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6) 안수받은 성도 스데반의 영성은 어떤 수준이었나?(행6:8~15)_2022-08-04(목)

https://youtu.be/zwhyxdvWSbs  [혹은 https://tv.naver.com/v/28359104 ]

 

1. 스데반은 어떤 사람인가?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뽑은 안수받은 평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5절). 그는 사도들의 직무들 중에서 구제와 행정에 관련된 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한 자라고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제일 처음으로 추천받은 자였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영과 지혜가 충만하였고(3절,10절), 은혜와 능력도 겸비한 자였다(8절).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에 대해서 열정적이고도 탁월한 감각을 소유한 자였다. 또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큰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할 수가 있었다(8절).

 

2. 소위 예루살렘교회의 7집사들 중에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안수받은 평신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때 뽑혀 안수받은 사람은 총 7명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중에서도 남달랐다. 그는 평신도 중에서 복음을 증거할 능력을 갖춘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부들을 돌보는 일 이상도 가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당시 평신도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지 않나 싶다. 사도라고 해서 평신도보다도 항상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실제 평신도들 중에서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능력면에서 볼 때 유명하지 않은 사도들보다 뛰어났지 않았나 싶다. 만약 그가 일찍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았더라면 사도로서 택함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도 그는 복음증거 능력을 갖춘 자였다. 그러니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와 변론을 할 때에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10절). 그러므로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를 어떻게 하면 없이할까 궁리하여 남자들을 사주하여 거짓으로 그를 고소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일곱 명의 안수받은 성도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특별히 스데반은 빌립과 더불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였기에, 스데반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빌립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기적과 표적들까지 행하는 자가 되었다. 

 

3. 현재 천국에서 스데반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시대는 천국에서 지금 무슨 일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높은 영성을 가진 자들에 의하면, 지금 천국에서 스데반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에 있는 24장로들 중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예배드릴 때에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의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드릴 때에는 순서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위치는 역시 24장로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144,000명의 성도들이 있다. 144,000명의 성도들은 70줄의 보좌에 차근차근 앉아있다. 그런데 보좌 자리 1번 줄에 앉은 사람과 보좌 자리 70번 줄에 앉은 사람은 수준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보좌 10번 자리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스데반은 24장로들의 반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사실 신약시대의 성도들 중에서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은 딱 네 사람 뿐이다. 세례 요한,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그리고 스데반 뿐이다. 그중에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마지막 주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인 자다. 그리고 베드로는 12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24장로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자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거기에 들어가 있으며, 이어서 스데반이 들어 있다. 여기서 스데반은 평신도의 대표로서 24장로의 반열에 든 것 같아 보이고, 아마도 순교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열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장차 순교자로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스데반 마을에 가서 살게 될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평신도라도 해서 천국에서 꼭 낮은 수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스데반처럼 최고 수준의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평신도라 할지라도 천국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높은 지위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 들어갈 수도 없으며 어떤 이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달란트와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 주님 보좌 가까이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가 되려면,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를 아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사역을 보면, 대체로 안내위원이나 예배위원으로 섬긴다. 그리고 찬양대원이나 식당봉사로 그리고 주차요원으로 그리고 구역장이나 여전도회장이나 남선교회장 등의 직책들로 섬긴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이렇듯 섬기는 직책을 성실히 감당하면 다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컫게 되는 것일까? 스데반의 사례를 보니, 그것은 기본인듯 보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본다. 그것은 아무리 평신도라 할지라도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회개시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에 가서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공회 석상에서도 떨지 않고 유대인 지도자들의 허물과 잘못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에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의인들과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던 것처럼 이제도 역시 의인이었던 예수님을 잡아죽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였고 회개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평신도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천국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고 회개의 중요성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이 천국에서 귀한 신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5. 평신도들은 말씀을 전할 수 없는가?

  평신도들도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까?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안수받은 일곱 명의 성도들을 보니, 적어도 두 사람 곧 스데반과 빌립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자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든지 아니면 그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놀라우리만치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구약의 율법과 성전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평신도들도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봉사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천국복음과 회개의 중요성을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먼저 알고 본인이 실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옛날에는 이처럼 말을 잘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주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시지 전달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와 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메시지를 전송하면서 "한 번만 들어봐"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당연히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나 자신이 꼭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도 안 되면 "한 번 같이 가보자"하고 빌립처럼 천국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데려오면 될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기로서, 알곡을 거두는 시기이다. 그리고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할 시기이기 때문에 천국복음전파와 회개의 중요성 전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2022년 08월 04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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