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8)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교회관은?(행9:10~18)_2022-09-09(금)

https://youtu.be/YAHMuCkl_KQ  [혹은 https://tv.naver.com/v/29111775 ]

 

1.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바울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이 땅에 그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셨던 분께서 이제는 때가 되니 찾아오셔서 그를 불러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이 땅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고 보냄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영들에 갇혀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있었다. 그러다나 어느날 다메섹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빛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럼, 예수께서 사람에게 오실 때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 하늘과 우리가 살고 있는 첫째 하늘이 순간적으로 딱 맞닿아버리면서 즉시 오시는 것이다. 즉 중간의 둘째 하늘이 접혀져 버리면서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빛은 프리즘처럼 쫙 펼쳐지게 되는데, 그 속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그려지면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빛 가운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2.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로 3가지는 무엇인가?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로는 3가지다. 하나는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방문을 맞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구약시대에 해당되며,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가 그랬으며, 사무엘이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에는 이름을 부르시는데, 그때에는 꼭 두 번씩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22:11), "모세야 모세야"(출3:4), "사무엘아 사무엘아"(삼상3:10).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결코 볼 수 없다(요4:24).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딤전6:16).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방문을 맞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의 일인데, 예수님의 방문을 맞이하는 것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일을 행하실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직접 오신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로는 어떠할까? 그때에는 대부분 다 성령께서 오셔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의 경우이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육안으로는 하나님이 오셨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는가 하는 것은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결과로서 알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주인이 나였던 것이 그때부터 성령 하나님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세미하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이 확실히 믿어지게 되고, 내 인격이 바뀌게 되고, 내 삶의 목적도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때 오신 성령께서 내게 어떤 선물(은사)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방언을 말하기도 하고 환상을 보기도 하고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는 두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경우였기 때문이다. 

 

3. 사도바울의 교회관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경에서 '교회관'이라고 함은 거의 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교회관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본다. 물론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가 무엇인지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지만 말이다. 어느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군지를 물어보았을 때에, 수석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그리스도이시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그러자 베드로는 그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 곧 주님이 주인인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16:18). 다시 말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는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다메섹에서의 체험 때문이었다. 사울이 혈기등등하여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 결박하고 옥에 가두고 때로는 죽이기 위해 주의 성도들을 찾아 헤매고 있었을 때였다. 열심이 특심이었는지 그는 이방지역에 해당하는 다메섹에까지 가서 주의 성도들을 잡아오려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치었고, 그때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때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그러자 문득 자기 앞에 빛 속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고는 그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게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5~6). 바울은 그때 예수믿는 자들을 못살게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지 결코 죽고 사라져 버린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이미 죽어서 없는 분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사울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자기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예수님을 믿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는데, 그것이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들은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교회관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4. 바울이 다메섹에서 체험한 주님과의 만남과 그분의 지시는 그의 교회관을 어떻게 정립하게 해 주었는가?

  바울은 그때 스데반과 주의 성도들이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도들이 매맞고 성도들이 옥에 갇히고 성도들이 죽임당하게 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당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교회는 그(그리스도, 예수님)의 몸이라"라고 하였다(엡1:22). 스데반과 주의 성도는 당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몸은 하나인 것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그리고 각 지체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앞에 나타난 예수께서는 더이상 그에게 말씀하지 않고 그에게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붙혀준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바울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5.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적어도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주 예수님을 주님이자 머리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엡1:21). 왜냐하면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머리로 믿고 따르지 않는 자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둘째, 자기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12:13). 성령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들어와 있어야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신학 책을 보면, 교회의 표지는 다음과 같은 3가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말씀의 참된 선포요, 둘째는 성례(세례와 성찬)의 바른 집행이며, 셋째는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예수님을 진정 주님으로 믿고 있고, 자기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이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고 지체를 자기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엡5:28~30). 왜냐하면 주님께서 먼저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기의 몸을 내주셨기 때문이다(엡5:25).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교회로 만드시기 위해 자기의 몸을 내어주셨는데, 어찌 그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분이 핏값을 주고 산 이웃 형제자매를 어찌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권징을 신실하게 집행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행하셨던 희생적인 사랑을 다른 지체들에게 그대로 행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나니아가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행9:17). 사실 예수믿는 자들은 결박하여 옥에 넘기기 위해 다메섹에 들어온 바울은 아나니에게는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용서하고 그 원수와 같은 자를 형제로 받아주라고 하셨다. 또한 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고 그의 눈에게 악한 영들을 제거해주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준행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까지 베푼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여러 지체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교회인 것이다. 

 

2022년 09월 09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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