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오늘날 구원을 위해 교회들이 목숨처럼 지켜내야 할 것은?(막6:10~13)_2022-07-10(주일)

https://youtu.be/gSYeRk8HDHc  [혹은 https://tv.naver.com/v/28024586 ]

 

1. 들어가며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 항상 우리 물으며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교회가 사회 기관 또는 친교 모임 기관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음부의 권세가 해하지 못하는 튼튼한 교회를 세우고, 교회생활하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18~19). 그러므로 겉으 아무리 멋있게 보이고 건물이 화려해 보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퍼센트가 적은 교회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친교 모임이 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와 다음주는 교회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 교회되게 만들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꾸준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우리가 과연 목처럼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가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가 대체로 타락하거나 세상이 부하게 되면 교회는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는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고 오늘날은 세상이 부하게 된 시대다. 그러니 중세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을 잘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는 약 천 년 혹은 약 오백 년 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천국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을 것인지와 죽어서 이미 연옥에 빠져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지를 전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현대 교회도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전해 왔다. 그 방법으로서 셀모임을 어떻게 잘 하는지, 제자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를 전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회개의 중요성을 빠뜨리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과연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잘못 가르쳐 주거나 혹은 너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방법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럼 중세 교회는 어떠했을까? 그때는 오직 교회의 사제 계급 곧 신부들의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그럼 왜 이렇게 천주교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3. 천주교회는 어떻게 천국복음을 전하지 않고 연옥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왜 천주교회는 참된 진리의 천국복음과 회개를 전해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천주교회의 타락과 그리고 세상과의 혼합주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D.378년 로마의 다마수스(Damasus)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 곧 고대 로마의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속한 최고 사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A.D.590년 제63대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 1세가 자신의 직함을 '교황'이라 사용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이교도인 태양신 종교와 혼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는 갖가지 이방 종교의 의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수많은 교리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다. 그중의 으뜸은 바로 '연옥'이라는 교리다. '연옥'이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기는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임시 감옥으로서,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구원에 대해 보장은 받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때부터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회가 가르쳐 준 것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에에게 기도를 바치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미 자신의 선행과 공로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은 잉여 공로가 있는 성인들에게 기도를 바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품들도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회마다 앞다투어 성물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숭배하고 찾았으니,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에도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는 평소 3배가 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 성당 안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속옷과 십자가의 녹슨 못 1개 그리고 마리아의 머리카락 3개 그리고 불가타역 성경을 만들었던 제롬의 이빨 3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드디어 A.D.1091년도부터다. 교회가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 하고 재정 축재를 하기 위해 재정 모으려다 보니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의 도장이 찍힌 면죄부를 사게 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사실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그때부터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리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못하게 했다. A.D.1123년부터 5차에 걸친 라테란 종교회의 결과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게 되면 종교 재판에 넘겨 온갖 고문을 하고 죽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녀사냥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죽인 성도들의 수가 무려 6천만 명이었다고 한다. 

 

4. 천주교가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준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런데 이러한 천주교회의 연옥복음에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신부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A.D.1483~1546년). 그도 죄로부터 해방되어 살기를 원했으나 온갖 고행과 선행 그리고 거지 성지순례, 성인 숭배 등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인 스타우핏츠 신부의 도움으로 성경을 접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루터는 사람이 구원얻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오직 의인은 믿음과 회개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롬1:17, 합2:4, 시32:5). 그리고 드디어 만성절(모든 성인 대축일) 하루 전날에 비텐베르크 성당에 자신의 생각을 함께 토론해 보고자 95개 반박문을 게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중세의 구원관이 성경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는 중세의 구원관 3가지 중에서 2가지 거부한다. 하나는 교회의 사제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가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과 구원에 달려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5. 루터가 성당문에 게제한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루터가 만성절 하루 전날에 나무로 된 성당문에 붙던 95개조 반박문을 읽어 보면 우리는 그가 대체적으로(학자마다 다르겠지만) 3가지 주제로 항의를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렇다.

  첫째는 진정한 계속된 회개없이는 사제의 어떤 고해성사도 죄용서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95개 조항의 첫 번째부터 4번째 조항이다. 그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4:17), 그분은 신자들의 전 생애에서 회개가 지속되기를 원하셨다. 
제2항 이 ‘회개하라’는 말씀은 고해성사 곧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어지는 고백과 속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3항,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마음 속에서의 참회만 국한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참회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들을 죽이는 외적인 표지들을 낳지 않는다면 그 참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4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존재하는 한(즉 진정한 내적인 참회가 없는 한), 죄의 형벌은 [계속] 존재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죄의 형벌은]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 루터는 사람이 죄용서를 받는 것은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직접 하나님에게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고할 수 있으며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제직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만제사장설).

  그리고 둘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은 실제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요, 째는 교황이 가지고 있다는 사죄권(천국 열쇠) 합당한 것이 아니며, 돈을 받고 면죄부를 발하는 권한이 교황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 중 핵심적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5항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제6항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제10항 죽은 자에 대하여 연옥을 교회법적 형벌로 유지하려는 사제들의 행위는 무지하고 사악한 짓이다.
제22항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26항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 사죄를 허락할 수는 없다(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은 당치도 않다).
제27항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빠져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제28항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32항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36항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데, 이는 면죄부 없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제52항 면죄부로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 성지순례와 같은 고행, 성자 유품과 유물 숭배를 통한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나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루터는 중세 시대에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진정한 회개만이 죄용서를 받게 해 준다는 것을 찾아낸 놀라운 중세 신학자였던 것이다. 

 

6. 루터의 공헌에 맞물려 그가 가졌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루터의 모든 주장들은 다 들어맞는 것인가? 아니다. 그가 외쳤던 회개에 관한 부분과 연옥교리 및 교황 수위권에 있어서는 옳은 주장을 했지만 그가 주장한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의 실수 여기서부터 발견된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게 되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이후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것이 면류관이 되고 상급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우리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직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 의지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라고 했으며, 인간이 자유 의지를 사용한다면 구원을 얻는데 적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구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책임이 없다면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다 정해 놓고 하는 일을 가지고 말이다. 또한 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명하셨겠는가? 왜 우리의 시인과 부인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며 말했겠는가? 그리고 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님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셨겠는가?(마5:39~40) 그렇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반응함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나아오고 결단을 할 수 있는 의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했다(마12:18~21).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꺾여지고 말 것이며, 우리의 심지는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꺾여진 갈대라도 다시 바로 세워지고,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타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 의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천국에서 상급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믿었으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천국을 위해 살고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도 있고 주님 보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 교회와 싸우느라고 미 이런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죄용서받는 것이 회개라는 것까지만 생각했던 것이다. 회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상황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지 아니했을까...

  둘째, 위와 맞물려서 또 한가지는 신약 성경 중에서 믿음으로서의 행위 곧 회개의 열매로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나 유다서를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는 사실 성경을 잘 이해한 것이다. 그는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한 책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에 어긋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했으며, 이는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야보고서 강해 서문에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쓴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이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한 의가 어떻게 믿는 이들에게 전가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인생의 결말에 갔을 때에 자신을 되돌아보건 믿음에 따른 행위가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각도가 다르다. 그리고 그는 야고보서가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무려 21가지가 거의 인용다시피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심판주(5:9), 재림주(5:8), 생명의 면류관의 수여자(1:12), 치유자(5:14~15)로서 묘사하고 있으며, 비록 자신이 예수님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이 자신은 종이라고 칭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한 것이 무려 10번 이상이나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그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놀라운 발견 곧 회개의 중요성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잃어버렸으며, 결국에는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절대예정와 절대작정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는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배턴을 그만 넘겨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회개의 중요성을 외쳤어야 했다. 그리고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잘못된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원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쉽게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줌으로서 결국 올바른 구원관의 퇴보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주에 한 번 더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루터가 중세의 500년간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정말 기뻐 춤을 추어야 한다. 비록 그가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연옥의 실상에 대해서 분명한 관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이 땅에서 수고하는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 주었다. 또한 참회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현재 살고 있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가 되었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는 것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상관없이 죄용서가 일어난다는 것도 밝히 드러내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는 사람이 죄용서받는 것까지는 잘 말했으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무시해 버렸고 그것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회개만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죄용서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사탄에게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사수해야 할 진리는 바로 진정한 회개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며, 이 땅에서도 벌을 면죄해 준다는 사실이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래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알려 주신 회개 이후의 삶에 관한 말씀들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회개되어진 자유 의지로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는 날,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 얻고 보좌 자리를 차지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 가까이에 서서 주님께 찬양하고 감격하며 예배할 그날을 위하여... 

 

2022년 07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오직 믿음!" 이것은 종교개혁자들 특히 종교개혁자 루터가 내 건 슬로건이다. 그는 사실 "오직 믿음"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 그는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예수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라는 5가지 개혁신앙의 핵심요소를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귓가엔 "오직 믿음"이라는 두 개의 낱말만이 쟁쟁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오직 믿음"이 단순하고 외우기 쉽고 따라가기 쉽고, 구원받기도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얻을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가 활동하던 중세의 시기는 구원관이 성경에서 엄청 빗나가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종교개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오직 믿음"이 종교개혁 후 5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전 세계교회를 타락으로 몰고가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말았다. 이것 때문에 전 세계교회가 타락하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한국교회도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받고, 구원도 받고, 천국에도 들어간다고 가르쳤고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진정한 진리의 구호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오직 믿음"이 얼마나 교회를 타락으로 몰고가게 되었는지와 "오직 믿음"이 성경에 과연 나오는 말씀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서, 바른 구원론을 찾고 정리해보기로 하자.


2. "오직 믿음"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

  첫째,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교회를 타락으로 몰고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오직 믿음"은 중세시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모두가 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로 얻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은혜"란 참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 절차를 보면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중보자인 사제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고로 사람이 은총을 받으려면 반드시 사제의 중보를 받아야 했다. 그것들 중에 첫번째가 죄용서를 위한 고행성사였고, 두번째가 세례였다. 사제가 죄사함을 선포해주지 않고, 세례를 주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은총도 사제(신부나 교황)이 없으면 그 누구도 받을 수 없던 시대가 바로 중세시대였던 것이다. 또한 공로도 문제였다. 사람이 아무리 은총을 받아도 죄로 인한 상처가 남게 되는데, 그 상처를 씻어내려면 공로가 필요하다고 중세는 가르쳤다. 그리하여 중세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구원을 위한 공로를 쌓기 위해, 금식도 하고, 거지순례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다. 특히 헌금을 내면 자기의 죄로 인한 상처도 씻음받고 연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모두가 다 비싼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야 했다.

  그때였다. 성경을 연구하다가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루터는 보다 못해 이렇게  외쳤다.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가 결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지 아니하며, 사제의 죄사함의 선포가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면 다 용서받는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조건을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강력하게 증거해야 했다. 그래서 등장한 구호가 바로 "오직 믿음"인 것이다.


3. 오늘날 "오직 믿음"이 가져온 폐해는 무엇인가?

  하지만 "오직 믿음"의 폐단은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에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받고, 죄사함도 받고, 구원도 받고, 천국에도 들어간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칭의와 죄사함과 구원과 천국의 요건은 믿음 뿐만 아니라 회개가 같이 가야 한다는 그만 간과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는 믿음지상주의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를 짓는다해도 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믿음만 있으면 다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죄의 문제는 더이상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 있으면 이미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루터의 종교개혁의 바톤을 이어받은 칼빈은 이것을 더 확고히 만들어주었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들고 나오면서, 자신의 구원은 이미 만세전에 예정된 것이라고 믿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하고 있는 자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 구원의 확신도 갖지 못한 믿음약한 사람이라고 책망한다.


4.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이 사람의 구원을 막는 이유

  그렇지만 구원에 대해 성경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또한 구원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그것의 요소는 오직 믿음이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이 누구요,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믿음 사상이 그만 회개를 등한히 여기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니 예수믿는 자라도 회개하지 못해 지금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회개없이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이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오직 믿음이 얼마나 많은 범죄를 그냥 용인하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라도 "오직 믿음"이 아니라, 믿음과 회개를 통한 구원을 외쳐야 할 것이다.


5. "오직 믿음"에서 "오직"이라는 단어가 과연 성경에 나오는가?

  둘째, 그렇다면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이 과연 성경에 나오는지를 살펴보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이 성경에 나온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단 한 구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들은 "오직 믿음"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그것을 믿고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의 첫번째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의 심어놓은 슬로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어서 두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믿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경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한글성경책에서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니 한국교회 성도라면 언젠가 성경을 읽다가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오직 믿음"이라는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잠재된 의식처럼 우리속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큰 일이다. 성경 원문에는 없는 말이 우리말성경에 들어오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것이 마치 진짜인 것을 믿어버리게 되었다.


6. "오직 믿음"에서 "오직"이라는 단어의 헬라어의 뜻은 무엇인가?

  자, 그렇다면 우리말 성경에만 등장하는 "오직 믿음"이라는 단어의 실체는 대체 무엇인지 살펴보자. 성경 원문이라고 일컬어지는 헬라어로 성경이나 영어로 된 성경에는 사실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헬라어성경을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에는 그 말이 나온다. 번역자들이 그것을 삽입해 넣은 것이다. 아마도 종교개혁의 전통을 잘 반영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추정해본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가 짊어져야할 병폐는 사뭇 크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말성경에 등장하는 "오직"이라는 말의 본 뜻은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말성경에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은 딱 6번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오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오직"을 뜻하는 부사어 "모노스"가 아니다. 거의가 다 종속접속사로서 "그러나,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을 지닌 단어들이다. 성경원문에는 "접속사+믿음"이라고 나와 있는데, "오직 믿음"이라고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러한 성경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총 6번 나온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de: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alla:알라)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alla:알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ean me:에안 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alla:알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de:데)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렇다면, 한글로 "오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부 종속접속사로서, "de, alla, ean me"라는 단어들이다. 그 중에서 "de(데)"는 단어는 "그러나, 더욱이, 그리고"이라는 뜻이고, "alla(알라)"라는 단어는 "그러나, 이와는 달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ean me(에인 메)"는 "만약 ~이 아니면( If ~not)"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번역자들이 종속접속사를 부사어 "오직"으 로 번역해버린 것이다. 그러니 한글성경을 영감된 진리의 말씀을 믿는 자는 "오직 믿음"이 성경에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오직 믿음"이 나온다는 것을 믿고서,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오직 믿음'을 더욱 굳게 붙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헬라어로 된 성경원문에 나오지 않는 부사어를 우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더이상 잘못된 주장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지,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구원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요, 성경적인 것이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만들어낸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을 모든 성경의 열쇠처럼 따라가는 자가 부지기수다. 이제는 "오직 믿음"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직 믿음"이 말하는 단점과 폐해를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 회개치 않고 천국들어갈 줄로 확실히 믿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구원은 믿음에다가 회개가 중요요소인 것을 알고 그것을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오직 믿음"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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