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8)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17)(계1:10~18)_인자와 같은 이이신 예수님(2)_2022-05-19(목)

https://youtu.be/9etPkjjj2Cg  [혹은 https://tv.naver.com/v/26877915 ]

 

1.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에 영안에서 보았던 주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그는 기도 중에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다 보게 되는데 그때에 환상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치게 된다. 이때 그는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영락없이 구약시대에 다니엘이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단7:9~10, 단10:5~6). 그분은 발에 끌리는 세마포 흰 옷을 입고 계셨으며,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다. 그리고 그의 머리와 털은 흰 양털과 눈처럼 희였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았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 그리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았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들을 쥐고 계셨으며, 그의 입에서부터는 두 날을 가진 검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 같이 비추고 있었다(계1:13~14). 

 

2. 사도 요한에게 나타난 예수께서는 사도요한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사도 요한은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자 그만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된다. 누구라도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그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의 오른 손을 얹은 후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계1:17-20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3. 사도 요한에게 보여졌던 예수님의 모습은 실제적으로 그분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사도 요한의 영의 눈에 보여진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계시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모습이 구약시대에 다니엘이 보았던 모습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모습이 들려주는 실제적인 속성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계1:13~14).

  첫째로, 그분은 한 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으로서 천국에 계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자같은 이"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분은 천국에서 대제사장이자 왕으로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발레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하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귀한 직분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구약시대에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신분의 소유자는 [대]제사장과 왕이었다(출28:8, 29:5). 그리고 그분이 정금으로 된 띠를 띠었다는 것은 그분이 대제사장이자 왕으로 일하신다는 의미다(요5:17). 셋째 그분은 영원하고 불변하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머리털이 희었는데 이는 다니엘서에 보면 "옛적부터 계신 이"의 모습으로서(단7:9), 그분이 죄가 없으며 순결하며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존재해왔음을 의미한다.  곧 그분의 무죄성과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넷째, 그분이 전지하고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눈은 불꽃같아서 모든 것을 감찰하고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단10:5~6). 다섯째 그분은 공의로운 심판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발이 빛난 주석 같기 때문이다. 이는 그분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재판장이라는 뜻이다(단10:6). 여섯째, 그분은 위엄차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아서 쩌렁쩌렁하기 때문이다(겔43:2). 그리고 일곱째 그분은 교회에 세우신 당신의 종들을 끔찍히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오른손에 일곱 별들로 지칭된 일곱 교회들의 사자들(메시지 전달자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여덟째, 그분은 전쟁에 능한 용사이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이 선 검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계19:15). 아홉째,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얼굴에서는 해가 힘있게 비치듯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시던 순간에도 한 번 그렇게 변형된 일이 있음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마17:2). 그때 예수님과 예수님의 옷은 사람이 빨래한 것보다 훨씬 더 희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속성적 측면에서도 하나님으로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4.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는가?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보았고 또한 들었던 바 그 내용을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라고 했다는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계1:11). 그런데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도 요한이 보았던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하시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어느 한 각각의 교회를 책망하고 심판하고 칭찬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과 영락없이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천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예수님의 모습과 교회가 당시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먼저 그분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는 분'이라는 말은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의 불꽃 같은 눈과 그의 주석같은 발'이라는 표현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인삿말 속에 나온다. 그리고 셋째로,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들을 쥐고 계시는 이'라는 표현은 에베소 교회와 사데 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있다. 그리고 넷째로, '그분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모습은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책망에 나온다. 그 표현들은 다 그 교회의 정황과 거의 맞아 떨어지고 있다. 

 

5.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들 중에서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소개된 예수님은 왜 인자같은 이의 모습 속에는 나오지 아니한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써 보내라고 했던 일곱 교회들을 돌아보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의 모든 모습들이 7개 교회들의 서두 인삿말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외모에 대한 10가지 모습 이외에도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들려준 어떠한 말씀도 같이 기록해놓았다. 그것은  크게 2가지 문구인데, 이로헌 문구는 인자같은 이의 모습 속에는 나오지 않고, 그분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이름하여, 예수님에 관한 자기소개의 문구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첫째로, 서머나 교회에게 자신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이로서 전에 죽었었지만 현재는 살아있는 이라고 말씀하셨다(계1:18~19). 이 문구는 예수님의 외모에 대한 표현 속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속에 나온다. 그리고 둘째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예수께서 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열쇠를 쥐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2가지 문구들은 칭찬과 더불어 책망도 같이 들었던 소아시아 다섯 교회(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는 안 나온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었던 2개 교회(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 나온다. 그렇다. 외모가 사람에게는 정말 필요하고 중요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외모만을 추구하다 보면 인간은 어느새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본질적인 말씀에들에 100% 순종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그래야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1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28)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16)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2)(마18:18~20)_2020-08-18(화)

https://youtu.be/dEsCY_IGCt4 [혹은 https://tv.naver.com/v/15308722 ]

 

 

1.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님에게도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신성한 본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한 분이셨으므로, 그분에게는 자존성과 무소부재성, 전지전능성, 영원불변성 등이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다만 육신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육신 자체만으로 볼 때에 예수께서는 무소부재성에 있어서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2.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도 여전히 신성한 본성에 있어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증거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도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8:20). 그런데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이유는 사실 기도하기 위해 모든 모였음을 문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현장에 항상 예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육체를 지니셨기에 비록 육체적으로는 무소부재하지 않으셨지만, 영으로는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현장에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3. 육체를 가지셨지만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무소부재하시다는 실례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요한복음1장 43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면서 부정적인  태로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예수님의 출신을 나사렛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나사렛"은 "네째르"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써, 뿌리에서 올라오는 감람나무의 새로운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기에, 예수께서 다윗의 뿌리요 모든 인류의 근원이 되심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오직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나, 사신 곳이 나사렛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도 간곡히 권면하자, 빌립을 따라나서게 된 나다나엘은 주님과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께 어떻게 자신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현재의 시간에 계신 예수께서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현장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 과거의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영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현장에 현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4. 거슬리는 풍랑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나요?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는 육체만큼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어느날 예수께서는 기도할 일이 있어서 남으셨고 산 위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고 있는데, 제자들이 먼저 배타고 가다가 거센 풍랑과 마주치므로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건져내기 위해 육체를 지니셨던 예수께서는 빨리 제자들에게 가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은 상태라, 갑자기 밤에 배를 빌릴 수는 없으니, 그냥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배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도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는 육신적으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제한을 받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의 영은 신성한 본성 안에 있었으니 제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다 보실 수가 있었고 또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영적인 세력을 제압하시고자, 예수께서는 걸어서 배에까지 가신 것입니다. 이는 언제고 당신의 백성들이 위험한 현장에 있을 때에 주님은 거기에 아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도와주신다는 점을 우리에게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5.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나요?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상태로서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마28:20).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현장에서 드고 계십니다(마18:20). 그리고 즉시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도 하십니다(막6:48). 그러므로 지금도 하늘에서는 천상에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예수님 앞에, 모든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들과 구원받은 신구약성도들의 대표인 24장로들이 엎드려 경배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24장로들의 손에는 2가지가 들려있습니다. 하나는 거문고요 또 하나는 금대접입니다. 거문고는 어린양되신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고, 금대접은 예수님에게 성도들의 기도를 바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받고 계십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과정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사건에 개입하시면 마귀가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기도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무소부재히신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즉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요14:14).

 

2020년 08월 18일(화)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정말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면 그분은 어떻게 무소부재하실 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무소부재성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호와 증인이라는 이단에서는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당신의 보좌에 앉아계시는데, 그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시존재하시지도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도 계시지만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오실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맨 첫번째 영적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힘이라고 가르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은 정말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셋째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만 앉아계실까?(시103:19, 사6:1, 단7:9) 아니면 오순절이후에는 믿는 이들 속에도 들어가 계시는가?(계3:20, 고전3:16) 아니면 천지에 충만하게 거하고 계시는가?(렘23:23~24) 분명한 사실은 온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홀로 계셨다는 것이며, 한 분이신 그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 위에 앉아계셨다는 사실이다(시103:19, 사6:1, 단7:9). 다시 말해, 천국에서 보좌는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요, 하나님의 본부로서 하나님의 활동의 중심지였음은 분명하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보라.

시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그러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느날에 창조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당신이 만드신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한 만물을 어떻게 관리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것일까? 그것은 2가지 통치방식이 있다. 하나는 당신의 영을 직접 보내어 관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 있고, 또 하나는 당신의 종으로 지은 천사들을 보내 관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직접 보내어 당신이 창조한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직접적인 통치방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능력 곧 무소부재의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당신의 영을 보내어 그 일들을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창1:2, 시104:30). 하나님께서는 사실 영적인 존재이시다(요4:24). 그러므로 그분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다. 그분은 천사와 인간과 같은 피조된 영적 존재와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영적 존재이며,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동시에 다른 장소들에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만물을 창조하실 수도 있고, 동시에 만드신 만물을 감찰하실 수도 있고 그것들을 지켜보실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어떤 상황을 알게 되면, 즉시 동시에 여러 곳에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가 있으시다. 이것은 바로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속성으로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에 대한 속성이다. 이것을 우리는 무소부재의 속성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여기, 2개의 성경구절을 살펴보라.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모든 사람의 앉고 일어섬을 다 아시고, 멀리서도 그 사람의 생각까지도 헤아리시며, 길과 눕는 것을 포함한 모든 행위를 다 아실 수가 있을까? 더욱이 사람이 자신의 혀로 말하는 모든 것까지도 빠진 것이 없이 다 아실 수가 있을까? 그것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그 사람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시139:7-10 내가 주의(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당신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여기에서 "주(당신)'라는 존재는 시139:1~3에서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139편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하늘'이라는 곳은 이 온 우주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상징하며, '스올'은 가장 낮은 곳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이 말이 뜻은 하나님께서는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니계신 곳이 없으실 수 있을까? 그것은 그분이 동시존재가 가능한 그분의 영을 모든 곳에 보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렇게 말했다.

렘23: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데에도 계시지만 먼 데도 함께 계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동시에 모든 사람과 모든 환경을 다 살피시고 감찰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은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두번째 통치방식이 있다. 그것은 당신의 종으로 지은 천사들을 사용하는 것이다(시103:20~22).

시103:20-22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천사들은 하나님께 수종들도록 처음부터 능력있게 창조한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홀로 창조하신 것들을 향하여 천사를 보내신다. 그래서 천사로 하여금 그것을 감찰케하고 지키게 하고 보호하게 하기도 하신다. 이것은 간접적인 통치방식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분명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곧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일을 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 일을 하게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통해서 일을 하시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 직접적으로 통치하시든, 당신이 창조한 능력있는 천사를 보내 통치하시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은 모든 만물을 관리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자신이 무소부재하신 창조의 영이신 것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어느날 사람의 육체를 입고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무소부재하셨을까? 아니었다. 그분이 육체를 입으신 잠깐의 시기에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육체라는 인성이 같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이 영으로는 아니 계신 곳이 없으셨다. 다시 말해 그분의 영은 무소부재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마18:20의 말씀을 보라.

마18: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이미 모여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도하는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미 주의 이름으로 모여있는 곳에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비록 그분이 육체를 입기는 했지만 그분의 영은 신성한 아버지의 영이시므로 무소부재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결국 이 말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인데, 자신의 백성들이 자기에 기도하면 그 기도를 다 들으신다고 말씀이요, 복음을 전파하러 가면 그곳에 항상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그것은 그분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존재자체가 영이시니까 동시존재가 가능하며, 또한 이 세상에는 그분의 영을 보내시므로 동시에 모든 일을 수행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리고 그분이 육신을 입으실 때에는 시공간의 제약을 잠깐 받으시기는 했지만 그분의 영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기도하는 자들 가운에서 가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요14:14). 그리고 이어서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이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이것은 천사들을 보내 역사하는 간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기도하는 일에 힘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쓰기를 바란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에 관한 말씀이다. 보혜사 성령님은 세 번째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예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영으로 다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님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영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계1:4).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곱영들은 또한 일곱 눈들을 가진 어린양의 눈들로서,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은 따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으로서, 이 온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는 예수님의 눈들인 것이다. 특별히 일곱 눈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 땅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키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세밀하고 완전하게 감찰하고 있는 눈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예수님이시요 이 땅에 보내어진 예수님의 감찰기관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 앞에 피하여 도망칠 수가 없다. 하늘 끝에 오를지라도 거기에 계시며, 땅 아래 지옥으로 내려갈 지라도 거기에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유익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적어도 4가지 이상의 유익이 있다. 첫째, 그분으로부터 지키심을 받는 것이다. 온 땅을 전부 다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눈동자같이 보호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시118:6~7, 신31:8, 민14:9). 둘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해침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모든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낮의 해와 밤의 달도 해치 못함을 받는 것이다. 더욱이 악한 사탄마귀가 건들지도 못하게 하신다(요일5:18). 셋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힘든 일도 견뎌낼 수 있고 고난도 달게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는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항상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기에 함부로 죄를 짓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야곱과 요셉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려움과 역경도 잘 이겨내었다. 여호수와 갈렙도 마찬가지로 두려워하지 않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러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도 그랬다. 사울왕이 그를 아무리 죽이려고 했지만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를 이와 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살아난 다니엘을 보라. 극렬히 타는 풀부불에 던져졌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라.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된 이상 주님께서는 내가 죽는 그날까지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것을 믿으라.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이다. 미래가 결코 두렵지 않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6-06-03  하나님은 진짜 무소부재하신 분이신가(시139;1~16).ts_00000206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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