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0(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아브라함이 족장 중 처음으로 왕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창11:31~12: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PwgR20nySI  [혹은 https://tv.naver.com/v/31023051 ]

 

1. 들어가며

 성도들의 최대의 꿈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12진주문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도 천국에서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서 왕적 지위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과 같이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족장들로서 천국에 들어간 자들이 되었으며 또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족장으로서 아브라함은 대체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대체 어떠한 삶을 살았길래 천국에 들어갔으며 또한 그곳에서 왕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창세기 11장부터 등장하여 25장까지 쭉 계속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도 어떻게 하면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믿음의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다(마8:11). 그렇다면 지금 천국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천국에서 24장로가 되어 있다. 사실 나중 천국에 들어가 보면 다 아시겠지만 천국 성도들은 천국의 2층천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에는 3층천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때 천국 성도들이 한꺼번에 다 올라가 예배드릴 때도 있지만, 보통은 한 마을 사람들만 올라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때 대표는 24장로 중의 그 마을들의 대표자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의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따라 삼층천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은 대부분 세례 요한처럼 회개를 외치고 천국을 전파한 사람들이다. 마을 이름에 걸맞게 살았던 자들이 그 마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이삭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삭처럼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 자들이 산다. 그리고 이삭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이 그 마을에 살고 있다. 또한 스데반 마을에는 스데반처럼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내어드린 자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마을에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우상숭배의 저주를 끝내고 자기 집안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들이 되게 한 사람들이 그 마을에 들어가서 살게 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대체 어떻게 자신의 가문의 저주를 끝낸 것인가? 그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자신의 가문을 우상숭배의 죄에서 건져내어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는 가문으로 만들었던 것인가?

 

3.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족을 데리고 인도한 사람은 데라인가 그의 아들 아브라함인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다. 그리고 12장부터 50장까지가 족장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의 끄트머리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나오는데, 데라는 나홀의 아들로서, 장가들어서 하란(70세에)과 나홀(120세에)과 아브라함(130세에)을 낳는다. 그리고 어느 날 데라가 셋째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래 그리고 하란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 그리고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 거류하게 된다(창11:30). 그렇다면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왔던 장본인은 아브라함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아니, 데라가 아브라함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온 것인가? 창세기 11장과 12장의 이야기만을 읽게 되면, 우리는 데라가 아브라함을 데리고 우상숭배의 도시였던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온 것으로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15장에 가서 보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창15:7). 그리고 신약시대 예루살렘교회의 안수집사였던 스데반의 설교를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본다(행7:2~4). 대체 어찌된 것인가? 

 

4. 어떻게 되어서 데라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오게 된 것인가?

  우리가 창세기 11장과 12장의 이야기만을 읽다보면, 데라가 우상숭배를 그치기  위해서 스스로 결단하여 자식과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온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는 데라가 스스로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 의하여 데라가 그곳을 빠져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데라는 여태껏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적어도 그곳에서 50년 이상을 우상을 직접 만들어 섬기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데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상숭배를 버리고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 것인가?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참고할 자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호수아도 인정하고 다윗도 인정하는 역사의 기록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야살의 책'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 보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와 역사가 나온다. 거기에 보면 어떻게 되어서 데라가 우상숭배를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오게 되었는지를 잘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때 데라는 함의 손자이며, 바벨탑을 쌓았던 장본인인 니므롯의 오른팔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 데라는 자신이 직접 나무로 신들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는데, 12가지 신들을 달마다 섬기고 있었다. 적어도 최소 50년 이상을 그렇게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마침 셋째 아들 아브라함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날 니므롯의 신하들이 데라의 집에 갔다가 하늘에서 이상한 별들을 보게 된다. 매우 큰 별 하나가 동쪽으로부터 오더니, 하늘에서 달리다가 다른 네 개의 별을 삼키는 것이었다. 네 개의 별은 당시 니므롯이 다스리는 4개의 도시를 의미하고 있었기에, 이 소식을 접하게 된 니므롯은 즉시 데라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데라가 몰래 아들을 빼돌려 동굴로 피신을 시킨 후 다른 여종의 자식을 그에게 갖다 바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0살이 되자, 데라는 아브라함을 노아와 노아의 아들 셈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거기서 약 40년을 살면서 노아와 노아의 장자 셈으로부터 직접 참된 신앙을 전수받게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50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도 역시 아버지는 여전히 우상을 열심히 섬기고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던 아브라함은 망치를 들고 사당에 들어가 그 신들을 다 부숴버린다. 그리고 가장 큰 신의 손에 그 망치를 들려놓는다. 한바탕 소동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을 보고 꾸짖는다. 왜 우상들을 쳐부쉈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큰 신에게 바친 음식을 작은 신들이 먹으려고 하자, 큰 신이 화가 나서 저 망치로 작은 신들을 다 때려 부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면서, 어찌 데라 자신이 직접 나무로 만든 신이 다른 작은 신들을 때려 부술 수 있겠느냐며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한다. 그때 아브라함은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을 숭배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큰 신마저 때려 부수고는 도망쳐버린다. 그러자 아버지 데라는 이미 니므롯의 충신이 되어 있었기에 그 문제를 니므롯에게 고하게 되고, 결국 아브라함은 붙들려 간다. 그리고 신들을 농락한 자는 풀무불에 던져 넣어야 한다는 선고를 받고 풀무불에 던져진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3일을 불구덩이 속에 있었는데도 타지 않자, 니므롯이 그를 불러내어 그에게 절을 하고는 은금패물과 진주를 들려주고, 두 명의 수석 종들을 상으로 주어 자유롭게 놓아 보낸다. 그중의 한 명이 바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다. 하지만 니므롯이 또 꿈을 꾸게 되는데 이 역시 아브라함이 니므롯의 나라를 삼키는 꿈이었기에, 니므롯은 아브라함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낸다. 그러자 이것을 곁에서 듣고 있던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자, 아브라함은 다시 노아와 셈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자 비밀리에 셈의 집으로 찾아온 데라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한다. 
[야살의책 12:65] 이제 여기에서 아버지께 속한 자가 누구며, 이 땅에서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일어나서, 가나안 땅으로 함께 갑시다. 그러면 우리가 그(니므롯)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훗날에 아버지께서 그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데라에게 이제는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그 우상을 버리고 니므롯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가나안 땅으로 가서 살자고 설득한다. 그것을 곁에서 듣고 있던 노아와 셈도 아브라함의 의견이 옳다고 지지해 준다. 그러자 마침내 데라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니므롯의 종이 되어 그를 섬기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데라는 아브라함과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오게 된다. 그리고 셈족 계열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에블라 왕국의 수도였던 하란으로 피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라가 아브라함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 나오게 된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오게 한 장본인은 데라가 아니고 바로 아브라함이었던 것이다. 그의 기도와 설득으로 아버지가 우상숭배를 끝낼 수 있었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50세가 되어서 한 일은 아버지가 우상숭배를 끝내고 갈대아 우르를 탈출하는 것이었다. 

 

5.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더러 하란을 떠나라고 했을까?

  데라가 우상숭배를 끝내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와 일차적으로 정착한 곳은 어디였는가? 그것은 '하란'이었다. 하란은 셈족 계열의 자손들이 살고 있던 도시였다. 그래서 거기에 사는 것은 안전하였다. 그러다 보니 데라는 거기에서 머물러 살았다. 그리고 약 15년이 지나자 데라가 하란에서 죽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지금 그 땅과 너의 친척과 너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다시 불러내어 그곳을 떠나라고 한 것인가? 그것은 하란 역시 셈족 계열의 친족이었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우상을 숭배하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형제들과 친족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 땅도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그곳 하란에 가서 자신의 아내들을 얻어 데리고 나오게 되는데, 그때 그의 아내 중에 라헬이 자신의 아버지의 신 곧 드라빔을 훔쳐 가지고 나온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상을 갖고 있었던 건 라헬만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도 역시 이방신들을 몰래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야곱은 그 모든 이방 신상들을 모아서 세겜 땅 상수리 나무 아래에 파묻어 버린다(창35:4).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더러 하란을 한 번 더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6. 아브라함이 모든 우상을 다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우상숭배를 완전히 끝내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 사실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은사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은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은사들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그에게서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안 열림의 은사, 환상의 은사 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또한 하나님을 본 사람은 극소수 중의 극소수다. 그리고 아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사실 노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이후, 다시 일천 년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철저히 우상숭배를 그쳤고 하나님을 믿으며 신뢰했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받은 형통함의 축복이 그것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명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그후 물질적으로 엄청난 축복을 받고 살게 된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을 부어 주었으니 그에게는 가축과 은금패물과 종들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도 물질은 더 달라붙었다. 이것은 그가 우상숭배를 완전히 끝낸 사람이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축복이었다. 사실 우상들을 섬기거나 조상들이 우상을 섬김으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달라붙어 있는 자는 부자가 되기 어렵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난이 이미 끝난 형통함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우상숭배를 끝냈다는 두 번째 증거다. 

  셋째, 아브라함에게 남아 있던 불임의 저주마저 끝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그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사래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의 여성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숭배함으로 나타난 가문의 저주였다. 그런데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에게 자식을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경륜적인 이유로 이스마엘 다음에 이삭을 얻기는 했지만, 불임의 저주가 아브라함에게서 이미 끝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의 우상숭배를 끝냈기 때문이다.

  넷째, 그의 후손들이 받은 축복이 그것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낳은 아들들은 사실 모두 다 복을 받고 살았다. 특히 이삭은 농사를 지으면 백 배를 얻을 수 있었고, 마침내 거부가 된다(창26:12~14). 물이 없으면 파는 곳에서 우물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그는 소와 양이 떼를 이루었고 종도 심히 많은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할아버지 데라가 우상숭배를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어떠했는가? 야곱은 유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장자권 때문에 자신의 쌍둥이 형의 낯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피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가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치게 되자, 외삼촌 라반은 그만 거부가 되었다. 왜냐하면 야곱이 손대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진짜 이유는 그의 증조부 데라가 우상숭배를 그쳤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아브라함은 어릴적부터 믿음이 좋았던 인물이었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그는 비록 어렸을 때에 아버지와 헤어져 살았지만, 노아와 셈으로부터 직접 올곧은 신앙을 배웠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50세가 되어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 왔을 때에는 그의 아버지는 우상을 직접 손으로 만들어 그것을 섬기는 철저한 우상숭배자였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들에다가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우며 12가지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바로 그 아버지의 집에 들어갔고 마침내 우상숭배를 그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노아 이후 점점 더 신앙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마침내는 함의 손자 니므롯의 휘하에 들어가 셈의 후손을 우상숭배의 저주에서 끌어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부터 형통함의 축복을 받게 된다. 물질과 노비에 있어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받은 복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손 번성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하겠다는 약속을 축복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생전에는 자손 번성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을 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의 후손들이 나중에 받게 된다. 그렇다. 우선 알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그것이 약속으로 받았다고 해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못 받으면 내 후손들이라도 꼭 그것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어떠한가? 그는 하늘에서는 큰 땅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을 본받아 천국에 올라간 수많은 영적 후손들을 얻게 되었다. 하늘에서는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가 된 것이다. 그렇다. 그는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땅을 기업으로 받아 왕 노릇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아브라함처럼 우상숭배의 저주를 끝내고 온 가족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우리도 역시 천국에 들어가서 왕적 지위를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은 꼭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되어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11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인간은 왜 바벨탑을 건축한 것일까?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까지 닿게하려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바벨탑을 쌓는데 주동한 사람은 누구였으며,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어렵고 고된 노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는가? 인간이 탑을 쌓는다는데 왜 하나님이 그 문제에 개입하셔야 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 사건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2021-04-1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창세기강해(65) 바벨탑의 건축과 인류의 분산이 주는 교훈(창1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Yl1fdhfr6wU  [혹은 https://tv.naver.com/v/19544469  ]

 

 

1. 들어가며

  창세기의 이야기는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사람에 따라 관점은 다르겠지만 창세기가 아마도 모든 것들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것들이 어떻게 부패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창세기는 우리가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는 무궁무진한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고 있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는 천문학에서부터 시작하여 고고학,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오늘은 바벨탑 사건에 대해서 집중해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과연 바벨탑은 누가 언제 건설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바벨탑은 왜 건설하게 되었으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분출통로가 되었던 바벨탑의 의미는 무엇으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후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지켜 보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사실 B.C.1446년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시내산으로 데려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할 법도를 모세에게 말씀해주셨다. 그 핵심은 바로 "십계명"이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이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와 법도를 제시하고 있는 규정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수많은 법도들 중에서 현재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10가지 계명 속에 집어넣은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이 정한 것이 있어서 그런듯 하다. 다시 말하면, 아담부터 인간이 행해온 행동을 지켜보시면서 인간이라면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염두해주신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추리고 추려서 만든 것이 바로 십계명인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아담과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듣고 타락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제9계명으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며,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것을 보시고 제6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나온 사건들, 즉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섞여 살면서 폭력을 사용하고 권력을 쥔 자가 여러 여자들을 거드리고 사는 것을 보시고는 제7계명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염두해두셨을 것이고, 이어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과 제10계명 "이웃의 집과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노아홍수사건이후 노아가 불효자였던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ㄹ니 저주를 보시고는 제5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염두해 두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을 보시고는 어떤 계명을 생각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제1계명에서 제4계명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벨탑 사건의 결론은 결국 인간의 권력과 명예욕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종교적인 행위로 귀착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누군지를 듣고 보고 공부하지 않고 조상으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을 때에는 누구든지 사탄의 포로가 되고 만다.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들어온 악이 사람 전체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욕심은 남이 자기를 높여주도록 사람들을 부추기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을 신적 존재로 추앙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노선을 취하여 자기는 아니더라도 하나님 아닌 피조물을 신격화시켜 그것을 받들어 섬기도록 하고, 자신은 그 신의 특명을 받은 자처럼 가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사건을 보시고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을 생각하셨을 것이고, 제2계명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는 계명도 같이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에서 보여주듯 사람마다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하고, 하나님을 배우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름 계명으로 제3계명을 말씀하셨을 것이고, 제4계명으로서 안식일계명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주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세속화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3. 바벨탑은 언제 누가 건설했는가?

  창세기에는 총 5차례에 걸쳐 타락이 나온다. 아담의 타락, 가인의 타락,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타락, 그리고 함(가나안)의 타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탑시대의 니므롯의 타락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선역사라고 일컬어지는 창세기 1~11장의 이야기는 창조와 타락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장부터는 약속과 회복이라는 또 다른 주제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바벨탑 시대의 타락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바벨탑 시대의 타락은 사실 타락의 최고봉에 속하는데, 이 시작은 함의 손자 니므롯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의 끝없는 권력욕과 명예욕이 니므롯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꼬드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바벨탑을 쌓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창세기 11장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창10:8~12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함의 손자 니므롯의 이야기가가 바벨탑사건의 서막이기 때문이다. 니므롯은 함의 여섯째 아들로 늦게 태어난다(창10:7~8).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차지하고 살던 성읍이 4군데였다. 그것도 자신의 형제들이 살던 함의 땅에 자신의 성읍을 개척한 것이 아니라 셈의 땅에 성읍을 개척했던 좀 특별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가 먼저 차지했던 성읍들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그것은 셈의 땅의 한 복판에 있었다. 그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맨 끝자락인 갈대아우르 근방에 4개의 성읍을 개척했다. 그것은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아카드), 갈레라고 하는 성읍이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그가 맨 처음에 차지했던 시날 땅의 바벨에 세워진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니므롯에 있어서는 수도와 같은 곳이다. 이것을 보면 니므롯의 욕심이 상당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개척했던 4개의 성읍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유브라데와 힛데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른 사람의 성읍을 빼았았고 그리고 거기에 거대한 성읍을 세워나간다. 그래서 세운 성읍이 바로 앗수르의 니느웨 성이며, 르호보딜과 갈과 레센(니느웨와 갈라 사이)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중 니느웨는 거대한 성읍이었으며, 그 위성 성읍으로서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을 세운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언제 누가 세운 것인가? 좀 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함의 여섯째 아들 니므롯에 의해서 세워졌다. 하지만 창세기 11장 어디를 읽어보더라도 그 주동자가 니므롯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에 10장에 보면 시날 땅의 바벨이라는 성읍을 그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자기가 개척한 성읍에 사람들을 꼬드겨서 탑을 쌓은 것 같다. 특히 그는 먼저는 4개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8개의 도시에서 왕노릇하던 자였다(창10:10). 그러므로 그가 도시 사람들을 설득하여 성쌓기를 종용했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이 성쌓기를 시작할 때에는 언제였는가? 그것은 아마도 에벨의 아들 벨렉의 때가 아닌가 싶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까지만해도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이다(창11:1). 그런데 바벨탑의 언어혼잡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고로 하나였던 언어가 각기 다른 언어로 분화된 것은 바벨탑사건 이후였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셈과 함과 야벳의 70종족의의 이름들 말미를 보면, 그들이 여러 지역과 민족과 나라들로 분산되어 나가게 되는데, 그들이 각기 언어별로 나갔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70개의 종족들이 한 가지의 언어를 쓰고 있다가, 바벨탑사건이 발생하였고, 바벱탑사건이후 사람들이 서로 뿔뿔이 흩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가 셈의 자손의 경우에는 에벨의 아들 벨렉으로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때에(그의 시대에) 세상(땅)이 나뉘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벨렉이후 사람들의 수명이 그전에 비해 절반 아래로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반역사건이후 인간의 수명을 감축되었으며, 그 사건이 바로 바벨탑사건이 아니었겠나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4. 바벨탑은 왜 건설했으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니므롯이 왕으로 다스리던 당시 사람들은 왜 시날 땅의 도시에 탑을 쌓으려고 했던 것일까? 창세기 11장에 나온 말씀에 보면 2가지 목적이 있었다(창11:4). 하나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의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의 이름을 내고자 그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해보자고 그렇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자기의 명성을 위하여,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탑을 쌓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에는 니므롯의 선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못내 자랑하고 싶었고, 자기들이 세운 건축물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탑쌓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기자를 통하여 그들의 원래의 목적이 그 탑을 쌓아서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는 데에 있었다고 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 니므롯이라는 이름이 "반역자, 대적하는 자"라는 데에서도 그 원인을 엿볼 수 있다. 이때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난 용사(영걸)라고 하였다(창10:8). 이는 그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왕노릇하던 폭군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낭꾼"이 되었는데,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여호와를 대적하여, 여호와를 맞서서"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대항하여서 대적하는 자로서 행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벨탑 사건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고자 하는 인간의 강력한 열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성경기록이 아닌 다른 언어들의 기록을 조사해보면, "바벨'이라는 용어는 "신의 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하늘의 문까지 자기 탑을 쌓아 하나님과 겨뤄보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날 성읍에 쌓기 시작한 탑은 어떻게 해서 끝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성쌓기를 중단함으로 끝이 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탑을 쌓는 것을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탑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더불어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깨닫게 된다. 그때 어땠었는지 잠깐 살펴 보자.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11:6)",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 그렇다. 인간은 어느 정도 숫자가 모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어떤 이상한 흐름이 생겨난다. 그것은 그 모임의 주최자가 한 번 무엇인가를 결정하게 되면, 아무도 그것을 반대하거나 뒤집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중은 지도자 한 사람을 추켜세워 그를 신적 존재처럼 떠받들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신적 존재로 추앙받기 전에 그 일을 그치게 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속히 그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탑을 쌓는 것을 그치게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정말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짓는 일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그 자유의지를 사용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위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에 자유의지를 사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5.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이 높아지려는 욕망과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니므롯은 자기의 성읍을 4개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름 사람의 성읍을 빼앗아 자기의 성읍으로 만들려고 했으니, 그는 무려 8개의 성읍을 차지했어도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을 꼬드겨 탑까지 쌓도록 종용하던 자였던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 둘째, 인간에게는 조금만이라고 자기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것을 행사하려 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가 신적 권위를 가진 자임을 선언하고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신격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니므롯이 살아있을 때에는 비록 성취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내인 세미라미스에 의해서 시작되어 그의 아들 대에 가서 완성에 이른다. 셋째, 인간의 자유의지는 심각하게 하나님의 뜻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이 죄짓는데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나쁜 결과들을 맺을 수 있기 때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늘 하나님의 뜻에 맞춰나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그것에 내가 점령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시편기자는 말한다. 인간에게 시간은 지나간 밤의 한순간 같다고 말이다(시90:4~6). 인간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세가도를 달린다고 할지라도 그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늙어도 죽을 무렵이 되면 다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가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다음에 비로소 그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인생의 영화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아니 풀은 아침에 돋아나지만 저녁이면 지고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의 부귀영화에 너무 목매지 말라.  우리 인생의 부귀영화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기 때문이다(약4:14).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할 줄로 알아야 한다. 더 많은 물질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최고 지혜인 것이다. 니므롯을 보라. 그가 비록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도시들을 갖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도 죽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만약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벌은 우리의 후손에게 반드시 전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는 남을 압제하고 괴롭히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고개를 빳빳히 쳐들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다가는 어제까지 내 형제자매요 어제까지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이었음에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후회 누리도록 주시는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만을 경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생, 살다보면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새삼 알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4월 11일(주일)

정병진목사

 

누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종족과 민족과 나라의 시작과 역사를 단 몇 줄에 요약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것을 행하신 분만이 기록할 수 있다. 창세기 10장의 이야기는 그래서 특별하다. 고로 나의 뿌리가 어디이며, 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창세기 10장과 더불어 11장의 이야기를 공부하면 된다. 사실 인류의 종족의 시작은 노아의 세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민족이며 내 민족 앞에는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까?

2021-04-09(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64) 노아의 세 아들들의 족보가 들려주는 인류역사의 이야기(2)(창10:21~3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sxcWFCgV8A  [혹은 https://tv.naver.com/v/19510194  ]

 

1. 들어가며

  인류의 시조는 아마도 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아담이 시작했으나 노아의 홍수 때에 다 죽었고, 노아의 여덟식구만 살아남았으니, 노아가 새로운 인류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아는 홍수 후에 더이상 자식을 낳지 않았으니, 새로운 인류의 조상들은 노아의 세 아들들이었던 셈과 함과 야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의 각 종족과 민족과 나라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 보면 그것이 셈과 함과 야벳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전 시간에 이어, 노아의 세 아들들의 족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가운데 두번째 시간으로서, 노아의 후손들이 각각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그 각 종족과 민족들이 어떻게 정착되었으며, 그들 중에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은 또 어떻게 생겨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노아의 세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은 누가 진짜 장자인가?

  한글개역성경만을 보아왔던 분들은 노아의 세 아들들 중 장자는 당연히 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노아의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을 기술하고 있는 여섯차례의 성경기록(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에서도 항상 그 순서가 셈과 함과 야벳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10:21의 말씀을 보면, 장자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셈은 연장자인 야벳의 형제"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셈은 야벳의 형 곧 그 큰 자"라고도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셈을 장자로 본다. 왜냐하면 창세기 10장에 언급되고 있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자식들의 배열순서를 보면 연장자가 맨 먼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함의 넷째 아들이었던 가나안의 자식들을 언급할 때에는 처음 기록한 시돈을 아예 장자라고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셈이 장자가 아니라도 해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창세기가 말하려고 의도를 간파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장차 메시야 곧 "여자의 씨"(창3:15)를 산출한 영적인 장자로서 셈을 그 위치에 배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노아의 후손으로서 70명 족장들 가운데 특별한 바로 그 한 사람은 누구이며, 왜 그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 비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가?

  노아의 후손들 중 70명의 족장들 가운데 가장 특별한 사람은 "니므롯"이다. 왜냐하면 70명의 족장들 가운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록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니므롯"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니므롯은 함의 장손자다. 함의 첫째 아들인 구스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구스는 오늘날로 말하면 이디오피아 나라를 가리킨다. 그런데 구스가 먼저 다섯 명의 아들들을 낳았고 그리고 여섯째 아들로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가 아주 특별한 인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처음 출현한 용사(인간 사낭꾼)였기 때문이다(창10:8). 특히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낭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로서"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출현한 세상의 첫 용사였던 것이다. 특히 그의 이름이 그가 어떤 사람인 것을 말해주는데, 그 이름의 뜻은 "반역하다. 거역하다"의 뜻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니므롯은 "님(Nim)+로드(Rod)"인데, "님(Nim)"은 존칭접미사이고, "로드(Rod)"는 "마라드(marad)"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한다. 고로 "니므롯"은 그 이름 자체가 "반역자, 대적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나중에 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을 대적한는 존재를 성경에서는 "사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므롯이야말로 사탄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니므롯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땅(도시)이 또한 특별하다. 왜냐하면 그가 차지한 땅은 함의 종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셈의 종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의 한 복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함의 땅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셈의 땅의 들어가서 도시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 도시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었다. 그가 지배했던 땅은 네 군데로서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아카드), 갈레였다. 그런데 니므롯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왕국을 더 확장해 갔으니, 그는 셈의 둘째 아들이 차지했던 앗수르를 정복하여 니느웨에 거대한 도시를 만든다. 그리고 위성도시들도 함께 좋조성하였으니, 그 위성도시들로는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이 있었다. 그러니 그는 8개의 성(도시)를 거느린 난폭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또 배우겠지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주동자가 바로 니므롯이라는 사실이다. 그럼 그 때는 언제였는가? 즉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언어가 혼잡케 되어 전 세계로 또 다시 흩어지게 된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마도 셈의 자손중 벨렉의 때인 것 같다(창10:25). 그때에 땅이 나뉘었다고 창세기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벨렉의 때에 바벨탑사건과 언어혼잡사건이 있었고, 그때에 니므롯이 성쌓기를 그쳤던 것이다. 

 

4. 함의 둘째아들인 미스라임은 어떤 족속이었고 훗날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은 어떤 족속에서 나온 사람들인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4명의 아들들을 낳았었다(창10:5). 구스(이디오피아), 미스라임(이집트), 붓(리비야), 가나안이 그의 아들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둘째 아들 미스라임이 이집트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미스라임은 총 7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차례를 따라서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이 그들이다. 이중에서 갑도림은 오늘날 크레타섬(깃딤)을 가리킨다. 그리고 미스라임 족속 중에서 특별한 사항이 하나 있으니, 미스라임의 여섯째 아들이었던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 족속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힌 나라가 바로 블레섹 족속이 아니었던가! 사실 블레셋 나라는 블레셋에 속한 5개 족속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이 족속이 함의 족속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주변에서 가시 같은 민족을 두어서 당신의 백성이 잘못 행할 때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을 치게함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5. 함의 넷째아들인 가나안 족속은 어떤 족속인가?

  노아의 둘째 아들으로서 방주를 직접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함"은 아비의 실수를 형제들에게 고발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심각한 저주로 이어질 뻔 했었다. 하지만 함이 직접적으로 저주는 받지 않았다. 아마도 이전에 방주를 짓는데 참여하였고 부모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인 것 같고, 하나님께서 복주셨던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 있어서였던 것 같다(창9:1). 다만, 함의 의도적인 누설로 인하여 간접적으로 노아의 벌거벗음 사건에 참여했던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된다. 아마도 가나안이 노아의 벌거벗었던 몸을 보던 일에 참여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저주를 받았으니, 그는 자신의 형제들 중에 가장 천한 종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고(창9:25), 더불어 자신의 작은 아버지(셈)와 삼촌(에벳)의 종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다(창9:26~27). 그러니 가나안은 자신의 땅을 결국 셈의 자손인 이스라엘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부모를 잘 공경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실수를 고자질하거나 누설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실수는 타산지석으로 삼고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 같다.

  그렇다면, 노아의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결국 저주받은 가나안은 몇 명의 자식을 낳았던 것일까? 창세기에는 노아의 손자 가나안종족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해주고 있다. 그것은 가나안이 11명의 형제를 낳았으며, 이들 족속이 차지한 땅의 맨 끝자락이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 땅까지도 가나안족속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창10:19).

 

6. 셈의 후예는 어떻게 퍼져나가게 되었는가?

  창세기 10장의 족보이야기의 핵심은 셈의 후예들에 관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셈의 씨를 통하여 장차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셈과 함과 야벳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은 놀랍게도 셈의 후예들 가운데서 나오지 않고 함의 후예들 가운데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니므롯"라는 인물인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셈과 함과 야벳의 시대에 뛰어난 인물이 함의 자손에서 나왔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거짓그리스도가 먼저 출현한다는 신약성경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마24:24)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인의 형통함은 결코 부러울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오래 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그만 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셈의 후손들은 각각 어디로 흩어져나가거 살았을까? 사실 셈의 후예들이 차지한 땅은 지형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야벳의 땅 아래 쪽에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라 함의 땅의 북동쪽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위치는 오늘날로 본다면 아라비아 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셈은 5명의 아들들을 낳았으니, 순서대로 치면,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삭과 룻과 아람이 그의 아들들이다. 이중에서 엘람은 나중에 페르시아 나라가 되며,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바로 그 앗수르 제국의 처음 이름인데, 맨 처음에는 셈의 아들 앗수르가 앗수르를 차지했으나, 곧이어 치고 올라오는 함의 손자 니므롯에 의해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니므롯은 이내 앗수르를 초대형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넘어뜨렸던 앗수르 살만에셀 왕은 순수한 의미의 함의 자손이 아니라, 함과 셈의 자손이 섞인 자손이거나 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셈은 셋째 아들로 아르박삿을 낳았다. 이 아르박삿이 바로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인물인데, 그 뒤로도 몇 대까지 셈의 후예들 중에는 특출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름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예들 중에서 결국 9대째에 가서 아브라함을 얻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셨던 몇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악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 우린 과도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 우리에게도 마지막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얼마 안 있으면 아마겟돈 전쟁을 치르기 위해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다. 그러면 그놈이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것이다. 그래도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그를 따라가지 말라. 거짓이 진짜처럼 행세하나 그를 따르면 같이 멸망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7. 셈의 후손인 벨렉의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셈의 후손 4대만에 세상에 큰 일이 있었다. 셈은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은 셀라를,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이 벨렉과 욕단을 낳았다. 그런데 이 벨렉의 시대에 땅이 나뉘었던 것이다. 대체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그 때에 인류역사에 아주 큰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벨렉"이라는 이름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 뜻이 "분리, 나뉨"이기 때문이다. 둘째, 벨렉의 시대부터 수명이 급격히 감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인류가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셋째, 그때에 땅이 갈라졌다고 하기 때문이다(창10:25). 여기서 땅이 갈라졌다고 함은 2가지 의미인 것 같다. 첫째는 진짜로 대륙들이 갈라졌다는 말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황해도 한 때는 뽕나무 밭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육지의 침하와 융기작용으로 인해 바다가 된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상전벽해(뽕나무 밭이 변하여 바다를 이루었다"이라는 말이 있다. 그 옛날 동이족의 사람들은 누에를 키워 비단옷을 입고 살았는데, 중국 동남쪽과 우리나라 사이에 황해가 그때는 뽕나무밭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때 땅이 갈라질 정도는 인류에게 흩어짐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 11장의 언어혼잡의 사건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 증거가 창세기 10장과 11장에 나오는데,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들의 후손들 70종족이 흩어질 때에 언어로 인하여 흩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10:5, 21, 31). 그리고 창세기 11장에 가서 바벨탑 사건이 있기 전까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고 말도 하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창11:1). 고로 우리는 벨렉의 시대에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언어의 혼잡이 발생하였으며, 그 죄로 인하여 대륙의 침하와 융기가 일어났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도 여기서 잠깐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해서는(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여기서 짧게 언급하겠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에벨의 둘째아들이었던 욕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이 된다. 바벨탑 사건 이후 욕단의 자손이 대거 동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동쪽으로 이주해온 사람들 중에는 셈의 후예인 욕단자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갈대아우르에서 서로 섞여 살았던 함의 자손도 동쪽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지나족(중국민족)은 그때 이동한 함의 자손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조상 동이족은 셈의 자손으로서 동쪽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참고로 셈의 자손의 독특한 특징의 하나는 셈의 자손에게서 종교와 문화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8. 나오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들 가운데 성경처럼 확실한 책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는 책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에 거짓말을 기록해두었다고 치자. 그리고 그 중에 조금이라도 거짓말이 들어있다고 치자, 그러면 하나님의 명예와 진실성에는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예를 걸고 진실만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에도 등장하고, 불못에 들어갈 죄목에도 등장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모든 이야기와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히 알려면 창세기의 기록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중에서 창세기 10장의 이야기는 인류의 종족과 민족과 나라의 기원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것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들이 말해준다. 특히 범죄했던 함과 그의 자손에게서 그 악이 발현하였음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죄에 대한 형벌로서 가나안은 자기의 형제들에게도 종이 되고, 셈과 야벳의 후손에게도 종이 되는 징계가 주어졌다는 것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렇다. 죄는 짓게 되면 누군가 그 형벌을 받든지 아니면 회개하여 그 죄를 없애든지 둘 중의 하나만 있을 뿐이다. 고로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없이는 인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리고 고통과 징계에 계속해서 묶이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다시 보라. 함과 가나안과 니므롯이 회개했다는 말이 있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당장 우리 시대에 그리고 우리 가문에 훌륭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이 성행할 때에 당신의 사람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셈으로부터 아브라함 때까지 9대에 걸쳐 셈의 자손 가운데 별다른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종살이로 고통받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안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4월 09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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