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7가지 은사는 무엇인가(창12: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1dr5FVJQ5A  [혹은 https://tv.naver.com/v/31023178 ]

 

 

1. 들어가며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과거 우리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는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 동생이라고 속이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인물이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첩을 통해 자식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도 우리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첫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받았던 은사를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에, 그는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매우 뛰어난 신앙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은사를 받은 것일까? 그리고 그가 받은 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신앙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2.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과거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인물이라고 평가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과감히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를 하나님께서 불러냈을 때에는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되어서 담대한 믿음을 갖게된 것일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을 하시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한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면 그 이전부터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었는가? 그것은 창세기 12:1~3의 말씀에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아브라함을 은사론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그는 이때 비로소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나타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도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는 몇 사람 안 된다. 그런데 그 중에 아브라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그에게 깊은 신앙심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한 마디로 그는 이미 영안이 열릴 준비가 다 되어 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3.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신앙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던 시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은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아니 그는 대체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분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가 갑자기 믿음이 커진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은 자신의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가? 창세기 11:31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나선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분명히 그의 아버지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살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데라가 왜 최소 50년 이상 섬겼던 우상을 버리고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데라의 변화의 내막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성경 기록 외에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통해서 그 내막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여호수아와 다윗도 인정하고 있는 '야살의 책'에서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10살 때에 노아와 셈의 집으로 보내져서 약 40년을 살다가 50살이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말해 그가 신앙이 좋았던 이유는 그가 아버지에게서 신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10대와 9대 조상이었던 노아와 셈에게서 신앙을 배웠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50살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깜짝 놀라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50년 이상을 우상을 철저히 숭배하며 살아왔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섬기는 우상들을 때려 부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를 설득하여 우상숭배의 도시였던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오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설득 때문이었던 것이지, 아버지 데라의 스스로의 믿음에 의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을 구별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노아와 셈 이후, 신앙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셈의 가문을 우상숭배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가 75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이미 성숙한 신앙의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4. 아브라함이 받은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75세경부터 받아 누렸던 그의 은사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그를 은사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신앙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성의 수준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받은 은사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가 받은 은사들에는 일반 은사가 있고 특별 은사(고전12:8~10)가 있다. 먼저 그가 받은 특별 은사부터 살펴보자. 그가 받은 특별 은사는 3가지 정도 다.

  첫째로, 그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먼저 본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에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그가 애굽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래를 자기의 누이동생이라고 속인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고 싶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바로 왕에게 바친 인물로 보아야 하는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쪽에서 본다면, 그는 이미 그가 애굽에 들어가서 나올 때에 어떤 모습으로 나오게 될 것인지를 미리 환상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기꺼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이고, 자기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꿰뚫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상황 판단을 아주 잘했다. 특히 자기의 조카 롯이 5개 연합군에 의해 붙들려 갔어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5개 연합군이 어떤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뒤쫓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318명의 자신의 종들을 데리고 가서 롯을 그들의 손으로부터 구출해 올 수 있었다. 

  셋째로, 그는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그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면서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비록 많은 자손을 보지 못했어도 실망하지 않았으며, 그가 살아 생전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이미 그러한 것들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에 자신을 위해 준비된 기업과 영적 자손이 풍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5. 아브라함이 받은 일반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에는 특별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받은 은사에는 일반 은사도 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일반 은사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일반 은사는 그가 신앙으로서 아버지에게 있는 우상숭배의 저주를 끝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상에게서 내려오는 우상숭배의 저주를 끝냄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일반 은사를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받은 일반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 아브라함은 '형통함의 은사'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가는 곳마다 어떤 일에서든지 일이 다 잘 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물질과 종들과 가축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실수를 하여 자기의 아내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하여 먼저는 애굽에서 양과 소 그리고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 등을 받아서 나올 수가 있었고(창12:16), 그가 그랄 왕에게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양과 소 그리고 종들과 은 1천 개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창20:14,16). 그리고 그가 318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5개 연합군과 전쟁을 치렀으나 승리하고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창14:14). 왜 그랬는가? 그가 가문의 우상숭배의 저주를 끝냄으로 하나님께서 범사에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창24:1). 

  둘째, 그는 믿음의 소식을 잘 '전파하는 은사'를 받았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그의 신앙은 노아와 셈의 신앙을 전수받은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고집스러웠던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우상숭배로부터 빠져나오게 할 수 있었고 ,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앙을 잘 전파하는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건강함의 은사'를 받았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지만, 그는 어떤 일이든지 다 잘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84세 때에는 조카 롯을 구출해 올 수 있을 만큼 건강하였다. 그리고 그가 86세 때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을 수도 있었다(창16:15). 뿐만 아니라 그는 100세에 이삭을 얻을 수 있었으며(창21:5), 심지어 그의 아내 사래가 127세(자기의 나이는 137세)에 죽은 이후에는 또 그두라라는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6명이나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건강함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넷째, 그는 또한 '기쁨의 은사'도 받았다. 사실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는 한 번도 불평이나 원망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기쁨 가운데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특히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언제라도 새 출발을 시작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그는 '순종의 은사'를 받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는 75세 때에는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했다(창12:4). 그리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하고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에 순종했다(창17:5,10). 또한 하갈과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으라는 말씀에도 순종했다(창21:9~10,14). 그리고 그의 나이 125세 내지 137세 때에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즉각적으로 순종했다(창22:2).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단 한 번도 불순종한 일이 없었다. 

 

6. 나오며

  인류에게는 사실 세 번의 시작이 있었다. 처음 인류의 시작은 '아담'이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후손은 타락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담의 10대손 노아와 일곱 식구만을 남긴 채 다 쓸어버리셨다. 그리고 노아로 다시 시작케 하셨다. 그리하여 노아를 통해 인류가 전 세계로 다시 퍼저나갔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서로 흩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하나로 뭉쳐 바벨탑을 쌓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다시 흩어버리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다시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셨다. 이것이 세 번째 시작이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태어날 때부터 구별된 사람이었다. 10살 때부터 그는 노아와 셈의 집에 가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리고 50세에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버지 데라에게 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우상숭배를 끝내고 식구들을 갈대아 우르로부터 떠나게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름받은 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신 은사들은 매우 특별했다.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일반은사들이 풍성했다. 어릴적부터 구별된 삶 그리고 그의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상숭배를 끝내고 주님만을 믿고 따라간다면 놀라운 은사들이 우리에게도 나타날 것이다. 

 

 

 

2022년 11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43) 창세기에 나타난 신부의 두 번째 예표 사라(창18:10~14)_2021-10-28(목)

https://youtu.be/pKZ8ZG_7cAU  [혹은  https://tv.naver.com/v/23226903  ]

 

1.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내용은 무엇인가?

  하와는 오직 자기 남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에덴동산의 침입자인 뱀의 말을 듣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고 자기의 남편에게도 주어 그도 먹게 하였다. 결국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이뤄지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그들에게 집행하기 전에 살 길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장차 여자의 후손(씨)을 통하여 악한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린 인류를 놓아주시겠다는 것이었다(창3: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에게는 그 이후 엄청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끝없는 욕망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어로 '데슈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한글로 번역하면, '열망, 갈망, 사모'라는 뜻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다른 한글 번역 성경들에서는 이 단어를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창3:16)." 그런데 이 단어는 원함이나 바램 정도가 아니다. 어떤 욕구의 분출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창세기 3:16에 나오는 '데슈카'라는 단어는 성경에 딱 3번 나온다. 창세기 3:16에 한 번, 그리고 창세기 4:7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가서 7:10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온 '데슈카'는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의 내면 속에 파고 들어간 강렬한 욕구로서 그것을 이기내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이유가 그 열망(욕망)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가 너를 원하나('데슈카') 너를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2. 선악과를 따먹게 된 후 하와 속에 들어가 버린 열망(욕망, 욕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선악과를 따먹게 됨으로 인하여 하와 속에 들어간 욕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출되었는가? 그것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반영하듯 창세기 3:16에 나오는 "너는 남편을 원하고"라는 부분을 다른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공동번역),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표준새번역). 그렇다. 사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속아 넘어간 인간은 그때부터 사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주입된 것이다. 하나님이 없이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처럼 군림해 보려는 욕망이 내면에 가득 들어찬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 후 인간은 철저히 고민하며 순종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절체절명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와는 실패한 것 같다. 하와가 아담을 주인처럼 섬겼다는 흔적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첫째 아들 가인을 낳은 후 실망했던 그녀의 마음은 고스란히 둘째 아들의 이름 속에 표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와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벨'이라는 단어로서, '허무, 공허'라는 뜻이다. 그녀는 자기의 태를 통해 여자의 후손(씨)이 태어나리라고 기대를 했는데, 철저히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인을 낳은 후 '허무하다'라고 탄식했기 때문이다. 

 

3. 사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 중에서 왜 중요한 인물인가?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처였던 '사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라는 하와의 실패의 자리를 여자로서 처음으로 승리의 자리로 바꾸어 놓은 여인으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를 읽는 것만으로는 그녀가 어떤 큰 믿음의 소유자였고 어떤 위대한 삶을 살았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예수님의 혈통적인 조상들 곧 남성 중심으로 역사가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요, 또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짧게 기술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시자 그녀의 '피씩' 웃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와의 제대로 된 진면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쓴 다른 성경책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 3권의 책은 사라의 진면목을 알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사야서이며, 히브리서이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의 말씀이다. 

 

4. 창세기가 아닌 다른 성경을 통해서 보았을 때 사라는 진짜로 어떤 존재였는가?

  창세기의 기록만을 보면 그녀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또한 생리가 이미 끊긴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것과 더불어 다른 성경책에 기록된 그녀에 관한 말씀을 보면, 그녀는 믿음이 없었던 여인이 아니라 아주 믿음이 신실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째는 이사야서의 말씀에 그렇게 나온다. 이사야서에서는 사라를 어떤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을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시온을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셨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2-3)." 이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조상은 한 사람 '아브라함 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생산했던 또 한 명의 사람이 같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사라' 였던 것이다(사51:2).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그녀의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임신할 수 없었으나, 메말랐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11:11-12)." 그런데 그녀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바라고 믿었던 믿음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5.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사라는 어떤 측면에서 이기는 신부의 예표였는가?

  '사라'에 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말씀은 사도 베드로의 언급이다. 그 말씀에 따르면 그녀는 이사야서와 히브리서에 나온 그러한 신실한 믿음 말고도 그녀가 신부의 예표가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언급해 주고 있다. 우선 그 말씀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벧전3:1-6)." 그렇다. 사도 베드로는 하와가 비록 남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뱀의 말을 들어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이제 사라에 대한 사례를 언급하면서 그녀는 비록 불임의 상태였지만 항상 자기의 남편을 주(주인, 주권자)로 불렀으며,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자기를 아무리 높인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하와 이후 인간은 남편을 이겨 보려는 하와의 열망, 혼자서 최고의 권위자가 되고 싶어하는 하와의 열망이 아주 컸다. 하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러 이땅에 오신 예수님만을 진정 나의 주인이자 구주로 섬긴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당신의 신부로 맞이하여 주실 것이다. 특별히 창세기 18:12의 말씀에 의하면, 그녀의 자궁은 이미 메말라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라가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시들었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내게 무슨 즐거움(원문: 에덴)이 있겠습니까?"(창18:12)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광야의 메마른 그녀의 자궁을 다시 에덴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다(사51:3). 그리하여 사라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021년 10월 28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속편(05)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의 중요성을 알았던 첫 번째 여자는 누구였는가?(창3:15)_2021-08-13(금)

https://youtu.be/Kdb4sye6F9Q  [혹은 https://tv.naver.com/v/21856125  ]

 

1. 사탄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탄마귀가 비록 아담과 하와를 자기의 수중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씨)이 장차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박살나게, 짓뭉게버리게)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었기에, 여자의 후손의 출현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는 그때 이후로 '여자의 후손'의 출현을 막아보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늦춰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담 이후 72대손으로 결국 약속의 후손이 태어났으니 그분이 바로 인간으로 오신 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겼던 '이긴 자'의 모델(전형)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지금도 이기는 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의 중요성을 안 여자는 누구였을까요?

  창세기에서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여인일 수 있지만 사실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 곧 '약속의 씨'는 남자 혼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자의 씨는 남자의 씨 곧 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후손의 원래 단어는 '씨'이기 때문에, 여기서 '씨'는 남자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사내아이를 낳고 싶어해도 여자없이는 또한 그러한 아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필연코 여자의 후손을 얻기 위해서는, '여자의 후손'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서 과연 이러한 '약속의 씨'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태를 통하여 그러한 씨를 낳기를 갈망했던 여인들은 누구일까요? 그 여인들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책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녀들은 바로 "다말, 기생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곧 밧세바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 1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도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 중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 다음으로 '사라'라라는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여인인 믿음의 조상들 중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그녀가 천국에서도 이긴 자가 되어 왕 노릇하는 레벨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3. 사라는 어떻게 되어서 여자이지만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가 선별 족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과 비교해보니,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나오는 이름들은 예수님의 조상들의 모든 이름이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등 왕의 이름들이 빠져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이들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실제로도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에 5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은 딱 한 명입니다. 그녀는 '다말(타마르)'입니다. 그녀는 유다의 첫째 며느리로 들어온 가나안 여자였는데, 남편이 죽고 남편의 동생도 죽게 되어 더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창녀로 분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를 끌어들여, 2명의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그중의 하나인 '베레스'가 결국 유다 가문의 대를 잇게 됩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약속의 씨(여자의 후손)'는 '베레스'이며, '여자'는 '다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믿음의 조상들의 명단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던 여인의 하나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믿음의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녀의 믿음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것은 창세기만의 두드러진 기사를 통해 그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분명 믿음의 조상들의 명단에 여자로서 그 이름을 올려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사라는 어떤 믿음을 갖게 된 것인가요?

  사라는 일종의 여장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결정은 아브라함을 늘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사라가 자신의 태가 막혔다는 것을 알고 후사를 얻기 위해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들여서 아브라함의 후사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하자 여주인인 사라를 업신여깁니다. 그러자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기를 원하노라(창16:6)"고 하면서 하갈을 통해 자신의 자식을 얻기를 소망했으나, 하갈이 착각하여 자기가 임신한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녀를 내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학대를 못이겨 도망친 하갈이었지만 천사가 나타나 위로함에 따라 다시 돌아가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초미의 관심사는 과연 이스마엘이 약속의 씨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약속의 씨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게 될 터인데, 그러면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아이가 약속의 씨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창17:15~16,19,21). 그러자 사라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태를 통해 태어난 아기가 약속의 씨가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히브리서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히11:11~12). 그러니 사라를 통해 약속의 씨인 이삭이 태어난 후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게 되자, 즉시 사라는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녀의 아이를 내어쫓으라고 요구합니다. 즉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약속의 아들인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준 약속의 씨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라는 일찍부터 경수(생리)가 끊겨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으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녀가 약속의 씨를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고스란히 믿어서 결국 약속의 씨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있었어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아니하시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에 있었으나 아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결국 사라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결국 사라도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되니, 그가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 가문에 드리워진 저주가 사라가 아들을 낳음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저주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일찍 죽는 저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아내에게 있는 불임의 저주도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은 모두가 다 자기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끊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지 못했고 불신앙의 모습으로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방문을 받아 그는 자신이 따라가고 있는 분이 전능하신 분임을 믿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할례를 통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아내 사라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태어난 아이는 '약속의 씨'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님을 못 하실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에게 웃음을 갖도록 이끄신 하나님 여호와를 전능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라에게 임했던 불임의 저주도 끝이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저주(일찍 죽는 저주)와 사라의 저주(불임의 저주)가 끝이나게 된 것입니다. 

 

2021년 08월 13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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