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의 비유는 주님 오실 때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비유라는 것쯤은 아마 모두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그 '기름'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성령'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것인가? 우리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기름을 가지고 왔는데도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를 통하여, '기름'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는 오늘부터라도 그 기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2022-02-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천국복음(06)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구분하는 2가지 기준은?(마25: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4tC_no-EUd8 [혹은 https://tv.naver.com/v/25389890 ]

 

1. 들어가며

  마태복음 25장에는 천국에 관한 3가지 비유가 등장한다. 그것들 중에 첫 번째 비유가 바로 '열 처녀의 비유'다. 이 비유는 누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놀라운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에 관한 기본적인 포맷은 이미 며칠 전에 함께 나누었다. "천국복음(05) 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천국에 못 들어갔는가?"가 그 제목이다. 오늘은 이 비유에 대한 두 번째 시간으로서, 똑같이 둘 다 처녀들이었으며, 똑같이 둘 다 신랑을 기다리던 여인들이었는데, 왜 한 편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었고, 반대로 왜 또 한 편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 근본적이 이유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번 말씀을 통하여 대체 '기름'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 깊이 묵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나도 기름을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철저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는 최소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충분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2. 천국 준비는 그냥 열심히 준비하면 되는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깨어있으라' 혹은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하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의 의미요 저렇게 하는 것이 준비하고 있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중에 가장 흔한 생각은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준비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조금 뚜렷하지 않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깨어있으라 그리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충성하고 있으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으라"는 의이다(마24:44~45). 그러므로 내가 지금 깨어 있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고, 또한 똑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2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주셨다. 하나는 "지혜롭게 하고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마25:1~13). 그리고 또 하나로 "충성하고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풀어주시기 위해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주셨다(마25:14~30).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열 처녀의 비유"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말씀이라고 하겠다. 사실 기도도 배워서 할 때에 시간이 절약되고 더 잘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듯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워서 준비한다면 훨씬 그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3. 처녀들이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게 되었던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혼인잔치 곧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천국의 영광의 광장에서 이루어질 혼인잔치는 과연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늘 "열 처녀의 비유"에 따르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요,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하면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생긴 것인가? 그것은 딱 2가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는 그날 신랑과의 만남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느냐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준비한 기름이 과연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는 기름을 준비한 채 나갔느냐 아니면 그냥 나갔느냐 하는 문제요, 후자는 기름을 가지고 가긴 갔어도 그 기름을 과연 신랑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느냐 받지 못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4.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자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했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등(등잔이나 횃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가지고 나갔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등만 가지고 나갔다. 곧 기름을 가지고 갔느냐가 결국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럼, 왜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고 나간 것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딱 한 가지 차이에서다.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을 마중만 나간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을 생각하고 준비하고서 나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마중만 나갔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1절과 6절에서 알 수 있다. 1절을 보면, 열 처녀들은 모두 다 자기의 등을 취한 후에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맞이하러'라는 말은 '마중을 위하여, 영접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휘판데시스'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누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지가 나오는데, 이는 그분과의 만남을 위하여 준비하였던 자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만남'이라는 단어는 '아판데시스'이다. 그렇다.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가 신랑을 마중 나갔던 것은 다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을 마중만 나간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만남을 준비한 채 나갔던 것이요, 미련한 처녀는 그냥 마중만 나간 것이다. 

 

5. 슬기로운 여인이 준비했던 기름은 어떤 용도였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슬기로운 여인이 준비했던 기름은 꺼져가는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한 용도였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맞다. 하지만 그 기름은 그 용도로만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이 비유의 후반부에 나온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가 신랑이 온다는 말에 깨어나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등잔에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자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그들은 곱게 거부하면서 자기가 쓰기에도 부족할 것 같으니, 가서 댓가를 지불하고 사오라고 말한다. 그러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사기 위해 급히 나간다. 그리고 얼마 후에 돌아온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혼인 집 문이 닫혀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그들이 신랑에게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청원한다. 그런데 신랑은 그들은 알지 못하겠다고 잘라 말한다. 다시 말해 "너희가 내 신부가 될 사람인지는 나는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신랑이 그들을 혼인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그들의 등불이 활활 타오르지 않아서였는가? 아니다. 그들이 신랑의 영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이유는 그들이 나중에 기름을 채워서 왔더라도 그 기름은 신랑을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등불이 활활 타오르지 않아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신부로 맞아들이기에 합당하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슬기로운 여인들이 신랑을 맞이하기 전에 준비했던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여인들이 준비했던 기름이 꺼져가는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한 용도로만 쓰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신랑이 오기 전에 준비한 기름은 그녀들로 하여금 신랑을 자신의 남편으로 맞이들이기 위해 합당한 준비를 했다는 증표였던 것이다. 뒤늦게 기름을 가지고 온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그것이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신부로서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여인들은 언제부터 이 기름을 준비한 것인가? 그것은 '처음부터'다. 그들이 앞으로 자신이 신부가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부터다. 왜냐하면 2절 말씀을 보니,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된 것이 나중에 신랑을 만날 때에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음을 헬라어 동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슬기로운 처녀는 처음부터 신랑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지혜로운 이들로 있어왔기 때문이요(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구문), 미련한 다섯 처녀도 역시 처음부터 신랑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미련한 이들로 있어왔기 때문이다(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구문). 그 근거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그릇에다가 기름을 준비했기 때문이요,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그것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왜 슬기로운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슬기로운 처녀는 어떻게 되어서 처음부터 그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을 장차 영접하기 위해서만('휘판데시스') 살았던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만남('아판데시스')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부는 처음부터 장차 신랑이 자신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하면 신랑이 자신을 아내로 맞이해 줄 것인지를 생각하며 준비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신랑이 자기를 아내로 맞이해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만약 그날 그들이 신랑을 만났는데,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나는 당신을 모르겠소. 그래서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소"라고 말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기다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지런히 신랑과의 만남을 위해 모든 나날을 준비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그들이 가져간 '기름'은 그저 단순한 기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헌신과 수고와 땀과 노력의 결정체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이 가지고 간 기름의 그릇이 '기름병'이었다고 나온다. 그 안에 기름을 채워서 가져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에서 혼신의 노력으로 댓가를 치러 신랑을 맞을 준비하였던 것이 한 방울씩 한 방울씩 기름이 되어 그 기름병에 채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처녀들이 신랑을 마중 나갈 때에 그들의 허리에서는 찰랑찰랑하면서 기름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 기름병에 담겨진 것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일생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럼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들은 그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 때로는 서슬퍼런 핍박을 견디어내야 했을 것이고, 노동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빨리 일어나서 일해야 했으며, 남들보다 더 늦게까지 일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장차 신랑을 마주 대할 만남의 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것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처음 믿었을 때에 받은 것을 그냥 가진 채 그냥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주님과의 맞선에서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지에 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8. 열 처녀의 비유가 들려주는 기름의 4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하여, 열 처녀의 비유가 들려주는 기름의 4가지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째는 그것은 절대 남에게 나눠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준비한 것은 자기만이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꺼져가는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라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등불'은 계4:5에 의하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 곧 '성령'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만나는 그날까지 성령께서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수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기름을 미련한 다섯 처녀에 나눠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미련한 처녀들이 달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고 하였다. 자기들도 댓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신이 죽기 전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신랑은 지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졸았고 잠들었다. 모두가 지쳐서 그만 잠든 것이다. 여기서 '잠들었다'는 말은 요11:11~13이나 살전4:13~16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열 처녀들은 모두 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에 큰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호령'도 아마 천사장의 호령이리라고 본다(살전4:16). 그러자 그들이 깨어났다. 그들이 부활한 것이다(살전4:16, 고전15:12~18). 그런데 부활한 후에 나가서 준비해온 기름은 그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님께서 그것을 인정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댓가를 치르지 않은 분들은 죽은 후에라도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 치른 댓가를 통해서 절대 혼인잔치에 참여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댓가를 치러서 우리의 것을 장만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 우리가 이땅에 살고 있을 때 뿐이다. 

 

9. 슬기로운 여인들이 준비했던 기름의 최종적인 쓰임은 어디에서일까?

  헬라어원문을 보면, 슬기로운 여인들이 준비했던 기름병의 숫자가 각각 다르다. 어떤 여인은 한 개의 기름병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여인은 두 개의 기름병이나 다섯 개의 기름병을 준비했을 수도 있다. 아니 어떤 여인은 한 개의 기름병 안에 기름을 다 채우지 못해 이제 맨 밑바닦에 채울 만큼의 기름만 가지고 있었던 여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맞이하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며 준비했던 그 여인들을 다 신부로 맞이해주었다. 사실 이 비유에 나오는 '신랑'은 전지전능한 분이다. 왜냐하면 신랑이 곧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미련한 다섯처녀에게 "나는 처음부터 너희들이 나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기름병에 담긴 기름이 어떻게 해서 채워졌는지를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 어떤 기름은 핍박과 고난을 참으면서 준비했던 한 방울의 기름이라는 것을 그분은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것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신랑을 만날 그날을 위해 수고한 땀방울의 결실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날 기름병의 크기와 숫자와 그리고 양에 따라 신부들에게 장차 하늘나라에서 받을 복들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면류관으로 주실 것이고, 아니면 저러한 면류관으로 주실 것이다. 그리고 면류관에 박힐 보석도 이러한 것으로 주시기도 하고, 저러한 것으로 주시기도 하실 것이다. 기름의 종류와 양에 따라서 말이다. 그리고 그 준비한 기름의 크기에 따라 보좌 자리도, 천국 집도 각기 마련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신분도 정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기름은 처녀들의 일생의 수고와 사랑과 눈물과 땀이 담겨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하늘나라를 위해 그 기름을 준비했던 것이다. "오, 주여 나도 지금부터라도 그 기름을 준비하게 하소서!"

 

10. 나오며

  열 처녀의 비유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난다. "그랬었구나. 그 여인들이 그렇게 해서 기름을 준비하였고 그것을 허리에 차고 마중 나갔었구나"하고 생각하면 그 기름 한 방울 한 방울의 의미가 다시 한 번 되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실천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러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그러한 사실에 관심도 없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자신은 신랑을 마중 나갈 수 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그날 그 시에 어떻게 신랑을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등'으로 상징되는 '성령'을 받았고(계4:5), 처음에는 그것으로 불도 사를 수 있었기에 그것이 있으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은 지체되었다. 오늘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믿는 순간에 죽지 않는다.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살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등불이 점차로 희미해져간다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미처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믿은 것으로 혼인잔치에 그냥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혼인잔치에 못 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충분조건으로 그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면 오늘 이 시간부터라도 그렇게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후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이라 할지라도 하루치의 품삯을 주었던 그 포도원 주인(마20:1~16)이신 우리 주 예수님,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기억하고 오늘부터라도 신부단장을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2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15) 미련한 다섯 처녀가 준비하지 못했던 기름은 대체 무엇일까?(마25:1~13)_2021-09-02(목)

https://youtu.be/bMkg-8LK2zw  [혹은 https://tv.naver.com/v/22221147  ]

 

1. 열 처녀의 비유는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들려주신 말씀인가?

  열 처녀의 비유는 예수께서 장차 성전 건물들이 전부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언제 그러한 일이 있겠으며, 주의 오심(파루시아)와 세상 끝(종결)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가를 묻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 있는 말씀 중에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성전이 무너질 것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또한 종말의 때에는 어떤 징조들이 있을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주의 오심과 종말을 대하는 성도들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과 충성하고 있어야 할 것과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할 것을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첫번째 비유가 열 처녀의 비유인 것이다. 

 

2. 열 처녀의 비유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는 상식들 중에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열 처녀의 비유'라고 하면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모르는 분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설교에서도 많이 등장했었다. 하지만 우리 나라가 어느 정도 잘 살게 되면서부터 이러한 종류의 설교는 들어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열 처녀의 비유는 매우 인상적이어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한 번만이라도 들었다고 하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비유다.  그런데 이때까지 이 비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이 있다. 적어 3가지 이상이 있다. 그것은 첫째, 처녀가 들어가려고 헸던 곳이 과연 신부의 집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인가 하는 것이다. 셋째, 기름이 과연 성령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 추가할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남겨진 문 밖이 과연 어디냐고 하는 것이다. 

 

3. 신랑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들어가지 못한 장소는 과연 신부집인가?

  그동안에는 신랑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곳은 신부집이라고 생각해왔다. 대충 이런 것이다. 신부가 자신의 친구들인 들러리들을 시켜 마중 나가게 했으나 신랑이 더디 왔기 때문에 들러리 처녀들은 졸며 자기도 하였는데, 갑자가 신랑이 왔다면서 신랑을 맞으로 나오라는 소리와 더불어 이내 신랑이 도착하였고 그래서 들러리들 중에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을 단장할 수 있어서 신랑과 함께 신부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왜냐하면 신랑이 등장한 장소는 바깥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좀 늦게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신랑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신부를 얻기 위하여 지체하신 것이다(마25:5,19, 24:48). 그러므로 5절을 원문으로 보면, "그런데 신랑이 지체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는 더 많은 처녀를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더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럼, 신랑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 집(성)의 주인은 왜 신랑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만약 이 집(성)의 주인이 신부였다면 그 집에 들어오게 하든지 못 들어오게 하든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신부이거나 그 집의 아버지였을 것이이다. 신랑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문을 열어주거나 닫을 권한이 없는 것이다. 이때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은 것은 그 집이 자기 집이니까 그런 것이다. 그리고 신랑은 그 집에서 나와 밖으로 나와서 신부를 데리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흔히들 우리가 예수님의 집을 가리켜 '천국'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새 예루살렘 성"인 것이다. 

 

4.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들인가 예비 신부들인가?

  두번째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랑을 기다리다 잠들었던 여인들기 과연 신부의 들러리였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 증거는무엇인가? 첫째로, 이 여인들은 들러리로 나간 것이 아니라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부의 결혼을 축하기 위해서 나갔던 들러리가 아니라 직접 성 안으로 들어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이 성 안에 들어가려 하는 목적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고 함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기자신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처녀들은 예비 신부들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5. 처녀들이 들고 있었던 '등(램프)'과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열 명의 처녀들은 그들이 미련하든지 슬기롭든지 간에 처음에는 다 등불과 기름을 같이 가지고 신랑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랑이 성 밖으로 나오는 것이 지체됨으로 인하여 그녀들이 가진 기름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졸며 잤다. 그리고 갑자기 신랑이 나온다는 소리가 났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등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등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해석은 등(램프)이 '여호와의 일곱 영'이라는 것이다(계4:5). 그러니까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다르게 '말씀'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는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라고 했기 때문이다(시119:105). 그러나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는 등은 이 땅에 교회 위에 있는 등대이신 성령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성 밖으로 나올 때까지 활활 타오르게 하는데 필히 있어야 했던 '기름'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자신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막상 주님이 오시는 그 싯점에 없을 수 있는 있는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했을 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자기들의 등이 꺼져가는 보고는 슬기로운 처녀에게 그들이 가진 기름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랑으로 오시는 날까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날 버림받을할 줄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슬기로운 처녀들이 여분의 기름을 장만하기 위해 어디론가 갔지만 그때에 그만 혼인잔치의 문을 잠기고 말았다. 그녀들이 과연 기름을 마련했는지에 관하여는 성경이 말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을 때에 신랑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자신들은 응당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준비하지 못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기름이다. 이제 등잔에 사용되는 기름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내일 계속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2021년 09월 02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25)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이 보여준 교회의 정의와 건축재료와 사명(1)(창28:10~22)_2021-06-18(금)

https://youtu.be/4WkcIUjpKWM  [혹은 https://tv.naver.com/v/20895446  ]

 

1.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의하면 야곱의 삶은 무엇의 예표인가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의 성경해석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에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삶은 성령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2.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사닥다리 꿈과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얼핏 보기에 창28장의 꿈이란 정처없이 길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찾아가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지켜 주실 것이며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해주시자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창28장의 야곱의 이야기는 성령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세우는지를 말해주는 하나의 완전한 그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닥다리 환상과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한 것은 신약시대이후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는 일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마16:18, 딤전3:16). 

 

3. 창28장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창28장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장차 탄생할 교회가 어떤 것이며 또한 교회의 건축재료는 어떤 것이 사용될 것이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로, 창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말을 통해서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교회와 비교해볼 때 창28장은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어떤 씨앗이 등장하고 있는 것인요? 그것은 총 3가지입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17절). 왜냐햐면 야곱이 꿈을 꾸었을 때에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혹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사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집을 누구의 집이라고 말하려 했을 때에 그곳에 그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라고 불리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람 냄새만 난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친목단체요, 종교 사교단체이며, 취미생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교회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그곳의 주인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그 모임의 주인이 될 때에 그곳을 비로소 "교회"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늘의 문"이라는 것입니다(17절). 야곱은 사닥다리 환상을 통하여 자기가 잠자고 있는 바로 그곳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로 들어가게 해주는 연결통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끝에는 여호와께서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시며, 유일한 길이 되시는 사닥다리(요1:51) 곧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어떤 단체나 장소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속한 사람을 전부 하늘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그 사람을 천국에 데려다주지 못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한 영혼을 천국문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12절). 왜냐하면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에는 그때도 부지런히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창28:12). 그럼, 이 천사들은 무엇하는 천사들입니까? 이 천사들은 보고천사들과 수호천사들 이며 그리고 전투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지금 성도들의 기도에 따라 움직이는 천사들로서, 이 세상의 임금이자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과의 싸우고 있는 우리 성도들을 돕기 위해 이 땅에 파송되고 있는 천사들이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행한 일을 보고하는 천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최초로 교회라는 단어를 언급하실 때에, 참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라면 그 교회는 반드시 "음부의 문들을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교회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전사들로 세워주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되려면 그 교회가 사탄마귀와 귀신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에 결국 실패하게 되면 그 교회는 음부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창28장의 야곱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건축재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나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재료를 통하여 세워지는 것인가요?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돌이요, 둘째는 기름이며, 셋째는 하늘의 이상입니다. 첫째로 교회의 건축재료는 야곱이 베고 잠자던 바로 그 "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18절). 야곱은 그날 자신이 가는 길에 하나님이 계속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가 베고 잠자던 그 돌을 가져다가 기름을 붓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 장차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바로 "반석(페트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그러므로 훗날 베드로가 편지를 쓸 때에도 그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 잊어버리지 않고서, 유대인들에게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었던 예수께서 결국 교회를 건축하는 모통이 돌이 되셨다고 말하면서 그분이야말로 "보배로운 산(살아있는) 돌"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벧전2:4). 둘째, 교회의 건축재료는 "기름"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반드시 성령이 강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께서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지만 그때 베드로를 교회라고 말씀하시는 않으셨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베드로와 함께 한 무리들 위에 내려오실 때부터 그들을 "교회"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름"은 구약시대에 "성령"을 예표하는 것이므로(출30:23~25, 행10:38, 요일2:27), 교회의 건축재료로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기름같은 성령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셋째, 교회의 건축재료는 "하늘의 이상"으로서,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날 꿈을 통하여, 하늘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죄인이 사닥다리인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요14:6, 행4:12). 왜냐하면 이같은 하늘의 이상을 본 자만이 결국 교회가 되고, 교회의 성도가 되어야 음부의 문들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럼 내가 속해있는 교회는 과연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부분에서 충만한 것인가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건축자료가 무엇인지에 대한씨앗들을 우리는 창세기 28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야기가 성령하나님의 역사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천국에 못 데려다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교회"라는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귀신들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으면서도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들이 이러한 개념들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고 또한 가르치지 않으면서 자신을 교회라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 교회는 어느 측면에서 교회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서 그것을 보완할 수 있도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부의 권세를 못 이기는 교회가 되고, 그러면 교회는 사람들을 천국문에 데려다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021년 06월 18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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