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3) 주께서 들려주신 거듭남과 영생의 비밀(요3:1~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8KQFLbh96U  [혹은 https://tv.naver.com/v/29458957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과연 자기가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는데 그가 아직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거나 영생을 소유해지 못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리고 영생을 소유했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영생을 소유했는지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거듭나지도 않았고 영생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거듭남이나 영생을 얻는 것이 과연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서도 가능한가? 오늘은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과 더불어 그 해답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고자 한다. 

 

2. 니고데모는 누구며 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는가?

  니고데모는 그의 이름이 '니케(우세함,승리함)'와 '데모스(백성)'가 합쳐진 말로서, '백성 위에 우세함'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으로 볼 때 유대교 중에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는 율법을 매우 중요시하는 유대 종교 분파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의 지도자(통치자)였다. 그는 유대의 최고 중앙의결기구이자 최고재판소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율법에 있어서 최고 교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영적 갈증이 대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시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경계하고 있는 예수님을 밤중에 몰래 찾아올 리가 없다. 또한 그는 굳이 다른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먼저 예수님을 높이는 말부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온 채 있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절대 행할 수 없는 표적들을 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예수님을 율법의 정규과정을 다 밟은 자로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의 생각에는 예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도 더 뛰어난 분이요 율법에 대해서 뭔가를 더 알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율법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그가 가진 유대교의 율법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는 율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물과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 거듭남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께서는 율법 안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온 니고데모에게 한 가지의 대답을 통해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이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율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고 또한 영생을 얻는 방법은 율법 안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물과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요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거듭 태어난다'고 하신 말씀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헬라어로 '아노덴'으로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아노덴'이라는 말은 '다시, 새롭게, 위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겠느냐면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육체로부터 태어난 채 있는 것은 육체가 되는 것이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어야 영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3:6). 그런데 여기에 보니, 거듭남의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물'도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며,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물'에 대해서는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잘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그것은 '물'은 정화의 수단으로서, '세례'로 예표되는 것인데 그것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행2:38, 딛3:5).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그렇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훗날 자신이 죽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다고 말했다(고전15:45). 고로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먼저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처럼 사람은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사람이 거듭 태어나게 되면 그 순간에 무슨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며, 그를 돕기 위해 그 사람만의 수호천사가 파송이 된다. 

 

4. 사람은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먼저는 회개해야 하며 또한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먼저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뉘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난 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이 자신의 죄를 없애는 것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신다. 이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방법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수단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은 결코 율법을 지켜서 거듭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거듭남은 오직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사역을 믿고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을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니고데모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것은 곧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 사건이다(요3:14).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었을 때였다. 그들이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의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다. 모세더러 자기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인도해 냈느냐면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에 왜 데려왔느냐고 하면서 불평했다. 그리고 하찮은 만나같은 음식은 더이상 자기들에게 싫증난다고 외쳤다. 그러자 화가난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게 하셨다. 이에 독이 퍼져 고통받고 있을 때에 그들은 모세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가 여호와와 모세에게 원망하여 범죄를 했으니, 이 뱀들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지시하셨다. 그것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 뱀에 물린 자가 있으면 그것을 쳐다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살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자 모세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두었다. 그러자 백성 중에 뱀에 물린 자들 중에는 놋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독뱀에 물렸으면 빨리 독있는 피를 흘려버고 해독제를 먹어야 살아날 것인데, 놋뱀을 쳐다보았는데 그만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듭남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예수께서 놋뱀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인 것이다. 

 

5. 거듭남에 있어서 율법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왕국은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구원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율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정확히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율법으로는 사람이 중생할 수 없는가? 그것은 사람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것이 율법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온갖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자는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기 때문이다(신27:26). 사실 이러한 율법과 거듭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문제는 니고데모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훗날 사도 바울도 이 문제에 부딪혀서 약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 바울도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을 목도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21:23에 말씀에 따르면,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께서는 분명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정결법이나 음식법을 어기고 성전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죽고 없어진 그분이 어느날 생시에 그것도 대낮에 자기의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분이 살아서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바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자는 절대 다시 살아서 이 땅에 돌아올 수 없는데 그분이 자기의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과 그때 자기 눈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율법은 의롭고 거룩한 것이지기는 하지만,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 조항을 다 지키며 살아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율법의 온갖 저주를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려고 속죄양이자 아사셀양이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있는 모든 자로 하여금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되는 길을 새롭게 그분이 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예수께서 대신 받으신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셨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생명을 받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율법으로서는 도무지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저주를 받는 것이지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어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의 법칙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6. 영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는가?

  이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사도 요한은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지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16~21까지의 말씀이다. 이 부분을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가키려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 부분은 아무래도 사도 요한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하여 해설을 붙여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영생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이는 그를 믿고 있는 모든 자가 다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여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요3:1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 안으로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오히려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그분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하는 영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참고로 이것을 안다는 것을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요20:31).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이 앞의 3개의 공관복음서 외에 요한복음을 또 기록했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며, 그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먼저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주셨다(요5: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안에만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명'은 어느 시기에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세'다. '다음 시대'인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 자신의 영이 가서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생명을 이 땅에서 얻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는 사망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멸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이 생명을 얻지 못한 채 죽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사망'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있고 또 나를 보내셨던 분을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망에서부터 생명 안으로 옮겨진 채 있는 것이다(요5:24)" 그렇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컴컴한 곳으로 가서 살아야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한 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인류를 대신하여 죄값으로 십자가에 달려죽은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영생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고로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으로서, 이 생명을 가진 자는 죽은 후에 다음 시기에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 가서 거기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7. 사람은 왜 영생을 얻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사람 중에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빛으로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함으로 인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3:19). 그래서 악을 행하고 있는 자는 모두 다 빛을 미워하게 되는데, 이런 자는 빛을 향하여 나아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럽고 추한 자신의 죄된 행위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3:20). 그렇지만 오직 진리만을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그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자기의 죄를 예수님께 고백함으로 용서를 구한다. 또한 이런 자들은 빛되신 예수님 안에서 행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빛된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며 산다(요3:21). 그렇다.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빛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그분이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자기자신이 심판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그분을 믿고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때에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3:17~18).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래서 이 복음을 나만 알고 있지 말로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8. 나오며

  사람은 어떻게 거듭나며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리고 '거듭남'이란 대체 무엇이며 '영생'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는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거듭남과 영생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람의 거듭남은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으로서 이는 '회개'와 '믿음'의 방법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이유에서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다음 시대에 가져야할 생명으로서, 아버지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가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망'이란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곧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켜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 또한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도 없다.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지하고 사려깊은 니고데모라 할지라도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다. 율법보다 430년전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법칙이 지금도 율법보다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으니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거듭 태어나기도 하고 영생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알고 보면 이처럼 쉽고도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영생의 법을 모르고 있거나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먼저 믿어 거듭난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도리인 것이다. 

 

 

2022년 09월 21일(수)

정병진목사

 

사람은 저마다 신앙의 표현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표현한다. 그중에서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공회원이었으나 예수님의 제자였던 두 사람의 경우가 그렇다. 그중에 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다. 둘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였으나 자신의 믿음을 숨기며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달랐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으나 밤중에 주님을 찾아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달라졌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해 오신 참 빛이요 그것이 생명의 빛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할 수 있는 한 예수님을 변호하거나 두둔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가져올 것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던 날, 주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준 말씀을 니고데모는 항상 기억하고 있었고, 예수께서 죽자 장사하기 위해서 무덤에 찾아간다. 그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 때문에 그날 무덤에 장사하러 간 것인가? 오늘은 니고데모와 아울러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을 비교해보면서 나의 신앙양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니고데모는 왜 예수님을 장사하기 위해 무덤으로 왔을까? 자기가 마음 속으로 좋게 생각하고 있던 분이었으니까 장례나마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드리고 싶어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니고데모가 그날 무덤으로 온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발각된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고, 그분을 따르는 자라고 자신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면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쉽게 생각해보면, 산헤드린공회에서 파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패거리로 몰려 동료 공회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장사하러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러 왔는지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놀라운 니고데모의 신앙이 들어있다.

 

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게 되었을까?

  니고데모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러 오던 날은 캄캄한 밤이었다(요3:1). 그때 그는 자원하여 스스로 주님께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산헤드린공회를 대표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기 위해 예수님께 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혼줄이 났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으로 책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 당시 자신처럼 많이 배우고 율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는데, 인류의 속죄를 위해 메시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됨으로 성취된다는 것까지 들었다(요3:14).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신적 지혜에 따라 자신이 속해있는 산헤드린공회가 어떤 종교단체인지까지 들었다(요3:11). 자기들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활동하였던 세례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인 줄 알면서도 그분의 외침을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았으면서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예수님을 싫어하고 배척하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실제가 그랬었기 때문이다.

  그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계속해서 어둠 가운데서 지낼 것인가 아니면 빛으로 나아올 것인가를 말이다(요3:19~21). 니고데모는 그날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온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이후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이 소문으로 들어왔거나 경험했던 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분에 대한 판단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만 한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메시야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장례는 어떻게 치러졌는가?

  그러나 세상은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기가 속한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자 그를 죽여 없애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날 빛을 가슴 속에 담아두었기에 예수님을 배척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헤드린공회와 백성들의 외침은 예수님을 정말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산헤드린공회는 불법도 서슴없이 행하였다. 재판하는 날에는 절대 형집행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 규정까지도 다 무시하였다. 속전속결로 예수님을 처리한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외로히 그리고 백성들의 버림 속에서 아사셀염소처럼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는 그분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있었다. 그것은 민21장에 나오는 놋뱀처럼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그제야 확실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대와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소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알려진 사람이라,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의 시체를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동료 중 한 사람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예수님은 그날 해가 지기 전에 골고다 언덕에 위치한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된다. 그 장소에 니고데모도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몰약과 침향(알로에) 섞은 것을 가지고 말이다(요19:39).

 

4.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섬긴 두 사람, 아리마대 요셉과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의 생애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장례 또한 구약성경에 나온 예언에 따라 진행되었다. 사53장에 보면, 고난받고 죽임당하실 메시야는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사53:9). 그런데 정말 예수님의 시신은 부자의 묘실에 안치되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공회의 한 명이었던 아리마대사람 요셉이 부자였고, 그가 새로 골고다 언덕에 새로 파놓은 가족묘실에 예수님을 안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12제자들이나 70명의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있었던 두 사람을 보게 된다. 그들도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였다. 성경기자는 아리마대요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산헤드린공회원이었다(막15:43).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막15:43).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눅23:50). 그는 예수님을 죽이는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다(눅24:51). 그는 부자였다(마27:57). 그리고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마27:57). 그랬다. 그는 예수님의 숨겨진 제자였던 것이다. 그날을 위해서 말이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미리 공개되어버렸다면 아마도 빌라도가 그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존경받는 산헤드린공회원이었기에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부자였기에 골고다언덕에 자신의 새 무덤까지 준비해 둘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 주변에서는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평소 때에는 잘 모르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에는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아리마대요셉이 그랬다.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기시 전까지는 자신의 마음을 숨겼다.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시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 실천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부자의 묘실에 묻히실 것이라는 예언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다르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전혀 몰랐던 인물이었으나, 밤중에 주님을 찾아가 정탐하다가 그만 이 땅에 온 빛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때에 마음을 바꾸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예수께서 사람들에 의해 모함당할 때 변호사를 자처했다(요7:49~51). 그래서 그는 일찍이 산헤드린공회에서는 예수님을 두둔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만약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더라면 아마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그의 예언을 완성하셨음을 알고는 온전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다(요19:39~41). 그래서 산헤드린공회의 두 사람이 그날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5. 나오며

  모든 사람은 다 언제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랬고, 니고데모가 그랬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고, 니고데모는 3년반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을 보호하고 두둔하기 위하여 준비된 일꾼이었다. 둘은 꼭 그렇게 쓰임받았다. 그렇다. 사람 중에는 자신을 공개하지 않고 어느 때에 나타남으로 쓰임받을 사람도 있고, 자신을 공개함으로 주님께 쓰임받을 사람도 있는 것이다.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쓰시는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었기에 자신에게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도 필요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쓰임받을 것인가?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주님을 섬기는 자인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자로 쓰임받을 사람인가? 아니면 숨어있다가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주님께 쓰임받을 사람이 될 것인가? 그것은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대로 감당하면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6월 17일
정병진목사 

 

 
  예수께서는 왜 죽으실 때 유대인 법이 아닌 로마의 법대로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을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장사지냄은 왜 그리 빨리 진행되어야 했을까?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냈을까?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자가는 저주의 형틀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곳에서 죽으신 이후 십자가는 고귀한 희생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법에 의해서 참람죄로 고소되었지만 죽을 때에는 로마의 반역죄인처럼 취급받고 사형에 처해지셨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주장했던 참람죄(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 고소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니 반역죄인이라고.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다윗왕의 혈통에서 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왕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요18:36-37, 요1:11). 그러므로 반역죄는 성립될 수 없었다. 몇 번의 심문을 통해 이것을 알아차린 로마총독은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민란을 걱정한 나머지 결국 그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내 주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에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온 12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처형되셨다. 죄없으신 분이 죄인처럼 취급받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형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셨나?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막10:45, 요10:11, 요12:24). 그 방법이 인간이 가진 저주를 끝내는 방법이요 율법이었기 때문이다(신21:22-23, 민21:8-9, 갈3:13)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당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통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찾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종교법으로 예수님을 정죄했고, 로마법까지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안목으로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으니, 오직 흠없는 어린양되신 예수님만이 속죄제물이 되실 수 있었기에,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속죄양이 되시어 골고다 제단에서 죽으신 것이다(갈1:4).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속했으며, 더불어 가난과 목마름의 저주를 속량했다(신28:48). 그리고 질병까지도 대신 담당하셨다(사53:5, 벧전2:24). 이것이 사53장과 시22편에서 말하는 고난받는 종의 길이었다. 오직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이루고 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마지막 외마디 외침은 "다 이루었다"이다. 다 지불하신 것이다. 다 성취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유대인의 유월절의 예비일인 13일 금요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12시가 될 때 아버지부터도 버림을 받으셨다. 그리고 오후3시에 운명하셨다. 곧 3시간 후면 유대인의 큰 안식일이 시작된다. 니산월 14일은 안식일이자 유월절의 첫날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부정을 염려하여 유대인들은 시체를 빨리 치우길 원했다. 그래서 단 3시간만에 장례가 치러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산헤드린공회원 두 사람을 준비해두셨다. 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였다. 아리마데 요셉은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부요함을 언제 써야 하는 지도 알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시대마다 숨겨둔 당신의 사람들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시신을 옮겨 장사지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 무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리 옮길 수 있었고 장례법대로 니고데모와 함께 씻고 몰약과 향품과 침향을 바른 다음, 세마포에 싸서 그곳에 뉘여 놓았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그 몸을 가지고 그대로 부활해야 했기 때문에, 뼈가 하나도 상해서는 아니 되었으며, 장례 때에도 화형이나 매장을 해서는 아니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군병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B.C.20년에서 A.D.70년까지만 있었던 장례풍습대로 예수님은 빈 무덤 안에 그냥 뉘어있었던 것이다. 사암을 파고 그 안에 시체를 넣어두는 장례풍습은 그 시대 전후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3일 뒤에 그 몸을 가지고 그대로 부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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