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3(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우리 성도가 꿈꾸어야 할 진정한 꿈은 무엇인가?(창37:5~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vQkPsd3il8  [혹은 https://tv.naver.com/v/30826423 ]

 

1. 들어가며

  사람은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꿈은 대부분 의미없는 꿈들이다. 그런데 꿈들 중에서도 계시적인 꿈 또한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적인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과 같은 것으로서, 장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는 두 명의 꿈꾸는 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한 사람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인물이요 또 한 사람은 바벨론 포로시절의 '다니엘'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들 중에서 '요셉'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 요셉은 계시적인 꿈을 꾸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되어서 주님이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가 꾸었던 꿈은 대체 어떤 계시적인 뜻을 함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의 꿈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릴 장래의 지위와 그 꿈은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가?

 

2. 의미없는 꿈과 계시적인 꿈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꿈을 꾼다. 그런데 꿈을 꾸고 나서도 대부분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 무서운 영화를 보고 나면 악몽을 꾸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많아도 식은땀 흘리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꿈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 무의식 속에서 펼쳐지는 꿈이기 때문에 앞뒤가 잘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꿈의 내용이 잘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이러한 꿈들은 보통 '개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꿈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계시적인 꿈들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꿈들을 가리켜 계시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 조건이 들어맞을 때다. 그러면 그 꿈은 계시적인 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첫째, 꿈을 꾸고 난 뒤에도 그 꿈이 잊혀지지 않으며 계속해서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이라면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꿈을 꾸되 겹쳐 꾸는 꿈이거나 반복적인 꿈 그리고 이어서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은 계시적인 꿈일 수 있다. 셋째, 꿈의 내용이 일정한 패턴 즉 일정한 스토리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꿈이라면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그 꿈이 그대로 성취가 되는 꿈이라면 정말 그 꿈은 계시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다. 

 

3. 요셉이 꾸었던 계시적인 2가지 꿈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대체 어떤 꿈을 꾼 것일까? 그는 사실 처음부터 형제들에게 '꿈꾸는 자' 즉 '꿈쟁이'라고 불렸다(창37:19). 그만큼 그는 많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가 꾸었던 많은 꿈들 가운데서 오직 2가지, 겹쳐 꾼 꿈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꿈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꿈이었다. 그리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꿈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꿈을 형제들과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정확히 15년 뒤에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 고로 요셉이 꾸었던 꿈은 계시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꿈을 꾸었던 것인가? 그가 꾸었던 꿈은 이러하였다. 

  첫째, 요셉이 형들과 함께 곡식단을 묶고 있었는데, 형들의 곡식단이 일어서더니 요셉의 곡식단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다. 17세 되었던 요셉은 그 꿈이 하도 선명하고 신기해서 그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형들은 요셉이 형들 위에 왕이 되어 다스릴 것 같으냐면서 동생 요셉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같은 종류의 다른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절하는 꿈이긴 하였지만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 꿈을 들은 아버지가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너에게 가서 땅에 엎드려 절하겠느냐"면서 요셉을 꾸짖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꿈을 마음에 간직해 둔다. 

 

4. 요셉은 어떻게 되어서 계시적인 꿈을 꾸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미없는 꿈을 꾸는데, 왜 요셉은 계시적인 꿈을 꾼 것인가? 그리고 왜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사실 요셉이 꾸었던 꿈은 그의 장래를 알려 주는 꿈이었고 더욱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가 어떤 지위를 누리는지 알려 주는 꿈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듯 메시지를 갖고 있는 계시적인 꿈을 꾸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알려면 그의 4대 조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적인 꿈을 꾸고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받은 축복을 누리기까지는 그의 조상들이 행했던 놀라운 회개생활과 희생이 요셉에게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을 가지고 있어서 영의 눈(영안)으로 천사를 볼 수가 있고 귀신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귀신들이 사람의 몸속 특히 눈 속에 가득차 있어서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한다. 또한 계시적인 꿈도 꿀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요셉이 계시적인 꿈을 꾸게 되고 주님의 동행하심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살다간 그의 조상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는 세상에 이미 하늘은 어둠이 걷혀 있었고 맑은 하늘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조상들은 어떻게 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이런 축복을 누리게 할 수 있었을까? 오늘은 그들 이야기를 다 자세히 살펴보기는 부족하기에 간단하게 그들의 삶을 정리해 본다. 

  첫째, 아브라함은 일찍 죽어 나가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가문의 저주를 끝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상숭배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왔고 회개하여 100세에 이삭을 낳아 불임의 저주까지 끝냈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저주를 끝냄'이었다. 둘째,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모리아산에 기꺼이 자신을 살아 있는 제물로 바친 사람이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헌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기업을 잇는 후사가 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상속자가 되기를 사모하고 또 사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사모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로 요셉이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계시적인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다가 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은 천국에서 어떤 위치에 앉아 있는가?

  우리는 신약시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디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8:11)" 그렇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천국에 들어갈 자가 될 것이며, 거기에서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귀중한 신분이 된다는 말씀을 주께서 하신 것이다. 그렇다.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서 보면 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24장로들이다. 그런데 24장로들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 있으며, 더불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낳은 최고의 사람 요셉 역시 천국에서 24장로의 반열에 들어 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럼, 요셉은 어떻게 되어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인 꿈을 그대로 믿었으며, 여러가지 죄 특히 음행의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었고, 자신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 천국에 가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은 왕적 지위를 누리는 반열에 참여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 창세기 이야기는 창조의 이야기(1~11장)와 구속의 이야기(12~5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구속의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는 동시에 그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의 이야기와 겹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기는 부분이자 열매가 곧 요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되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를 통하여 그 실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6.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이야기는 무엇으로 귀결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와 같은 믿음의 족장들의 이야기는 성도들 중에 족장들의 이야기로만 끝난 것일까? 아니다. 왕적 지위에 관한 구약의 이야기는 비단 족장들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사용했던 민족 곧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다시 한번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처럼 그들의 우상숭배의 저주를 끝내기 위해 애굽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광야로 나왔을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삭처럼 자신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는 그 땅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기 위해 피나는 전쟁을 벌여 그 기업의 상속자가 된다. 마치 야곱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때에는 요셉처럼 왕을 세워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 그래서 구약성경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왕을 세우는 것인지를 알려 주는 책이 사무엘상하요, 그 왕들이 또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이야기가 열왕기상하인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세워진 왕은 사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숭배를 행하여 왕위를 내놓게 된다. 그렇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정하여 왕으로 예정해 놓았어도 왕적 지위를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은 왕위에서 제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세워진 왕이 다윗왕이었는데, 다윗왕은 지금 천국에서 가장 빛나는 왕적 지위를 누리는 24장로들 중에 한 명이 되어 있다. 그럼, 그는 대체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처음에는 아버지와 형들로부터 소외당한 사람이었으나 들판에서 양떼를 치면서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늘 목자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 즉 그는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실로에 있었던 성막을 왕궁 옆으로 옮긴다. 그리고 어느 날은 자신은 백향목 향기나는 궁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처소는 펄럭이는 휘장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한다. 그러자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된다. 그렇다. 다윗이 하늘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7. 요셉이 꾸었던 계시적인 꿈은 그의 장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을 알려 주는 꿈이었는가?

  요셉이 겹쳐 꾸었던 2가지 계시적인 꿈은 결국 천국에서 일어날 2가지 영적인 비밀을 알려 주는 꿈이었다. 첫 번째의 꿈은 요셉이 장래 천국에서 다른 형제들로부터 섬김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 주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실제로 이 땅에서부터 요셉의 형들은 자신의 동생 요셉을 찾아가 적어도 4번씩이나 절을 하였다(창42:6, 43:26, 44:14, 50:18). 그것은 형들의 시기로 인하여 요셉이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에 들어갔으나, 여차저차하여 요셉은 거기에서 총리가 되었고, 기근이 수년째 계속되었을 때 요셉이 총리로서 애굽에서 곡식을 팔고 있었기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들어가면서 총리 앞에서 절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형들은 실제로 요셉에게 네 번씩이나 절을 한다. 꿈대로 이뤄진 것이다. 두 번째의 꿈은 요셉이 장래 천국에서 해와 달과 별들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꾸었던 두 번째의 꿈을 잘못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자신과 요셉의 어머니 라헬과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으로 그것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에게 절을 하지 않았으며,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야곱이 이 꿈을 꾸기 1년 전에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으며, 요셉의 형들은 11명이 아니라 10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꿈은 아버지마저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를 대강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장차 있을 것에 대해 실례로서 당시 수년간 지속된 기근으로 인하여 수많은 외국 사절단과 왕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와서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성취되기도 하였다.

 

8.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왕적 지위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왕적 지위는 실제로 무엇인가? 우선 우리가 알 것은 성도들 모두가 다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왕 같은 제사장도 있지만 종같은 제사장도 있기 때문이다. 천국 성도들 중에 일부가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실제로 성도들 중에는 어떤 왕적 지위를 누리는 것일까? 그것은 성경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요셉의 꿈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첫째로 천국에는 성도들 중에 일부가 다른 성도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마20:26~27). 이것은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 위에 군림하거나 왕 노릇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성도들 중, 간신히 구원얻은 성도들 중에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가진 성도들의 집에 가서 섬긴다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성경 어디에 그러한 말씀이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고 하는 다툼이 일어나자, 이 땅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있을 것이고, 이 땅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천국에서 종으로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0:26~27 헬라어 원문 참조). 그리고 둘째로 천국에서 성도들 중에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은 성밖으로 나가서 왕 노릇을 하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 자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1:24). 그렇다. 성도들 중에 왕적 지위를 누릴 사람들은 성밖으로 나가 민족들을 다스리고 또한 해와 달과 별과 같은 행성들을 다스릴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왕 노릇할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9.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갖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장차 천국에 들어가게 될 때에 왕적 지위를 누리려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 땅에서 삶을 보내지 않은 사람 가운데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이 땅에서 살다간 사람들 중에 왕적 지위를 갖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도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누가 왕적 지위를 얻게 된 사람이었는지를 잘 살펴보고 그들의 삶의 발자취를 우리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과 다윗이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반열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런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천국에서 우리도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회개하여 가문의 저주를 끝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도 이삭처럼 자신을 주님께 드려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도 야곱처럼 하늘의 상속자가 되고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되는 것을 사모하고 사모해야 한다. 넷째, 우리도 요셉처럼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계시적인 꿈을 그대로 믿고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도 다윗처럼 결코 우상숭배하지 않고 끝까지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도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적 지위를 소유하는 복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10. 나오며

  사실 우리가 꾸는 꿈이나 체험은 모두가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확실하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성도들의 최종적인 신분이자 최종적인 지위가 무엇인지를 성경적인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요셉으로 결론 지어지는 족장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윗왕으로 귀결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시는 왕 노릇하는 조건은 이와 같은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앞의 것들과 똑같다. 그 내용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나온다. 그중에서도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왕 노릇하는 것이 나온다. 그것은 철장 권세로 왕 노릇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둘째는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계2:26~27). 사실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선지자 이세벨이 활동하는 교회였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고 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는 이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렇다. 우리들도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탄 마귀의 궤계를 알아차리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저주를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음행의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요셉처럼 자신을 지켜 음행과 같은 죄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요셉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처럼 주님께서 헌신하고, 다윗처럼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갖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11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69) 또 하나의 영적 계승자로 축복받은 유다의 삶과 그가 받은 영광(창49:8~12)_2021-08-04(수)

https://youtu.be/2DfsIJudPnY  [혹은 https://tv.naver.com/v/21700693  ]

 

1. 야곱의 장자권은 누구에게로 넘어갔나요?

  야곱의 장자권은 원래 큰 아들 르우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그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도 분노와 혈기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임으로 장자권은 4번째 아들 유다와 사실 11번째 아들 요셉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중에서 영적인 장자권은 유다에게로 넘어갔으며, 물질적인 장자권은 요셉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2. 야곱의 장자권이 요셉과 유다에게 넘어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야곱의 장자권이 우선 요셉에게 넘어간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그러한 안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명을 받아 이 땅에 보내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요셉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장자권은 그에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충실하게 그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로 장자권이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에게로 넘어간 이유는 그가 그러한 축복을 받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죽을 요셉을 살려내었으며, 자기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건져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제물이 되려고 했던 헌신적인 책임자였기에 장자권은 르우벤에게서 유다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의 왕권은 이제 요셉과 유다지파에게로 전승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야곱의 장자권이 유다와 요셉에게 있다는 것은 어떻게 예표되었나요?

  사실 야곱의 장자권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둘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두 배의 땅을 기업으로 약속받은 요셉에게로 넘어갔으며, 또 하나는 메시야를 낳을 영적 계승자인 유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이 야곱의 장자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되었을까요? 그것은 요셉이 죽고 난 후 약 300년이 지난 시점에 고스란히 성취 되었습니다. 그때는 모세가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40일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이 경과보고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매우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면서 어서 가서 그것을 취하자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땅에 신장이 거대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신다고 약속했으니 가서 차지하자고 말한 것입니다(민14:6~9). 결국 당시 광야로 나왔던 출애굽 1세대들 가운데 오직 살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두 명이 바로 요셉과 유다의 지파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즉 여호수아는 요셉의 장남이 된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요, 갈렙은 유다 지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민13:6,8).

 

4.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으로서 왕권에 대한 예언은 누구를 통해서 실현되었나요?

  야곱은 유다에게 장차 그가 형제들로부터 절을 받을 왕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이며, 그가 원수들의 목을 잡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창49:8). 그랬는데 정말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B.C.1010년에는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서 왕이 된 다윗에게 모든 이스라엘의 지파가 엎드렸습니다(삼하5:1~5). 왜냐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곧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다윗은 예수님의 예표로서 베들레헴 출신으로서 30세에 왕이 된 인물입니다. 그리고 A.D.96년경 천상의 예배광경을 지켜보던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으로부터 "누가 두루마리를 받아 펼칠 수 있는가?" 하는 힘있는 천사의 질문에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어린양이 그 일을 할 것이라는 소리를 24장로의 한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다(계5:5). 그렇습니다. 유다 지파의 후손에 메시야의 예표인 다윗이 있었고,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유다 지파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유다에게 "너는 사자 새끼(젊은 사자)"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예서께서 30살의 젊은 나이에  이 땅에 물질계와 영계의 왕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이 세상 임금의 머리를 박살냈으니, 야곱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가 된 것입니다. 

 

5. 야곱은 유다지파에서 나오게 될 약속된 메시야를 어떻게 예언했나요?

  야곱은 유다에게 축복하기를 규와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창49:10). 이는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남유다의 왕이 유다지파에서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는 영적인 장자의 축복을 받았던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탄생하기까지 유다의 후손들 중에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윗을 필두로 왕은 계속 되었으니, 만약 남유다 왕들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후손이었던 남유다의 왕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유다는 20대 시드기야 왕을 끝으로 왕위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왕위가 언제 끝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예언했는데, 그것은 "실로가 오시기까지"였습니다(창49:10). 여기서 "실로"란 히브리어로 "그것을 가진(소유한) 자"라는 뜻으로서, "왕권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실로'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야곱은 그가 오시면 암나귀와 나귀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 예언을 을 이루었으니, 그가 나귀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포도주처럼 붉은 피를 흘리시어 인류의 속죄제사를 완성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창49:11~12). 그렇습니다. 유다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예정된 안배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땅에서 그가 행했던 행위들을 통하여, 그는 영적인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후손들 중에서 수많은 왕들을 배출할 수가 있었으며, 메시야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지만,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아시고, 장래에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영광을 위해 오늘도 야곱의 넷째아들 유다처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21년 08월 04일(수)

정병진목사

 

다윗은 무명의 시골목동이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왕이 되게 한 인물이자, 그의 후손에게는 자자손손 왕위를 물려받게 약속해준 인물이다. 다윗이 그렇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축복의 명단에서 제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의 범죄 앞에서 어떻게 처신한 것인가? 거기에는 나와 내 후손이 정말 복을 받고, 축복의 명단에서 내 이름이 제거되지 않게 만들어주는 비결이 들어 있다.

2019-12-08(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메시야의 조상 다윗이 들려주는 족보 이야기(마1:6)
https://youtu.be/JSjJGi1-PvM


1. 들어가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복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나 자신이 받아야 할 복이 있고 내 자식이 받아야 할 복이 있다. 그런데 내가 받아야 할 복에는 육체가 받을 복과 영혼이 받을 복이 있다. 사실 사람이 받아야 할 궁극적인 복은 내 영혼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천국,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천국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했을 때에, 내 육체가 복을 받는 것을 보게 될 때다. 그때에 사람은 점차 천국이 실재하다느 것을 믿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서 육체가 복을 받아 건강하게 살게 되고, 열심히 일한대로 수확을 얻게 되는 것을 볼 때에 사람들은 저마다 천국은 실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나 자신이 복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내 자식도 복을 받을 확률이 그토록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내가 복을 받고 내 자식이 복을 받는 비결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내가 이미 복을 받았지만 실수하여 복을 잃어버리게 생겼지만 이미 받은 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메시야의 족보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의 생애 가운데 나온다.

 

2.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족보의 특징은 무엇인가?

  마태복음에 1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족보는 구약에 나오는 족보들과는 다른 어떤 특징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4가지다. 첫째, 족보에 여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둘째, 오직 한 사람에게만 "왕"이라는 직분을 같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셋째, 구약성경에는 나오지만 메시야의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 조상들이 여러 명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 메시야의 족보를 다윗의 이름의 숫자값(14)에 따라, 14대씩 3기에 걸쳐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 중에서 세번째의 말씀은 지난 주에 함께 나누었다. 오늘은 첫째와 둘째에 관련된 말씀으로, 메시야의 조상들 가운데 다윗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며, 다윗이 솔로몬을 낳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다윗에 관한 족보 기록이 다른 여타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기술되었다는 점이다. 첫째, 이새가 다윗왕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접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이름 옆에 "왕"이라는 신분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새가 다윗왕을 낳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왕이 된 다윗을 낳았던 것이다. 둘째, 다윗이 그냥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윗을 아주 나쁘게 평가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으니, 얼핏 보기에 다윗은 남의 아내를 빼앗아 자식을 낳은 파렴치한 인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 메시야의 족보에 보면, 왜 다윗에게만큼은 "왕"이라는 칭호가 붙어있는가?

  그렇다면, 다윗에게는 왜 "왕"이라는 칭호를 붙혀서 기록했을까? 신약성경은 사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단어 하나라도 빼거나 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왕"이라는 칭호도 그 단어를 빼거나 더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서의 기자는 다윗에게 만큼은 "왕"이라는 칭호를 붙혀서 기록한 것인가? 그 이유는 사실 알고 보면 간단하다. 그것은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그것은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예수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원래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복음서였고, 이 복음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였기에, 족보를 귀하게 여기는 히브리인들의 요구에 따라, 예수께서 조상도 근본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의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장차 하나님께서 메시야로서 보낼 사람은 다윗의 씨 가운데 태어날 것이는 예언들이 구약에 여러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 몇 가지만 보자. 이사야 9:6~7의 말씀에서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는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B.C.730년경 예언)"라고 했다. 이는 장차 태어날 메시야는 아기이자 아들로 태어나실 것인데 그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것이며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23:5에서도 "내(여호와)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B.C.599경 예언)"라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예언에 따라서 예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오셨으며, 그가 왕이 되어 다스리게 되었다. 또한 에스겔37:24~2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B.C.586년경 예언)"라고 예언되었다.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처럼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때가 되매, 주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임신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가르쳐주었으며,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라고까지 알려주었다(눅1:31~32). 예수는 다윗왕의 후손으로 와야 하기 때문이다.

 

4.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후손까지 왕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새가 다윗왕을 직접적으로 낳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장차 왕이 될 다윗을 낳은 것이다. 그러하면, 다윗은 어떻게 되어 왕이 될 수 있었는가? 놀랍게도 그것은 하나님의 지명에 의해서였다(삼상16:11~12, 행13:22). 사울왕을 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유대땅에서 왕 될 자를 찾아다니셨다. 그래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소년 다윗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그때 나이 약 15세 때였고, 그때에 하나님의 지명을 받아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장차 왕이 될 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럼, 왜 하나님은 이새의 막내아들(여덟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곱번째 아들로 기록됨)에게 기름부으라고 한 것인가? 그것은 사도바울에 전언에 의하면, 소년으로서의 그의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15살 때에 막내로서 들판에 나서 양떼를 치는 목동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양떼를 정말로 잘 쳤다. 왜냐하면 가끔씩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을 움켜서 물고 갈때면 뒤쫓아가 사자의 이빨과 곰의 발톱에서 어린양들을 구해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용기와 무용이 출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삼상16:18). 더불어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을 잘 찬양하던 자였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악기를 하나님을 찬양했으니, 그의 소년시절 찬양이 바로 시편23편으로 "여호와의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편 찬송이다. 그는 자기가 목자였지만 진짜 목자는 하나님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기가 사자와 곰에서 구출해 낸 것도 자기의 실력으로 구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셔 하나님이 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그러한 사실을 노래로 만들어 악기로 연주하며 지냈던 것이다. 결국 무명의 시골 목동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그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긴 일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며 찬양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왕직을 수여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었던 사건이 무엇이었나를 살펴보자. 그것은 삼하7장에 나온다. 그것이 그가 그만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즉 다윗은 나라가 안정을 이루자, 곧바로 나단선지아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것은 시온산성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하나님은 그만 감동해버리신다. 왜냐하면 출애굽이후 하나님께서는 여태껏 펄럭이는 휘장과 장막 안에 거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누구에게 '언제 내 집을 지어줄 것이냐'고 부탁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이름을 최고의 영예스러운 이름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셨다. 이는 그의 후손을 세워라도 다윗의 왕국이 영원히 견고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또한 범죄한다고 할지라도 선왕에게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동시킴으로 왕직을 수여받았으며, 자기의 후손도 계속해서 왕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5. 메시야의 조상인 다윗의 족보에 왜 "우리야의 아내"라는 수치스러운 수식어가 붙어 있는가?

  무명의 목동 다윗이 왕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다윗의 영광의 기록 다음에 마태복음 기자는 그의 수치스러운 사건을 곧바로 기록한다. 왜 그랬을까? 그런데 다윗의 수치의 기록이 적나라하다. 왜냐하면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하지 않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장에 있는 메시야의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4번 나온다. "다말, 라합, 룻, 마리아". 그런데 다윗에게는 여자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명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하였다. 원문에 의하면, "우리야의 여자"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의 기자는 다윗이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그것은 다윗의 수치를 더 드러내기 위함이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여인이 되게 한 파렴치한 인간이었음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야의 아내"라는 말을 통해서, 다윗의 장수였던 "우리야"는 나라와 왕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다윗은 자신의 부하만도 못하는 사람이냐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렀던 다윗은 메시야의 족보에서 탈락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메시야의 족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6. 족보에서 지워질 위기에 처했던 다윗은 어떻게 족보에서 지워지지 않게 되었는가?

  메시야의 족보책에서 지워질 뻔했던 다윗의 이름은 왜 지워지지 아니했을까? 그것은 그가 눈물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간음을 저질렀고 그리고 그의 남편을 전장의 최전선에 보내 죽게 한 자였다. 하지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의 죄를 지적했을 때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즉시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아니하고 자복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면서 눈물로 회개하였다. 시늉만 낸 것이 아니다. 밤마다 침상을 띄우며, 요를 둥둥 떠다닐 정도로 참회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그것은 곧 메시야의 족보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랬다.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족보에 이름이 들어간 자라도 범죄했을 때에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 빠진 자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족보책에 이름이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7. 다윗이 받은 복은 무엇이며, 그가 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택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이 받은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명의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이다(행13:22). 그렇다면 다윗의 후손까지도 복을 받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삼하7장). 그렇다면 족보책에서 다윗의 이름이 지워질 위기 앞에서 다윗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실로 회개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우리는 여기서 내가 복을 받고 내 후손이 복을 받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작은 행동이라도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하고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있고 그분을 감동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축복의 명단에서 우리의 이름이 지워질 위기에 처해졌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은 죄들이 있음을 즉시 시인하고 진실로 그 죄들을 통회자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축복의 명단에서 이름이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이 큰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는 범하지 않았다. 그 죄는 우상숭배의 죄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다. 그렇다면 오늘날 만약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렀거나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치자.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가 있는가? 그것은 다윗이 행했던 통회자복보다 수십배 수백배의 통회와 자복이 필요할 것이다. 나의 지금의 회개생활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나의 회개기도는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만한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나와 내 후손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늘 간절히 회개하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9년 12월 08일(주일)

정병진목사 


이번 주일부터 대강절(대림절)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살펴보기 시작한 메시야의 족보인데, 메시야의 족보에는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어 있다. 하나는 5명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며, 또 하나는 다윗왕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기록되지 않은 메시야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다. 적어도 11명이나 된다. 그중에 오늘은 남유다의 제6대,8대,9대왕의 숨겨진 비화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들은 왜 메시야의 족보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인가? 저자의 실수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누락인가?

2019-12-0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메시야의 족보에 담겨있는 놀라운 비밀(마1:6~11)
https://youtu.be/aEFZNIz9Vco


1. 들어가며

  성탄절을 앞둔 4주간의 절기를 교회는 "대강절(대림절)"이라고 부른다. 대강절을 맞아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역사를 살피는 것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의 족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메시야의 족보에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 숨겨 있었다. 그것은 그냥 마태복음 1장의 족보책만을 쭉 읽어내려가면 파악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만약 구약의 열왕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분이 이 족보책을 읽는다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족보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3명, 3명, 5명이 순차적으로 그 이름이 빠져 있다. 무엇 때문에 11명의 이름이 빠진 채 기록된 것인가? 이것은 기록자의 실수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생략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메시야의 족보에 빠진 채 있는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 3명을 중심으로 그들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지게 된 이유를 통해서 메시야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다.

 

2. 메시야의 족보에는 어떤 특별한 점이 들어 있는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를 쭉 읽어내려가다보면 "아, 이것은 메시야의 윗대 조상들의 이름인가보다"하고 그냥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열왕들의 기록을 잘 알고 있는 분이 이것을 읽으면 읽다가 잠깐 멈추게 될 것이다. 그것은 3가지 면에서 좀 특이한 점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메시야의 족보책에 여러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가 그들이다. 원래 족보책에는 여자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인데 메시야의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메시야의 조상들 42명 가운데 특이한 한 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윗이다. 다름 모든 사람은 다 이름만 나오는데, 다윗은 그의 직분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즉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메시야의 조상들 가운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남유다의 제5대왕이었던 요람 다음에 무려 3명의 왕들(아달랴를 포함하면 4명의 왕)이 이름이 빠져있다. 그리고 5대 고손자인 제10대 웃시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요시야왕 다음에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왕이 빠져 있고, 여고냐 다음에 시드기야 왕도 빠져 있다. 이것이 두번째 생략부분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스룹바벨 이후에 아비훗 사이에 약 5대가 빠져 있다. 이처럼 적어도 11대 명단이 빠져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3. 메시야의 족보책에 여러 조상의 이름이 빠져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메시야의 족보책에 적어도 11명의 이름이 빠져있는 이유를 여러 학자들이 연구해서 써놓은 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약 4가지가 있다. 첫째, 마태라는 기자가 인용한 족보책이 이미 처음부터 그들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도 빼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히브리원문을 잘못 읽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원래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인데, 이것을 베끼는 과정에서 한 줄을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셋째, 히브리적 문학적 기교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는 17절에,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제1기족보), 다윗부터 바벨론의 이거하기 전까지 14대요(제2기족보), 그 뒤로 예수님까지를 14대라고 하는데(제3기족보), 제1기 족보였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14대가 맞다. 하지만 다윗부터 요시야왕까지는 18대다. 그러므로 14대를 맞추기 위해, 4명의 왕들(남유다 제6대 아하시야, 제7대 아달라, 제8대 요아스, 제9대 아마샤)을 생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러 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도 같다. 왜냐하면 다윗의 이름을 숫자값으로 환산해보면(게마트리아), 14(달렛=4, 요드=6, 달렛=4)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는 기록이 진짜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특히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진 것은 이들이 바알신을 가져와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아합과 이세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메튜헨리). 그렇다면, 남유다 왕들 중에서 6대 아히사야, 8대 요아스, 9대 아마샤왕이 빠진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4. 제2기 족보 가운데 남유다의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왕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요람왕의 아들이었던 아하시야, 아하시야왕의 아들이었던 요아스, 요아스왕의 아들이었던 아마샤왕은 왜 족보에서 빠진 것일까? 그것은 서두에서 보았던 4번째 견해와 일치하는 면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진 이유를 우리는 신약과 구약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것은 요한계시록 2:22~23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보응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모두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질병과 환난과 사망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출20:5이나 34:7에 따라,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자신의 후손 3~4대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먼저, 요한계시록 2:22~23의 말씀을 보자.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아디라교회에서 주신 말씀이다. 그것은 거짓선지자 이세벨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본인이 침상에 던져질 것이고, 우상숭배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는 큰 환난에 던져질 것이며, 그의 자녀는 살해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을 맨 처음 시작한 자는 두아디라교회의 거짓선지자 "이세벨"이었다. 그런데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진 위의 3명의 왕은 바로 이세벨의 행위와 관련이 깊다. 왜냐하면 제5대왕이었던 요람왕의 장모가 "이세벨"이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7대왕이었던 아합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를 신으로 섬기던 두로와 시돈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하였다. 그러자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선지자 수백 명을 데리고 북이스라엘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합은 그녀를 위해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종교는 여호와 하나님에서 바알신으로 급속히 바뀌기시작하였다. 그런데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던 아달랴가 남유다의 제5대왕이었던 요람(여호람)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그러자 요람왕은 그녀(아달랴)를 위해 예루살렘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해 주었고, 바알의 제사장도 두었다. 그리고 아내의 말을 듣고 우상숭배정책을 비판하던 자신의 동생들 6명을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하셨는지 아는가? 계2:22~23의 말씀에 따라, 그를 침상에 던졌다. 그는 38세에 병이 들었는데, 창자가 썩어가는 질병에 걸렸다. 그는 2년간 침상에 있다가 결국 창자가 튀어나와 사망했다(대하21:18~20). 그의 나이 39세였고 왕이 된지 8년만이었다. 우상숭배하면 당사자가 질병의 침상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둘째,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아버지의 죄가 후손 3~4대까지 이어진다는 말씀을 보자. 남유다 5대 요람(여호람)이 죽자 그의 장자였던 아하시야가 왕통을 이어받았다. 남유다 제6대왕으로 등극했던 아하시야는 22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1년도 채 못되어 살해당했다. 자신의 외할머니(이세벨)에게 문안인사갔다가 북이스라엘의 구테타 주동자였던 예후에게 붙잡혀 도망가다가 죽었기 때문이다(왕하8:27~29). 그리고 아하시아의 아들 요아스도 그리고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도 우상숭배하다가 신하들과 무리들의 반란의 살해당하게 된다. 성경말씀 그대로 성취가 된 것이다.

 

5. 남유다에 우상을 들여왔고 형제를 살해했던 제5대 요람왕은 어떻게 되어 메시야의 족보책에 기록될 수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의 요람왕은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있다. 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요람왕은 메시야의 족보에 든 것인가? 우리가 앞에서 들었던 말씀에 의하면, 요람왕도 멸망을 받았어야 옳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자와는 달리 그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왔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약의 열왕들의 기록에는 그가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과 다른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결국에 회개하고 죽었으리라는 가정이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를 한 자치고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아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계22:14~15). 그렇다면 그가 죽기 전에 회개하였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정확히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추론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죽기전에 질병의 침상에 던져져 2년여동안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상숭배를 들여온 이세벨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또 내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계2:21~22). 그렇다. 누군가 죽기전에 침상에 던져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여자 이세벨선지자가 우상숭배를 방조하였거나 허락함으로서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그녀를 사랑했기에 주님께서도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그녀에게 허락한 것이 바로 "질병"이다. 그녀를 질병의 침상에 던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비록 요람왕이 남유다 예루살렘에 바알의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우기긴 했지만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그를 질병의 침상에 던진 것이다. 그래서 요람왕은 죽기전에 2년동안 창자가 썩어가는 질병을 앓으면서 회개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회개를 기회를 주지 않고 징계할 때에는 곧바로 죽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악한 요람왕에게 왜 회개할 기회를 준 것인가? 그것은 그의 부모의 기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사례에게 그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남유다의 제14대왕은 므낫세왕이다. 그는 12살에 왕위에 올라 무려 55년간 남유다를 통치하였다. 그런데 남유다에서 그처럼 악한 왕은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겼고, 일월성신을 섬겼다. 그리고 몰렉신에게 자신의 자식을 불에 태워 바쳤다. 그리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가까이에 두었다. 이렇게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일삼았던 왕이 바로 므낫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년에 회개를 한다.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포로 끌려가서 거기서 회개를 한 것이다. 그것이 역대하의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대하33:12~13). 그렇다. 그는 환난을 당하여 자신의 조상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므낫세가 말년에 환난을 당하여 회개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남유다의 3대 선한 왕에 속하는 왕으로, 히스기야왕이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야말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한 왕이었던가? 그러니 므낫세는 자신의 아버지의 기도 덕분에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회개할 기회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한 예는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이 말년에 타락하여 멸망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결국 회개하여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인 다윗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대하28:9~10). 그러니 요람의 아버지였던 여호사밧왕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가 한 때 약간 빗나간 것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남유다의 3대 선한 왕이자 하나님을 잘 섬겼던 왕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아들 요람을 위해 기도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요람왕이 병들어 침상에 누워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의 기도로 인하여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기에 그를 단번에 치지 아니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6.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구원의 족보에서 빠지게 되는가?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했을 경우 어떻게 되는가? 만약 그가 우상을 숭배한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지없이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해결받지 못한 자를 결코 천국에 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을 보라.

계22:14-15 자기 두루마기(스톨레=겉옷)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자기의 겉옷을 예수의 피로 빨지 않는 자는 결국 천국의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생명나무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며, 문들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다. 특히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는 밖에(바깥 어두운 곳=불못)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7. 나오며

  사실 예수께서는 메시야의 족보상으로 아브라함의 42대손이요, 요셉의 아들인 것이지만 실제로 메시야의 조상으로부터 피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기 때문이다(눅1:34~35, 마1:20~21). 만약 조금이라도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다면 그분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흠없는 어린양이 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태 기자를 통해서 메시야의 족보를 쓰게 하실 때에 우상을 숭배하고 멸망받은 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셨다. 분명 육적으로는 존재했고 활동했던 왕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를 메시야의 족보에 올릴 수가 없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관한 예표로서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중에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계3:5).

 

2019년 12월 0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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