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1(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도바울이 받았던 일반은사와 특별은사는 무엇인가?(고전12:7~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ip6w897bIg  [혹은 https://tv.naver.com/v/30710654 ]

 

1. 들어가며

  성령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신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의 은사'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있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는 일반 은사가 있고 특별 은사가 있다. 일반 은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은사인데 보통 부모를 통해 자녀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특별 은사는 좀 다르다. 특별 은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특별 은사가 이처럼 특별한 선물인 만큼 이 은사는 신령하며 또한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경험하면서 절대 전능자인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굴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은사는 매우 귀중한 보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신약의 대 사도였던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떤 은사를 받아서 그의 사역에 활동한 것일까? 그가 받은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는 대체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구해야 할 은사는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사도 바울은 어떤 일반 은사를 받았을까?

  우리는 사도 바울의 생애를 사도행전의 기사와 그가 남긴 12개의 편지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까? 은사를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로 구분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어떤 은사를 받은 것일까? 먼저 사도 바울이 받았던 일반 은사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 은사'란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아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은사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은사들은 보통 부모와 조상들이 행한 일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는 은사들을 가리킨다. 재물의 은사, 건설의 은사, 섬김의 은사, 봉사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등이 일반은사에 속한다. 그러므로 일반 은사는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부모나 조상들 중에 억압이나 착취 그리고 살인하거나 사기를 친 이들이 있다면 그의 후손들은 좋은 은사를 받지 못한다. 대부분 악한 영들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어떤 일반 은사를 받은 것일까? 그가 받은 일반 은사를 큰 것부터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사랑의 은사'를 받았다(고전13:1~2).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떤 은사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강조했다.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어떤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즉 방언과 예언,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사랑의 은사가 중요한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크게 받은 은사는 역시 '사랑의 은사'였다. 

  둘째, 그는 '담대함의 은사'를 받았다(행20:23~24). 그는 모르는 사람 앞에 서서 설교할 때나,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 앞에서도 결코 떨지 않았다. 그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고 늘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 앞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도 알았지만,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목숨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그는 '복음 전함의 은사'를 받았다. 그는 말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설득하고,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그러한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즉 회당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공회 앞에서나 어디서든지 복음을 조리있게 잘 전할 수 있었다. 그의 감동적인 설교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으니, 안디옥 회당에서(행13장), 루스드라의 문 앞 광장에서(14장),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행18장), 밀레도에서(행20장),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행23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전한 설교(행24장)는 잘 알려진 설교들이다.

  넷째, 그는 '건설의 은사'를 받았다. 즉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은사를 받은 것이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너무나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비시디아 안디옥교회,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등등이 있다. 

  다섯째, 그는 '세움을 받는 은사'를 받았다. 그는 이방인 선교의 사도로서 세움을 받았으며, 가르치는 자로서도 세움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성경을 쓰는 자로 세움을 받았으며, 율법과 복음의 관계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복음 증거자로서도 세움을 받았다. 

  여섯째, 그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았다(딤후1:11). 그는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3차 전도여행 때에는 두란노에서 약 2년 동안 사람들을 가르쳐 각 지역에 파송하여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다(행19:9~10).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것들 외에도 다양한 일반 은사를 받아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3. 사도 바울이 받았던 특별 은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위와 같은 일반 은사 외에도 사도 바울이 받아서 복음 전파에 사용하였던 초자연적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실 우리는 특별 은사가 무엇이며, 어떤 종류가 있는지 사도 바울이 써 놓은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기본 은사로서 9가지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제시해 놓았기 때문이다(고전12:8~10). 그만큼 사도 바울은 은사의 모든 것을 알았고 또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받은 특별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가 받은 특별 은사가 무엇인지 그 은사들을 큰 은사부터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지혜의 말씀의 은사'란 지혜의 은사가 아니라, 미래의 상태를 초자연적으로 아는 앎의 은사를 가리킨다. 즉 미래의 일들을 마음의 영감이나 환상 그리고 글자로 보든지 음성을 듣는 은사가 이 은사인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에 마케도냐인의 환상을 본 것이 그 예이다(행16:9~10). 

  둘째,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도 받았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도 지식의 은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정보를 초자연적으로 아는 은사를 가리킨다. 이것도 역시 마음의 영감이나 환상 글자 혹은 음성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은사다. 예를 들어,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 구브로에 있을 때에 박수 엘루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초자연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앞잡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행13:10~11). 

  셋째, 그는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믿음의 은사'란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는데 그냥 믿는 은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믿는 은사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요, 또한 아직 땅 한 평도 없었고 자식 하나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에게 기업으로 주신다고 하신 말씀과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는 말씀을 고스란히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를 어떤 사람으로 불러 쓰신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그 일에 충성하였던 것이다(행9:15, 26:16~18). 

  넷째, 그는 '예언의 은사' 또한 받았다. '예언의 은사'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마음으로 듣거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거나, 성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후에 그것을 전달해 주는 은사이다. 또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글자로 보여서 그것을 읽어 주는 은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였다(행13:1).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는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를 언급하였는데, 특히 '예언'하기를 권면한 바 있다. 특별히 그가 예언한 재림 예언은 지금까지 재림 예언의 표준이 되고 있다(고전15:51~54, 살전4:13~18).

  다섯째, 그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것은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로서, 천사와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귀신과 뱀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현상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악한 영들에 의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은사가 능력 행함(기적과 축사)의 은사와 함께 나타나면 사실 놀랍게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예수님을 보았고, 주의 음성을 들었으며,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어떤 영인지를 구분하여 그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그는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 여기서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이것은 은사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자신은 방언을 더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고전14:18). 그리고 그는 방언 찬양도 할 수 있었다. 

  일곱째, 그는 '방언 통역의 은사'도 받았다. 그는 방언을 많이 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통역의 은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방언만 말하지 말고 통역하기를 힘쓰라고 말했던 것이다(고전14:13). 

  여덟째, 그는 '병 고치는 은사' 곧 '신유와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2차 전도여행 때에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였으며(행14:8~10), 3차 전도여행 때에는 두란노에서 그의 앞치마만 얹어도 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었다(행19:12).

  아홉째, 그는 '능력 행함'의 은사도 받았다. 여기서 '능력 행함'의 은사라는 것은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 점치는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 그녀가 자꾸 전도하는 일을 방해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그 속에 있는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오라고 명함으로 귀신을 쫓아버렸다(행16:16~18). 또한 그 일로 인하여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기도하고 찬송을 하였다. 그러자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착고가 풀리는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행16:25~26). 그리고 3차 전도여행 때에는 드로아에서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려내기도 하였다(행20:9~12).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한 9가지 초자연적인 은사를 다 받은 아주 특별한 사역자인 것을 알 수 있다. 

 

4. 사도 바울이 받은 은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받은 은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부르심과 사역에 맞는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아무렇게나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이 땅에 그 사람을 보낼 때에 주신 소명에 따라 그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는 은사의 거의 전부를 주신 것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은사를 구할 때에는 자신의 사역에 맞는 은사를 구해야 한다. 만약 은사를 받아서 자기 자랑하고 폼 잡으려고 은사를 구하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은사를 적극 활용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은사를 주신다는 것이다. 은사는 그것이 일반 은사이든 특별 은사이든 상관없이 대부분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다. 다만 악한 영들이 많으면 그 은사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서 은사를 받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에 어떤 은사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구해서 받은 은사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가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사역에 은사를 적극 활용하여 그것으로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실 때에는 어떤 은사는 크게 주시고 어떤 은사는 상대적으로 작게도 주신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있어서 큰 은사는 빛의 은사쪽이다. 즉 영안이 열려서 영의 세계를 보고 듣고 하는 은사를 크게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 그리고 예언과 영들분별의 은사는 보다 더 크게 받은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불의 은사 곧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 행함의 은사는 적게 받았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우심을 받은 자는 아무래도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환상,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더 간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나오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는 사실 좋고 나쁨이 없다. 다만 은사는 자신의 부르심과 사역에 필요하고 합당한 은사를 구하고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역시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에 그의 부르심과 사역에 맞는 은사를 같이 딸려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은사인데도 자신이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은사를 구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주신 은사를 활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사만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았으면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그것을 자기의 영력의 자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거나, 아니면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는 어떤 은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는 기도하는 은사, 기도 응답의 은사가 있으면 매우 유익하다. 왜냐하면 성도로서 중보기도 할 일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물의 은사와 섬김과 봉사의 은사가 있으면 더욱 좋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 자신이 처음 믿는 가정이라면 영적 권세가 있어야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에, 영 분별의 은사를 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가정을 악한 영으로부터 구원해 낸 후에는 그것을 교회의 다른 지체를 섬기는 일에 곧 그들을 영적인 어둠에서 건져내는 일에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주의 종이라면 복음 전파의 은사와 더불어 지혜와 말씀, 지식의 말씀, 영 분별의 은사, 예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 치유의 은사를 구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케 하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11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은 누구신가(24)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3가지 이유(행1:8)_2020-06-17(수)

https://youtu.be/3vDrCe51EXM [혹은 https://tv.naver.com/v/14329612 ]

 

1. 예수께서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전에 무엇으로 무장하라고 말씀하셨는가?(행1:8)

  예수께서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전에 능력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성령의 어떤 것이 제자들 위에 내려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이 능력을 받게 됨으로 인하여 무장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어떤 것"이란 성령께서 믿는 자들 위에 내려오실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행11:17, 8:20). 

 

2.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옷입혀져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드시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셨지만, 우선 위로부터 능력으로 옷입혀지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럼 왜 예수게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라고 하셨나요? 그것은 3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은 악한 자 곧 마귀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요일5:19). 예수께서도 이 세상 임금을 마귀라고 하셨습니다(요12:31, 14:30, 16:11). 사탄마귀는 실질적인 악의 지배자로서 지금은 음부에 갇혀 있지만(주님 재림 직전에 잠깐 놓임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도 음부에서 자신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내보내 통제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앏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면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마귀는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인기를, 어떤 사람에게는 쾌락을 주어, 거기에 빠지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머물러 있게 됩니다. 

 

3.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옷입혀져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둘째,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옷입혀져야 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는 본인이 담대해지기 위함입니다(행4:29~31). 귀신들 앞에서 쫄아서 벌벌 떨고 있으면 귀신들이 대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들은 담대해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모든 성도가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들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오로지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들을 파송해주시는데, 우리에게 파송된 천사가 귀신보다 더 세고 강력해질 때에 귀신들은 나가고 멀리 있어 가까이는 얼씬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마17장에 보면, 변화산 아래에 있던 9명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자신들이 왜 그랬는지를 묻자, 예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충만을 받게 되고, 그래야 능력을 받게 되는데, 사실 능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천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천사들이 파송되어 나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천사가 치료하는 천사이면 내게서 치료의 은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고, 만약 그 천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천사이면 그때부터 내게서 환상이 보여지고 꿈도 꾸어지며 귀신들도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근지 기도해서 성령의 능력을 옷입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을 건져올 수 있겠습니까? 

 

4.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옷입혀져야 하는 세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셋째,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옷입어야 하는 셋째 이유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보거나 듣지 아니하면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2:4)"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불신자의 영혼들은 웬만해서는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눈에 보이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인기와 쾌락만 좇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심사를 영적인 세계로 돌리려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옷입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확실한 답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5. 최초의 성령강림사건이었던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의 사건이 보여준 성령의 능력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든 최초가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동안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 120명의 성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침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다 방언(글로싸)으로 말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해석해본다면, 누군가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말하게 되었면 그는 이미 성령의 능력도 함께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나눌 때에 말씀하겠지만, 방언의 은사는 초자연적인 은사이면서도 영적인 선물을 받기 위해 첫 관문(현관문)과도 같은 은사입니다. 누군가 성령세례로 인하여 방언이 터저나와 방언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는 여러가지 은사들이 그때부터 이미 와 있을 수 있고, 와 있는데도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른 채 사장시켜놓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더 큰 은사(선물)을 받아 교회의 목회자의 지도아래서 믿음과 건강이 약한 지체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그것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2020년 06월 17일(수)

정병진목사

 

  B.C.1406년 출애굽후 딱 4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모세는 이제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을 들려준다. 이제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나갈 것이지만, 남겨진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을 정복하러 가야한다고 하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하고 담대함이라는 것이다. 과연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약속의 땅에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오늘은 적진에 뛰어들기 일보직전에 진정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강하고 담대함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모세는 모압평지에 서서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들에게 말했다. 자기는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신31:2).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러 들어가라는 것이다(신31:6,8). 그런데 그들은 과연 모세가 없는 정복전쟁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사실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들은 모세를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모세의 눈은 흐린 상태가 아니었고 그의 기력도 쇠하지도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신34:7). 그런데 모세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때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 맨붕이 왔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그동안 믿고 신뢰하고 따라왔던 후원자나 지도자가 자신의 곁을 떠나가겠다고 선언하고 또한 앞으로 해야 할 더 큰 과업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과연 두려워하지 않고 떨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처럼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들은 당시 2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모세의 부재요 또 하나는 중과부적과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아야 할 2가지 이유를 말해주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먼저 가셔서 가나안족속들을 멸망시키실 것이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 붙여주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신31:3,5).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신31:6,8). 과연 그후에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모세도 없고 중과부적의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이다. 그러자 담대하게 적진을 향해 뛰어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어떻게 함께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먼저 가서 일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 결과는 가나안의 첫성에서 나타났다.

  가나안땅의 첫성은 여리고성이었다. 여리고성은 요새였다. 2중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정복하는 데에 그들에게 신무기를 들려주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공성퇴와 같은 신무기 제작법을 일러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화살도 없었다. 단지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여리고성을 돈다고 해서 지진이라도 일어나겠는지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날에는 일곱바퀴를 돈 다음 외치라고 하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외친다고 성벽에 붙어있는 잎사귀하나라도 흔들리겠는지 말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정말 땅이 흔들리기 사작하더니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안쪽으로 말이다. 그러자 여리고성 안에 있는 가나안족속들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그 성 안으로 들어가 칼날로 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가서 일하심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 가까이에 왔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보냈기 때문이다(수5:13~15). 아마 그는 미가엘 천사장이었을 것이다. 그가 먼저 가서 여리고성을 장악하고 있는 하늘의 악한 영들을 묶어버렸고, 이어 함성이 들리자 그의 천사들과 함께 그 성을 허물어뜨렸던 것이다. 그렇다. 정말 그랬다. 하나님께서 먼저 가셔서 일하셨던 것이다.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이 해야 했던 일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적진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일들이 남아 있다. 아직도 세상에는 구원해야 할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귀에게 붙들려 살고 있는 영혼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불쌍한 세상의 영혼들을 향해 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다. 오히려 떨고 있다.

  그런데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보라. 이제 3년반의 공생애를 마치고 하늘로 떠나가려는 순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당신에게 주어져 있으니 이제는 세상으로 담대히 나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덧붙혀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고 약속해주셨셨다(마28:20).

  그렇다. 우리가 어디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여호수아와 출애굽2세대들 및 예수님의 12제자들처럼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때다. 모두가 다 영적인 싸움에 나갈 때인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에 그냥 머물러 있으려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나 먹고 생수나 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만을 받고 광야에 그냥 머물러 있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나 먹이고 생수나 마시게 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게 하려고 불러내셨을까? 아니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불러내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회생활의 최종적인 목적지가 어디인지 잘 모르고 있는 듯 하다. 광야에 머물러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광야에 머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나 먹고 구름기둥불기둥의 안내를 받던 출애굽1세대들 중에 누가 과연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마치었는지를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들 대부분은 원망불평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았다. 이들은 결국 출애굽은 했으나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구원을 향해 첫 발은 내딛었지만 결국 천국을 예표하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지옥에 떨어졌던 것이다(유1:5).

  성도들이여, 그러므로 이제는 강해지고 담대해져야 한다. 가만히 자기 신앙이니 지키며 살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과거 이스라엘백성들처럼 광야에서 원망불평하다가 광야에 엎드려져 죽기 쉽상이다. 요단강을 건너 적진의 땅으로 담대히 들어가라. 그곳에 가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이나 다름 없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신 예수께서 이겨놓은 것에 우리가 가서 승리만을 챙취하면 되기 때문이다. 왜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먼저 가서 일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그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 " "너희가 성령을 받았으면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행1:8)"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어디에서 체험하려고 하는가? 강하고 담대히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곳에 있는 영혼들을 악한 사탄마귀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나갈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생활만 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에서 엎드려저 죽을 수가 있다. 담대하라. 임마누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 그러면 주님이 일하신다. 가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가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해놓으셨지를 보게 될 것이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

2016-04-17 성도여 강하고 담대하라(신31;1~8).ts_00001315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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