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7) 바울은 어떻게 디모데와 의사 누가를 동역자로 얻을 수 있었을까?(행16:1~10)_2022-11-11(금)

https://youtu.be/eHTIrll9s8c  [혹은 https://tv.naver.com/v/30686848 ]

 

1.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에 어디에서 누구를 동역자로 얻게 되었는가?

  바울은 A.D.49~52년 까지 진행하였던 2차 전도여행의 초기에 두 명의 동역자를 얻게 된다. 이때 바울은 청년 디모데를 얻었고 또한 의사였던 누가를 동역자로 얻게 된다. 이때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그리고 의사 누가는 드로아에서 전도 수행원으로서 두게 된 것이다. 

 

2.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어떤 코스로 진행되었는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여행을 했던 곳을 다시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이방인들의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 자신이 전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 그리고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을 차례대로 방문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했던 바, 주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 4가지를 그들에게도 전달해 주었다. 그것은 곧 '우상의 제물과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갈라디아에 위치한 교회들은 믿음이 더 단단해졌고, 믿는 이들의 숫자 또한 더 늘어났다. 그런데 다음이 문제였다. 이제는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바울은 먼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라볼 때 서남쪽에 위치한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성령께서 거기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그러자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통과하여 서북쪽에 있는 무시아를 향하여 올라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동쪽에 위치한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영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시아 가까운 드로아 항구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바울에게 밤에 환상이 주어진다. 그것은 에게해의 건너편 마케도냐인이 나타나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과 더불어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시아와 비두니아가 아닌, 유럽 대륙으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됨으로써 복음이 수리아와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까지 전파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3. 바울은 청년 동역자 디모데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초기에 '더베'를 갔고 그곳을 지나서 '루스드라'를 향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은 '디모데'라는 신실한 청년을 만났다.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마도 약 1년 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때 전도를 받았든지 아니면 그 후에 루스드라의 성도들에 의해 전도를 받았든지 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참 믿음이 좋았다. 왜냐하면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로부터 신앙 교육을 잘 받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대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방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까지는 할례를 받지 않은 채 있었다. 그렇지만 디모데는 어찌나 믿음이 좋던지, 루스드라 뿐만 아니라 옆 도시인 이고니온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눈여겨본 바울이 그를 동역자로 삼고자 원했다. 하지만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에, 앞으로의 복음 전파의 걸림돌인 '할례' 문제를 해결하고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이는 전도할 때 유대인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디모데는 이때부터 바울 선교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바울이 죽는 날까지 그를 돕는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디모데는 일종의 바울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진정 디모데를 동역자로 취할 수 있었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즉 누군가를 진정 자신의 동역자로 얻는 비결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루스드라라는 도시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에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다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때 바울은 죽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는데,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그곳에서 바울은 다른 한 명의 사람을 건져내어 자신의 동역자로 삼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스데반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얻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4. 바울은 어떻게 의사 누가를 동역자로 얻을 수 있었는가?

  이어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다시 전도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전도의 길이 좀처럼 열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남갈라디아서에서 아시아로 말씀을 전하려고 했을 때에는 성령께서 그를 막으셨고, 무시아의 드로아에서 비두니아에 가서 전도하려 했을 때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많이 지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때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아쉽게도 사도행전에는 그 이유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바울이 그때의 상황을 갈라디아서에 남겨놓았다. 바울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갈4:13~15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랬다. 육체의 약함 때문에 바울은 전도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연코 '건강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그가 얼마나 아팠든지 바울은 드로아에서 자신의 약함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들러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만난 이방인 의사가 바로 '누가'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때 바울이 안질에 걸렸다고 주장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의사 누가가 바울 선교팀에 합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사가 달라붙지 않으면 안되는 바울의 육체의 상황이 있었기에, 의사 누가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바울을 치료하기 위해 그에게 달라붙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즉 바울이 의사 누가를 동역자로 얻게 된 것은 그가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때 얻은 육체의 약함 때문에 자신의 육체를 치료했는데, 이때에 의사 누가를 만났고, 누가는 바울 곁에 붙어 계속해서 그를 치료해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의사 누가는 그때 바울과 그의 동역자인 실라 그리고 디모데로부터 무엇인가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이다. 

 

5.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붙여 주시는 2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붙여 주시는 이유는 딱 2가지다. 하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 걸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동역자를 붙여 주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하다가 잘 안되면 다른 일을 찾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병행하는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동역자를 붙여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사명에 목숨 걸고 충성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동역자를 붙여 주시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복음 전파를 위해 몸마저 돌보지 못한 채 일하려 할 때에 전도자의 건강도 중요함으로 하나님께서 육체의 건강을 돌볼 자를 그에게 붙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바울에게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드로아에 있을 때에 바울은 거의 녹초가 되었든지 아니면 번아웃이 된 상태에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의사의 눈으로 볼 때, 그냥 내버려두면 바울이 사역을 얼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바울 곁에 바짝 달라붙어 그를 치료하기 위해 누가가 동역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동역자를 붙여 주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의 후계자가 될 만한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을 수 있었고, 자신의 평생에 주치의였던 의사 누가를 만나게 된 것이다. 
 

2022년 11월 11일(금)

정병진목사

 

우리는 지난 4주동안 부르심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오늘은 부르심에 관한 말씀 중 마지막 시간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자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기록된 말씀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천국복음전파의 동역자로서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이 길 끝에는 과연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이 말씀으로 인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놀라운 혜안이 열리기를 바란다.

 

2022-05-22(주일) 주일낮부예배

제목: 나는 과연 어떤 복음전파사역자로 길이 길이 남을 것인가(딤후4:9~1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0BmAegCMty4 [ 혹은 https://tv.naver.com/v/26941129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사역자를 이 땅에 보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보내신 사역자를 돕도록 예나 지금이나 동역자들을 붙혀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의 사역자를 통하여 동역자를 찾고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해서 그냥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천국복음의 중요성을 깨닫기까지는 했으나 그것을 끝까지 붙잡지 못한 채 중간에 탈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야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소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 바울과 함께 천국복음을 전파했던 동역자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디모데후서 4장 9절에서 16절을 보면, 바울과 함께 일했던 동역자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의 미래가 나온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은 지금 어떤 사역자로 준비되고 있으며, 어떤 사역자로 쓰임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장차 어떤 사역자로 일하다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서 과연 어떤 충성된 상을 주님으로부터 받을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2. 바울은 어떤 복음사역자였는가?

  바울은 참으로 특별한 사역자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분명하게 복음전파사역자들로서 12명의 제자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사도(보냄을 받은 자)라는 직책을 주셨고 또한 그들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바울을 불러내서 그에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역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특별한 사역을 맡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로부터 어떤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그는 첫째로, 복음전파자로서의 사명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가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에 성령의 지시를 따라 복음을 전파하도록 특별히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행13:1~2). 특히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전편과 후편에서 똑같이 자신을 '복음전파자'라고 하였다(딤전2:7, 딤후1:11). 뿐만 아니라 그는 둘째로, 자신을 '사도'라고도 말했다(딤전2:7,딤후1:11). 왜냐하면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복음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하라고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셋째로, 율법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도 부름을 받았다(딤전2:7, 딤후1:11). 그것과 동시에 그는 또한 마지막으로 '선지자'로도 부름을 받았다. 즉 그는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현장에서 말하는 수준의 사람이었던 것이다(행13: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는 4~5가지 종류의 인도자 직분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이자 교사'다(엡4:11~12).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직책을 다 소유한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자는 대부분 이러한 4~5중직의 직분들 중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받은 자다. 즉 지교회에서 몸담고 활동하는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보통 사역자들과 달랐다. 그는 큰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의 성도만을 위한 사역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 지역에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고 또한 그 교회에서 시무할 목회자를 가르치고 양육하여 파송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3. 바울의 주변에는 어떤 동역자들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바울 주변에는 어떤 동역자들이 있었는가? 사역의 초기부터 바울에게는 복음전파를 함께 하는 사역자들이 함께 하였다. 그러다가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점차 확대하여 다른 사역자들도 배출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역자들이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이러한 사역자들을 분류해 본다면, 그거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그룹으로는 목회자적인 소임을 감당하는 그룹이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로는 에베소 교회에 파송받은 '디모데', 처음에는 고린도 교회로 파송받았지만 나중에는 그레데 교회와 달마디아 교회에서 시무하게 된 '디도', 그리고 디모데후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골로새 교회에서 파송한 '에바브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골4:10). 한편 지교회에서 목회자로서 파송받지 아니하고 바울을 도와서 일평생에 선교활동에 동참한 이들도 있으니, 그러한 사람으로는 의사인 누가, 마가가 있으며, 디모데후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아리스다고 등도 있다(몬1:24). 그리고 두번째로는 평신도 그룹도 있었다. 이들은 바울이 선교하다가 만난 사람들인데,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던 성도들로서 바울의 지근거리에서 일평생 기도와 물질로 헌신하였다. 빌립보 교회의 자주장사 '루디아'나 고린도 교회의 천막만드는 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다른 분류가 나온다. 즉 바울과 함께 언제까지 동역했느냐에 따라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분류법에 따르면 디모데후서 4:9~16에 나오는 9명의 사람들은 다시 5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룹은 바울이 순교하는 그날까지 바울의 사역에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로는 디모데, 누가, 디도 같은 동역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바울의 2차전도여행 때에 만나 합류한 이후 단 한 번도 바울과 떨어지지 않고 바울을 도운 사역자가 있는데 그가 '누가'라는 사람이다. 그는 원래 의사였다. 그런데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에 북쪽에 있는 지역 곧 비두니아와 전도하러 가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 잠시 드로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눈을 치료하게 되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의사 '누가'다. 그런데 누가는 그때 바울을 만난 이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일평생 바울과 동행하며 사역을 도왔다. 이때 의사 누가는 식자층인만큼 바울의 곁에서 바울의 선교활동을 그대로 적기 시작하였고, 이전에 사도들의 선교활동도 함께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 사도행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에 루스드라에서 만난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신앙지도로 경건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헬라인이어서 할례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신앙의 경건성을 알아본 사도 바울이 그를 자신의 영적이 아들로 삼았다. 그래서 바울의 지도를 받았던 디모데는 에베소에 가서 목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회자인 그에게 보낸 편지들이 오늘날 목회서신으로 분류되고 있는 디모데전서와 미모데후서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그룹은 처음에는 바울선교팀과 함께 했지만 중간에 혹은 말년에 바울의 곁을 떠나간 자들도 있었다. 그러한 자들로는 '마가'와 '데마'가 있다. '마가'는 바울의 제1차전도여행 때에 바나바와 같이 출발했던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큰 고생을 해보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러다보니 선교활동을 하면서 겪게된 어려움을 보고는 곧 음식과 잠자리와 풍토병 등을 견디지 못하여 하였다. 그래서 그는 중간에 바울을 떠나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2차전도여행을 출발할 때가 되었다. 바나나는 자신의 조카였던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하러 가는 선교사가 함께 일하다가 자기 개인적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은 결격사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사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렇다. 이처럼 바울과 함께 사역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떨어져 나간 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 말기에 바울을 떠나간 자도 있었으니, 그는 '데마'라는 동역자였다. 딤후4:10의 말씀을 보니, 그는 이 세상(현재의 세대)를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쾌락을 부추기는 이 세상을 향하여 떠나갔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영적으로 막중한 사명을 받았는데도 그러한 사명을 저버렸다는 것을 가리키고, 천국에서 그가 받을 상이 이미 준비된 채 있었음데도 그것을 끝내 받지 못하는 길을 선택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바울의 제4차 전도여행인 로마 선교의 초기에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다는 사실이다(몬1:13~14, 골4:13~14). 그렇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자로서의 길을 선택한 자일지라도 이렇게 중간에 탈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데마와는 달리 좀전에 나왔던 '마가'는 영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 후 마가가 사울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딤후4:11). 그가 삼촌 바나바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한 이후 그의 행적이 잘 모른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베드로의 편지에 보니, 베드로에게 마가 요한은 그의 영적인 아들이 되어 있었다. 그가 회개하고 베드로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베드로를 통해 들었던 예수님의 행적들이 기록으로 남은 마가복음이 되었다. 그런데 바울이 쓴 옥중서신을 보면 마가가 옥중에까지 찾아온 것으로 나온다(골4:10).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울이 그를 동역자라고 부른다(몬1:24). 그는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신실한 주의 일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번째 편지를 보낼 때에는 그가 자신의 사역에 매우 유익하니 올 때에 그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딤후4:10). 그렇다. 사람이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영원히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마가 요한처럼 다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그룹은 바울 선교사역의 중요성은 깨달았으나 본인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 탓에 목회자나 선교사로서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선교를 기도와 물질로 끝까지 후원해썬 동역자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로는 아까도 언급했지만 빌립보 교회의 자주장사 '루디아'가 있고, 고린도 교회의 천막 만드는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있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이었는데, 로마 4대황제 글라디우디오가 유대인추방령을 내렸을 때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때 로마의 귀족이었던 브리스길라도 남편 아굴라를 따라 고린도로 이사를 가서 일하다가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금새 바울이 어떤 사명자인 것을 알아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때부터 바울을 돕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가 끝나는 그날까지 기도와 선교비를 후원했던 사람이 되었다. 어찌나 고마웠는지 바울은 이들 부부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그리고 넷째 그룹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에게서 목회자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훈련을 받아 지교회에 파송받아 시무한 동역자들도 있다. 그러한 자들로서는 '디도'가 있으며, '그레스게', '두기고', '에바브라', '빌레몬' 등도 있다. 이들이 바울 곁을 떠나간 것은 이들이 자원해서 떠나간 것도 아니며, 세상이 좋아 떠나간 것도 아니다. 이들은 바울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평생 사역지를 찾아간 것이다. 마지막 그룹으로 다섯째 그룹이 있는데, 이 그룹은 있어서는 안 될 그룹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목회하였던 교회의 성도였으나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계속해서 흠을 잡고 말로 공격하는 자도 있었다. 이러한 자들로는 구리 세공업자였던 '알렉산더'와 '후메내오'가 있다. 이들은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말로서 진리를 전하는 바울을 대적하고 공격하였기 때문이다(딤전1:19~20, 딤후2:19~20). 이런 자들은 한 마디로 진리의 원수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했다(딤후4:14).

 

4. 바울의 동역자들은 왜 각각 다른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었는가?

  그렇다. 바울이 선교하면서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함께 일하게 되었던 동역자들 중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바울을 버리고 떠나 세상으로 돌아간 자도 있었고,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바울과 함께 한 자들도 있었다. 한 편으로는 바울을 대적하고 해를 끼친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고생스러워 바울의 곁을 떠나갔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 충성스런 일꾼이 된 자도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비록 평신도였지만 죽는 그날까지 바울을 도와 기도와 물질로 후원했던 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천국과 천국에서 받을 상을 얼마나 소망하고 달려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일신상의 안녕이나 세상이 주는 기쁨도 같이 맛보며 살려고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이 땅의 것과 자기자신의 명예와 돈과 같은 것을 얻고자 하는 자는 이 천국복음 전파사역에 동참하여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뭐든지 욕심은 내지만 자신의 삶에 어려움과 역경 핍박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는 금새 돌아서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간절한 소망에는 천국이 들어있지 않으며, 이들의 간절한 소망에는 그가 천국에서 받을 상이 들어있지 않는 것이다. 

 

5. 나오며

  사실 천국복음 전파사역은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파사역에 주께서 쓰시려고 준비된 사역자나 또한는 그러한 사역을 돕도록 안배를 받은 자에게 이러한 기회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는 거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 누구든지 한 번 쯤은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잘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만한 끈기와 인내력이 있어야 하며, 주와 복음을 위해서는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만만 굳은 의지와 투지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의 영의 나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영의 나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금새 힘들어하고 금새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보면, 성숙한 나이로서 이 땅에 파송을 받아 사역하는 사역자들이 더러 있다. 그런 자들은 아무나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누가 그를 건드린다고 하여도 그런 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이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사역자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붙여준 동역자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하고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누가나 디모데나 디도처럼 말이다. 주님의 복음전파사역자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참으로 천국에서 복된 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소망에 대하여 이제 서서히 눈을 뜨라. 그리고 신앙생활의 목적은 바로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딤후4:18).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을 소망하고 달려가야 한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육신의 삶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벗는 그 순간부터 진짜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날이 우리에게서 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그날이 가까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동역자로서 복음전파사역에 동참하고 있는가? 이제는 나의 미래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정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의 선택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함께 하길 빌며, 그 길에 선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이 계속 함께 하기를 빈다. 

 

2022년 05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분이신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구원까지 이를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배움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람은 배워서만 아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턴가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지는 앎을 가질 때가 오기 때문이다. 배워서 아는 것을 "기노스코'적인 앎이라고 한다면, '오이다'적인 앎이란 알아지되 돌이킬 수 없이 알아지는 앎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너는 오이다적인 앎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누구에게 배웠는지 그리고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붙들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보면 교회에서는 오이다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성경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 말씀을 지도자는 자가 꼭 갖추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경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신약성경 디모데후서는 A.D.66~67년경 당시 사도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로마감옥에서 자신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유언처럼 간곡히 부탁하는 말씀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말세를 당하여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그것은 디모데가 그동안 배웠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들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딤후3:14). 그래야만이 자기도 구원할 수 있고 남들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2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데에 무엇이 제일 중요한 요소일까?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2가지를 부탁하는데, 하나는 디모데가 누구로부터 배웠는지를 잘 생각하, 자신이 배웠던 것들과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들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권면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듣고 배웠던 성경안에 꼭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사도바울은 지금 2가지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그동안 배웠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성경만이 디모데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줄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는 모든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반드시 2가지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누구로부터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왔는데 또한 그가 사도바울 자신으로부터 배웠던 가르침에 더욱 주의하고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했다.

 

3. 디모데는 누구로부터 배웠으며 성경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렇다면 디모데에게는 과연 누가 성경을 가르쳐주었을까? 첫째는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였다(딤후1:5). 그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배웠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기때부터 성경말씀을 배웠고 암송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어느정도 성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전도하러 자기동네를 찾아온 사도바울을 만나게 된다. 이때 사도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전도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거쳐 루스드라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2차전도여행이 시작되자, 사도바울은 일부러 루스드라에 들려 디모데를 자기의 제자로 삼는다. 그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디모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둘째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갖게 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4.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성경을 공부했으며 무엇 때문에 성경을 가르쳤을까?

  그런데 당시에 유대랍비들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훨씬 더 율법말씀을 배웠고 공부했다. 아마도 정규적으로 배우지 못한 디모데보다는 훨씬 더 많이 배웠을 것이고 더 많은 지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를 못 알아보았다. 오히려 배척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왜 그랬을까? 그들도 성경을 공부하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했지만 성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곧 메시야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권익과 지위를 유지하지 위한 수단으로서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를 보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는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성경(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해도 거기에서 예수님 곧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배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구약성경 곧 모세의 글(율법,토라)와 선지자들의 글(예언서,느비임)과 다른 성경들(성문서들)을 풀어서 알려주셨다. 그것이 곧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이다.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에 메시야를 꼭 발견해야 바른 공부라고 가르쳐준 것이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렇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공부하든, 신약성경을 공부하든 거기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잘못된 배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가르쳐준 성경을 보는 각도를 분명하게 다시 일깨워주고 있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며, 그것을 끝까지 힘써야 한다고 유언처럼 말하는 것이다.

 

5.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알아본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목회적인 지침을 주면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디모데가 자신의 가족과 사도바울에게 배웠던 말씀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놀라운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디모데가 알고 있던 것이 '기노스코'적인 앎이 아니라, '오이다'적인 앎이었기 때문이다. 딤후3:15~16에 보면 "알다"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런데 두번 다 '기노스코'가 아니라 '오이다'라는 사용하고 있다. '기노스코'란 헬라어 동사로서, 배워서 아는 것이며, 체험해 가면서 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이다'라는 동사는 똑같이 '알다'이기는 하지만 선험적으로 아는 것이요 완전히 아는 것을 가리킨다.

 

6.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사람들이 모든 사물과 이치를 알아가는데 어떻게 알아가는지 아는가? 처음에는 배워서 아는 것이요 체험하면서 아는 것이다(요17:3). 기노스코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기노스코'의 범위를 벗어나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진다. 알되 완전히 알아지는 것이다. 다시 뒤돌아갈 수 없는 앎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더이상 배우지 않아도 부인할 수 없는 앎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이다'적인 앎이다.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항상 오이다적인 앎을 가지고 계셨다. 예를 들어보자.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오이다)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오이다)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오이다)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오이다)(요8:19)" 그렇다.  요8:19에 나오는 '알다'는 동사는 전부가 다 '오이다'라는 동사다.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비록 율법선생이기는 하였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오이다적으로 알려고 했다면 예수님도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진정 알기 위해 율법을 배웠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기를 원해서 배웠을 뿐이다. 그러니 성경을 그렇게 날마다 읽고 암송하고 가르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또 한 구절의 예를 살펴보자. "너희는 그(그분,하나님)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되 나(예수)는 아노니(오이다) 만일 내가 알지(오이다)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오이다)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5)" 그랬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이다적인 앎으로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를 오이다적인 앎으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분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이다적인 앎으로 아버지를 알고 있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열심히 배워서 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앎은 안타깝게도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지 못했다. 성경을 이용해서 다른 욕심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처음부터 오이다적인 앎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기노스코적인 앎으로 배워서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순간에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7. 우리 모두가 '오이다'적인 배움을 가지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온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성경을 배우고 설교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끝내 하나님을 알지(오이다) 못한다.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결과들은 비단 나쁜 마음을 품은 초신자들에게만 해당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십년을 교회를 다녔어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출석하고 열심히 봉사할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결국 기노스코적인 앎의 단계에서 끝나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만약 죽는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그는 이미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를 일부러 다시 찾아가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사역을 위임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오이다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도 오이다적으로 알고, 예수님을 증거하여 다름 사람에게도 오이다적으로 그분을 알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진정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8. 나오며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을 오이다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전해줄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는 오이다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성경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찾아내고 어디서든지 그분을 발견하여 그분을 전해줄 수가 있는가? 만약 이것이 되지 않는 자라면, 그는 절대 목회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둘 다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먼저 오이다적인 앎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성경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처음에는 기노스코적으로 성경을 배우다가 어느순간에 오이다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곡히 간곡히 바란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