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5)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은 어떻게 고침받았는가?(행3:1~10)_2022-06-21(화)

https://youtu.be/uwUOGYxf3Xo  [혹은 https://tv.naver.com/v/27592997 ]

 

1.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와 요한에게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세례 사건이 있은 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번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으로 있다가 태어나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40여세나 된 남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그만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술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이것을 지켜 본 사람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는데,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행3:10).

 

2. 나면서 못 걷는 자가 고침받은 일은 언제 어디에서 일었던 사건인가?

  그렇다면 나면서 못걷는 사람이 고침받은 일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을까? 때는 오순절 성령강림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그리고 장소는 성전의 미문(美門, Beautiful Gate)에서였다. 그렇다면 성전의 미문은 어디에 있는 문일까? 성전의 미문은 성전의 동편에 있는 정문 쪽의 문이다. 아래의 사진으로 보면 그 문의 위치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크게 4개의 뜰이 있다. 제일 처음으로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것은 성전의 제일 바깥쪽에 있는 ㄷ자 형태의 뜰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전의 동쪽에 있는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것이 바로 '여인의 뜰'이다. 그리고 여인의 뜰에서 '니카노르의 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의 뜰'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뜰 앞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와 지성소의 바깥쪽의 양쪽 공간을 가리켜 '제사장의 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드론 골짜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수산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면서 못걷는 자가 구걸하다가 고침받은 장소인 '미문'은 어떤 문을 가리키는가? '수산문'인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인가? 아니면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는 '니카노르의 문'인가?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가장 신뢰할만한 것으로는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의 기록인데, 그는 자신의 책 "유대전쟁사" 제3권 제17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해 뜨는 쪽을 향하여 있는 내부 성전(제사장의 뜰)의 문인 동문(銅門):bronze gate)[㈜ 고린도의 청동문(전쟁.5권. 5:3(201))은 아마도 여인들의 뜰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며, 행 3:2의 미문(美門)과 미쉬나(Mishna)의 나카노르(Nicanor)문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로 우리는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는 문인 니카노르의 문이 성전 미문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에 들어갔던 자는 여인의 뜰의 맨 앞쪽 니카노르의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이 남자를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3.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인 채 태어났던 청년은 어떻게 고침을 받게 되었는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던 어떤 남자가 고침받았던 사건은 왜 그리 충격적인 사건이었을까? 그것은 이 남자의 신체의 어떤 부분이 다쳤거나 고장났던 것이 치료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리를 쓸 수 없게끔 태어난 사람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하반신 장애인으로 태어난 자가 고침을 받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옷으로 빗대어 말하자면, 사용하던 옷의 찢어진 것을 수선한 것이 아니라, 없던 옷의 일부를 새로 만들어 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병고침의 사건이라기보다는 창조의 기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 온 예루살렘이 소동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전의 미문(아름다운 문) 앞에서 항상 구걸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수십 년을 그렇게 해 온 것이다. 그의 나이가 당시 40여세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랫동안 성전 앞에서 구걸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도 그는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베드로와 요한이 그 친구를 눈여겨본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를 향해 일어나서 걸어갈 것을 명령했을 때, 그 친구가 정말 일어서더니 걷고 뛰어버린 것이다. 

 

4.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렇다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어떻게 해서 걷게 되었는가? 그의 믿음이 좋아서였는가? 아니면 베드로의 능력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그 장애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맞는 이야기라면 베드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날 베드로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 장애인의 믿음으로 나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베드로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낫게(창조의 기적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첫째, 베드로의 믿음 때문이다(행3:16).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하여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베드로의 기도 때문이다(행3:1). 왜냐하면 그날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의 하나인 오후 3시의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행3:1). 1절을 헬라어로 읽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제 9시(오후 3시) 기도 시각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안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는 것은 그때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하고 있던 습관처럼 그날도 오후 3시가 되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에 몰두하는 일을 계속해 온 것이다. 사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은사를 받으려면 하루에 6~7시간씩 6개월을 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고로 병든 자의 치유의 관건은 기도의 유무와 그 분량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나면서 못 걷던 이가 낫게 된 사건은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가?

  나면서 못걷던 이가 낫게 된 사건은 사실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도 남았다. 첫째는 그 사람을 늘 지켜보았던 이들 때문이다. 그 반응은 한 마디로 경악했다는 것이고 자신이 현재 꿈꾸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까지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시 베드로에게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세례가 부어질 때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 가운데 일어나며 그와 같은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해명을 한 끝에 성도의 수가 3,000명이 늘었듯이 이번에도 베드로가 또 일어나 설교했을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믿는 이가 무려 5,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는 산헤드린 공회가 베드로를 비롯하여 12사도들을 감옥에 가둬 버린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보초가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뒤에 해방시켜 주신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시다. 

 

2022년 06월 21일(화)

정병진목사 

 

20220621_093618.jpg20220621_093559.jpg20220621_093543.jpg20220621_093444.jpg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강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역적으로 본다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지역과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퍼저나갔다. 그리고 사람으로 본다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자들로부터 불신했던 자들에게로 퍼저나갔다.
  이 중에서 사도행전 3장의 이야기는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이름을 사용해 치유를 선포하자, 그 명령 한 마디로 인해 예수공동체에 속하지 않던 자가 치유를 받았고, 그 일로 인해 온 성이 발칵 뒤집혔으며, 무려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공동체에 들어왔기 때문이다(행4:4).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십자가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였고, 그것은 미혹이 아니라 진짜였다는 것이 판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해서 불가능한 치유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걸인은 어떻게 되어서 창조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을까?
  먼저, 첫번째로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사역부터 살펴보자. 이 두 사도는 초기예루살렘공동체의 대표격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까지는 기적같은 일을 행해 본 일이 없던 자들이었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 본 일도 없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날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예수이름의 능력을 적나나하게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해서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첫째, 행2:1-4에 보면 그들은 우선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기에 예수이름을 사용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행3;1에 보면,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에 힘써왔고 그 날도 기도하러 가다가 그 행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이름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믿었기 때문이다(행3:6). 넷째, 처음 접해보는 일이지만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담대함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행3:6). 그들은 자신이 명령했는데도 앉은뱅이가 일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당신도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충만을 받은후 예수이름을 사용해보라. 즉각 자신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두번째로,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어떻게 치유받았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비참했지만 그것을 비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이 사람은 거지에, 앉은뱅이 환자에, 하나님의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는 영적 소외자였다. 그것도 나면서부터 지체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였다. 날마다 불평불만하며 부모를 괴롭힐 수도 있었건만 그는 누군가의 손을 빌어서 날마다 예루살렘의 성전 미문이라는 곳 앞으로 나왔던 자이다. 둘째, 그는 듣는 귀를 통해서 믿음을 키워나가던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와 소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분은 못고칠 질병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병마저 고쳐줄 것을 예수님에게 부탁할 즈음에 그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 이후의 소문에게도 귀를 기울였다. 예수께서 죽었으나 3일만에 살아나셨고, 승천하셨으며,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것도 들었다. 그때 제자들이 받은 성령은 예수님의 12사도와 예수님의 가족과 여러 믿는 이들이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는 예수공동체의 핵심인물인 베드로와 요한을 직접 만난 것이다. 그리고 셋째, 그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려고 작정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 성령받은 예수공동체가 그 힘을 발휘하여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해서 구원자를 얻어야 하는 시기였고, 하나님께서도 첫신앙공동체인 예루살렘교회의 복음전파에 활력을 불어넣어야할 아주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날 그 자리에 나면서 소경된 자가 있었어도 그 소경은 눈을 떴을 것이다.
 
  그렇다. 믿는 성도들이여, 이제는 당신도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라. 성령충만받고 기도하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분의 이름으로 명령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일어나버렸다. 이제 당신도 예수의 이름을 청원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사람의 몸과 대자연을 향해서 회복과 치유를 선포하는 이름으로 사용하라. 예수의 이름은 청원하면 응답받게 해주는 이름이지만, 믿음으로 명령하면 기적을 가져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도 혹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 걸인의 치유를 보라. 그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귀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믿음을 키워왔다. 그리고 주의 종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즉각 반응했다. 발과 발못에 힘을 들어간 적은 작은 것이었지만, 더 믿음으로 반응했다. 그랬더니 그는 벌떡 일어설 수 있었고,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당신에게 있어도 기적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큰 것으로 확대되어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라. 그러면 당신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