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21)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 장사의 천국 비유는 대체 무엇을 말하기 위함인가?(마13:44~46)_2022-03-15(화)

https://youtu.be/uWbt4vn_u8A  [혹은 https://tv.naver.com/v/25684216 ]

 

1. 예수께서 13장에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 중에서 5번째와 6번째 비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무려 7가지나 말씀하셨다. 그중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비유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라고 불리며,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수의 비유'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비유는 같은 종류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비유들이다. 한 마디로 천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더라도 취득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 비유가 같은 주제의 비유라는 것을 알려 주는 단서가 있는데, 그것은 여섯 번째 비유 '팔린(again)'이라는 헬라어 단어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뜻은 '다시'라는 뜻이다. 이는 주님께서 똑같은 주제를 또다시 말씀하시겠다는 뜻이다. 결국 둘 다의 비유는 이렇다. 둘 다 어떤 사람이 매우 좋은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 것이다. 

 

2.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는 어떤 것인가?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는 정확히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렇다. "하늘들의 왕국(천국)은 마치 밭 안에 [이미] 감추어진 채 있는 보물[상자]와 같으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 후에 감추었다(숨겨두었다). 그리고 그것의(혹은 그의) 기쁨으로부터 떠나갔다. 그리고 그는 가지고 있는 것들 만큼 많은 전부를 판다. 그리고 그는 저 밭을 산다." 그렇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소작농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밭을 쟁기로 갈다가 쟁기에 무엇인가 걸려서 살펴보다가 보물 상자를 발견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그 당시에는 보물을 발견한 자가 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밭의 주인이 보물의 임자가 될 수 있었던 때였다. 그러므로 소작농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게 되는데, 팔고 사는 것이 현재형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아주 현장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좋은 진주 장수의 비유는 어떤 것인가?

  '좋은 진주 장수의 비유'는 이렇다. "또다시 하늘들의 왕국(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들을 찾고 있는 어떤 장사하는 사람(상인)과 같으니, 그런데 그가 비싼 어떤 진주 하나를 발견한 후에, 떠나간 뒤에 그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들 만큼 많은 전부를 처분한 채 있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샀다." 이 비유의 끝은 현재형의 문구가 아니다. 과거형이다. 어떤 상인이 이미 좋은 진주를 구매한 이후를 기록하고 있다. 즉 현재의 장면이 아니라, 이미 끝난 장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인이 좋은 진주를 구매한 시점은 이미 그 진주를 사려고 그때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이미 다 처분한 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자기가 가진 재산 전부를 다 처분한 채 있지만 그 일이 결코 후회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실제로 더할 나위 없는 가장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4. 이 두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대체 주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이 비유를 든 것인가? 첫째로, 이 비유들은 천국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니,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꼭 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하고 귀중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는데, 천국은 그것들을 다 포기해서라도 꼭 얻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댓가의 지불없이는 그것을 결코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인생이 꼭 취해야 할 것은 바로 '천국'인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희생이 필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거듭난 자로서 회개하는 자는 들어갈 수는 있기 때문이다(막1:15, 마4:17). 그런데 여기서 취득해야 할 천국은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게 될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에는 천국집과 면류관, 보좌 자리가 있다. 그리고 굳이 공통점 하나를 더 추가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둘 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열심을 내고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5. 이 두 가지 비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비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비유는 공통된 주제를 말하고 있지만 약간의 차이점도 있다.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는가 하는 것이다. 밭에 감추어진 채 있는 보물 상자의 경우는 어떤 소작농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가 예기치 않게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날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천국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는 열심히 진주를 찾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두 번째 비유로서 '좋은 진주 장수의 비유'는 오랫동안 찾고 찾은 끝에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다는 비유다. 이는 어떤 친구가 오랜 노력 끝에 천국을 찾아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사람들마다 천국을 발견하는 방법이 각각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천국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찾도록 찾다가 마침내 그러한 천국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견한 후의 일이다. 그것을 발견한 후에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것은 모든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그것을 다 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어떤 사람은 천국이 좋다는 것도 알고 회개하면 들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댓가도 지불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천국도 좋고 회개하면 들어가는 것도 알고 있으며, 충성하게 되면 천국에서 누릴 영광(상급)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위해 자신의 것들을 전혀 희생하려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즉 자신이 가진 물질과 달란트와 시간을 천국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강과 지혜와 능력을 그 놀라운 천국을 얻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천국은 결국에 언감생심으로 끝날 뿐이다. 그렇다. 천국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안다고 해서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사모한다고 해서 다 얻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반드시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 세상에서 그가 얼마나 천국을 위해 댓가를 지불했느냐에 따라 그가 받을 영광도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에 비하면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받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현재 받고 있는 고난은 장차 자신에게 주어질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롬8:17~18). 

 

2022년 03월 15일(화)

정병진목사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크기와 내가 이 지상에서 누릴 축복의 크기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예수께서는 어느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는 어떻게 할 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가만히 있어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가?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이 둘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2022-02-2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주일예배] 천국과 그분의 의를 찾는 자들이 받을 은혜(마6:31~3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es9d-EWS70 [혹은 https://tv.naver.com/v/25310186 ]

 

1. 들어가며

  왜 우리는 회개하고 있는가? 아니 왜 우리는 회개를 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가 회개하는 목적을 정리한다면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회개를 함으로 지은 죄들을 사함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마4:17, 눅24:47). 그런데 회개의 목적은 이것만이 아니다.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회개를 함으로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성경 요한일서 1:9 말씀에 따르면, 사람이 회개하면 2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우리가 모든 불의함으로부터 깨끗하게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전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후자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전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자신의 영이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행위책을 떠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조금 가능하다. 왜냐하면 불의함으로부터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러운 영인 악한 영들이 내쫓겨남으로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이 우리 안과 밖에 있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떠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늘에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회개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악한 영들이 잘 떠나가는 회개를 해야 한다. 즉 하늘에서 내 죄를 용서받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악한 영들이 잘 떠나가는 회개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회개할 때에도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회개의 방법을 알고 회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조상들의 죄를 대신 회개하면 그의 후손들이 온갖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가? 그건 아닐 수 있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는지 그리고 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배척해 왔음과 그동안 죄를 지어왔던 죄들을 회개하면 그는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건 첫째로,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를 그 누구도 회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는 그냥 놔두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둘째로, 우리가 회개하지 않은 채 우상 숭배의 죄들을 그대로 그냥 놔두면, 그냥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값을 후손 3~4대가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출20:5). 그럴 때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악한 영들로 인하여 온갖 종류의 저주와 질병,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게 되고, 자녀들에게 망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회개하는 우상 숭배의 죄 회개는 천국가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자손들이 저주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그리고 또한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받기 위한 회개인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는 '구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찾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말 성경으로 마태복음 6:33의 말씀을 보면 이렇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구하라'는 단어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한글로 보면 그 의미가 '요청하라'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 단어는 '요구하다, 요청하다'라는 뜻의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찾다'라는 뜻의 '제테오'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하고 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구하다'라는 단어는 사실 '요청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고, 더불어 '찾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헬라어는 '요청하다'라는 단어와 '찾다'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단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7에 보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서 '구하라'는 단어는 정확히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찾으라'는 단어는 '제테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로서 '구하다'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가 '요구하라'는 뜻인지, '찾으라'는 뜻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그럼, 마태복음 6:33에 나오는 '구하다'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인가? 그것은 '제테오(찾으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본문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이 단어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왕국)과 그의 의를 [계속해서] 찾고 있어라"는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요]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찾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찾아야 할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요청해야 할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전자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다 말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오직 그것을 찾고자 하는 자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있다면 그는 아마도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이 어떤 것인지를 그것을 찾아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천국과 그분의 의는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으면 안 열리기 때문이다. 한편 '찾으라'는 말씀은 말이 아니다. 행동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1장에서 빵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A라는 친구에게 어느 날 한밤중에 친구B가 찾아왔다. 그러자 A는 그 순간 어떤 결정을 해야 했다. B라는 친구를 그냥 굶길 것인가 아니면 좀 민폐를 끼치더라도 이웃 친구를 찾아가서 빵을 구해올 것인가를 말이다. 그때 A라는 친구는 이웃 친구들에게 가서 빵을 구해 오기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빵을 찾아 나선다. 그렇지만 어느 집에서 얼마만큼의 빵을 구할 수 있을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만약 그날 그가 빵을 구하러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빵을 구해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마침 C라는 이웃 친구가 있었다. 그에게는 여분의 빵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귀찮아서 A라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도 강청을 하기 때문에, C라는 친구는 A가 자기의 친구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않으려 했지만, 하도 강청을 하니 들어주겠노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발견하는 것도 다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 나서는 자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인 것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자는 결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성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반드시 찾고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서 살게 될 천국을 여기서 잘 준비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방인들 곧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을 위해 아주 열심히 살아간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 오늘도 분주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지금도 부지런히 찾고 또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러다가 망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들과는 달리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그러한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찾고 구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과 그분의 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장차 들어가야 할 다음 세상은 어떤 곳인가?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살기 위해서는 그분의 의로운 기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할 때 천국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떻게 할 때 그분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켜 드릴 수가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모두가 천국을 사모하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주님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이라는 말만 듣고 그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천국이란 어떤 곳인지, 또한 과연 그곳에는 누가 들어가게 되는지, 그곳에서 갖는 신분은 대체 어떤 것이며, 누가 어떤 종류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이 땅에서 그것을 장만할 수 있는 것인지를 찾고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만히 있으면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의 의로운 요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인지, 죄많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특히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는 더러운 영들을 떠나보낼 수 있는지를 우리는 찾고 구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과연 천국의 비밀을 얼마나 발견한 채 있으며, 그분의 의로운 요구에 얼마나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6. 천국과 그분의 의는 어떻게 해야 찾을 수가 있고 또한 발견할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천국의 비밀들과 그분의 의로운 요구들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있으면 그것이 결코 발견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을 내 것으로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노력과 수고 혹은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이 얻어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댓가를 지불한 분량만큼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천국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좋은 진주 장수의 비유'다(마13:45~46). 주님은 천국은 누가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떤 진주 장수를 말씀해 주셨다. 그는 좋은 진주들을 구하고(헬라어로는,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내 그가 값비싼 좋은 진주 한 개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가 그날 발견한 진주는 천국에 관한 비밀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찾아낸 그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처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진주 하나를 산다. 그렇다면, 묻겠다. 왜 이 진주 장수는 그 비싼 진주를 사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 진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진주가 그만한 값을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 것이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다.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은 채 천국의 놀라운 영광스러운 자리와 지위는 결코 얻을 수가 없다. 또한 회개도 마찬가지다. 회개를 어떻게 해야 악한 영들이 잘 나가는지를 알려 주는 방법을 듣고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회개가 어렵고 힘들게 보이면 회개를 안 하고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회개 없이는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회개 없이는 깨끗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데, 그는 그 일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를 쓰시려고 해도 깨끗하지 않은 자를 하나님은 결코 쓰실 수가 없으며, 그를 혹 쓴다고 해도 그를 계속해서 쓰실 수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는 시간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어찌 악한 영이 떠나가겠는가? 악한 영들에게는 많이 바쳤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회개 헌금 한 번 드리지 않는 자가 어찌 더 자신이 깨끗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있는 천국과 회개에 관한 영적인 비밀들을 정말 가슴 깊이 새기며 그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7. 천국과 그의 의를 발견했으면 누구나 그것을 다 얻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과 그분의 의로운 요구가 무엇인지를 찾고 찾아서 발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내가 발견한 천국과 그의 의는 그냥 내가 다 가질 수가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먼저는 그것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다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좋은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내 재산이 너무나 아까워 그 진주를 사지 않는다면 그 진주는 내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과 회개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도 참으로 소중한 일이지만,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그것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결국 그런 자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클 것이며, 회개를 더 많이 하여 깨끗한 그릇이 된 자가 하나님께 더 크게 쓰임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만큼 그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지불해서라도 그렇게 살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분량이 작은 사람은 작은 분량만큼만 살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은 조상들이 물려준 것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낼 때에 그에게 주신 그릇의 크기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천국과 그분의 의를 다 똑같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지불하는 자만이 그것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을 내가 듣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천국의 많은 복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며, 이 땅에서도 더 크게 쓰임받을 수 있을 것이다. 

 

8. 나오며

  열심히 찾지 않았는데 그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리가 없으며, 열심히 찾지 않았는데도 회개의 비밀을 터득할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견했어도 어떤 댓가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그가 천국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으며, 그것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는데도 그가 회개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다. 구원이라는 것은 사실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축복의 크기나 천국에서의 상급은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가치있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겼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는 자는 정말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그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별로 가치있다고 여기지 못한 자는 결코 그 진주를 사지 않을 것이다. 다른 싼 진주만을 찾아다닐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 어떠한 사람인가? 만약 지금 우리가 목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는 방법을 들었지만 어찌 그 많은 시간을 낼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더 깨끗한 그릇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면 주님으로부터 정말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지도 못할 것이다. 주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듣는 성도들이라면 그는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도전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천국과 그분의 의를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자에게 이방인들이 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같은 이 생에서의 필요를 가득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마6:33). 놀라운 축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02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사람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살아있다고 하나 이름뿐인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어떤 잣대로 확인할 수 있는가? 여기 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방법이다. 그것은 2가지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도 이러한 잣대로 늘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태하거나 안일한 삶으로 치달아 구원의 노정에서 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괜찮하고 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이것은 영적 전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점검하고 무장하지 않는 한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쳐들어오는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탄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기 위해 오늘도 힘써야 한다. 그것은 평생을 힘써서 해야 할 일이지 한 두 번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라도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는지 한 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자. 그리고 도전해보자. 어떤 진리라도 그냥 얻어지는 영적 진리는 결코 없는 것이니까...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나온다. 이 일곱 개의 교회는 A.D.95~96년 당시 소아시아에 실재하였던 교회들 가운데 주님께서 소개하고 계시는 대표적인 교회들이다. 그 중에서도 다섯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 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앞선 두아디라교회는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중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해주고 있는 사데교회를 향해 우리 주님께서는 무슨 평가를 하고 계신가?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매우 가련한 평가를 하셨다. 왜냐하면 사데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 죽은 교회였다고 평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종교개혁시대의 교회가 죽은 교회로 변모해버린 것일까? 그리고 교회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을 가리키며, 어떻게 해야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사데교회 이후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러한 사데교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자.

 

2. 사데교회는 왜 두아디라교회와 함께 교회 앞의 지역의 이름이 복수인가?

  사데교회는 바로 이전에 등장하는 두아디라교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사데교회 이후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교회 및 라오디게아교회와는 또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소아시아 일곱교회들 가운데 특이한 이름부터 살펴보자.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가운데, 이름이 복수인 교회가 있다. 그것도 딱 두 개만 있다. 그것은 두아디라교회와 사데교회 뿐이다. 다시 말해, 다른 5개의 교회들은 다 그 이름이 단수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두 교회만은 복수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두아디라교회는 "두아디라들 안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데교회는 "사데들 안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은 당시 소아시아의 두아디라 라는 도성이 2개 이상 있었고, 사데라는 도시가 2개 이상 있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주께서는 사도요한에게 도시의 이름을 복수형태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이 두 개 교회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다. 두아디라교회는 주지하시다시피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2개의 교회는 둘 공히 이 교회의 책임맡은 자 곧 말씀전파자인 주의 종들에게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먼저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교회에 용납하여 이 교회을 인도하는 주의 종이 이미 타락해 있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음행같은 것은 죄가 아니라는 가르침에 미혹되어 그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주의 종이 타락해 있는 교회가 바로 두아디라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니 우상숭배의 죄로 이 주의 종의 메시지를 듣고 따라가고 있는 자는 불못에 떨어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계21:8). 그리고 사데교회는 말로는 살아있다는 알려져있지만 실은 주의 종이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교회도 주의 종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교회였던 것이다. 그렇다. 이 두 개 교회의 지명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교회가 이미 주의 종들이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 있는 상태에 있었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이들 지도자들을 따라갈 수는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주의 종의 가르침을 따라가서는 같이 멸망할 수 있어, 교회에는 소속되어 있으나, 다른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개의 교회이나 공동체가 둘이 있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름 앞에 등장하는 지역명칭이 복수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3.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사데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있지만 실은 죽어있는 교회를 지칭한다. 여기서 죽어 있다고 하는 대상은 평신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이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의 종을 가리킨다. 그리고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목회자 자신도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는 성도들도 또한 같이 죽어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래도 이 교회 안에는 숫자적으로는 많지 않아도 진실한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데교회 안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흰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었다(계3:4). 그들은 늘 더럽혀진 자기의 옷을 예수의 피로 빨아서 희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일1:7). 그러므로 사데들 안에 있는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 부류는 흰 옷을 입은 무리들로서,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또 한 부류는 죽어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주의 종을 따라 평신도들도 영적인 측면에서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 있었다. 앞의 부류를 확대적용하면 빌라델비아교회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고, 뒤의 부류를 확대적용하면 라오디게아교회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데교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교회요, 확대판인 것이다. 그것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소개에서 그러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의 경우는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전부다 계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따왔다(지금 읽어보라). 하지만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계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따온 것이 없다. 새로운 표현들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자기선언에서 나오는 표현은 이미 에베소에서 사데교회 가운데 다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추가된 교회들인데,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사데교회의 확대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는 사데들에 속한 한 공동체로서 그래도 흰 옷을 입고 있는 무리들을 가리키며,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주의 종을 비롯하여 그러한 주의 종을 따라가고 있는 죽어있는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4. 라오디게아교회는 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 있었는가?

  그러므로 사데교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확대적용하면 그것이 곧 라오디게아교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떻게 되어서 죽어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을까? 요약해보면,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살아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죽어있는 교회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차겁지도 않고 뜨거워지지도 않는다. 이미 신앙이 화석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있다.

  첫째,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그들은 외적인 자신의 모습만을 바라보고서 자신의 내면도 그렇게 되어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다. 그들은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했고,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실재는 영 딴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사금산업으로 인하여 부자가 되어 있기에 자신들은 축복받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모를 팔아서 부요한 자가 되었기에 자신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부르기아안약을 팔아서 남의 눈도 고치고 자신의 눈도 고쳐서 돈을 많이 벌어놓았고 자신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기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우리 주께서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의 평가를 내리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평가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네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

  둘째, 이들은 믿음과 선행과 영적 진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댓가라도 지불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전혀 지불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계3:18). 그래서 그들은 한 마디로 죽어가고 있었다. 세상의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서 얻어냈지만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댓가지불하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도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듣기를 게을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진단해주는 말씀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들은 현재에 그냥 만족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로 살고 있고, 또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더욱이 주의 종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고, 자신도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둘 다 망하는 길이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은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리가 없으며, 그들에게 참된 복을 주실 리가 없다. 사실 우리에게 거져주시는 이신칭의의 은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라는 댓가가 지불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마25장의 열처녀의 비유를 보라. 신랑이 올 때에 미련한 처녀에게서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거져 얻을 수 있는 기름이 그들에게 있었는가? 가서 사와야 했다. 늦게 댓가를 지불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지금 댓가를 지불하라. 지금 더욱 더 기도하라. 지금 더욱 더 진리의 말씀을 들으라. 지금 더욱 더 책망을 받으라. 지금 더욱 더 회개하라. 지금 더욱 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

 

5. 라오디게아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라오디아교회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가능한한 빨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자각하고 깨어나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진리의 누룩같은 말씀들로 부풀려 있는 자신이 심각하게 영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날마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사데교회 안에 있었지만 이기는 자들로 남아있던 작은 무리들처럼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행실의 겉옷을 빨아 희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날에 이르러 이미 기록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계3:5).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은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수고와 노력 그리고 영적으로 자신을 무장하기 위한 애씀과 인내, 이런 것들이 없이 거져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날 죽는다면 순전히 주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날 죽지 않는다. 앞으로 수십년을 더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사탄마귀가 그 사람을 천구가도록 그냥 놔두겠는가? 결코 아니다.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여 넘어뜨린다는데, 어찌 믿음 하나로 시작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넘어뜨리려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상황이 두아디라나 사데교회의 상황이라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의 종도 이미 타락했거나 죽어있는 상태에 있으니 같이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천성적으로 쉽고 편한 길을 택하려고 한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며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선택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무장하여 사탄의 온갖 교묘한 속임수와 유혹을 이겨내어 천국에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늘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과 구원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미 믿음으로 얻은 일차적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늘 기억해야 한다. 기적과 같은 절대적인 은혜로 애굽에서 탈출해나왔지만 교회생활을 대변하는 광야에서 애굽의 우상숭배의 습관과 불평불만하던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가나안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천국에 못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8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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