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58) 바울의 설교를 듣고 왜 유대인들은 거부했지만 이방인들은 환영했는가(행13:44~52)_2022-10-19(수)

https://youtu.be/S6_QC2fOusw  [혹은 https://tv.naver.com/v/30428979 ]

 

1.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어떤 설교를 했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나갔다. 그런데 회당장이 그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바울은 최초로 설교를 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결국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께서 오셨다고 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과 그들의 통치자들에 의해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는데 이는 시편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얻게 되는 유익을 말했다.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멸망하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고 말했다(합1:5). 한 마디로 짧고 굵은 설교였다. 하지만 바울의 설교는 듣는 이들에게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었으며, 결단을 촉구했다. 

 

2.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러자 바울의 설교를 들은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설교를 들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이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음 안식일에도 그러한 레마 말씀을 들려 달라고 부탁하고는 바울과 바나바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이 되었다. 그러자 온 도시의 사람들이 거의 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회당에 모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두 패로 갈라졌다. 비교적 소수는 바울을 따랐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자 시기 질투심이 났던 것이다. 그러자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기 시작했고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의 유력한 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였고 그 지역에서 쫓아내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정말 주께서 하셨던 말씀처럼 자기들의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다음 도시인 이고니온으로 향했던 것이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말이다. 

 

3.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를 거부했는가?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때 대부분 그의 말을 거절했던 것인가? 그것은 피상적으로 볼 때는 바울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그것을 시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내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들은 회개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38절). 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를 보내 주셨는데 유대인들이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동족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 아니 그 죄를 죄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으며 사람으로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했으니 신성 모독죄를 짓고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안식일마다 구약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구약 성경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39절). 다시 말해 바울이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으로도 결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자, 그 말에 그만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목숨처럼 지켜온 율법인데 율법으로서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바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그것을 수용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바울을 배척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며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이방인들은 왜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뻐했는가?

  그런데 이방인들은 달랐다. 사실 그들이 메시야의 탄생을 위해 한 일이 그때까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이 아닌 것들 곧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약속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또한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을 그들은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고 그것을 기쁨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자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날 영생 안으로 배치된 채 있는 이들로 계속 있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48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5. 오늘날에 믿는 이들 가운데서 유대인과 같은 자는 하나도 없을까?

  놀라운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들려주었을 때에 나타나는 반응은 똑같다는 것이다. 하나는 그것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이들이 있으며, 또 하나는 그것을 수용하고 환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더라도, 한글 성경으로는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되어 있으니까,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개인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헬라어 성경을 잘못 번역한 데에서 오는 오류다. 왜냐하면 헬라어 성경에서는 "영생 안으로 배치된 채 있는 이들로 계속 있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면, 영생을 얻기로 배치된 자는 결코 개인이 아니라 복수로 나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 중에서 구원받을 숫자와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받을 숫자를 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 숫자의 수효만큼 믿게 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이 구원받기로 만세전에 예정되어 있기에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날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던 이방인들 중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의 숫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구원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심을 따라서 되어진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3:5을 보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자가 있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겉옷을 빨지 않는 자는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한다고 했다(계22:14). 예수믿는 자들 중에서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은 성밖에 던져지거나(계22:15) 심지어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시고 있다(계21:8). 우리는 결코 교리나 어떤 신학자의 견해를 따를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런 자에게 구원이 주어질 것이다. 

 

2022년 10월 19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57) 바울이 선교사로서 선포한 첫 번째 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행13:14~43)_2022-10-18(화)

https://youtu.be/AudKrPakUH4  [혹은 https://tv.naver.com/v/30134295 ]

 

1. 바울이 밤빌리아의 버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어떤 도시였는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밤빌리아의 버가(Perga)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비시디아의 안디옥(Pisidian Antioch)이었다. 이곳은 내륙의 큰 도시로서, 여기에도 역시 유대인들의 회당이 자리잡고 있었다(14절). 그러므로 바울 일행은 안식일이 되자 회당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에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먼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이 읽혀졌다. 그러자 회당장이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형제들아, 만일 백성에게 권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때 회당 안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은 오직 회당장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러자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조용하게 한 후에 그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회당에는 유대인들(헬라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행한 바울의 설교는 회당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도시 전체를 흔들 만큼 파급력이 매우 강한 설교였다. 

 

2. 바울은 어떤 설교를 했는가?

  바울은 그 회당에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같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소개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생활 40년,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왕부터 시작된 왕국시대 그리고 다윗왕까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웠는데 그분이 곧 '예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소개한 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약속의 자손이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의 통치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만 죄없는 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려주셨고,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간 많은 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은 시편과 선지자의 글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2:7과 16:10 그리고 사55:3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믿는다면 얻게 되는 유익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분 안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통해서도 얻지 못했던 의롭다함까지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했다. 아무리 말해 주어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통해 바른 결단을 하는 자가 복되다는 것이다(합1:5). 

 

3. 바울의 설교를 들은 회중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러자 바울의 설교를 듣게 된 회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설교 후 바나바와 바울이 밖으로 나갔을 때에 그들이 다가오더니 청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레마 말씀을 꼭 다시 들려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회당 모임이 끝난 후에도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의 많은 수가 바울과 바나바를 뒤따라왔던 것이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있으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이 되었다. 그러자 회당예배 안에는 인산인해를 이룰 만큼 사람들이 꽉 들어차게 된다. 왜냐하면 온 시민들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 회당 안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4. 바울의 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처럼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가져왔고 믿음의 결실까지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의 설교가 대체 어떠했길래 이처럼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것인가? 그것은 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설교는 듣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꿰뚫고 있었고 구약 성경을 즉석에서 인용하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설교는 그가 무엇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인지 분명한 설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증거하려는 설교였다. 바울은 이때 예수님이 누군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져왔고,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하던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했다. 특히 예수님은 다윗의 씨로 오신 분이요, 시편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었다고 설교하였다. 셋째, 그의 설교는 듣는 자들에게 결단까지 촉구하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먼저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분을 믿게 되면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맞이하게 될 비침한 결과까지 선지자의 글을 통해 선포했다. 참으로 짧았지만 그의 설교는 두께가 굵은 설교였던 것이다. 

 

5. 바울은 왜 이처럼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설교인데도, 왜 이와 같이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었을까? 사실 바울에게 이처럼 설교 기회가 주어진 것은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되어진 일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의 철저한 준비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바울은 사실 말씀을 전하는데 특화된 선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 전공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바울은 율법을 전공했던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약 10년간은 오직 기도하면서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 기록된 말씀에 과연 그리스도가 어떤 관계인지를 철저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형론적 성경 해석은 다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며, 이것이 성경에 대한 가장 바른 해석이라는 것을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5:39). 그렇다. 준비된 자를 하나님이 쓰신다. 언제 어느 때든지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슴지 않고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다. 그렇다. 복음전파자나 설교자는 언제 쓰임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떠한가? 나는 정말 언제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는 나를 돌아볼 차례다.

 

2022년 10월 18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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