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다보면 걱정되는 일이 좀 생긴다. 그것은 내가 회개한다고 회개하고 있지만 혹시 내가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의 구원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다 회개하지 못할 죄인데 굳이 회개하려고 그렇게까지 힘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지 못해 남아있는 죄, 과연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지, 이 메시지에 안으로 들어오라. 히브리서의 말씀이 다시 보일 것이다. 오 주여, 우리에게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소서!!!

2021-12-0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 있다면 그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가?(히9:6~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81s29EfZMU [ 혹은 https://tv.naver.com/v/23929679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선각자들이나 성인들이라도 그들은 결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어서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것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죄[사함]의 문제요, 또 하나는 사망(죽음)의 문제요, 마지막 하나는 이 세상임금인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퇴치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대강절을 맞이하여 예수께서 베풀어주실 죄사함의 은총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조금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예수께서 그때 완전한 속죄제사를 드리셨으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채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러한 진술은 합당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사람의 모든 죄가 어떻게 용서함 받게 되는지를 살펴보되 구약의 제사법을 가지고 살펴보고, 우리가 지은 죄들 중에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죄사함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사함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사실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원칙론에서는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까지 들어가려면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음과 더불어 우리의 회개가 함께 동반될 때 이 모든 혜택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그래서 안전하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우리들의 저주까지 다 끝냈으니 우리에게는 더이상 받을 저주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번째 진술은 성경과 위배가 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서 주신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원을 받지 못한 채 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저주가 완전히 다 사라져서 더이상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정말 물질의 축복을 받고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기에 모든 병에서 다 치유받고 건강하고 살고 있는가?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사고로부터 자유함을 입고 있는가? 그리고 자녀들은 형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다 사실이라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믿겠다고 달려들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병원에 가보라.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지 아는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도 얼마나 가난에 허덕이는 자가 많은지 아는가? 또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두번째 진술은 선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중간의 과정을 생략한 채 이것만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하는데, 회개와 관련되어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교회는 우리나라에 약 1%에 속하는 교회로서 한 번 받은 구원이지만 그것이 영원한 구원이 되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회개하고 있는 교회들 중의 하나이다. 회개 없이는 구원이 완성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개할 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 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회개기도문"이라는 책자를 사용한다. 그것을 보고 회개한다. 그러면 자신이 무슨 무슨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에 진정 회개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회개를 하다보면 하나의 궁금한 점이 생긴다. 과연 이 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어차피 죽을 때까지 회개를 해야 하는데 혹시 회개하지 못한 채 넘겨버린 죄가 있다거나, 그것이 죄인지 모른 채 죄를 지은 죄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죄 때문에 구원에서 탈락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다 회개하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적당히 회개할 일이지, 뭘 그리 열심히 회개할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를 끝까지 들어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때 그분이 우리 사망의 값과 저주의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는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용서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우리 대신 속죄제물로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기에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때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가 지었던 죄와 앞으로 우리가 지을 죄까지도 다 담당했으니 우리는 다 죄사함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주장이 합당한 것인가? 만약 이 질문이 옳다고 동의해주지 않으면, 요즘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그때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구약시대에 속죄제사법이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뭐든지 이것이 옳은지 저것이 옳은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언제나 처음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처음에 사람이 어떻게 죄사함을 받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표론적으로 보여준 예표적인 사건이자 말씀이기 때문이다. 

 

5. 구약시대에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해서 용서함 받았는가? 그것은 속죄제사법을 통해서 용서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깨닫고 용서받기를 바라면 그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 법을 일컬어 '속죄제사법'이라고 한다. 이러한 속죄제사법은 구약성경 레위기 4장과 16장에 나오는데, 레위기 4장에서는 개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제사법이 나온다. 그리고 레위기 16장에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대속죄일 속죄제사법이 나온다.

  먼저, 개인이 죄를 짓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속죄함(용서)받는 방법부터 살펴보자. 레위기 4장에 보면, 이때에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제물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방법은 똑같다. 먼저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달은 자가 자신이 지은 죄값을 치를 흠없는 대속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아간다. 그때에는 신분에 따라 송아지, 양과 염소 등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본인이 흠없는 속죄제물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넘긴다. 그 다음 그것을 자신이 칼로 찔러서 죽인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아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제물의 고기는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많은 양의 돈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죄일 제사법에 대해 살펴보자. 레위기 16장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죄를 용서받는 제사법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을 일컬어 '대속죄일 제사법'이라고 부른다. 이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드리는 것이며, 매일 드리는 것도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차례만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제물의 피를 바르고 뿌리는 장소가 속죄제사법과 각각 다르다. 여기에서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바르고 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마저도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므로, 먼저 자기를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를 드린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의 속죄제사에 있다. 그런데 이때 드리는 대속죄일 제사는 양을 한 마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나 드린다. 이 때 사용하는 양은 '숫염소'를 사용하는데, 두 마리를 가져다가 제비뽑기를 하여 하나는 여호와를 위한 양으로 잡고, 또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양으로 삼아 무인지경에 버리고 온다. 먼저, 여호와를 위한 양은 대제사장이 잡아 그 피를 담아서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앞에 뿌린다. 그리고 성소로 나와서는 그 피를 향단의 뿔에 바르고 일곱 번을 뿌린다. 그리고 나와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아사셀양에게 안수하여 넘긴 다음, 정한 사람에 맡겨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에 버려둔 채 오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도착하면, 대제사장은 "너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로 선포를 한다. 그러면 온 회중은 그날에 금식을 끝내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한다. 

 

6. 대속죄일에 제사법이 알려주는 이 제사법에 대한 주님의 의도는 대체 무엇인가?

  구약시대로 다시 한 번 가보자.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어겨서 도둑질을 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양이나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돈도 들어가고, 시간도 들어가고 자신에게 번거롭기 때문에, 분명 자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 년에 한 번 모든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제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대속죄일 제사'다. 그러므로 그는 평상시 개인적으로 속죄제사는 드리지 아니한 채, 대속죄일 제사에만 참여한다. 그리고 그날 대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일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진정 이 때에 이 사람이 일 년 동안 지은 죄가 다 용서된 것일까?우리가 하나님이라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렇게 해서 죄사함을 받으려고 한 자를 지켜보호해 주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제사를 받아주신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대속죄일 제사를 치렀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믿기만 하면 자신은 완전한 속죄를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그러한 사람들로서, 대속죄일 제사에만 참석하여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으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평소 때 자신이 지었던 개인 죄를 용서받는 제사는 한 번도 드리지 아니하고,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하여 모든 것을 떼우려는 자들을 위하여 히브리서 기자로 하여금 성경을 쓰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있다. 

 

7. 대속죄일에 제사 한 방으로 일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함받을 수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백성인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한다면, 그는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다 사함받을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때 진짜 자신의 죄들을 용서함받는다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죄사함받고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들도 분명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리고 대속죄일 제사에 참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인가? 그들은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과 대속죄일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대속죄일 제사 때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목이 다르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 이제는 히브리서 9:6~7을 보자. 

히9:6-7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개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제사장은 개인용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한꺼번에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사해주는 속죄제사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대속죄일 제사 때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목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들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그것은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말이다. 이 때 '허물'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아그노에마'이다. '아'는 부정접두어이며, '그노에마'는 '앎,이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그노에마'는 무지하여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뜻한다. 그러므로 대속죄일 제사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자기가 죄인지도 모른 채 지었던 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속죄일 제사법은 평소 때 개인이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드리는 속죄제사와 다른 것이다. 이때에는 그것이 미처 죄인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대제사장이 대신 드려주는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대속죄일 제사를 통해 자신은 완전한 속죄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평소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여 예수님의 피를 통해 속죄를 받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들을 용서받도록 하기 위해 대속죄일 제사법을 주신 것이지,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8. 그리스도인은 대속죄일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말한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고 자신의 피로 대속죄일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한 번의 제사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더 이상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우리가 지은 죄들을 계속해서 자백할 때에 용서해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요일1:9). 그렇다. 개인이 지은 죄는 날마다 개인용 속죄제사 곧 그 죄를 개인적으로 자백해서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백하여 죄를 고백했다 할지라도 어떤 것은 미처 회개하지 못한 채 넘어가버린 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그것이 죄인 줄로 몰라서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남아있는 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죄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대속죄일제사를 골고다 언덕에서 드리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다 사해주실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에 의해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대속죄일 제사를 믿기만 하면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고 주장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해서 아니 된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그렇게 믿겠노라고 할지라도, 과연 자기와 자기의 가문에 드리워진 저주가 떠나가게 되는지를 살펴보라. 자신의 죄를 낱낱이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저주가 떠나가는지 지켜보라. 그렇다.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는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주도 한 번에 다 날아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죄목을 꺼내어 놓고 기도할 때에 하나씩 하나씩 저주도 나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할 때에 이미 죄 때문에 내 속에 들어와 있던 영이 하나씩 하나씩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가 많은지, 구약시대로 치자면 대속죄일 제사에 한 번 참여하는 것만으로 일년 동안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죄용서를 받으려고 시도하는 자의 죄를 과연 다 용서해주시겠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철저히 깨닫고 대신 죽어가는 속죄양을 보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속죄제사를 보실 때에, 그들이 미처 다 회개하지 못한 죄를 그때에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아무나 한 번 믿었다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해서 한꺼번에 죄가 다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저주도 역시 한꺼번에 싹 나가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할수록 저주도 사라지게 해 놓았다.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할수록 귀신도 역시 떠나가게 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신 축복이다. 자신이 지은 개인적인 죄마저도 회개하지 않으면서, 한 번 믿고 회개한 것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말하지 말라. 진짜 그렇게 죄가 용서 되는지 보았는가?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라. 회개하라. 특별히 자신이 지은 개인적인 죄를 보다 더 철저하게 회개하라. 그래야 혹시 내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21년 12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께서는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셨는데 어찌 그것이 인류 위한 속죄제사가 될 수 있었는가?(히9:1~12)_2020-03-16(월)

 

[또는 https://tv.naver.com/v/12885805 ]

 

1. 사람이 속죄제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했나요?

  사람이 속제제사를 드리려면 3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제사드리는 장소가 있어야 했고, 둘째는 제사에 사용될 제물이 있어야 했으으며, 셋째는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제사를 드리려면 장소로서 성막(성전)이 있어야 했고, 제물은 흠없는 제물이 필요했으며, 제사장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제사를 성막(성전)에서 드려야 한다고 하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사드릴 장소로서 최초로 시내산 아래에 성막이 건축되기 전만에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장소는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셋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같은 족장들은 보통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나 나타난 장소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예표로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그 장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서, 아라우나의 타작장마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 장소가 의미있는 장소였음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막이 세워진 이후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으로 얻을 땅에 들어갈 때에는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장소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신12:14~27,14:23~24), 나중에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7년간 성전을 짓고나서 그가 드리는 기도를 보면, 그곳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왕상8:29). 그러므로 속죄제사는 아무데서나 드리려서는 아니되고 꼭 성전에서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온 백성을 위해 드리는 속죄제사는 일반적인 속죄제사와는 어떻게 차이가 있었나요?

  일반적인 속죄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에 따라서 즉 그가 "제사장"이냐 "이스라엘 온 회중"이냐 "족장"이냐 "평민"이냐에 따라서, 제물이 각각 다르긴 했지만(레4장), 모든 속죄제사는 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자가 흠없는 제물을 성막(성전)으로 끌고가서 자신의 죄를 제물에 안수하면, 제사장이 그 제물을 잡아서 성소에 피를 뿌리는 것으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대속죄일제사(레16장)는 대제장들과 백성의 회중를 비롯하여 지성소와 회막과 분향단을 속죄하기 위한 제사로서, 이 때에는 드리는 제물들도 더 많았고(번제물과 속죄제물), 절차도 더 복잡했으며(제사장을 위한 제사와 온 백성을 위한 제사), 집례도 대제사장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대속죄일 제사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4.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죽지 않았고 골고다언덕에서 죽었는데, 어찌 그것이 대속죄일 제사라고 할 수 있나요?

  예수께서는 성전(예루살렘의 스룹바벨성전)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골로다언덕 위에 있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되어서 그것이 인류를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죄일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요?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둘째는 온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로서 드려지는 두 마리의 속죄양(숫양)이 제물로 드려질 장소가 바로 골고다였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첫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치신 성막이었던 것입니다(요1:14, 2:18~21).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성막을 치셨기 때문이요(요1:14), 또한 예수께서 직접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전된 자기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요2:19~21). 더욱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몸이야말로 첫째성막 곧 성소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히9:1~12).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물질적인 성전에 있는 성소의 휘장도 같이 한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데(마27:51,눅23:45), 그 휘장을 두고 예수님의 육체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히10:19~20). 그리고 둘째로 속죄양 두 마리가 속죄제물로 드려지려면 골고다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한 마리의 속죄양은 여호와를 위한 양으로서 이 양은 성전에서 죽임을 당해 그 피가 지성소의 법궤의 동쪽 위와 그 앞에 뿌려졌어야 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골고다언덕 밑에는 남유다 말기로 추정되는 시점에 제사장들이 옮겨놓은 법궤가 예레미야 동굴 속에 감추어져 있었고, 예수께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지진으로 인해 십자가 아래에 있던 피가 바위틈을 따라 그 법궤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의 간증). 그리고 또 한 마리의 속죄양은 대제사장의 안수를 받게 한 후 죄를 짊어지고 버려져 죽게하라고 했는데(레16:7~10,20~22), 예수께서는 세상죄를 짊어지신 뒤에(요1;29) 당시 예루살렘 밖(영문밖)에 있는 골고다로 가셔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두 마리의 속죄양이 되어 규례대로 죽으신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골고다언덕의 속죄제사는 인류를 위한 대속의 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예수님이 몸이 성소(첫째성막)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성전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신 것을 두고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쳐주는 영적인 설명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온전한 장막이신 당신의 몸(성소)을 찢어서 제물로 바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9:11~12,10:19~20). 그러므로 예수님은 당시에 "걸어다니는 성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성전은 그당시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몸은 걸어다니는 인격적인 성전이 되어서,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성전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몸이 위치해 있다면 아무데라도 다 성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의 물질적이며 고정적인 예루살렘성전이 이제는 이동적인 성전으로 그 개념이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오순절성령강림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되었기에, 모든 성도가 곧 움직이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만나보려면, 사람들은 물질적인 예루살렘성전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내가 하는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돌아가셨던 그 장소가 곧 성막이자 성전이었던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그가 율법을 어긴 것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020년 03월 16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님의 몸은 첫째 성막(성소)으로서 그의 죽으심은 하늘 길을 여는 것이었다(히9:1~8)_2020-03-12(목)

https://youtu.be/PlPeWPapteU

https://tv.naver.com/v/12820792

 

1. 모형론적(예표론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모형론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땅)에 장막(성막)을 치신 것입니다(요1:14,딤전3:16). 하나님께서 임마누엘하신 것입니다(마1:23). 그런데 그 목적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출25:8~9).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인류을 구원할 속죄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막10:45).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처소를 준비한 것이었으며, 속죄제사를 위한 발판을 놓았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 모형론적(예표론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그러니 모형론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2가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해방하여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모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전3:16).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당시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다 예수님에게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 예수님의 육신을 성막으로 삼아 오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딤전3:1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요14:9)"이요,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요14:10)"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속의 피를 흘려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는 행위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속죄일 제사를 드려 인류의 죄를 없이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3.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이 어떻게 대속죄일 제사가 되는 것인가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예수께서 당시 인류의 대표자로 보냄받은 선지자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 되신 것이요, 죽음의 재앙을 면케 해줄 "유월절 어린양(고전5:7)"이 되시어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속죄일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되는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희생제물은 2가지였습니다(레16:5). 그것은 숫염소 2마리였습니다. 속죄양으로서 숫염소는 둘 다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안수하여 넘긴 후에 죽게 하였는데, 그중 숫염소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드려졌으며(레16:9),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광야에 있는 마귀로 해석됨)을 위하여" 드려졌습니다. 그때 여호와를 위한 숫염소는 잡아서 그것의 피를 지성소의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렸으며, 아사셀을 위한 숫염소는 산 채로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면 아사셀 숫염소는 뜨거운 태양볕에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가 혀를 모래에 쳐박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 있는 성막(성전)에서의 속죄제사로 인하여, 그것이 비록 모형이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시어 2가지 일을 다 마치신 것입니다. 그와같은 속죄제사는 당시 골고다언덕에서 행해졌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1933-1999)는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천사의 지시를 받아, 남유다 므낫에 왕 때에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법궤가 묻혀있는 예레미야의 동굴을 파고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 장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던 장소의 아래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위를 파고 들어가보니 그곳에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고, 법궤 위에 마른 피가 있어서 그것을 가져가다 유대 혈액연구소에 보내 조사해보았더니, 남자의 것이 없는 여자의 절반의 염색체로만 구성된 피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동정녀마리의 태를 빌려 태어나신 것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럼, 왜 피가 법귀 위에 있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릴 때에 그분이 흘린 피가 십자가를 타고 내려왔는데,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지진이 일어났고 그 바위에 틈이 생겼으며 그 틈새로 피가 흘러내려와 법궤 위에 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법궤 위에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의 피가 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죽임당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니,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죽임을 당하셨기에, 그분은 아사셀을 위한 속죄양으로서도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4.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어디로 가셨나요?

  예수께서는 그날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의 영혼은 참 하늘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체를 입으신 후에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로 들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들(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하늘 자체 안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히9:24).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율법을 따라서 동물의 피로서 정결함을 입을 수 있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더 좋은 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히9:23).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죽으신 것을 다른 것으로도 표현하였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둘째 휘장을 찢는 행위였었다고 한 것입니다(히10:19~20).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은 첫째 성막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성막은 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동쪽은 첫째 휘장으로 서쪽은 둘째 휘장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남쪽과 북쪽은 판자로 만들어진 벽이었습니다. 이 성소 안에는 일곱금촛대와 분향단과 진설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둘째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막15:38)", "한 가운데(눅23:45)"가 찢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간 무덤으로 내려가셨다가 3일째 되는 날 부활하시어 그의 영혼이 하늘에 있는 지성소(둘째성막)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형(이 땅의 지성소)이 아닌 실체(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시어 원형으로서 속죄일제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죽으심을 모형론적으로 어떻게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나요?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예수님의 몸(육체)은 첫째 성막(성소)이라고 해석했으며(히9:8), 이 세상 성전의 둘째 휘장이 찢겨진 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겨진 것이라고 했습니다(히10:20).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때 이 세상에 있는 성전 안의 지성소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기자신을 속죄제물로 드리심으로 제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히9:12,24).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시어 아직 하늘(지성소)에 들어가시기 전,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만지려했을 때에, "나를 손대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요20:1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아직 하늘의 지성소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 예수께서는 하늘의 지성소에 가시어 하늘에 있는 둘째 성막(지성소)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인류를 위한 참 성막에서 속죄제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니(히8:1~2), 하늘의 지성소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들의 죄를 다 용서하여 씻어주고 계십니다(히10:12,14, 7:24~25).

 

2020년 03월 12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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