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6) 향유부은 여인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교훈(요11:45~12: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7PqSZouuBY [또는 https://tv.naver.com/v/32826012]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로서 대부분 예수께서 하신 말씀 어록에 집중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가급적 넣지 않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약 70퍼센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다른 공관복음서에서처럼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의 기록은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대체 어떤 것이 같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인가? 또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사도 요한은 왜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나사로와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책망했던 제자를 굳이 가룟 유다라고 왜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체포하자고 결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며, 예수님의 예루살렙 입성에 그렇게도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요한복음에서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2.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였던 공회는 왜 예수 체포령을 결의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부류는 제사장 그룹으로서 사두개인들의 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그룹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원래 서로 정반대의 신앙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데에 그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그해 유월절이 되기 전에는 왜 예수님을 그토록 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명분을 들고 나온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 때문이었다. 가야바는 A.D.18~36년까지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중대한 결단을 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논리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도록 공회를 설득하고 사형 법안을 통과시켰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께서는 비록 죄가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온 민족이 망하느니 그를 죽여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때 무슨 소요사태나 로마에 대항하여 무슨 독립전쟁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들더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제사장의 논리는 사실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분을 살려둔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 민족의 땅을 빼앗고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둔갑시켜 제거하려는 나쁜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결국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짜로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게 됨으로 유대 민족도 살릴 수 있었고, 이방으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악한 계획을 말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편으로 보면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3.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요한복음처럼 실명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은 사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는 조금 다르다. 첫째로, 향유 도유 사건 장소가 다르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의 장소를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막14:3).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소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즉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명시적으로 나온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 부은 여인을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마26:7, 막14:3). 그런데 이 사건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이름을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는 기록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이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자들이 나사로와 마리아를 죽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회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었기 때문이다(요12:10).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요12:11). 그렇다. 죽은 지 나흘되었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그만큼 그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와 마태복음 기자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쯤에는 유대인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가는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상황이 달랐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에는 벌써 A.D.90년 이후의 시점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미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었고 나라도 이미 망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그 이름들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성경 기록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4.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누군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말이다(요12:3). 그런데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요한복음이 좀더 구체적이다.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붓되, 예수님의 머리에만 부은 것이 아니라, 발에까지 부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까지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2:3). 둘째,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려 부은 것을 보고 책망했던 제자의 이름이 누군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장차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던 '가룟 유다'였다(요12:4).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는 더 분명하게 이 기사를 기록했던 것일까?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까지 붓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녀가 얼마나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기 위함이다. 사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며, 주님께 얼마나 자신을 낮추려 했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는 그녀를 높여 주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첫째로, 그녀가 한 일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시고, 낭비라고 말했던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리아도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을 매우 낮추자 그녀를 높여 주시기 위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신 것 같다. 셋째로, 그녀가 한 일은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는 그녀의 감사의 마음과 자신을 낮춤이 우리 주 예수님을 아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예수께서는 며칠 후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둘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을 보고 책망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을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라고 밝힘으로서, 가룟 유다가 말한 것 곧 약 3백 데나리온어치나 되는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 가룟 유다의 마음이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적으로서 돈궤에 들어온 돈을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요12:6). 이는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5. 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수께서 타셨던 운송 수단이 바로 '어린 나귀(오나리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2:14).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 한 번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자 이스라엘의 왕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셔야 했던 것일까? 정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왕의 행렬처럼 백마를 타고 오셔야 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을 듯한 어린 나귀를 일부러 타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어린 나귀를 준비했어야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스가랴 9:9의 말씀에, "시온의 딸,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의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인가? 그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어떤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길이길이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성이 열광적인 입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공관복음서에서는 사실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을 모시고 입성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기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9:40). 환영하는 무리들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왜 그날 그렇게 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나사로 소생 기적 사건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죽은 지 나흘되어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이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십자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그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한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12:19)"

 

6.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 내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시기심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분노로 표출되었고 결국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는데 사용되고 만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결국 사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자세와 각오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보은으로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리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돈 욕심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전철을 우리는 결코 밟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오히려 더 높여 주셨다. 그녀의 헌신을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때 마리아에게서 겸손을 배우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사람에게서 배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옷깃을 여밀 뿐이다. 

 

2023년 0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왜 조상숭배(제사나 추도예배)를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고전11:23~26)_2019-11-19(화)

https://youtu.be/FSfMGwG4TRU

 

1. 기독교와 유대교와 유교의 제의(祭儀: 종교적인 의식이나 제사)는 무엇인가요?

  모든 종교에서 제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의란 종교적인 의식이나 제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유교에서는 "조상제사"라는 제의가 있고, 유대교에서는 동물을 잡아서 대신 바치는 성전제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는 어떤 제의가 있을까요? 그것은 유대교의 성전제사를 계승발전시킨 "성만찬"과 "세례"입니다. 그중에서도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독교 제의 가운데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2.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한 데에는 어떤 요인이 있었나요?

  1885년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가장 많이 양적으로 부흥하던 시기는 1970년에서 1980년경입니다. 1990년부터는 주춤하다가 그 후로는 쇠퇴기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970년와 1980년에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난 것일까요? 거기에는 아주 특별한 요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상제사의 문제를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해결한 데서 기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조상제사는 선교사들에 의해 우상숭배로서 금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를 "불효막심"의 종교로 비춰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불효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졌던 것이죠. 그러다가 1897년 정동감리교회의 이무영 성도가 어머니의 기일(제삿날)에 제사를 추도예배를 바꾸어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낳은 조상도 몰라본다는 비난에 맞서 "추도예배"라는 것을 고안하여 제사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자 기독교에 대해 무조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불신자들이 대거 기독교로 전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1970년에서 1980년대의 일입니다.

 

3. 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왜 예수님은 되고 죽은 조상은 아니 되는 것인가요?

  사도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되, 성만찬을 통해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또한 그것을 후대에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선교사들도 우리나라 조선시대 500년동안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던 유교의 조상제사를 금지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고전10:20). 그러면 불신자들이 당연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물을 것입니다. 왜 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되고 우리의 죽은 조상은 아니 되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죽은 조상들은 우리가 제사를 드려도 이곳에 올 수 없기에 우리가 드리는 제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요, 성만식에는 예수님께서 영으로 오시어 복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4. 왜 죽은 사람을 기념하거나 그에게 기도나 음식을 바치거나 절을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왜 죽은 사람을 기념해서는 아니 되는 건가요?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죽은 자의 사진이나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앞에다 놓고 거기에 기도를 하거나 음식을 바치거나 절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대체 그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사도들은 죽은 조상에게 대해 제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인가요? 그것은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것이 조상을 섬기는 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귀신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시대 이후 사람들은 죽은 즉시 그 영혼이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으로 가버리고 없습니다. 시신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상의 제삿날에 영정사진을 가져다놓고 거기에 정성껏 제사를 드린다고 할지라 그들은 제사를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니까, 귀신들이 죽은 조상으로 모습으로 나타나 제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하늘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로서 얼마든지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죽은 조상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100% 싱크로율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엇비슷하기 때문에 진짜 죽은 조상이 온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말 죽은 자가 저승에서 이승으로 와서 제사를 받을 수 있다면, 왜 후손들은 수도 없이 죽은 조상 전부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은 결코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도 죽은 조상 3~4대 사이에서 들어갔다 나왔다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3~4대 이상의 조상들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없기 때문이요, 그들 속에 있던 귀신이 나와서 지금의 세대사람들 누군가에게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위해 제사를 드리면 귀신들을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오거나 옆에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저주입니다. 질병에 시달리게 되고, 사건사고가 연일 터지며, 자식들 중에 정신이상자가 나오고, 자살하는 자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귀신이 하늘에서 쫓겨날 때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5. 마리아숭배와 성인숭배는 왜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인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조상숭배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귀신에게 속는 것이기 때문이요, 저주를 불러들이는 의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주를 받되 나만이 아니라 내 후손까지도 저주를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죽은 자를 기념하는 행위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행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라도 결코 이 세상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천국에 들어간 신구약의 성도들이나, 그후에 천국에 들어갔던 마리아나 성인들에게 어떤 의식행위를 하면, 그것도 역시 귀신을 불러들이는 의식이 되고 맙니다. 그들도 결코 올 수 없는데 자꾸 기도하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게 되면 귀신이 또한 거기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귀신은 사람보다 능력이 있는 존재로서 지음받았기에, 사람의 꿈이나 환상 속에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고, 능력도 상당히 갖고 있어서 때로는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기도 하고 기적적으로도 역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냥 깜빡 속아넘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현현했다고 말이죠. 그러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신이 아닙니다. 그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모친일 뿐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 죽어서 저 세상에 갔으면 그를 기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이자 동시에 하나님이셨기에 지금도 우리가 그분을 기도로 만날 수 있고 그분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성만찬 이외에 다른 사람들 즉 죽은 조상이나 마리아나 성인들에게 기도를 바치거나 향을 피우거나 절을 해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저주를 받으려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2019년 11월 19일(화)

정병진목사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족보로 시작된다. 아니 신약성경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이 메시야의 족보를 찬찬히 살펴보면 족보에 들어있어야 할 이름이 빠져 있기도 하고, 들어가서는 안 될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무슨 이유 때문에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졌던 것이며, 무슨 이유 때문에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메시야의 족보에 담긴 구원의 비밀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무엇이 우리의 구원을 잃어버리게도 만들며, 무엇이 자격없는 사람이라도 구원얻게 만들어주는지를 파악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내가 죽는다면 나는 과연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까? 그리고 이미 기록된 이름을 계속해서 보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계3:5)

 

1. 들어가며

  마태복음1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있어야 할 메시야의 조상들의 이름이 상당 부분 빠져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세리 마태가 메시아의 족보를 기록할 때 임의대로 빼버린 것일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과 바벨론포로를 기점으로 숫자를 14대씩 맞추기 위해 그중에 변변치 않은 사람들 사람들을 빼버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메시야의 족보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가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족보에 그의 이름을 올린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메시야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어떤 사람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졌는지를 살펴본 후에 과연 어떤 사람이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갔으며, 그들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도 죽었을 때 과연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서 영원히 누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메시야의 족보에 이름이 빠진 자들은 누구인가?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있어야 하는 그의 이름이 누락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며 무엇 때문에 그 이름이 빠진 것일까?

  우선 빠진 사람들이 누군지부터 살펴보자. 잘 아시다시피 메시야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넷째아들인 유다지파의 후손들의 이름만 기록된 특별한 족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판단할 수 없지만 샘플은 된다. 왜 무엇 때문에 족보에서 그 이름이 빠져야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야곱의 증손자 헤스론이 람을 낳았다는 것까지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마1:3). 하지만 람이 암미나답을 낳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마1:4). 왜냐하면 람은 입애굽시대의 첫세대의 사람이지만, 암미나답(아론의 장인)은 출애굽직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야곱의 증손자였던 헤스론 - 람  - 아미나답(암미나답) - 나손은 430년동안 애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애굽에 들어간 70명의 히브리인들이 4대만에 200만명이나 불어나기는 산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람과 아미나답 사이에 수대의 족보가 빠져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증거로서 메시야의 족보에는 아버지 이름 다음에 꼭 아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마1장 11절에서 요시야왕의 다음의 왕이 여고냐(고니야, 여호야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고냐왕은 요시야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요시야왕의 아들인 여호야김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아들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벤'은 "아들"이라는 뜻만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그 외에도 손자, 증손자, 후손에게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족보에 기록단 사람이 앞에 기록된 사람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문맥을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430년간의 입애굽시대의 몇대(2~5대?)를 비롯하여, 사사시대에도 몇대(5~6대?)의 족보가 빠져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사시대는 적어도 350년이상 되는 기간인데, 그 때 등장하는 인물로 살몬 - 보아스 - 오벳 - 이새까지, 4대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몇대(5~6대)의 족보가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왕시대(다윗~시드기야)에도 왕들 중에서 7명의 왕들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요람은 웃시야왕의 아버지가 아니다(마1:8). 요람 다음에 아하시야 - 요아스 - 아마샤라는 3대 후손들이 빠져 있다. 또한 바벨론포로 후에도 스룹바벨의 아들은 아비훗이 아니다(마1:13). 그러니까 아비훗은 스룹바벨의 5대후손인 것이지 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스룹바벨 다음에, 하나냐 - 스가냐 - 스마야 - 느아랴 - 에료에내라는 후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족보에는 유다지파의 후손들의 모든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3. 비록 유다지파의 후손들이지만 메시야의 족보에서이름이 빠진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렇다면 메시야의 족보에서 그 이름이 빠진 자들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사사시대의 빠진 댓수(적어도 5~6대정도)가 무엇 때문에 그 이름이 누락되었는지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삿2:10). 언약의 말씀을 계승해주지 못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잊어버린 자들이 족보에서 빠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사사시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리고 요담의 직계후손들인 아하시야 - 요아스 - 아마샤의 세 왕들의 이름이 빠진 것은 요담의 아버지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우의를 돈독히 해보려고 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아달랴를 며느리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유다가 온통 우상숭배에 빠진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또한 한 가지, 입애굽시대와 가나안땅을 정복한 후의 세대인 사사시대의 많은 댓수가 족보에서 누락된 것은 그 시대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렸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시대는 영적으로는 빈사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든지, 언약의 말씀의 중요성을 잃어버려 약속의 말씀을 계승하지 못했다든지, 우상숭배를 했다든지 하는 자들이 결국 메시야의 족보에서 그 이름이 빠져있는 것이다.

 

4. 메시야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서는 안 되는 자들은 누구며, 그들은 무엇 때문에 메시야의 족보에 그의 이름이 올라간 것인가?

  그런데 오늘 살펴보게될 두번째 핵심내용은 족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할 이름들이 왜 족보에 들어갔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들어가지 말아야 했던 이름이 족보에 들어간 경우가 누군지를 살펴보자. 놀랍게도 이들은 전부 여자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여인들을 살펴보면, 이방여인도 있고 전혀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았던 여인도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의 이름을 남편과 함께 시대별로 정리해보자. 그들은 5명이다. 유다의 며느리이자 아내였던 자로 다말, 여리고성의 정탐꾼의 하나인 살롬과 결혼한 기생라합,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 보아스와 결혼한 과부 모압여인 룻, 다윗을 통해 솔로몬을 낳았던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다지파로 나사렛의 목수였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 등이 그들이다.

  그렇다면, 왜 여자 5명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간 것일까?

  첫째, 유다의 며느리이자 아내가 되었던 다말이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간 이유는 언약의 후손을 얻고자 했던 그녀의 거룩한 열망 때문이었으리라고 본다(룻4:12). 그녀는 유다의 첫째아들 엘의 아내로서 유다의 며느리다. 하지만 엘이 자식없이 죽었다. 그러나 형의 씨를 잇게 하고자 둘째아들 오난에게 들여보냈다. 하지만 오난은 씨를 주지 않으려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고 말았다. 셋째아들은 셀라였는데 아주 어렸다. 사실 유다는 셋째아들이 죽을까봐 셋째아들을 며느리에게 주지 않았다. 그러자 창녀변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통해서 자식을 낳은 여인이 다말이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유다지파를 통해서 왕인 메시야가 태어날 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아버지를 속여서라고 자식을 낳고져 했던 것이다.  성경은 다말이 결코 시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했던 음란한 여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룻4:12). 약속의 자손을 낳은 복된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둘째, 가나안땅의 여리고성을 정탐했던 정탐꾼의 하나인 살몬과 결혼한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다. 이 이방여인이 족보에 들어간 이유는 자신의 직업과 신분을 통하여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정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목숨걸로 정탐꾼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여인을 조국을 배반한 비열한 인간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믿음을 행동으로 옮긴 여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약2:25).

  셋째, 베들레헴성의 사람들 중에서 나오미 가족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보아스와 결혼한 모압여인 룻이 세번째 여인이다. 모압은 원래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다(신23:3). 그럼에도 이 여인이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간 이유는 그녀가 모압에 있을 때, 시어머니로부터 받아들인 여호와 하나님신앙을 결코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시어머니를 따라가면 평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고단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시어머니를 따라나섰던 것이다(룻2:11~12).

  넷째, 다윗과의 사이에서 솔로몬을 낳았던 우리야의 아내의 경우는 왜 족보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야의 아내"라는 다른 방식으로 그 이름이 들어가 있다.

  다섯째, 목수였던 총각 요셉에게 시집왔던 마리아가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것은 그녀가 바로 법적으로 유다지파 다윗의 가문이었던 요셉과 정혼했기 때문이다(눅3:23, 마1:16). 사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헬리가 2명의 딸들(마리아와 살로메)만 낳아 가문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광야시대에 슬로브핫의 딸들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딸만 있어 가문이 끊어지고 기업을 누구에게 상속해주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에는 자기가 속한 지파의 사람에게 시집가서, 가문을 잇고 기업을 보존하라고 하였다(민27:1~11, 36:1~12). 결국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녀는 유자지파의 총각과 정혼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요셉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요셉의 씨가 이나라 다른 씨가 잉태되었을 경우 파혼을 당하거나 죽임당할 위험성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메시야의 족보에 여인으로서 그 이름이 기록된 자는 총 5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의 신분은 간음녀이었거나 창녀였거나 이방인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따로 정해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죄인 혹은 창녀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메시야를 받아들이게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생길이요 그것이 힘든 선택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인 자의 몫이었던 것이다.

 

5. 나오며

  그렇다.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여인들의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죄인이라고 해서 메시야의 족보에 못들어갈 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음녀여도 상관없고 창녀여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계승자가 되기 위한 거룩한 열망을 가진 자가 된다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수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자기의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하는 자도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한 것이 고생길이 환히 열리는 일이고, 그것이 죽음을 불러온다고 하더라고 오직 하나님신앙을 갖기를 원하는 자가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수 있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은 주님 보시기에 어떤 모습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어떤 조건에 합당한 자인가? 메시의 족보에 오른다는 것은 결국 하늘의 생명책에 그 명단을 올린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름도 과연 천국에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까? 이제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때가 아닌가 싶다.

 

2018년 8월 24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