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9) 왜 초기교회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을까?(행20:7)_2022-12-28(수)

https://youtu.be/gKQaVxqPWGY  [혹은 https://tv.naver.com/v/32115854 ]

 

1.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어느 요일에 모였는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드로아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모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만 해도 주일은 쉬는 날(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때 바울은 어느 성도의 집 3층 다락방 안에 모여서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던 것이다. 

 

 

2. 안식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주일에 예배 모임을 가지면 안되고 꼭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다. 이름하여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다. 그런데 이들이 믿고 있는 교리를 보면, 문제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구원론과 안식일 준수는 상당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대부분의 이러한 교리들이 다 엘렌 지 화이트라는 여사에게서 나왔다라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엘렌 지 화이트 여사를 선지자라고 믿고 따른다. 이 여사는 안식교를 창시한 죠지 밀러(A.D.1782~1847)의 부인인데, 죠지 뮬러가 죽자 그 배턴을 이어 받은 자로서, 이 여사가 말한 것들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신뢰하며 따르고 있다. 사실 죠지 뮬러는 1844년 10월 22일에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그때 오시지 않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셨고 거기에서 천국에 들어올 자를 가르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름하여 '조사심판'이다. 안식교인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되면 결국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사심판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다. 

 

3.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구원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안식교인들의 구원론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식일 준수와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고, 계명(십계명)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특히 계명들 중에서 제4계명 곧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인 666표를 받아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지만 계명들을 준수하지 못한 자는 조사심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생명(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조에')을 얻고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아무리 계명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생명을 얻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뿐이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믿고 계명도 준수해야 구원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구원론이다.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기 때문이다(마4:17, 요3:16, 롬10:8~9, 행16:31). 

 

4. 안식일에 관한 안식교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안식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일종의 생명줄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안식일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주장을 모아서 살펴보면, 3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안식일은 폐지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이미 폐지되었다(갈4:9~11, 골2:16~27, 호2:11, 히4;1,11). 둘째,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는 자는 태양신 종교를 따라가는 우상숭배자여서 결국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인 666표가 찍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여기지도 아니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일에 성도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초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제정하여,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자들을 강제로 일요일예배로 바꿨다는 것이다. 아니다. 초기 교회 중에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그것은 행20:7의 말씀에도 나와 있으며, 여러 교부들의 어록과 초대 교회가 남긴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사도행전 강해 88강을 참고하기 바란다). 

 

5.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렇다면,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눴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안식일은 한 마디로 모형이고 그림자로서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4, 골2:16~17). 안식일의 진짜 실체는 예수님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히4:11). 다시 말해, 구약에 주어진 안식일은 율법 중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야말로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의식법들은 완성되어졌다. 그리하여 폐지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라는 것은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요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없다면, 사람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없이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인데도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안식일법에 의하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만드신 예수님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고 규정만을 내세워 사람을 정죄하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날(안식일)과 달과(초하루)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과 해(안식년, 희년)를 다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결코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갈4:9~11).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 참된 안식과 평강을 이미 얻은 자들이 다시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율법의 의식법들(할례, 안식일,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이 아니라,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은 다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골2:16~17).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의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고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321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니 그날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편리하여졌기에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를 드렸던 것이지, 태양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일요일에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지, 일요일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또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2022년 12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7)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과 드로아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행20:1~12)_2022-12-23(금)

https://youtu.be/O11G4EEkXxA  [혹은 https://tv.naver.com/v/31902527 ]

1. 그동안 바울의 전도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바울은 적게는 3번, 많게는 5번 정도의 전도여행을 했다. 많게 5번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로마로 이동하면서 전도한 것(제4차 전도여행)과 로마에서 전도한 것(제5차 전도여행)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도여행 가운데 바울이 사용했던 전도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4가지 정도인데, 첫째, 그는 아는 사람에게 먼저 전하는 방식을 취했다. 바울이 이방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는 했으나 그가 항상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유대인의 회당'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여전히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찾아가서, 그들에게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이 예수님입니다"라는 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둘째, 한 번 세운 교회는 꾸준히 관리를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교회의 현황을 들은 후 바울은, 자신이 개척했던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자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고, 사람을 파송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본인이 직접 재방문하기도 하였다. 셋째, 선교센타를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전략으로서, 건물을 마련해 놓고 그곳에 와서 훈련을 받아 각 지역으로 파송하는 전략이었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넷째, 적대자들을 만나게 되면, 주님의 지시가 따로 없을 때에는 그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의 소극적인 면인데, 바울은 이러한 소극적인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고 오로지 적극적인 일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2.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를 떠난 이후 어디를 다녔는가?

  사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있어서 핵심 지역은 '에베소'였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선교센타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의 소요 사태로 인하여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 곧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로 이동하여, 자신이 2차 전도여행 때에 개척했던 교회를 다시 돌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헬라 곧 아가야 지방으로 갔다. 그리고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에서 약 3개월간 머물면서, 고린도후서를 집필하였고, 로마서를 써서 보낸다. 그리고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복귀하려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것을 듣고 계획을 수정한다.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이동한 후 마게도냐를 지나서 배타고 드로아에 상륙한 후, 거기에서 밀레도를 거쳐 수리아의 두로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두로에서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다. 

 

3.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는가?

  바울은 이미 에베소에 있을 때부터, 마가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행19:21). 그는 이제 로마를 거쳐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3차 전도여행의 종착 지점으로서 그가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개척했던 이방 교회로부터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각 교회에서 직접 자신이 헌금을 받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각 지역의 교회의 대표자들을 대동하여 그들이 직접 예루살렘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래서 3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가게 된,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총 7명이었다. 베뢰아교회에서는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교회에서는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교회에서는 가이오, 루스드라교회에서는 디모데, 아시아 곧 에베소교회에서는 두기와 드로비모가 있었다. 이런 교회에서는 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 준 모 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받은 영적인 은혜를 물질으로나마 보답하고 감사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4. 바울이 드로아를 다시 방문했을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 계획을 들었던 바울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하여 돌아가는 방식으로 계획을 수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도착한 곳은 '드로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들을 이제는 두 번 다시 와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므로 드로아는 바울이 그 다음날 곧바로 떠나야 될 장소였지만, 그는 드로아의 어떤 3층집에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라도 더 말씀을 전달하려고 강론을 밤중까지 이어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두고'라고 하는 어떤 청년(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온 것이다. 캄캄한 밤중이라 등불을 많이 켜두었고 그래서 생겨난 탁한 공기 때문에 이 청년이 창가로 갔고 그곳에 걸터 앉아 있었는데,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했는지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삼층에서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가서 일으켜 세워 보니 그는 죽어 있었다. 하지만 바울이 내려가서 그 청년 위에 엎드린 후에 자신의 가슴에 그 청년을 껴앉고 기도하여 주님께 그 청년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하나님의 긍휼로 이 청년은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나게 된다. 물론 몸의 부서진 뼈들도 다시 다 달라붙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바울은 날이 새도록 떡을 떼고 그들과 이야기한 후에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 다음날 사람들(아마도 청년의 가족이나 친구들이었을 것)이 그 청년을 데리고 교회에 나온다. 그러자 교회가 적지 않게 위로를 받는다. 

 

5. 왜 하나님께서는 이 죽은 청년을 살려주었는가?

  그렇다면 왜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이 청년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살려주시고 그 몸을 치유해 주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이 청년이 살아나게 된 3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야로 수고하며 애쓰는 바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7절,11절). 바울은 조금만 복음을 전해 주고 떠나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혼신을 다해 밤을 지새워 가면서 복음을 전해 주었다.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한 바울의 열정이 여기에 들어 있다. 고로 만약 그 청년이 죽는다면 바울의 열정이 허사가 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죽은 청년이지만 살려주셨던 것이다. 둘째, 낮에 일함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어보겠다는 사모함으로 집회에 나온 청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이다(9절). 아마도 이 청년은 종이었을 것이다. '청년'이라 쓰인 단어가 '종,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추정컨대 15세 전후의 청소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복음을 사모하여 그 집회 장소에 나왔으니 하나님께서 이 청년을 불쌍히 여겨주신 것이다. 셋째, 교회 공동체를 위로하여 힘주시기 위함이다(12절). 왜냐하면 위대한 사도가 와서 집회를 했는데 사람이 죽어서 집회가 끝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랬었는지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청년을 살려주셨다. 그리하여 이 청년을 알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 청년을 다시 교회에 데리고 나옴으로 인하여 교회는 위로를 받았고 큰 힘을 얻게 되었다. 

 

2022년 12월 2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7) 바울은 어떻게 디모데와 의사 누가를 동역자로 얻을 수 있었을까?(행16:1~10)_2022-11-11(금)

https://youtu.be/eHTIrll9s8c  [혹은 https://tv.naver.com/v/30686848 ]

 

1.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에 어디에서 누구를 동역자로 얻게 되었는가?

  바울은 A.D.49~52년 까지 진행하였던 2차 전도여행의 초기에 두 명의 동역자를 얻게 된다. 이때 바울은 청년 디모데를 얻었고 또한 의사였던 누가를 동역자로 얻게 된다. 이때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그리고 의사 누가는 드로아에서 전도 수행원으로서 두게 된 것이다. 

 

2.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어떤 코스로 진행되었는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여행을 했던 곳을 다시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형제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이방인들의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 자신이 전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 그리고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을 차례대로 방문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했던 바, 주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 4가지를 그들에게도 전달해 주었다. 그것은 곧 '우상의 제물과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갈라디아에 위치한 교회들은 믿음이 더 단단해졌고, 믿는 이들의 숫자 또한 더 늘어났다. 그런데 다음이 문제였다. 이제는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바울은 먼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라볼 때 서남쪽에 위치한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성령께서 거기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그러자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통과하여 서북쪽에 있는 무시아를 향하여 올라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동쪽에 위치한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영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시아 가까운 드로아 항구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바울에게 밤에 환상이 주어진다. 그것은 에게해의 건너편 마케도냐인이 나타나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과 더불어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시아와 비두니아가 아닌, 유럽 대륙으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됨으로써 복음이 수리아와 아시아를 넘어서 유럽까지 전파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3. 바울은 청년 동역자 디모데를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초기에 '더베'를 갔고 그곳을 지나서 '루스드라'를 향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은 '디모데'라는 신실한 청년을 만났다.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마도 약 1년 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때 전도를 받았든지 아니면 그 후에 루스드라의 성도들에 의해 전도를 받았든지 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참 믿음이 좋았다. 왜냐하면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로부터 신앙 교육을 잘 받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대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방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까지는 할례를 받지 않은 채 있었다. 그렇지만 디모데는 어찌나 믿음이 좋던지, 루스드라 뿐만 아니라 옆 도시인 이고니온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눈여겨본 바울이 그를 동역자로 삼고자 원했다. 하지만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에, 앞으로의 복음 전파의 걸림돌인 '할례' 문제를 해결하고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이는 전도할 때 유대인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디모데는 이때부터 바울 선교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바울이 죽는 날까지 그를 돕는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디모데는 일종의 바울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진정 디모데를 동역자로 취할 수 있었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즉 누군가를 진정 자신의 동역자로 얻는 비결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루스드라라는 도시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에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다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때 바울은 죽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셨는데,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그곳에서 바울은 다른 한 명의 사람을 건져내어 자신의 동역자로 삼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스데반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얻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4. 바울은 어떻게 의사 누가를 동역자로 얻을 수 있었는가?

  이어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다시 전도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전도의 길이 좀처럼 열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남갈라디아서에서 아시아로 말씀을 전하려고 했을 때에는 성령께서 그를 막으셨고, 무시아의 드로아에서 비두니아에 가서 전도하려 했을 때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많이 지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때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아쉽게도 사도행전에는 그 이유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바울이 그때의 상황을 갈라디아서에 남겨놓았다. 바울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갈4:13~15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랬다. 육체의 약함 때문에 바울은 전도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연코 '건강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그가 얼마나 아팠든지 바울은 드로아에서 자신의 약함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들러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만난 이방인 의사가 바로 '누가'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때 바울이 안질에 걸렸다고 주장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의사 누가가 바울 선교팀에 합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사가 달라붙지 않으면 안되는 바울의 육체의 상황이 있었기에, 의사 누가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바울을 치료하기 위해 그에게 달라붙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즉 바울이 의사 누가를 동역자로 얻게 된 것은 그가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때 얻은 육체의 약함 때문에 자신의 육체를 치료했는데, 이때에 의사 누가를 만났고, 누가는 바울 곁에 붙어 계속해서 그를 치료해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의사 누가는 그때 바울과 그의 동역자인 실라 그리고 디모데로부터 무엇인가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이다. 

 

5.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붙여 주시는 2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붙여 주시는 이유는 딱 2가지다. 하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 걸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동역자를 붙여 주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하다가 잘 안되면 다른 일을 찾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병행하는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동역자를 붙여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사명에 목숨 걸고 충성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동역자를 붙여 주시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복음 전파를 위해 몸마저 돌보지 못한 채 일하려 할 때에 전도자의 건강도 중요함으로 하나님께서 육체의 건강을 돌볼 자를 그에게 붙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바울에게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드로아에 있을 때에 바울은 거의 녹초가 되었든지 아니면 번아웃이 된 상태에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의사의 눈으로 볼 때, 그냥 내버려두면 바울이 사역을 얼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바울 곁에 바짝 달라붙어 그를 치료하기 위해 누가가 동역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동역자를 붙여 주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의 후계자가 될 만한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을 수 있었고, 자신의 평생에 주치의였던 의사 누가를 만나게 된 것이다. 
 

2022년 11월 1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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