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넷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1) 천국입성의 세번째 조건, 충성이란 어떤 의미인가?(마25:14~30)_2022-03-03(목)

https://youtu.be/7EAknutRHW0  [혹은 https://tv.naver.com/v/25469989 ]

 

1. 천국입성의 실제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최소조건은 2가지다. 하나는 '거듭남'이다(요3:5). 회심으로서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은 거듭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계속적인 '회개'다. 이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가리킨다(요일1:9).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이미 목욕을 했으니 그 이후부터는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조건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이것이 없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 있겠지만, 주님의 바라심은 충분조건을 채우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순종'과 '충성'이다. 둘을 하나로 합쳐서 '충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야말로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신분과 상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의 입성조건은 충분조건으로 많이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등 외에도 자신이 댓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준비함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혼인잔치의 예복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의 신분과 상급이 될 것이다. 

 

2. 달란트의 비유는 왜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날이 언제 올른지 아무도 모르니, 자칫 잘못하면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썩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24장에 나오는 "충성되고 악한 종"의 비유와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 오시는 날 그분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야할른지를 늘 생각하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3.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주의 종들에게 필요한 '순종'과 '충성'은 무엇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 것인가?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이미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종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자신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를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받은 종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둘 다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성실해야 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 하지만 둘은 소명을 맡은 것에 약간 차이가 있다. 이 둘의 차이를 비교한다면, '순종'과 '충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온 주의 종들이다. 이 종들은 자신이 받아서 이 땅에 온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천국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미 천국에 이미 준비된 채 있는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종들이 100%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인지라 그에게도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충성해야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새롭게 그에게 부여될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먼저 2가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는, 소명을 하늘에서 받았느냐 아니면 이 땅에서 달란트로 받았느냐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소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자이다. 하지만 마25장의 종은 이 땅에서 달란트로 소명을 받은 자인 것이다. 둘째는,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부터 복이 결정되어 있지만,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는 벌이 중하다는 것이다. 이 종은 하늘에서부터 이미 보좌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성실하게 순종했을 때에는 주인이 그에게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긴다고 하였으니(마24:47)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된다. 그렇지만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심한 형벌까지 받게 된다. 채찍으로 맞게 될 것이고, 외식하는 자들이 받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24:51). 그런데 마25장의 종은 충성하면 그에게 많은 상이 주어질 것이다(마25:21,23). 그러나 만약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묵혀두고 사용하지 않았을 때에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마25:30). 

 

4. 순종과 충성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주님의 종들이 사실 '순종'하는 것과 그리고 '충성'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은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 오늘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주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충성하는 것은 오늘날 평신도들이 자신의 달란트와 은사에 따라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24장의 '순종의 종'과 마25장의 '충성의 종'은 또 어떤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로,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이 우선인가 아니면 자신의 유익이 우선이냐 하는 것에 있다. 즉 순종의 종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특히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자다(마24:45). 그러나 충성의 종은 모든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며 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왜 자신에게 주어졌는지를 늘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책임을 깨닫고 그것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된다. 즉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가서 열심히 일하여 남겼던 다섯 달란트는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충성하면 그 남은 결과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자율적인가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하늘에서부터 구체적인 사명을 지시받고 온 자는 자율적이지 못하다. 자신이 받아가지고 온 그것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이 그에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이 받은 구체적인 그 사명에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르다. 그에게 주인은 달란트만을 맡겼을 뿐이다.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재량권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든지 그것은 종의 선택사항이다.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내가 내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이 능력과 재주를 물려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라 할지라도, 실은 자신을 어머니의 태중에 보내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달란트를 보다 더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마25장의 종으로 부름받은 자인 것이다. 

 

5. 충성이란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충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성실함과 열심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특별히 마25장의 종의 비유를 통해서 정의해보면, 스스로 주인의 기대와 바람을 알고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 재주, 능력)을 열심히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을 아주 무거운 책임감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묵혀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남김으로써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오늘도 최선을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늘 살핀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른지 잘 가늠하여 적재적소에 그것을 배치한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이와는 정반대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묵혀두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인의 기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쓰되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그것에 사용하지않고 그러한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전혀 일하지는 않는 게으른 자가 바로 게으른 종인 것이다. 그럼 지금 나는 어떠한가? 과연 나는 하나님에게 충성된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게으른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2022년 03월 03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속편(03) 창세기가 알려주는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사탄마귀의 출현과 활동(창3:13~15)_2021-08-11(수)

https://youtu.be/oGFBHNK-llM  [혹은 https://tv.naver.com/v/21798747 ]

 

1. 요한계시록에서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을 무엇이라고 칭하고 있나요?(계12:9)

    보통 창세기만을 읽은 분이 있다면 그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은 그 뱀을 "사탄, 마귀, 온 천하를 꾀는(미혹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계12:9). 우리는 창세기 3장을 읽을 때에 빨리 그 사실을 알아보았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어떻게 뱀이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지를 말입니다. 이것은 뱀 속에 이미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어떤 영적인 존재가 들어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문제는 그 뱀 속에 들어있는 영적 존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2. 창세기가 가르쳐주는 옛 뱀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창세기 3장은 인류 타락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는 아주 특별한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 놈의 유혹을 받아서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이 놈이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꼬드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뱀은 아담과 하와를 굳이 꼬드겨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을까요? 왜 그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반하게 하려고 했던 것인가요? 그러므로 이 사건에는 뱀의 간교한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그것이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창세기가 가르쳐주는 뱀의 정체는 사실 창세기 1~3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의 주범은 바로 옛 뱀 곧 사탄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먼저 알 것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A.D.95년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사탄마귀는 과거에 천사였다고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마귀가 원래는 천사였다는 사실에서부터 그 정체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살펴보면, 먼저,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던 아주 특별한 존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사실 이 우주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사요 또 하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창1:26에 나오는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해석이라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과 그 옆에 있는 천사들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각각 따로 계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협의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홀로 한 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수도 없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대표 구절로는 사44:24입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 그렇습닏. 고로 창1:26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천사들이 이미 곁에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어제도 살펴보았지만 천사는 첫째 날 하늘들(두 개의 하늘)을 창조하신 후에 창조되었으며, 그리고 나서 땅(지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창1:1, 2:1, 왕22:19, 느9:6, 시33:6, 103:21)

 

3.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천사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게 되자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후에 에덴동산에서 내보내게 됩니다. 왜나하면 그들이 손을 들어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먹고 영생을 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창3:22).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께서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옛 뱀으로 등장하여 아담과 하와를 꼬드겼던 천사들 중의 한 놈이 이미 선과 악을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그렇습니다. 그 놈이 바로 사탄마귀 루시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은 사탄마귀 루시퍼의 정체를 다각도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A.D.90년경에 쓰여졌던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을 "이 세상 임금(지배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연도에 기록되었던 요한일서에서는 사탄을 줄기차게 "악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요일2:13,14, 3:12, 5:18~19). 그런데 A.D.95년경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를 큰 용이요, 옛 뱀이요 사탄이요 마귀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계12:9).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인을 꼬드겨서 아벨을 죽이게 했던 놈을 사도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악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요일3:12). 고로 우리는 창3:22에 나오는 천사들 중에 한 놈이 이미 선과 악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천지창조 당시에 타락하여 악한 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아마도 루시엘 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때는 천사들의 1/3 정도가 타락하는 일이 일어나기 전, 4천년 전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루시퍼가 악을 알게 된 일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4. 창3:22에 나오는 "선과 악"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나요?

  그렇다면, 루시퍼가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설명하라고 하면 잘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비유말씀으로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입니다(마25:14~30). 여기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장사해서 그 배를 남겼기에 주인으로부터 아주 큰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때 주인이 그들을 칭했던 선언은 둘 다 똑같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라고 말했습니다(마25:21,23).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25:26)"라고 칭함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가 게을렀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주인에게서 받았던 한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놓았다가 그것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습니다(마25:26). 그렇다면 그가 "악하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가 주인을 나쁘게 표현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즉 한 달란트받았던 자는 자기가 게을러서 일하지 않은 것을 두고서, 자기의 주인에게 "당신은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가 모으는 악덕고리대금업자"라고 말함으로서 나쁘게 표현했습니다. 고로 어떤 사람이나 천사를 두고서 우리가 그를 "악하다"라고 평가할 때에는 그가 하나님을 나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고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된 자"였던 루시퍼는 이미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못 먹게 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야, 하나님께서 너희들더러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니? 야 야 야, 그것도 몰라. 그것은 네가 그것을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따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이 바보야!"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미 루시퍼는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5. 주기도문에 나와있는 옛 뱀 곧 사탄마귀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우리가 창세기 3장의 옛 뱀의 정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도 그를 "악한 자"라고 표현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바로 '주기도문'에 나와 있습니다(마6:9~13). 주기도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이 하늘에서 먼저 먹칠을 당할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가 훼손을 당한 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왕국)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우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9~10,13)"라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우리말 성경에서는 13절이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악한 자로부터 건지시옵소서"라고 번역해야 더 옳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아포 투 포네루'에서 '포네로스'는 형용사를 중성으로 번역하면, "악으로부터 건지시옵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그것을 남성명사로서 번역한다면 "악한 자로부터 건지시옵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은 실체가 없는 존재이기에, 실체가 분명한 '악한 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보다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를 꾀려고 에동산에 침투해 들어왔던 사탄마귀는 이미 악을 경험한 자로서 온 것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그가 자신이 악을 경험했던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하와와 아담을 속이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마귀야말로 하나님의 철천지 원수이자 인간의 철천지 원수라는 것을 알고 잘 대적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놈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만세전에 세워놓으신 인간의 구원 경륜을 훼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8월 11일(수)

정병진목사

 

회개에도 기한이 있다. 그 기간을 놓쳐버린 자는 자신이 맞이한 운명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뿐인 우리의 인생을 잘 살아야 한다. 후회없는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들을 말씀은 우리가 그동안 들어왔던 일반적인 말씀은 아니다. 이 본문을 헬라어원문으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절대 알 수 없는 말씀들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왜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둘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그에게는 그만한 2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일에 착수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삶은 비단 그의 삶뿐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요소가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된 판단은 우리의 미래를 사실 어둡게 하고 있다. 그는 사실 자신의 주인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그를 악하고 게으른 자가 되게 했고, 결국에 바깥 어둠 속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대체 왜 그는 일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이 올 때에 돌려드려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10년 20년 다녀도 영적인 진보가 없는 이유와 비슷하다. 


2018-12-30 주일낮예배

제목: 그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마25:29~30)

https://youtu.be/kD52Q0qF1I0

1. 들어가며

  연말이 되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 해를 맞이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해를 어떻게 마감해야 하는가? 한 해를 마감하는 데에 소홀한 사람은 다음 해를 맞이하기는 하겠지만 또 한 해를 그냥 흘려보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은 한 해를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한 해를 다시 뒤돌아볼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한 해를 뒤돌아볼 때에 정말 후회없는 삶을 살아왔다면 그는 분명 놀라운 영적인 진보 가운데 새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해 두 해를 지내왔지만 자신에게 영적인 진보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오늘 이러한 의문을 가진 자들에게는 생수와 같은 말씀이 기다리고 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음성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동안 달란트의 비유 가운데 한 달란트를 가진 자가 책망들어야 했던 이유를 어떻게 들었는가? 그것은 그가 악하고 게을렀기 때문이었다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왜 악하고 게으른 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듣게 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적인 구원론과 인간론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헬라어원문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값진 말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달란트의 비유에 감춰진 놀라운 영적 사실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할까? 오늘 그 해답을 한 달란트받은 자의 삶을 통해 발견하기를 바란다.

 

2. 우리가 알고 있는 달란트의 비유는 어떤 것인가?

  대부분의 성도들은 달란트비유에 관한 말씀(마25:14~30)을 익히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멀리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그 주인의 종들 가운데 3명이 종들이 등장하고 있다.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종들의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주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그런데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고 주인은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였다. 앞의 두 종은 칭찬을 들었지만 한 달란트받았던 종은 책망을 들었다. 그것은 그가 "악하고 게으른 자"라는 것이었다(마25:26). 그는 자신이 땅 속에 감추어두었던 한 달란트마저 빼앗겼다. 그리고 바깥 어둠 안으로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빨들을 갈게 될 운명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대체 한 달란트받은 종은 왜 주인이 그에게 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었다가 주인에게 돌려준 것인가? 그가 처음부터 악하고 게을렀던 종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주인이 그를 너무 홀대하여 한 달란트밖에 주지 않았던 것에 불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런데 오늘 달란트비유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좀 다르다. 그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3.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왜 일을 하지 않은 것일까?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왜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놓은 채 있다가 그것을 주인에게 되돌려 준 것일까? 성경원문을 보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로, 한 달란트받은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준 한 달란트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주인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마25:25). "나는 당신의 달란트를 땅속에 감추어두었나이다. 보소서, [이제] 당신은 당신의 것을 가지소서(마25;25)" 그러므로 그는 주인이 돌아오면 한 달란트를 되돌려주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주인이 자신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으로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보았자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보았자 다 주인에게 돌아갈 것인데 무어라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는가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눠줄 때에 한 번도 맡긴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예 넘겨 준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성경으로는 아무리 찾아봐도 그러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번역하는 자가 이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기에 그렇게 번역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다르다. 우선 14절을 보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마25:14)" 그러나 헬라어원문은 이렇다. "왜냐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멀리] 여행을 떠나고 있을 때에, 자기자신에게 속한 종들을 불렀고, 그가 그들에게 자기의 소유물을 넘겨주었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맡긴 것과 넘겨준 것은 다르다. 맡긴 것은 도로찾아가기 위해서 준 것이지만, 넘겨준 것은 아예 넘겨준 것이므로 소유주가 바뀐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칭찬을 받았던 두 명의 종들은 주인이 그것을 자신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주인이여, 당신은 내게 다섯(혹은 두) 달란트를 넘겨주셨는데...(마25:20,22)" 그러나 우리말성경에는 다 "주셨다'고만 되어 있다. 아니다. 헬라어원문을 보면, 14절의 "맡겼다"는 말씀과 20절과 22절의 "주셨다"는 말은 다 동일하게 "파라디도미(넘겨주었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글성경을 수십번 수백번을 읽는다고 해도 이 말씀의 본 뜻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른 두 명의 종들과는 달리 그것을 자신에게 맡긴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 한 달란트받았던 종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약 주인의 것을 장사하다가 잘못해서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것을 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인의 돈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땅 속에 몰래 감추어두었다가 주인이 오면 돌려주는 것이었다.

 

4. 그러나 실제 주인은 어떤 분이었나?

  그러나 실제로 주인은 어떤 분이었을까? 주인은 첫째, 아주 공평한 분이었다(15절). 왜냐하면 능력이 부족한 종에게는 그가 감당할 분량만큼 나눠주었고, 능력이 큰 종에게도 그가 감당한 분량만큼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둘째, 주인은 악덕업주나 고리대금업자가 아니었다(14절).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준 것은 다시 돌려받으려고 준 것이 아니라 아예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셋째, 주인은 종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었다(21,22절). 왜냐하면 종들에게 달란트를 넘겨준 것은 종들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종들이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통하여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아예 넘겨준 것은 지금 종들의 믿음직스러움과 충성심을 본후 그들에게 더 큰 것을 맡기려고 했던 것 뿐이지 종들을 시켜 노동력을 착취하여 돈을 벌려고 자신의 소유물을 나눠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5. 영적인 빈익빈 부익부는 왜 발생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은 29절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 이 말씀을 헬라어원문에 따라 직역해보면 좀더 의미가 분명해진다.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자에게는 그것이 주어질 것이며 풍성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가지고 있지 않는 자의 경우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다" 확실히 빈익빈 부익부에 관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빈익빈과 부익부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사실 오늘날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흑수저와 금수저는 처음부터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이와는 다르다. 빈익빈과 부익부가 이미 결정된 상태가 아니라 얼마든지 자신의 하기 나름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실 29절과 30절의 말씀이 뒤바껴있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대한 책망의 말씀(30절)은 28절 다음에 바로 나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유말씀의 핵심요절인 29절이 먼저 나오고, 한 달란트받은 종에 대한 운명이 30절에 뒤이어 나온다. "이 무익한 종을 바탙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30)"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29절의 말씀은 한 번으로 끝날 말씀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필요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는 칭찬들었던 종이 되느냐 책망받았던 종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국에 계속해서 책망받은 종으로 살아왔지만 끝까지 자신의 삶을 회개하지 않고 주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종은 30절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넘겨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활용하지도 않은채 게으른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이 오실 때에 바깥 어둠 안으로 내던져져 슬피 울며 이빨을 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의 결산이 딱 한 번 있는 일로 판단해서는 아니된다. 아니다. 그것은 매년 계속되는 결산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자는 결국 30절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6. 이 비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비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왜 오늘날 5년 아니 10년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영적인 진보가 없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 그가 한 달란트받은 자의 자세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보았자 내 것도 되지 않을 뿐더러,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축나는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해서 실패하게 되면 그 책임은 내가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전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비유 말씀의 진짜 내면을 들여다 보라. 첫째, 주인이 달란트를 넘겨준 순간부터 그 달란트는 주인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을 주인이 도로 찾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전도한 결과는 다 내가 갖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주님이 빼앗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고 투자해야 한다. 둘째, 혹시 일하다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내가 감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처음부터 자본금은 내 것이 아니었다. 주인이 내게 넘겨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돈으로 장사하다 실패했어도 그 책임을 주인은 결코 나에게 묻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인의 자본금이 날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은 애가 닳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주의 일을 하는 데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정작 하나님의 나라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자본금이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이 것이었고 주인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7. 나오며

  영적인 빈익빈 부익부는 지금도 해마다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빈익빈이 아니라 부익부가 될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달란트가 얼마인가를 먼저 계산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자하고 도전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없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라. 그래서 연말이 되었을 때 남긴 자가 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을 자본금으로 내게 투자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온전히 내게 또 넘겨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또 그것으로 장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으로 주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남기게 되면 그것은 다시 주인의 자본금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내가 죽거나 아니면 주님이 오시는 때가 되면, 그것은 영원히 천국에서 내가 누리게 될 상급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는 그만 못드린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봉사하면서 남들은 봉사하지 않는데 나만 손해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봉사를 주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속는 것이다.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내 것의 분량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한 투자인 것이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모아 상을 주신다. 그리고 더 큰 것을 내게 넘겨주시는 것이다. 오 이 놀라운 신비를... 내가 왜 그동안 빈한했는지를 살펴보라.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라. 건투를 빈다.

 

2018년 12월 30일(주일)

정병진목사(allete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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