지만, 성령이 오실 때에 뜨겁다는 분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읽어보면, 성령을 받았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했던 현상들이 있었다. 거기에 어떤 표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선물" 혹 "성령의 은사(카리스마)"라고 말했다. 사도행전에는 사실 성령이 사람에게 오시는 장면이 총5번 정도 나온다. 교회적으로 볼 때에는 3개교회 즉 예루살렘교회(행2장)와 사마리아교회(행8장) 그리고 에베소교회(행19장)에게 성령이 내려오셨고, 이방인에게는 고넬료가정(행10장)에게 오셨으며, 개인적으로는 사도바울(행9장)에게도 오셨다. 그럼, 이 5번에 걸친 성령강림사건과 동시에 일어난 공통현상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 성령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는 없는 영이신데, 그들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알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그들이 성령받은 후에 어떤 현상(증상,표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확인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마리아교회를 제외하고 다 "방언(글로싸)"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교회는 그때에 방언을 말했는지 안했는지를 기록만 되어있지 않았을 뿐, 실은 어떤 특별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교회에 마술사 시몬이 있었는데, 그도 사도들이 와서 안수했을 때에 성령받는 것을 보고는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도 그러한 능력을 받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이다(행8:17~19). 물론 그때 베드로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사마리아교회 성도들도 그때 방언을 말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서 방언이 터질 때에는, 오순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성지순례객으로서 참여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찾아온 15개국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방언어들로 방언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막16:17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보며 새 방언(글로싸)을 말하며..."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고로, "방언말함"은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들어오셨다는 가장 강력한 공통싸인이자 표적이며 현상이었던 것이다.

 

6. 방언은사는 왜 중요한가?

 그렇다면, 왜 방언말함이 중요할까? 그것은 성령께서 사람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표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실 때 선물(은사)을 주시는데, 공통분모가 바로 "방언:이었다. 고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방언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막16:17에 의하면, 믿는 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방언이며, 고전12장 14장에 보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의 하나가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는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받는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서 자기의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에 생명의 성령이 들어오시는데, 그때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조에)을 갖고 들어오신다. 그러면, 거듭남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방언"이다. 고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마땅한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는 성경의 기록이 멈추면서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믿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믿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방언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셨고(막16:17), 바울도 방언은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12장,13장,14장). 다만, 고전12:30에서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기록함으로써, 방언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했다. 이는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셨을 때에 주어지는 은사가 다를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성령께서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표적으로서 방언 아닌 다른 것들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도 역시 성령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은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실 때에 대부분 방언을 말했기 때문에, 방언의 성령이 오심의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어떤 것인가? 방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듣는 자가 없다. 즉 방언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므로 알아듣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답답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방언을 귀신 씻나락까먹는 소리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언은 통역해보면 유창한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터부시하거나 멀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롬8:26에 의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 위하여 친히 중보기도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방언은 매우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영의 기도이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행하시는 중보사역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을 통역하여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크게 2가지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다. 그리고 실제 방언통역한 것을 분석해보면, 이러한 자신의 영이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방언은 얼마 안 된다. 방언 중 약 1/10이나 1/9정도 밖에 안된다. 오히려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방언의 80~90%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방언통역에 나오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대체 누구인가? 성부인가 성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성령이신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방언통역을 통해서 나오는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은 확살히 분리되어 있다. 아버지가 행하시는 사역과 아들이 행하시는 사역 그리고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이 분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방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바로 아들 "예수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성령를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기도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7. 방언의 은사가 성도들의 삶을 매우 유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언은 사실 말(언어)의 은사로서, 기도의 은사요 찬양의 은사다. 사람은 방언을 통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신령하게 찬양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고전14장은 방언이 영이 말하는 것이자(고전14:2,4~6,13,23), 기도라고 했고(고전14:14~14), 방언으로 찬양할 수도 있다(고전14:15)고 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에 방언을 말할 때에는 또한 통역이 필요하다고도 했다(고전14:5,13,26).

  그런데 방언통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방언의 기도는 2가지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즉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서 진실한 소원을 아뢰는 기도의 통로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아버지의 뜻을 말하는 하나님의 바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방언은 첫째, 하나도 나쁜 것이 없으며 이기적인 욕심이 전혀 들어있지 않는 순수한 기도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기도의 내용을 통역으로 들어보면, 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요 자기자신의 가족과 주의 종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나온다. 방언기도에는 단 한 번도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취직시켜달라거나, 진급시켜달라거나, 집을 사게 해달라거나, 예쁜 자매와 결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 자신의 영혼과 가족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둘째, 방언은 예수님께서 나의 대한 바램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언통역으로 자신의 영의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항상 그렇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나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혹시 방언통역에 자신이 주의 종이나 선교사의 사명이 있다고 나왔을지라도 거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지 않는 한 결코 그렇게 쓰임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은사와 달란트와 기질과 영적인 분량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으로 쓰임받을 것인지가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게 정해진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정해진 분량만큼 그렇게 쓰임받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이 땅에서 기도하고 사모하고 바라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와 분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방언기도를 통해서 나오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램은 하나님의 뜻이자 소원인 것이지 결코 운명같은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라.

 

8. 방언의 은사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그럼, 어떻게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도할 때에 그냥 내 영이 말하는 대로 내 입술과 혀를 맡기면 된다. 우리나라 말로 발음을 또박또박 말하려고 하면 오히려 방언이 잘 안 나올 수도 있다. 방언은 사실 말하는 은사이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말을 하면 된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지 못하는 분들도 가끔씩 있는데, 이런 분들은 밖으로 말을 하려고 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더 잘 나오는 것이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자신의 혀를 자연스럽게 맡기면 내 영이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랄랄랄 롤롤롤"과 같은 식으로 방언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창피하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방언통역을 해보면, 그러한 방언이라도 그 내용은 유창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에 몇 개의 단어가 아니더라도 부모는 잘 알아듣고 응수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듣기에는 "랄랄랄 롤롤롤"으로 들릴지라도 통역해보면 그 내용도 다 다르며, 다 유창한 언어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방언을 부정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아는 이들은 "랄랄랄 롤롤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만서 조롱하는데, 진짜 방언통역하시는 분을 아직 못만나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요, 방언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보면 다 알게 될 것이니,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방언은 어떻게 직접적으로 하게 되거나 받게 되는 것인가? 방언을 표적으로 보면 그것은 말하는 것이지만, 은사로 보면, 그것은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어떤 사례가 있었는가?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딱 3가지 방법으로 방언을 받았거나 말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을 보내주심과 동시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2:1~4). 대표적인 경우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의 방언의 나타남이다(행2:1~21). 사실 가룟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이미 성령을 받았다(요20:22).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여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 모여 10일동안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오순절날이 되었고 그때 오전 9시에 성령이 내려오셨고 성령이 그들 마음 속에 들어가시자, 드디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둘째, 말씀을 전하는 이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때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10:44~46). 그 대표가 바로 고넬료가정이다(행10:1~48). 고넬료는 자기의 식구들을 모아놓고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던지 이미 말씀듣는 중에 성령의 은사가 부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입술에서 방언이 저절로 나왔고 방언찬양도 아울러 나왔던 것이다. 째, 이미 성령받은 권위있는 자의 안수기도를 받을 때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19:6).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안수함으로 성령받고 방언도 받고 예언의 은사도 나타난 사건이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교회에 가서 안수했을 때에 그들도 성령을 받았고 표적도 같이 나타났다(행8:14~17). 그리고 다메섹의 경건한 자 아나니아아가 말 위에서 떨어져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사울에게 안수했을 때에도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은 벗겨지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방언도 말하게 되었다(행9:17~18, 고전14:18). 한 마디로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즉시 방언으로 말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언의 표적이나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는 것을 더욱 더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려는 것이자, 더욱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함이다(행1:8).

  한편, 어떤 사람들은 방언기도가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내 영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뜻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게 되면, 방언기도의 내 기도나 하나님의 뜻은 내게서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날마다 회개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십계명을 어긴 것은 없는지 살펴보면서 십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방언기도의 기도가 이뤄지는 것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도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로서 "회개기도"를 대신하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방언기도로서 "감사"나 "봉사"를 대신하려고 하지 말라. 또한 방언기도로서 내 성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 나의 땀과 노력과 고백과 고군분투가 필요한 것들이다. 이런 것이 없이 맨날맨날 방언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적 진보는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한다. 회개기도도 동반되고, 감사와 봉사를 생활화하면서, 자신의 성품을 바꾸기 위해 기도하면서 방언기도도 할 때에, 방언기도의 내용이 이뤄지는 것이지, 방언기도만 냅다 한다고 해서 방언기도가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하려면, 통성으로 충분히 기도하여 회개하고, 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한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 방언기도로 하는 것이 좋다. 방언기도는 미래의 나의 모습을 미리 아뢰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면, 어느날 과거에 자신이 방언기도를 한대로 자신이 이미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회개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애쓰지도 아니하면서 냅다 방언기도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9. 나오며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은 세번째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겔36장의 약속에 따라 경륜적으로 이제 믿는 이들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물론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분은 단독적으로 인격을 가지고 일하시며 말씀하시기도 하신다(행16:7).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동시존재하시고, 상호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사실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들어오시기에 그분의 오심을 우리가 만지거나 느낄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이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표적이나 은사로 알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이때 어떤 현상이나 표적이나 은사가 자신에게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전12:3, 요3:5~6). 우리는 단지 곁에 서 있는 나뭇잎이 흔들리고 자신의 이마가 시원함을 느낄 때에,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성령을 받은 자의 대표적인 현상이나 표적이며 은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하는 분은 방언기도의 유익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인정하는 않아서라는 것을 알고, 오직 통성기도, 회개기도, 중보기도, 그리고 방언기도의 순서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019년 8월 14일(수)

정병진목사 


어떤 사람은 방언이 성경기록시기 이후에는 없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방언을 무슨 귀신 씻나락까먹는 소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란 다름이 아니라 외국어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은 과연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어떤 점들이 유익하기에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려고 하는가? 혹시 단점은 없는가? 사실 오늘날 기도할 때에 방언으로만 기도하고 있는 자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잘못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지금 귀신에게 붙들려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다(조금 있다가 글을 보라).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만능기도라고 생각하지 말라.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신령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착각하지도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기도는 우리의 장래에, 내 영혼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성경을 말한다. 아니 너무나 좋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좋은가? 방언기도가 무슨 기도이길래 내 미래와 내 영혼에 그렇게도 유익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방언통역의 은사는 대체 어떤 것이며, 또한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사실 방언과 예언은 말하는 주체가 정반대이며, 대상도 정반대다. 그래서 오늘은 방언과 방언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의 놀라운 비밀들과 그 실제에 대해 공부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기도하는 방법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을 사용해 기도를 드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영을 사용해 기도를 드리는 방법이다. 마음을 사용하는 기도는 입으로 기도를 발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때 입으로 드리는 기도를 "일반적인 기도"라고 정의해본다면, 영을 사용해 드리는 기도는 "방언기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기도에는 둘 다가 필요하다고 하였다(고전14:15). 그렇다. 우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도 드려야 하지만 또한 영으로 드리는 기도도 드려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방언기도를 비교해 보면서, 방언기도가 가지고 있는 단점과 아울러서 방언기도가 가지고 있는 유익한 점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지금보다 한층 더 깊어지고 넓혀지기를 바란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기도하는 2가지 방법을 알게 되면 우리의 기도의 영역은 매우 확장되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도 놀라운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2. 오늘날에도 방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어떤 믿는 이들 중에는 방언이라는 것이 이미 초대교회를 끝으로 사라지고 없다고 말한다. 성경을 기록하던 시대나 방언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지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때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도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방언 곧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외국어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근거가 고전13:10에 분명이 나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질 것이다(고전13;10)"는 말씀은 그 뒤의 문맥을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그때가 언제인지가 말이다. 그때는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때라고 분명히 쓰여 있다(고전13:11~13). 그렇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예언도, 방언도, 지식의 은사도, 믿음의 은사도, 구제의 은사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때에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던 성령이 지금 우리가 받는 성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존재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3. 방언이란 무엇이며, 방언통역과 함께 나오는 예언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이란 무엇인가? 방언(헬라어로, 글로싸)이란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방언은 기도의 일종으로서 영이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고전14:14). 그러므로 방언이란 그 자체만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방언은 자신의 영이 오직 하나님께 말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그렇지만 그것을 통역해보면, 내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기도하는 방법에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고 또 하나는 영으로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이것 중에서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한편, 방언과 맞물려 있는 예언이라는 것도 있다그렇다면 예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이 무엇인지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해서 설명하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예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정확히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방언이 내 영이 하나님에게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예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과 예언은 어쩌면 그 시작과 끝을 보면 정반대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방언기도가 내 영이 하나님께 올리는 소원기도라면, 예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예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방언을 하게 되었고 이어서 방언통역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대부분 예언의 은사도 동시에 올 것이다. 즉 방언통역을 할 줄 아는 은사자가 대부분 예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 살펴보면, 방언통역과 예언은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방언통역이란 내 영이 드리는 기도를 남이 통역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다른 은사가에게 나에게 전달해주는 것이다.

 

4. 방언기도의 단점은 무엇인가?

  방언기도는 사실 매우 유익한 기도다(조금 있다가 더 살펴볼 것이다). 그렇지만 방언기도도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딥다 방언기도만 하고 있는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도를 하는데 아예 일반적인 기도는 전혀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방언으로만 기도하고 있는 자는 지금 기도를 잘못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귀신들에 점령당한 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영이 말하게 되 이유가 성령께서 터치하실 때만 있지 아니하고, 귀신들이 내 영을 터치할 때에도 내 영이 반응하여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귀신이 그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어떤 사람의 영을 터치하게 되면, 그 사람도 방언을 말할 수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귀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영은 아우성을 치고는 것일뿐 그 사람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방언기도하다가 지옥에 떨어질 사람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만을 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반드시 방언기도에 앞서 반드시 마음으로 사용하여 입술로 기도하는 일반적인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방언기도가 갖고 있는 단점은 무엇인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방언기도가 매우 유익한 기도이기는 하지만 통역하지 아니하면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도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고전14:6~11)(물론 방언통역을 통해서 자신의 영이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방언기도가 전혀 답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게 된 자는 반드시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방언기도가 무슨 내용인지를 알고 기도한다면, 더욱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방언기도가 좋은 기도이기는 하지만 오직 나를 위한 기도만 할 수 있을 뿐 남을 위한 중보기도하는 방언은 없다는 것이다(고전14:4). 그렇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은 오직 자신을 세울 뿐이라고 했다(고전14:4). 방언으로 교회를 건축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사실 내 자신에게는 매우 유익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방언을 통역해 보면 알겠지만, 방언은 오직 내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사용해서 남을 중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내 영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일 뿐, 남을 위한 중보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남을 위한 중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일반적인 기도로(특히 통성기도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셋째, 방언기도가 좋기는 해도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고전14:14)사도바울은 말했다. "만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을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14:14)" 그렇다. 마음으로 드려야 할 기도를 방언기도가 대신할 수는 없다.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할 기도가 있다면 일반적인 통성기도로 기도하라.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반적인 기도는 바로 "회개기도"라는 것이다.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일 뿐 거기에는 회개하는 기도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개는 반드시 마음으로 그리고 통성으로 기도해야 한다. 또한 지금 당장 필요한 마음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도를 드려야 한다. 방언으로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언을 통역해보면, 보통 내 영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주여, 제가 겸손해지기 원합니다. 주여, 제가 더욱 더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주여, 제가 더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를 주님이 쓰기에 합당한 도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처럼, 방언기도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서 바라는 사람이 되어지도록 간구하는 기도인 것이지, 지금 당장 어떤 필요를 채우기 위한 기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번에 치를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하는 기도나, 이번에 아파트가 꼭 당첨되어야 하는데 당첨받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내 영은 절대 기도하지 않는다.  방언은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며, 주님처럼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고, 주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어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를 원하는 기도들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의 언어로 기도하기를 바란다.

 

5. 방언기도의 유익한 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언기도의 단점을 뒤집어놓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방언기도의 단점을 통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 방언기도의 유익에 대해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내 영이 나의 미래를 놓고 기도하는 것이기에 미래의 나를 위해서는 매우 유익한 기도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빚어서 쓰시는 사람이 되어가도록 하는 기도에는 방언기도만큼 좋고 유익한 기도는 없다. 방언기도는 오직 나만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도록 내 영이 소원을 아뢰는 기도가 방언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방언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기도이기에, 나의 미래를 열어가는 선구자적인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미래를 밝게 아름답게 그리고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열어가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더욱 더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힘쓰라. 그리고 이제 둘째와 셋째와 넷째는 방언기도를 오래 해 본 경험에서 우러 나온 장점들이다. 둘째, 방언기도가 유익한 것은 방언기도가 다른 영적인 은사들을 달고 나오는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방언을 말하게 된 자가 방언통역의 은사도 받게 되고, 또한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방언을 말하지 못한 자가 방언통역을 하지는 못하며, 예언을 할 수도 없다. 아직까지 그런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고 경험한 적도 없다(이것은 경험으로 안 것임). 셋째, 방언의 은사는 우리의 기도생활 가운데 오래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매우 유익하다.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고 마음을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기도하다보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기도하면 기도할 것들이 더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면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도를 드린 후에 기도할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에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는 매우 유익하다. 왜냐하면 기도를 끊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방언기도는 오직 나의 미래를 열어주는 기도이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방언으로 기도하게 된다면, 현재의 나의 필요와 궁극적이 나의 필요가 동시에 하나님께 아뢰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에 양날개를 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넷째, 방언기도는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서 귀신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기에 내 영의 필요를 간구하여 영디 훨씬 더 강해지기 때문에 유익하다. 또한 같이 기도하는 다른 성도들도 방언기도는 결코 알아들을 수가 없다(물론 성령이 통역시키실 때에는 아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내 영의 기도이기 때문에, 내 영이 더욱더 강건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방언기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기도다. 그러므로 더욱 더 내 영을 견고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방언기도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 기도만이 나온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할수록 내 영이 더욱 더 견고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많이 한 자는(물론 올바른 환경에서 기도하는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영이 튼튼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누구든지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더불어 기도하는 다른 분들도 내 기도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때문에 때로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유익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옆에 있는 분이 내 말로 드리는 일반적인 기도를 듣고서 내 흠을 발설할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처럼 방언기도는 나와 내 영과 나의 미래를 위해 매우 유익한 기도임을 알라.

 

6. 나오며

  방언기도는 참으로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은사는 주님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있을 은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에 대해 성령으로 말했던 사도바울의 권면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나는 너희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더 방언을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전14:18)", 그리고 "내 형제들아,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전14:39)" 하지만 우리도 방언을 말할 때에는 품위있게 말해야 하며, 질서있게 말해야 한다. 고로 방언기도는 절대 공중예배 때에 사용해서는 아니 되는 기도다. 만약 공중예배 때에 누가 방언으로서 대표 기도를 드린다면, 누가 과연 그 기도를 알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겠는가?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내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기도하는 순서를 앞뒤로 바꾸지는 말라. 통성으로 기도하는 기도를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방언으로 기도하라. 통성기도가 더 우선인 것이다.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는 맨 처음에 회개하는 기도를 먼저 하라. 다시 말해, 통성으로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드린 후에 방언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 순서를 잘 지키지 아니하면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가 있다. 왜냐하면 회개치 아니함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를 귀신이 사로잡는 경우가 많이 때문이다. 혹시 나는 방언으로만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중에는 귀신이 성령으로 가장하여 찾아와 뭔가를 보여주기도 하고, 뭔가를 들려주기도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주님이 보여주신 환상이라고 생각하기도하고, 그것을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속지 말라. 그것은 다 귀신들의 장난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무조건 통성으로 기도하기를 먼저 하라. 그래야 영적으로 막혔던 것이 순간적으로 확 뚫리게 된다. 그래야 곁에 있던 귀신들이 얼어붙어버리게 된다. 회개해서 예수님의 피를 요청하면, 귀신도 꼼짝 못한다. 그러므로 통성기도와 방언기도를 병행하여 기도하는 것이 좋다. 통성으로 기도하여 회개하고 마음의 소원을 아뢴 후에, 이어서 내 영이 드리는 기도를 드리라. 그러면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건투를 빈다.

 

2018년 3월 25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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