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가운데에 말의 은사에는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의 은사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소나무 몇 개의 뿌리를 뽑으면 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무엇에 주의하며 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은사는 받았지만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바깥 어두운데 떨어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2021-09-29(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2) 방언과 예언의 은사 받는 법과 그것의 활용(고전14:20~4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NUiRQRaTzU  [혹은  https://tv.naver.com/v/22704033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 중에서 은사에 관한 부분은 12장부터 시작하여 14장까지 게속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은사의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 속해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자기의 덕만을 세운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방언을 마치 자신의 영성을 자랑하기 위한 잣대로 삼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방언의 은사 사용을 교정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12장부터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더불어 직분의 은사를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 14장에 들어와서 비로소 방언의 한계와 그것을 사용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언도 좋은 은사에 해당되지만 방언은 예언에 비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공중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과 예언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은사인지를 살펴보고, 방언이 지닌 한계점과 그것이 교회의 공예배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린도전서 14:20~40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들어와서 드디어 은사들 중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방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바울은 방언 통역이나 예언도 방언과 함께 다룬다. 이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말하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방언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면서,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방언 통역과 예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견주어 비교하고 추천할 많은 은사가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방언의 은사보다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19의 단락을 통하여, 방언이란 어떤 것이며 교회의 덕을 세움에 있어서 방언은 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방언보다는 예언이 상대적으로 유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20~25절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상반된 역할에 대해서 다룬다. 즉 이 두 가지 은사가 성령의 은사를 믿지 않는 자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26~40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할 때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사도는 그것들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까지도 같이 알려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 사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서와 품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은사에 대한 말씀을 마치게 된다. 

 

3. 방언과 예언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이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사실 방언과 예언은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서 '방언 통역'의 은사와 더불어 '말'의 은사에 속한 은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방언'과 '예언'은 그 목적에 있어서 거의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교회를 세워 주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방언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남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과 예언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먼저, 첫째로 방언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자. 방언은 한 마디로 개인의 덕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할 수 있다(고전14:4). 왜냐하면 방언을 통역해 보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주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약 80~90%정도이며, 자기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약 10~20%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3가지 정도로 나온다. 하나는 위로과 격려의 말씀이 나온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모든 사람이 내 교회를 버리고 떠날 때에 너 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아 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너의 진심 어린 기도를 내가 들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앞 길을 친히 인도해 주마." 라는 말이 나온다. 또 하나는 책망(꾸짖음)과 폭로의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너는 왜 나의 종을 쫓아내는 일에 앞장을 섰느냐? 내 종은 내가 판단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종은 내가 세웠으니 내가 판단할 일인 것인데, 네가 네 손으로 그 종을 쫓아내었으니 네가 만일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와 너의 집을 향한 나의 징계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니라."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사명과 과업에 대한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이 땅에 보낸 것은 너만 믿고 구원 받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네가 회개함으로 네 자식과 네 집안까지 일으켜 세우라고 내가 너를 보낸 것이다. 너는 네가 했던 일에만 만족하지 말고, 이제는 너의 눈을 들어 너의 가족과 너의 가문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고로 이렇듯 방언의 내용이 위로와 격려, 책망(꾸짖음)과 폭로, 사명과 과업에 대한 메시지인 것을 가정해 보면, 그것이 예언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방언은 이러한 말씀을 방언하는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을 믿지도 않은 자나 불신자가 방언을 듣는다면, 아마도 그들을 미쳤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로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자. 예언은 사실 방언과 비슷한 은사이면서도 방언과는 좀 성격이 다르다.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방언 통역이란 방언하는 자의 말을 통역자가 듣고 그것을 해석해 주는 것이지만, 예언은 성령께서 내 영에게 주신 말씀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예언도 마찬가지로 주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만을 뚝 떼어놓고 본다면 그것이 통역되어 나온 방언인지 혹은 예언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예언에는 상대방의 영이 드리는 기도가 들어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정말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예언으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6가지 측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첫째는 권면과 위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전14:3). 그리고 둘째는 책망과 판단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고전14:24). 또한 셋째는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도 같이 수행한다(고전14:25,31). 왜냐하면 예언을 통하여 상대방이 감추고 있는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사람을 책망하여 결국 그를 회개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예언을 모든 회중이 같이 듣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를 제일 싫어하시고 또한 어떤 일을 매우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예언은 많은 사람을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게 된다(고전14:25). 

 

4. 공적인 예배시 방언과 예언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바울은 이제 공예배시에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첫째로 공중예배 때에 등장하는 예배의 요소들 곧 찬송시나, 가르치는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이 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에 팔요한 것임을 지적한다(고전14:26).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공중예배시 방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설명해 준다(고전14:27~28). 즉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에는 첫째, 방언하는 자를 두 명 내지는 세 명 정도만을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중구난방식으로 방언하게 하지 말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차례대로 방언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교회에서 방언을 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하는 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온 회중이 들어서 알게 하라고 하였다(고전14:27). 만약 교회에 이렇게 통역할 수 있는 자가 없다면 방언은 결단코 공중예배시에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혹시 방언을 하고 싶다면 그때에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에게만 말하라고 하였다(고전14:28).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공중예배시 예언을 할 때에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했다(고전14:29~32). 이때에도 역시 방언 통역 때와 마찬가지로, 첫째, 예언을 두 명이나 혹시 많으면 세 명 정도만을 선별하여 예언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 역시 이것도 차례대로 질서있게 해야 하며, 셋째, 예언이 끝나면 예언의 내용을 100%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 마귀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하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언이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보통 상대방을 보면서 그때 자기의 마음에 주님께서 떠오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예언하는 자의 마음과 발성 기관을 거치면서 예언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언하는 자가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았다든지, 하나님 앞에 불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은사를 사용하게 되면 예언이 잘못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언할 때에도 성령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사람이 예언을 할 때에 다른 이에게서 또 예언이 나오면, 그때에는 전에 예언하고 있던 자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지만 그 예언이 틀리게 전달될 경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 예언을 막으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뒤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에 제제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고전14:32).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 중에 부르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5. 모든 교회에서 여자는 항상 발언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은사 사용에 있어서 질서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고전14:33). 그러므로 공중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할 때나 예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차례를 따라 순서대로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고전14:27~28). 이어서 바울은 모든 성도가 교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창3;16),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어떤 질서를 정해 주셨으니, 그것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으로서 질서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고전11:3). 그러므로 여자가 교회에서 자꾸 말하다 보면 교회가 소란스럽게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태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을 보더라도 여자는 뱀에게 계속해서 말을 한다. 이때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함으로 인하여 여자가 먼저 꾀임을 받아서 죄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굳이 여자가 말을 하려고 한다면 직접 나서서 말하기보다는 자기의 집에서 자기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소란스럽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에게 묻지 않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대원칙과도 같은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참고로 이러한 명령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강요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성을 갖기를 위하여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자는 어떤 생각으로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은사의 사용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두고서 자기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서 그것을 정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권면한다(고전14:36). 그리고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직접 개척하고 세웠던 사도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교회에게 좀 더 강경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영적인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거나 모르는 자가 자기를 선지자나 영적인 자로 자처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라고 말했다(고전14:38). 그는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7. 방언과 예언 및 은사 사용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 이렇게 마무리 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있으며,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고 있어라(고전14:39)" 그렇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영적인 것을 사모하려면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더 사모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것일 뿐 교회의 덕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은사를 구하는 대원칙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방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금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방언이 마치 구원의 확실한 표적인 것인 양 떠들어대는 교단도 있으며, 반대로 방언을 지나치게 무시한 나머지 방언을 고린도 현상 내지는 귀신들의 장난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양쪽 다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이다(고전14:18). 왜 그런가? 방언이야말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다른 은사들을 받게 하는 일종의 첫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요, 방언을 많이 말할 때에 다른 은사들도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에는 2가지 태도를 꼭 지켜 줄 것을 권면하였다(고전14:40). 그것은 품위있게 은사를 사용하고, 질서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내가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그 은사를 최고로 여긴 채 함부로 사용하여서 교회를 소란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때로는 가진 은사라도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으며,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될 때까지 때로는 기다릴 필요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더 성숙한 은사자의 통제가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귀신의 밥이 될 확률이 매우 크며,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 바깥 어둔 데에 내던져지는 이들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8.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신령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영적인 것들을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 그런데 너희들은 더욱더 예언하기를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고전14:1)". 그렇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으려면 이러한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은사를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인가? 그것에 관하여는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니, 첫째,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의 은사는 다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시는 은사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신 은사들이 대부분인데 기도도 많이 하지 않으려 하면서 은사들을 사모하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은사는 예언의 은사의 경우처럼 그것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로 혼합되어 밖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진 상태에 있으면서 은사를 사모하여 은사를 받게 된다면 그 더러움은 누가 과연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회개를 하지 못해 청결하지 않는 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성령과 함께 동시도 귀신도 역사하여, 귀신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나게 한 것을 성령이라고 함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들은 누가 또 책임을 지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청결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모든 은사는 섬기기 위해 주어진 은사이므로 주신 하나님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은사를 다른 지체를 섬기라고 주어진 은사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을 제외한 모든 은사들은 다 남을 섬기라고 주신 은사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려 하고, 그것을 남을 위해 섬기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것을 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는 반드시 자신을 주님께서 헌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은사가 좋다하며 간구했다가 결국 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묶어 둔다면, 결국 주님 앞에 책망받을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은사를 받기 사모하는 자는 남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섬기는 은사이기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남을 섬기기를 더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남 섬기기를 자기를 섬기는 것보다 우선할 수 있는 자가 은사를 간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이 은사가 과연 최고의 은사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는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고로 바울은 모든 은사들은 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주어지는 은사이니만큼,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그래도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데에는 그만한 은사가 없기 때문에 방언 말하기를 금해서도 아니 된다고 하였다.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신령한 은사는 방언 통역의 은사요 예언의 은사이니 이러한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특별히 조금 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 경우에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은 거의 비슷한 은사라는 것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달랐다. 어떤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없고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을 유창한 발언을 따라 신령함의 정도로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결국 바울에 의해 크게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교정을 받아야 했다.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공예배시에 사용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을 세우라고 하였고,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때에는 잠잠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큰 소리로 내뱉는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제일 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최초로 나타났던 예루살렘교회가 그랬고, 이어서 이방인 최초로 믿는 자였던 고넬료 가정에서도 그랬으며, 베드로의 뒤를 이어 이방인 선교에 집중했던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렇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언이 만사 형통의 방법은 결코 아닌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는 아무런 유용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방언은 결코 회개를 대신할 수 없으며, 방언은 결코 자신의 성품을 바꾸어 주지도 못하며, 방언으로서는 감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언을 비롯한 신령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하기 위해 그러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더불어 진정 남보다도 더 십계명을 지키면서 성결한 삶을 살려고 하면서 은사를 구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시간을 다른 지체를 섬기려는 의도에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어찌되었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는 사역자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다운로드(1)] 고린도전서강해(22) 방언과 예언의 은사 받는 법과 그것의 활용(고전14,20_40).pdf

[첨부파일 다운로드(2)] 고린도전서강해(22) 방언과 예언의 은사 받는 법과 그것의 활용(고전14,20_40).pptx

 

2021년 09월 29일(수)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방언, 진짜 100%가짜인 것일까?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 중에는 귀신방언도 있는 것일까? 우리 통합측 교단의 원로격인 N목사님께서 최근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작년 12월달부터는 아예 공개적으로 방언문제를 거론하고 계신다. 요지는, "지금 한국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은 100% 가짜로서, 아무 뜻도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방언 중에는 귀신방언도 있어서,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방언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도 모르고 방언기도를 하는 자들이 있다." 이분은 성경을 적어도 200독이상은 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1977년부터 초교파적으로 성경통독세미나를 인도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 성경통독세미나를 다녀가신 분들도 적지 않다. 적어도 5천명이상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는 페이스북에 이 사실을 공포하기 시작했는데, 그분의 페이스북에 팔로워로 가입된 목사님들만해도 5천명이 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러한 주장은 한국교회에서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교회는 수 십 년동안 귀신들의 장난에 놀아난 꼴이 되고,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방언기도를 그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순복음교단이나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 같은 경우에는 수 십년 동안 방언을 해 왔고, 오늘날에 와서는 장로교회마저도 거의 대부분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데 큰 일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문제는 방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2. 방언기도는 100% 가짜라고 주장하는 통합측 교단의 N목사님


  N목사님의 주장을 요약하면 3가지다. 첫째, 우리가 성경을 보고 알고 있는 방언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방언이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방언이 맞겠지하고 있지만, 사실은 성경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방언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알고 하지만, 사실은 이를 증거해줄만한 성경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구절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거나 오역이라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 역사상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 즉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A.D.55년 이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였으니까 바울이 그것을 교정해줌으로 가짜방언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 들어와 갑자기 나타난 방언은 가짜라는 것이다. 적어도 교회사 가운데 약 1,500~1,700년동안 방언이 없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언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셋째, 20세기에 들어와 갑자기 등장하는 방언은 대부분 신사도나 빈야드 운동 쪽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교회의 방언의 시초는 이용도목사인데, 이들은 다 가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더 방언은 믿을 수 없고 틀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그분의 여러 편의 동영상을 보면, 그분의 주장은 확고하기만 하다. 이단소리를 들어도 괜찮고, 지구끝까지 가서라도 변론하겠다는 마음 같으시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N목사님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분의 주장은 이렇다.


  첫째, 성경에서 방언이 실제적으로 교회 가운데 나타났던 것은 4가지 경우 밖에 없다. 예루살렘교회(행2장)와 고넬료가정(행10-11장). 그리고 에베소교회(행19장)와 고린도교회(고전12-14장). 그런데 이 교회들 중에서 앞의 3개 교회는 진짜 방언을 했지만, 고린도교회는 가짜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즉 앞의 3개 교회의 방언은 사람이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서 지방언어 즉 외국어방언이었지만, 고린도교회에서 나타난 방언은 가짜방언이었기에 바울의 교정편지를 받고 또한 디도의 방문을 통해 방언을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의 의미의 방언은 예루살렘교회, 고넬료가정, 에베소교회 뿐이었고 그 뒤로 방언의 역사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말, 방언의 역사가 초대교회를 끝으로 그쳐버린 것일까?


  둘째, 무엇보다도 방언이라고 번역된 성경의 단어 중 단수(글로싸)는 오직 고린도전서 14장에서만 나오는데, 그것은 사람도 하나님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기에 그 방언은 가짜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에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들'은 방언이 아니라 외국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예루살렘교회와 고넬료가정과 에베소교회의 방언들도 다 '방언들'이라는 복수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 방언은 다 사람들이 듣고 알아들을 있는 지방언어 즉 외국어방언이었다고 주장한다. 정말, 사도행전과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이라는 단어는 전부 다 외국어방언을 가리키는 것일까?


  셋째, 더욱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은 일본어성경과 더불어, 보는 이가 잘못 이해하기 좋게 오역된 성경부분을 가지고 있는데, 유독 방언이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곳에서 오역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고전14장 2절과 고전14:14절이 오역이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방언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개역개정판 한글성경이 오역인 것일까?




3. N목사님의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신약성경의 원전인 헬라어성경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방언에 대한 경험이 없으신 분 혹은 방언을 말하고 있었지만 이 따위 방언을 왜 하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N목사님께서 전하는 영상을 보면, 십중팔구는 방언을 그칠 것이다. 그만큼 확고하게 말씀하기 대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분이 주장이 어디서 어떻게 틀렸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정말 방언의 역사가 초대교회를 끝으로 그쳐버린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방언의 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고전13:8).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첫째는 성경적인 고찰이 필요하고, 둘째는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먼저 성경적인 고찰부터 해 보자. 무엇보다도 사도바울은 방언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임을 고전13장에서 분명히 언급한다.


[고전13:8-12]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8절에 보면, 예언들도 폐할 날이 있고 방언들도 지식들도 폐할 날이 온다고 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12절에 나온 것처럼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의 얼굴이 직접 마주 대하여 볼 날이다. 다시 말해서 그때는 주님의 재림의 때이거나 아니면 지금 죽는다면 지금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의 얼굴을 볼 경우이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방언도 그치지 아니할 것이고, 예언도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언급하고 있다. 


  더불어 방언의 은사는 아무 의미없는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확실히 성령의 은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9가지 은사를 기록하고 있다(고전12:8~10). 그중에 바울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시작으로 예언, 영들분별함들, 방언들, 방언들의 통역 그리고 예언 등이 있음을 기록했다(고전12:10). 그런데 바울은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시해야할 은사 두 가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곧 방언과 예언이었다. 방언과 예언에 대해 바울은 고전13장과 14장 2장에 걸쳐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방언문제 때문에 아주 혼란스러웠었던 것 같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금방 다른 은사들과 구별할 수 있었고, 화려하게 보이고, 뭔가 있어 보였기에 너도나도 할 것없이 방언하는 일에 열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교회 구성원의 축에도 못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서도 방언의 은사야말로 가장 신령하며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고 방언을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갓 들어온 초신자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 방언으로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는 미쳤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거나 등지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전14:24).그것도 공예배 시간에 그렇게 방언으로 떠들어댔으니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신령한(영적인) 은사임에 틀림없지만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기에,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할 경우에는 방언을 사용하지 말 것을 지도할 필요가 생겼다. 사실 당시 공적으로 예배하기 위해 모였을 때에 그들은 찬송시로 찬양했으며,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르쳤고, 또 어떤 사람은 계시를 말했으며, 또 어떤 이는 방언을 했고 통역도 했던 것이다(고전14:26). 그러나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을 하지 않으려면 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오직 하나님에게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방언을 하려고 한다면, 통역을 세울 것이며, 그것도 무작정 방언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차례를 정해서 2명이나 많으면 3명이 방언으로 하고 곧바로 통역을 하라고 권면했던 것이다(고전14:27~28).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방언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며, 신령한(영적인) 것이며 아주 특이하면서도 특별한 은사라는 점이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일종의 언어이지만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서,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영의 기도라는 것이다(고전14:2). N목사님은 방언을 말하는 것과 방언기도를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딱 2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방언으로 찬송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고전14:14~15).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곧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요 자신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맞다(고전14:14). 그리고 그것을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14).  


  이제는 역사적인 고찰을 해 보자. A.D.55년 이후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그쳤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명확한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방언으로 기도 안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것 같아 그것을 숨겨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할 수 없는가? 한 때 장로교에서는 방언으로 기도하고 싶어도 교회에서 허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회에는 안 알리고 혼자서 방언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다고 방언이 없었다고 단정하거나 방언이 그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도베드로의 오순절설교처럼 말세에는 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줄 터인데, 그때에는 사람의 신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성령의 은사들을 부어줄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말세지말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20세기에 들어와서 방언의 은사를 더 강력하게 많이 부어주신 것은 아닐까?



  둘째,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들이라는 단어는 전부다 외국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데 그게 정말 맞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방언이 단수로 쓰이거나 복수로 쓰인 것은 그 방언을 말하는 주체가 단수일 때에는 단수로 쓰였고, 복수일 때에는 복수로 쓰인 것인 것 뿐이다. 방언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나온다고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외국어라고 결코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N목사님께서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일부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거지를 쓰는 것 같다. 그렇지만 N목사님은 예루살렘교회에 나타난 방언들과 고넬료가정과 에베소교회에 나타난 방언들이 전부 복수로 쓰였기에 전부 외국어 방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주어가 복수였기 때문에 방언들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을 뿐이다. 어찌 그것을 가지고 방언들이 전부 외국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


  자, 성경의 용례를 직접 살펴보자. 먼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방언은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루살렘교회의 방언은 외국어방언을 포함하고 있는 방언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15개 국가의 외국어 방언이 그날 터졌기 때문이다(행2:5~11). 그래서인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때 터진 방언을 일반적으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으로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 '글로싸(GLOSSA)'의 복수형으로 쓰기도 했고, 때로는 그냥 언어나 말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즉 '디아레크토(DIALEKTW)'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예루살렘교회에 성령께서 표적으로 주신 방언의 은사가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뿐만 아니라 외국어방언도 같이 터져나왔거나, 아니면 전부 외국어로 된 방언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리라고 추정해본다.  


하지만 행11장에 나오는 고넬료가정에 모인 사람들이 행한 방언이나 19장의 에베소교회가 행한 방언 그리고 고전12,13,14장에 나오는 방언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디아레크토'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전부 '글로싸'의 단수형태이든지 혹은 복수형태로만 사용되고 있다. 아마도 나머지 교회에서 터진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 터진 외국어방언이 아니라 전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즉 '글로사'가 터진 방언이었으리라 추정해 본다.



잠깐, 여기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은사로서의 방언에 관한 본문을 확인해 보자.


<예루살렘교회의 방언>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글로싸'의 복수형)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디아레크토')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디아레크토)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글로싸'의 복수형)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고넬료집안사람들의 방언>

[행10:46] 이는(그들이)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고넬료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가리킨다(행11:24)


<에베소교회의 방언>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그들이) 방언('글로싸'의 복수형)도 하고 (그들이) 예언도 하니

<---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12명의 에베소성도들을 가리킨다(행19:7)


<고린도교회의 방언>

[고전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것이라

[고전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글로싸'의 복수형)과 천사의 말( '글로싸'의 복수형)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글로싸'의 복수형)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4:2]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14:4]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글로싸'의 복수형)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글로싸, 단수)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글로싸, 단수)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원문은 '방언' 안에서, 단수구문)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22] 그러므로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고전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글로싸, 단수)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글로싸, 단수)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만약, 여기서 N목사님의 주장대로, 방언의 복수형태를 전부 '외국어들'로 바꾸어서 번역해보자. 얼마나 우스운 번역이 되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고전14:22] 그러므로 외국어들('글로싸'의 복수형) 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이 문장을 보라. 외국어들을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인가? 이 세상에는 외국어를 2개 3개쯤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외국어들을 말한다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고전14:5]나는 너희가 다  외국어('글로싸'의 복수형)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외국어('글로싸'의 복수형)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지금, 고전13장과 14장은 고전12장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 가운데 예언과 방언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장들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외국어를 말하는것을 원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가서 외국어들을 공부하라는 말인가? 지금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4:6). 여기에 어디 외국어가 끼어들 수 있다는 말인가? 다만 '너희'라는 주어가 복수이기 때문에, 바울은 '글로싸'의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 우리말 성경본문이 오역이 있어서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진정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에 다소 미흡한 번역이 있기는 하지만, 방언에 대해 나오는 성경구절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분이 오히려 N목사님이신 것 같다.


그 목사님께서 오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구절들 중에서 우선 2군데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고전14:2을 보자.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N목사님은 고전14:2은 부정적으로 번역해야 했었는데 그만 긍정적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방언에 대한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분은 특히 역접접속사(헬라어 '데(DE)' = 그러나)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것을 빼버려서 오역이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과 다르다. N목사님은 고전14:2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한다고 하지만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오해하셨다. 일부러 그렇게 잘못 번역하신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본문에 역접접속사인 '하지만'(헬라어 '데')이라는 단어는 거기에 넣어서 번역해서는 아니 된다. 사실 고전14:2의 본문은 세 문장이 합해진 문장이다. 자, 고전14:2의 원문을 직역해 보자.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혹은 오직)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역접접속사(헬라어 '데')는 두번째 문장에 들어있지 않다. 맨 나중 문장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 말은 부정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N목사님은 일부러 이 본장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역접접속사를 중간으로 끌어다가 사용하여, 부정적인 문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맨 나중문장에 나오는 역접접속사를 중간문장에 끼워넣어서 오역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고전14:14도 오역이라고 주장한다. N목사님은 고전14:14은 가정법의 문장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가정이므로 부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틀린 것이다. 가정법도 실현가능한 가정법이 있고 실현불가능한 가정법이 있다. 특별히 실현불가능한 가정법은 그 문장이 가정법 과거이면서, 가정법을 달고 오는 접속사가가 "에이(ei)"라는 단어가 쓰이는 경우 뿐이다. 그러나 고전14:14은 가정법 현재구문이다. 그것은 어떤 동작이 계속되거나 반복되거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런데 N목사님은 고전14:14이 가정법 현재의 문장인데도, 가정법 과거의 에이(EI) 구문으로 해석하고 계신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고전14:14은 만약 가정법 현재의 문장으로서,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가 에안(EA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만약, N목사님의 주장대로, 가정법 현재 문장이 실현불가능한 것을 가리킨다고 십분 양보해보자. 그러면, 아래의 가정법 현재의 문장을 어떻게 번역해야 옳겠는지 살펴보라.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접속사 '에안'이 이끄는 가정법 현재 문장으로서, 고전14:14과 같은 문장).

이것은 부정문으로 해석해야 할까? 아니다. 사람의 손은 언제든지 범죄할 수 있다. 긍정문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손이 범죄하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고전14:14이 가정법 현재 구문이니 실현불가능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본문은 바울은 방언(글로싸)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자신의 영인 계속해서도 기도하는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이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음(이성)의 열매를 맺을 수 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나오며


그렇다. 무턱대고 남이 이야기한다고 해서 검증도 안해보고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방언의 은사, 분명 성령이 주는 은사임에 틀림없다(고전12:10).  물론 신사도나 빈야드 운동하는 데에서는 거짓방언을 하면서도 그것이 진짜 성령이 주는 방언이라고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주는 은사가 분명 있긴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신령한 9가지 은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은사 2개를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라고 했다(고전14:1-5).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무시해서는 아니된다.


방언의 은사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기도다(고전14:14).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기도인 것이다(고전14:2). 자신의 영의 기도인 것이다. 그러니 방언은 헛소리라고 말하지 말라.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에는 딱 두 가지만 있다는 것을 아는가? 하나는 기도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으로 하는 일에, 방언기도가 있고 방언찬양이 있다고 했다(고전14:14~15). 방언기도, 하지 말아야 할 기도가 아닌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가짜방언이나 혹은 귀신방언이 아닌,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통회자복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받게 되는 것 같다. 조용히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가짜방언을 받았을 것이다. 회개도 아니하고 대충 누구에게 안수받아서 방언하려고도 하지 말라. 그것은 진짜 방언이 아닐 수 있다. 사탄은 수동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귀신을 집어 넣는다. 검증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머리 디밀지 말라. 귀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언의 은사를 맹신하지 말라. 사도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고전14:4~5). 즉 교회를 튼튼히 세우는 데에는 방언의 은사가 별로 유용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방언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라(고전14:14-15).


그러므로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드릴 때에는 방언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언이란 사람에게 말하는 것으로서, 딱 3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는 책망하는 것이요(고전14:24~25,31) 또 하나는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며(고전14:3), 마지막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고전14:31).


정 공중예배 가운데 방언을 말하고 싶으면, 방언통역을 세우서 방언하라(고전14:13,27).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제대로 방언을 통역해줄 사람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 분명이 있기는 있지만 그것을 통역해주는 사람이 드무니 참 안타깝기만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사실 방언중에는 가짜방언은 있기는 있지만 많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가짜통역이 수두룩할 뿐이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가짜방언통역에 속아 살아왔던가? 다미선교회 사람들의 가짜방언통역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혼란이 있었는가?


그렇다고 해서 방언하는 것을 그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방언은 분명 자기를 세워주기에 유익하다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4,28). 특히 자기의 영을 강하게 해 준다(고전14:2,14).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이 강해져야 한다. 방언기도란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청원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하는 것을 쉬지 말라. 혼자 있을 때에는 정말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라. 사도바울은 방언기도를 더 한다고 고백했다(고전14:18). 그러니 혼자 기도할 때에는 방언기도에도 신경을 쓰라. 물론 어떤 사람은 방언기도를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고전12:30). 하지만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말라. 교회로 모여 예배드릴 때에는 마음(이성)으로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하겟지만 혼자서 기도할 때에는 꼭 방언기도를 사용하라.


왜 방언기도를 그치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한지 아는가? 그것이 비록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기는 하지만 왜 방언기도를 해야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마침내 기도가 죽기 때문이다. 기도가 죽으면 성령이 역사할 수 없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는 촛대가 옮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방언기도를 하지 않고 그냥 우리말로 기도해보라. 그러면 몇 시간이나 기도할 수 있겠는가? 아마 얼마 못가서 기도가 안 나올 것이다. 그러다보면 점차 더 기도시간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다보면 기도를 쉬게 될 지도 모른다. 사탄은 이것을 미리 알고 방언기도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기도의 불을 끄려고 하는 것이다. 기도의 불이 꺼지게 되면 과연 어떻게 성령이 역사할 수 있겠는가? 사탄은 방언기도를 쉬게 하므로 기도의 불을 꺼트려 성령의 사역을 중지시키려는 간교한 속임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도가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면 촛대가 그 교회에서 옮겨질 것이 뻔하다. 기도하라. 마음(이성)으로 기도하든지 방언으로 기도하든지 기도하는 것을 쉬어서는 아니 된다.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해서 하려면 마음(이성)으로 드리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방언기도가 가짜라느니, 방언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느니, 방언은 헛소리라느니, 방언이 귀신소리라느니 주장하지 말라. 그것은 기도를 쉬게 하는 사탄의 전략이다. 가짜방언은 분별해내면 되지 않겠는가?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대로 기도하기를 힘쓰라.


나라와 민족과 교회, 목회자와 가정을 위해 기도해왔는가? 그러면 그때부터는 자기의 영을 위해 기도하라. 방언을 사용하여 기도하라. 오늘날에 대여섯시간 혹은 하루종일 기도한다는 사람의 대부분은 기도분량의 80%가 방언으로 하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남을 위해 중보하는 기도를 했으면 이제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방언기도, 주님이 오시게 되면 더 이상 그러한 기도를 하라고 명령해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날에는 더 이상 통역도 필요없을 것이다. 그냥 말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언어를 지금 우리가 여기서 따로 배울 필요도 없다. 그냥 가보면 된다. 하지만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우리는 마음(이성)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해야 한다. 언젠가는 방언기도도 그치고 예언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 쉬지 말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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