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1) 바울의 고별설교(2) 바울의 교회론과 목회자의 4가지 주의할 사항(행20:28~38)_2022-12-30(금)

https://youtu.be/_KZrFhMUi00  [혹은 https://tv.naver.com/v/32116106 ]

 

1.  바울이 밀레도에서 전한 고별설교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교회관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전했던 고별설교의 내용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에베소 장로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에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은 바울이 어떻게 에베소에 들어가서 주를 섬겼는지와 그가 전했던 복음의 핵심 4가지와 그리고 복음 전파자의 각오와 자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또 하나로서 바울이 장로들에게 한 권면의 말씀에 관한 것이었다. 그랬다. 바울은 그때 자신이 바라보는 교회관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전했으며, 동시에 양떼를 돌보아야 할 감독자가 지녀야 할 4가지 주의사항에 대해서도 전했던 것이다. 

 

2.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교회관은 어떤 것이었는가?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양떼를 맡은 감독자(에피스코포스)라 부름받은 것이라고 전했다(행20:28). 그러면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언급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피값을 주고 사신(획득하신) 것이라고 했다(행20:28). 이와 같은 사실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고 대신해서 얻은 것이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다(롬5:8). 그리고 둘째로, 교회를 건져내기 위해 피흘리신 분은 실제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시 한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교회는 감독자(목회자)와 양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행20:28). 오늘날에 들어와서 교회 안에는 목회자는 더이상 필요없고 모두 다 같이 형제자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곳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도 많은 기록을 남겼던 사도 바울이 교회의 구성원을 '감독자'와 '양떼', 이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사도 요한에게 편지를 써 보내게 하였는데, 그때 에베소교회에 보내라고 명령했던 편지를 통하여 말씀하기를, 주님께서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는 '교회의 사자'라고 했다. 여기서 '교회의 사자'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 오늘날의 목회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계2:1). 그렇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이 땅에 있는 일곱 교회로 지칭되는 7가지 유형의 교회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교회 중에서도 역시 교회의 메시지 전달자인 목회자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금도 역시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고 계시는데,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들을 쥐고 계시기 때문이다.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3. 바울은 훗날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였는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문제가 발생하자 그 문제를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게 된다. 그러자 바울은 배를 타고 로마에 간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어떤 감옥에 갇혀 있게 되는데, 그때 그는 에베소교회에 편지(에베소서)를 써 보낸다. 그런데 이 편지에는 온통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를 5~6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했다(엡1:23). 곧 교회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기관이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처럼 아끼는 각 지체들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했다(엡1: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셋째,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한 새 사람이라고 했다(엡2:15). 과거에 하나님이 아닌 것을 믿고 따라 살던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우주적으로 큰 새 사람이라는 것이다.  넷째, 교회는 성전으로서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처소라고 하였다(엡2:21~22).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는 성막이었다. 그것이 성전으로 발전했는데, 어느 날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있었기 때문이다(요2:19~21). 그리고 그것이 믿는 성도들인 교회가 된 것이다(고전3:16). 다섯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부라고 했다(엡5:25~27,32). 이것은 교회의 미래적인 지위를 말씀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교회는 그분의 신부가 될 것이다. 여섯째, 교회는 영적 전사라고 했다(엡6:12). 교회는 악한 영들로서,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워서 승리해야 할 전사들이기 때문이다. 

 

4. 바울은 양떼를 돌보아야 할 감독자(목회자)가 주의하고 있어야 할 4가지 주의사항으로 무엇을 말했는가?

  바울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그는 거의 모든 계시를 다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감독자들이 해야 할 일이자 또한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 무엇을 말했는가? 그것은 총 4가지를 언급했다. 이것들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첫째, 양떼를 해치는 포악한 이리 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행20:28~29). 즉 이단 세력으로부터 그리고 거짓 교사들로부터 교회를 지켜내야 할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다고 한 것이다. 둘째,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미혹하고 있는 거짓된 세력을 분별해 내라고 하였다(행20:30). 이들은 자기의 뒤를 따르게 하기 위해 주님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불러내어 왜곡된 말을 하고 미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두 종류의 이단 세력들이 있었다. 하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이다(행15:1~2). 오늘날에 이런 세력들은 일부 안식교에도 있는데, 대표적인 이단 세력은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다. 또 하나는 영지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영적인 지식만을 깨우치게 되면 육은 아무렇게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자신의 영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상에게 경배해도 그것은 우상숭배 행위가 되지 아니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당시에는 에베소교회에 있던 '니골라당'이 여기에 속하며(계2:6), 버가모교회에서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여기에 속한다(계2:15~16). 그리고 두아디라교회의 경우는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자들'이 이들이다(계2:20). 고로 교회에서 목회자는 이런 세력들이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분별해내어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셋째, 사도 바울이 무려 3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르쳐 주었던 말씀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행20:31~32). 이것은 곧 회개와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의도, 경륜)에 관한 말씀들이다. 넷째, 범사에 모본을 보이라는 것이다(행20:33~35). 물질에 욕심을 내지 말고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도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라는 것이다. 

 

5.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설교는 왜 중요한가?

  바울은 이러한 만남을 끝으로 더 이상 에베소 장로들과 만나지 못한다. 그때 그들에게 전해 준 것이 장로들이 꼭 들어야 할 메시지였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해 준다. 그것은 첫째로, 목회자는 교회의 수호에 있어서 책임이 아주 크다는 것이다. 둘째로, 목회자는 반드시 이단 세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그것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가 가르쳐야 할 복음의 핵심 4가지를 잘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목회자는 베푸는 데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러한 것들에 주의하면 교회는 건강해질 것이고, 또한 성도들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며,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2022년 12월 30일(금)

정병진목사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은 결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제 천국에 이르는 노정에 첫 발을 내디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난관들을 헤쳐나간 자만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인 스승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3가지가 있다. 어느 것 하나 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만 감사할 뿐이다. 2021-12-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성도에게는 3대 영적 스승이 있다(딤후3:14~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kay4k2J2F8 [혹은 https://tv.naver.com/v/24313203 ]

 

1. 들어가며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영적인 스승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어린이들도 학교에 가서 열심히 배워야 하는데, 어찌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쳐서 천국에 들어가야할 사람이 그 길을 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에 대해서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특히 성경은 그것들 중에 한 가지 영적인 스승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 세상을 살다간 수 천 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영적인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가 성장하여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3가지 영적 스승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 아무쪼록 이 말씀이 우리의 일평생에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훌륭한 가르침과 나침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성도에게 꼭 필요한 3대 영적 스승은 무엇인가?

  성도에게 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쳐주고 천국까지 인도해주는 영적인 스승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성도의 3대 영적 스승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첫째는 '목회자'요, 둘째는 '성경'이며, 셋째는 '성령'이시다. 사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서나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위와같이 3가지로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영적인 스승들은 어느 한 가지만 가지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영적인 스승은 우리 성도들에게 다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가진 한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 중에서 목회자는 목회자 자체의 자질 문제라고 하겠지만, 성경과 성령은 그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이 말씀하여도 성령의 계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3. 첫 번째 스승으로서 목사인 교사로서 목회자가 갖는 특징과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

  성도의 영적인 스승으로서 첫 번째 스승은 '목회자'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5가지 직분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것은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인 교사'다(엡4:11).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직분 중에서 아직까지 교회에 남아있는 직분은 '목사'인 '교사'라는 직분 하나 뿐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직분을 '목사'와 '교사'라고 말하지 않고, '목사와 교사'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직분에 대해 정관사가 한 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회자는 '목사와 교사'가 아니라 '목사인 교사'인 것이다. 또한 '목사'라는 직분은 당시에는 '목자(포이멘)'라는 직분이었다. 다시 말해 양떼인 성도들을 목양하는 자를 가리켜 '목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도가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목사인 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양육받기 위해서는 오늘도 성도들을 목양하고 가르치는 직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성도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만약 목사인 교사의 도움을 받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도 바울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가르침의 풍조에 밀려 요동할 것이라고 했다(엡4:14).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기까지 목회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여서 목회자가 선포하는 메시지 곧 선포되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영혼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만으로 성도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도 자신에게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목회자가 가진 역량이 다르고, 목회자가 가진 은사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가 되어서 내 영혼을 맡길 수 있는 합당한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을 너무나 행복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목회자는 구분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말씀의 전문가가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것에 전문가가 있는 것이다. 기왕이면 말씀과 영성 모두를 갖춘 목회자를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오직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에만 맡기려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조금 고려해보아야 할 사항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섬기는 목회자에게만 영혼의 양식을 의지했을 경우에 자칫 편식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회자의 역량을 충분히 파악하여 자신은 어떤 것을 보충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애쓰는 자기의 목회자를 함부로 대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 이는 자신의 부모가 혹시 못 배웠고 온전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분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4. 두 번째 스승으로서 성경의 특징과 주의할 것은 무엇인가?

  이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데 필요한 두 번째 스승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성도가 온전한 자가 되고 성숙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려면 두 번째로 '성경'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중세시대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있었던 때였다. 왜냐하면 성경 위에 교황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을 가진 목회자(신부)라고 할지라도 로마카롤릭 안에 있는 한, 로마카톨릭의 한계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6세기에 루터를 기점으로 여러 종류의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오직 한 가지 측면에서는 동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게하고 성경을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성경이 신앙과 삶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가장 확실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을 읽고 있는 자가 성경의 내용을 다 깨달을 수만 있다면 성경만큼 인생과 신앙의 훌륭한 스승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 성경을 읽는 독자가 그것을 다 깨달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유대인이었던 이디오디피아 내시가 절기를 지키고 이제 자기의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양피지로 된 비싼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성령께서 빌립집사에게 환상으로 그 내시를 보여주면서 그에게 가까이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빌립집사가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이샤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빌립이 물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러자 내시가 대답했다. "나를 지도해주는 이가 없으니 내가 어찌 깨달을 수 있겠나이까?(행8:31)" 그렇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자들이 받아서 기록한 것이므로, 성령의 감동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고, 이것을 통달하고 있는 영적인 스승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깨닫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야말로 영적인 스승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것이지만 이것을 읽는 독자에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서 영의 양식을 보충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영적인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성경은 읽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주어진다는 사실이다(딤후3:15).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읽기를 사모해야 한다. 목회자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년 내내 주일 메시지를 들었는데도 한 번도 천국과 지옥설교를 하지 않는 목회자도 상당히 있으며,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 목회자도 부지기수로 많기 때문이다. 

 

5. 세 번째 스승으로서 성령의 특징과 주의할 사항은 무엇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고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세 번째 스승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세 번째 스승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는 자들이 거듭날 때 그 사람 속에 들어오 성령님이시다(요14:16~17).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모든 성도들은 거듭날 때에 모두가 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께서 믿는 자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령을 우리 주 예수께서는 "보혜사"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는 주님 자신을 대신하여 이 땅에 보내시는 영적인 스승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신앙생활은 이성적인 인간의 능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는 일이나, 그분이 우리의 영에게 지시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이것을 잘 감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죄들을 자백하여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지 않는 한,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성령은 믿는 이들의 영 안에 들어오시고, 이성적인 감각은 우리의 육체 안에 들어있다. 그런데 악한 영들은 우리의 육체 속에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귀신들을 우리의 육체 내에서 제거하지 않는 한 영의 음성을 듣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때부터 일평생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만약 일평생 성도가 되었지만 자신의 죄와 그리고 조상들이 지은 죄를 자백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영들의 장막을 뚫고 나오는 성령의 지시와 인도를 받을 수가 없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므로 사실 목회자와 성경의 가르침고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성도가 성령의 온전한 가르침을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지도 지금도 말씀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까지 말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에 나오는 '주께 받은 기름부음'이란 성령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받을 수만 있다면 다른 무엇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믿기만 하면 저주에서도 해방되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도 들어가며, 믿기만 하면 천국에서 다 왕노릇을 하는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다 아니다. 믿음은 기본이고 그 다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회개하는 일'이다. 이것이 없으면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기 어렵다. 그러므로 회개없는 성령사역을 하는 분들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증상은 귀신의 가르침과 귀신이 보여준 것을 성령의 가르침과 성령이 보여준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만큼 훌륭한 교사는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령을 가장한 귀신들의 속임수에 넘어갈 가능성도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분별기준으로서 성경말씀을 주신 것이다. 성경말씀은 귀신의 속임수가 전혀 들어있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에 만약 성경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떤 역사가 성령의 역사인지 그리고 어떤 역사가 귀신의 역사인지를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하는 영적인 스승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도 잘 모르고 성령의 역사도 잘 모르는 초신자들은 아무래도 성숙한 목회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것이다. 

 

6. 나오며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의 영의 나이를 잘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함에 따라 육체의 나이를 먹듯이 영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면서 나이를 먹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30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영의 나이가 1살도 먹지 못한 채 그냥 어린아이의 상태로 남아있는 분들도 있다. 영의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는 늘 떼쓰에 바쁘고 불평하며 근심걱정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거듭났다면, 그는 이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육체가 육신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먹어야 성장하듯이, 영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영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의 양식을 그대로 먹기가 힘드니까 목회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목회자는 그 말씀을 그때그때마다 성도의 수준에 맞춰 적당하게 요리하여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목회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목회자의 도움 없이는 영적으로 성장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자의 역량에 있다. 과연 말씀과 성령에 장성한 분량에 도달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목회자에게만 매달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영의 양식을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여 깨끗한 상태에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의 성장을 기대할 수가 없다. 천국에 들어가보라. 거기에 사는 사람 모두는 다 이 세상에서 먹었던 영의 나이를 가지고 거기에서 살아간다. 천국에 사는 사람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7~8살 정도였던 성도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천국에서도 그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나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서도 왕노릇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아무나 다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2021년 12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성도들 중에는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신앙이 잘 성장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 그러한 분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들은 세상의 풍파와 환란에 금방 흔들리고 쓰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그만 신앙이 자꾸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신앙을 도와주기는커녕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러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면서도 신앙이 성장하게 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 그 해법과 실마리가 있다.

2021-11-0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벧전2: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dis_IBNvbw  [혹은 https://tv.naver.com/v/23428177 ]

 

1. 들어가며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20년 30년 했다고 해서 성도가 자동적으로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거듭 태어나기는 했어도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지 못한 채 그대로 있다면 그 영은 계속해서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영과 혼과 육체를 동시에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창2:7, 살전5:23). 그러므로 사람의 성장해야 할 부분은 사람의 육체만이 아니다. 사람의 혼(soul)도 육체처럼 성장해야 하고 영(spirit)도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육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의 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은 우리 눈에 잘 띄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의 영이 성장하는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나서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 그 실제적인 지침도 함께 나누어보려고 한다. 혹 자신의 영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오늘 메시지가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기를 바란다.

 

2.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은 어떻게 성장하기 시작하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을 동시에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들이 하나같이 성장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자라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키도 커지고 몸무게도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혼자서 일어설 수도 있고 걸어다닐 수도 있고 나중에는 뛰어다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혼(soul)은 어떠한가? 혼도 마찬가지다. 혼은 사람의 인격 곧 지정의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혼도 자라야 한다. 먼저 사람은 배워서 지적으로도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적으로도 성장해서 감정의 조절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 취사선택을 잘하고 결단을 잘 해야 한다. 이러한 혼의 성장을 위해서 부모는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경험을 쌓게 한다. 그런데 사람이 성장해야 할 부분는 비단 육체와 혼만이 아니다. 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영도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사실 엄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임신할 때에 하늘에서부터 보내어져서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그 시기를 영적으로 보면,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 약 2~3개월 정도 될 때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라고 해서 모든 것이가 영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만히 있으면 영도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이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에게 생명을 집어넣어주어야 한다. 그것을 바로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주 예수를 믿고 자신의 마음 속에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에 모든 사람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이때부터 영적 성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기가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사람의 육체가 밥을 먹어야 성장하듯, 영혼도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그 밥은 곧 하나님말씀이라고 했다(마4:4).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어서 이것을 먹는 자가 곧 영도 성장하는 것이다. 

 

3. 사람의 영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영이 거듭나서 새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이 성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성장하지 못하는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도 사람의 육체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기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대략 3가지 정도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기가 젖을 먹지 않거나 젖을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기가 아무리 잘 생긴 채 멋있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 아기가 젖을 먹지 못한다면 그 아기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체중의 아기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그 아기가 체내에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받으면 그 아기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영도 마찬가지다. 둘째, 젖을 먹긴 했으나 그 젖에 영양분이 충분히 들어있지 않거나 거의 없을 때에는 아기도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의 아기들과 한국의 아기들을 비교해보면 금방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현재 북한의 아기들의 발육정도와 한국의 아기들의 발육정도는 사실 판이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북한의 아이들보다 한국의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훨씬 더 많은 영양분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기가 성장하지 않는 두번째 이유는 영양분이 들어있는 젖을 먹으면 아기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도 마찬가지다. 셋째, 아기가 병들어 있을 때에도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이 들면 아기들은 대체로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빨리 질병을 진단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지 못한다. 그러면 아기의 체내에 영양분이 흡수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기는 더이상 자라지 않는 것이다. 영에 있어서 이것도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다. 

 

4.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첫 번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1~3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법을 2가지로 제시한다. 즉 사람의 영이 성장하려면 2가지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사람의 영이 성장하려면 영의 성장을 방해하는 악한 것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2:1).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먼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전에 모든 악독과 기만, 외식(위선)과 시기 그리고 비방을 버려야 한다고 며령한다. 곧 그러한 악한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좋은 것을 먹여도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내 몸에 악한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으면 과연 내 영이 성장을 하겠는지를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영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악한 것들의 배후에 있는 영들이다. 그러므로 영이 성장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귀신들이 많다. 조상적부터 내려온 악한 영들이 사람 몸 속에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신앙생활을 한 지가 이미 10년이 되었는데도, 그 사람의 영이 잘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그때에는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귀신이 있는지를 살피고 그것을 제거해야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 어린아기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귀신들이 아기 속에까지 들어가서 역사합니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세계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은 엄마의 태중에 아기가 착상될 때부터 공격하고 들어가서 자궁 안에 있는 태중의 아기 속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에게 영적으로 성장하는것을 도와주고 싶다면 그 사람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알려주라. 그리고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그래서 태중에 있을 때부터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으니 그것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조상들이 지었던 죄를 자백함으로 대신 회개하는 것이다(요일1:9). 그러면 아기 몸 속에 들어가서 기생하고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할 수가 있다.그런데 이러한 회개는 누구나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며, 오직 한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들이 할 때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해보면 안다. 악한 영들은 대개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부모와 자기의 아들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회개도 마찬가지다. 

 

5.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무엇인가?

  두번째로, 자신의 영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아기가 충분한 영양분이 있는 말씀을 먹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영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영양분이 가득 들어있는 말씀을 사모하고 그것을 먹을 때에 우리의 영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말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을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기가 자라기 위해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어떤 말씀을 가리키는가? 먼저, '순전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돌론'이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벧전2:1에 나오는 '돌론'이라는 단어의 반대어다. 그리고 벧전2:1에 나오는 '돌론'은 우리말로 '기만(궤휼,계교,사기)'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기로 하여금 말씀을 먹게 하되 아기가 먹어야 할 말씀으로는 거짓이 들어가 있는 말씀 곧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말씀을 절대 먹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아기에게는 오직 진실한 진리의 말씀만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은 과연 거짓과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진리의 말씀만을 전파하고 있을까? 그리고 두번째로는 '신령한' 말씀을 먹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령한'이란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로기코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한 마디로 '적합한, 합당한'이라는 뜻에 가깝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기에게는 아기의 성장발육 단계에 따라 거기에 합당하고 거기에 적합한 말씀을 먹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아기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갓 태어난 거듭난 성도가 자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기왕이면 거듭난 성도에게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진리의 말씀이자 아기에게 적합한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영적인 부모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의 도움없이는 고개도 가누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적인 부모의 도움없이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분들도 더러 있다. 고개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아기가 스스로 먹고 살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할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릴수록 거듭태어난 성도는 영적인 부모나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갓 태어난 성도에게 훌륭한 영적인 부모는 천군만마오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가 않다. 아기를 돌볼 능력이 부족하고 지식과 지혜가 부족한 부모 밑에 있으,면 그 사람의 영혼의 성장을 더디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에게는 자신의 영적인 부모가 영적인 세계에 좀 문외한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때에는 학교나 과외를 받아야 한다. 부모가 배우지 못해 자녀를 양육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 아이를 학교에 보내 선생님에게 붙여주어 훌륭한 아이로 성장하게 한다. 그렇다고 자기를 낳아주고 어릴 적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면 절대 아니 될 것이다. 사실 영적 세계에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며,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는 것이 철칙이기 때문이다(마20:24~25).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자신의 성장단계에 따라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6. 사람이 젖을 뗄 시기가 되어서 이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면?

  그래서 이제 젖을 뗄 정도가 되어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치자.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할 때에 스스로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여기 세 가지 실제적인 지침이 있다. 첫째, 영적 성장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말씀이니만큼 자신의 영적 성장 속도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성장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양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생기기 때문이다(롬10:17). 영계에서는 법칙이 확실하다. 무릇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더 받아 풍족하게 되지만,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마25:29). 그러므로 말씀을 주일낮예배 한 번만 들었던 분은 주일오후찬양예배에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각종 기도회 곧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새벽기도회에도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3년 안에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둘째, 나에게 영적인 스승이 없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적인 스승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3가지 영적인 스승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목사 곧 목회자가 있다(엡4:11~12). 이들로 인해 성도는 온전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목회자가 많이 있다. 찾아보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단에 속한 자들을 찾아가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로는 성경말씀이다(딤후3;16~17).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말씀이 우리의 두번째 영적인 스승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자라게 된다. 셋째로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말씀하시는 성도의 최고의 스승인 성령님이 있다(요14:26). 그러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들은 말씀을 소화시켜서 그것이 나의 살과 피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번만 들어도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이 완전히 내 사로가 피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두 번 세 번 반복으로 듣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할 때에도 길에 행할 때든지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그 말씀을 들려주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하라고 하셨다. 이를 위해서 들은 말씀을 한 번 더 들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 판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시작해보라.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3일 뒤에 한 번만 더 복습해보라. 그러면 그 말씀이 완전히 자기의 것이 될 것이다. 

 

7. 나오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지금 영적으로 볼 때에 어린아기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를 잘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경륜만을 자랑하려고 한다. 내가 신앙생활한지 몇 년이 되었으며, 내가 몇 대째 신앙생활하고 있는지를 아느냐면서 으시댄다. 하지만 그래서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영이 성장했는지 안 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쓴 것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심각한 환난과 핍박을 앞둔 상태에서 사도 베드로 빨리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은 진리의 말씀과 성장단계에 합당한 말씀을 먹어 성장하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 때 흔들리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을 이기고 순교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영적인 스승이 되어 또다른 약한 지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언제까지도 응석만 부리고 도움만 받을 것인가? 이제 코로나도 끝나가는 만큼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달려보자. 하나님께서는 침노하는 자에게 천국을 주시며, 댓가를 지불하는 자에게 그만큼 분량의 복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2021년 11월 07일(주일)

정병진목사

 

 

 

 

아가서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는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술람미 여인이 보이지 않는 솔로몬을 찾고자 할 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신랑을 찾는 술람미 여인을 공격하고 빼앗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원래 성안 사람들을 지키라고 그리고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라고 세워진 사람들일텐데, 왜 이들은 오히려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못했는가? 대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들은 천사들인가 사람들인가? 2021-10-25(월)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신부(40) 아가서강해(30)[최종회] 성안 순찰자와 성벽 파수꾼은 왜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못했을까(아3:2~3,5: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5urMsGcxaM [혹은 https://tv.naver.com/v/23166374 ]

 

1. 들어가며

  아가서의 말씀들은 사실 실제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책에 등장인물과 배경들은 다 어떤 함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 영적인 책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을 사용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특히 아가서에 나오는 각종 나무와 꽃들 그리고 동물들과 숫자까지도 다 의미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등장 인물들이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의 딸들"로 지칭되는 '처녀들'이 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내로서 왕후(왕비)와 비빈(후궁)과 시녀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에 살 때에 만났던 사람들도 나온다. 그들은 바로 '성 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이다. 오늘은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왜 이들은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왜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들을 때에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것은 우리의 과제와 기도제목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 술람미 여인이 청혼 후 임시로 거주했던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술람미 여인을 귀하게 본 솔로몬이 어느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아2:10~14). 그리고 임시로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물게 한다(아3:1~3). 그런데 솔로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밤에 고민을 하다가 꿈 속에서 예비신랑인 솔로몬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녀는 꿈 속에서도 솔로몬을 만나지 못한다. 이에 꿈에서 깨어난 술람미 여인은 그밤에 성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 솔로몬을 찾아서 거리들과 큰 광장들로 나간다. 하지만 또한 만나지 못한다. 그때 그녀는 성안에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보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답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지나치자마자(사라지자마자)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솔로몬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솔로몬을 찾는데 도와주지 못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왜 솔로몬이 그녀 앞에 문득 나타나게 된 것인가?

 

3. 결혼 후에 또 한 번 신랑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결혼 후에도 신랑을 한 번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아5:2~7).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을 찾기가 예전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일은 어느날 밤에 일어났다. 그녀가 침소에 든지 오래 지난 시각이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남편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머리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핑계를 대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아마도 다른 여인의 품에 있다가 이제야 들어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핑계는 그녀가 옷을 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찌 다시 입을 수 있겠으며,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겠느냐고 하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손으로부터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아5:4~5,13).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서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문을 열어 준다. 그녀가 문빗장을 만졌을 때에 자신의 손에서도 남편에게서 나온난 몰약즙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이미 벌써 돌아가버리고 그 자리에 없는 상태였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장 남편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만날 수 없었으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응답도 없었다. 그러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가 찾아본다. 그리고 성안에서 또 다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이번에 그들은 그녀를 때려서 상하게 하고 가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역시 그녀의 겉옷을 벗겨서 가져가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남편을 찾을 수 있도록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자가 다른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희고도 붉은지 만인 중에 뛰어나다고 말했다(아5:10). 그리고 남편의 머리부터 다리까지 남편의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아5:11~16). 그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자요 자신의 친구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딸들도 그녀와 함께 그를 찾는 데에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못가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그의 동산에서 만난다. 그는 이미 동산으로 돌아가 양떼를 먹이고 있었고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그럼, 왜 이번에 술람미 여인은 남편을 쉽게 만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왜 성안 순찰자들과 성벽 파수꾼들에게 수모를 당해야 했는가? 

 

4.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2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그녀가 거주하던 '예루살렘'이 대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나중에 신랑을 발견한 장소였던 바, 솔로몬이 양떼를 먹이고 있는 동산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 두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그녀가 솔로몬을 찾는데 첫 번째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오히려 그녀를 때리고 그녀의 겉옷까지 빼앗아가는 일을 저지른 것인가? 

  먼저, 그녀가 처음에 남편을 찾았던 장소와 그리고 순찰자들을 만났던 장소가 어디였는지부터 정리해보자. 그곳은 "성안"이었다. 여기서 성이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이란 왕이 거주하고 다스리는 도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녀가 첫번 째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예비신랑을 만났지만, 나중에는 성안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고 그의 동산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할 때에 우리는 예루살렘 성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해석해야 한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 성은 '천국'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남편의 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공간이었고, 신부가 성안의 순찰자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루살렘 성은 오늘날로 치자면 양과 염소가 혼재되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지상에 있는 교회 안에도 계시지만 진정 주님이 계시는 공간은 주님이 일하는 일터 곧 자기 동산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교회 안에 계신다. 하지만 교회 전체가 다 거룩한 공간은 아니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가 두 번 다 솔로몬을 찾아나선 시간이 어느 때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밤 시간이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아가서에서 밤 시간이란 두려움이 임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솔로몬도 결혼을 위하여 술람미 여인을 모셔오도록 자신의 가마를 보낼 때에 이스라엘의 용사 60명을 딸려보냈었다. 그 용사들은 다 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아3:7~8). 왜냐하면 그들도 밤의 두려움(위험)으로 인하여 각기 자기의 허리에 칼을 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솔로몬이 가마를 지키라고 보낸 용사들은 누구인가? 우선은 솔로몬이 보낸 왕의 군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좀 더 영적으로 들어간다면, 귀신들의 공격으로부터 신부인 술람미 여인을 보호하도록 주님이 보낸 천사들 곧 칼을 찬 수호천사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제 우리는 오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본 시간이 되었다. 그럼 이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둘 다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이들을 사탄마귀와 귀신들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무방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아가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짐승들 곧 포도밭을 허는 여우(아2:16)와 사자와 표범(아4:8)은 사탄마귀와 귀신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우'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왕'을 지칭할 때 사용한 표현이요(눅13:32), '사자'와 '표범'은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세상제국의 왕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실제는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악한 영들(귀신들)을 가리키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래도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고로 예루살렘의 딸들, 술람미 여인의 의붓오빠들, 그리고 성 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일차적으로는 그때 술람미 여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겉옷까지 빼앗아갔던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사탄의 무리들"로 보는 견해다. 이렇게 해석하는 분은 히브리어 원어를 성경을 해석하는 체데크 성경원어 신학대학원장 송광현박사의 경우다("원어로 풀어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기 아가서/체테크"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p.202.). 그리고 둘째는 교회를 지키도록 감독의 직분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로 보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총신대를 졸업하시고 칼빈대와 총신대의 교수를 역임하신 하문호 박사가 주장했다("아가서"/도서출판 그리심. p.413). 하문호박사는 그 직분자를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장로, 더 나아가서는 권사나 구역장이나 교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당히 새겨들어야 할 해석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가장 방해하는 존재들이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호되게 지적하셨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마23:33~34).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천국에 들여보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천국문을 가로막고 있다고 책망하셨다(마23:13).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만나는데 방해하고 해코지하고 모욕을 준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일 수도 있다. 특히 여기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자들로서 교회의 목회자와 지도자들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외부의 세력의 침입을 경고하는 자들로서, 신학자들이나 이단감별사들을 가리킬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성도들을 지켜주어야 하고, 이들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방해꾼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혹시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이러한 지도자들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그분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모든 삶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어느 목회자치고 자신의 양무리를 때리고 힘들게 하고 양떼들의 것을 갈취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십만분의 일이라도 그러한 일이 있다면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예수님과 같은 선한 목자로서 양무리를 천국으로 잘 인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6. 나오며

  오늘 말씀은 정말 주의해서 들어야 할 말씀 중의 하나다. 잘못 설교했다가는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말씀만큼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은 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자가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거나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정말 자신이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아무리 부족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적인 부모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사항이기 때문이다(계2:2~5). 그렇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외부의 이단세력이나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만나게 도와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으로 집행되지 못했을 때에, 아가서의 말씀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도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목양하는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을 발견하는 순간이 된다. 그러면 술람미 여인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만나는데 실제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사탄마귀와 귀신들이다. 이들이 배후에서 다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하려고 하지 말고 귀신들을 미워하라. 그리고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 이것이 성도들의 바른 삶인 것이다. 

 

2021년 10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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