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 세대에 가장 늦게 복음을 받았다고 얕볼 수가 있을까? 한국교회는 가장 늦게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유사 이래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었고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이 되었다. 그러니 오늘날의 영적인 세계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영적인 주도권을 한국교회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이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촛대를 어떻게 하시겠는가? 여기,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 사명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한다.

2022-02-06(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우리가 이 마지막 시대에 태어나 구원받은 이유는 무엇인가?(마20:13~1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Chizsm13TQ [혹은 https://tv.naver.com/v/24990769 ]

 

1. 들어가며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경륜상 어느 시대쯤 되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란 이미 시작되었다(요일2:18). 그런데 정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일보직전의 순간은 대체 언제일까? 주님께서는 어느날 제자들에게 당신이 재림할 때의 징조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은 무화과나무에서 싹이 날 때면 인자가 문 앞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24:32~33). 여기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이것을 대부분 '이스라엘'로 본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날이 1948년 5월 14일이었으니, 74년이나 지난 셈이다. 그러니 그 때가 가까웠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복음이 들어온지 약 130년이 지났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영성이 예사롭지 않다. 몇 십년전만해도 우리는 미국의 영성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24장로들이 누구며, 144,000명의 자리에 누가 앉아있는지를 보고올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도 미쳐 간과하고 말았던 회개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천국에 입성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주어진 한국교회의 과제는 무엇이며, 주어진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이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 들려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왜 누구에게 들려주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천국비유를 말씀해주셨다. 그것들 중에서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천국비유가 있다. 그것은 마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다(마20:1~16). 이 비유는 예수께서 왜 누구에게 들려주신 비유인가? 이 비유의 시작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9장에서 말씀하고 있던 어떤 이야기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보좌에 앉아 왕노릇하실 때에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도 12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 외에도 자기의 집이나 형제자매, 부모나 자식, 전토를 버린 자들도 역시 100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처음의 사람들이 맨나중의 사람들로 있을 것이고, 맨 나중의 사람들이 처음의 사람들로 있을 자도 많을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처음의 사람들이 맨나중이 되고, 맨나중의 사람들이 처음이 되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주셨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는 것이다. 

 

3.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포도 수확철에 어느 포도원 주인에게 고용된 품꾼들이 일을 마치고 품삯을 받는 것에 대한 비유다. 그런데 품삯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른 아침(오전6시)에 고용되어 하루 종일 일을 했던 품꾼(일꾼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포도원 주인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합의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오후6시가 되어 일을 마쳤는데, 그들에게도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그가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늦게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했던 다른 네 부류의 품꾼들(오전9시, 12시, 오후3시, 오후5시)에게도 주인이 동일한 한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른 아침에 온 자들의 한 품꾼이 따지며 말했다. "맨나중의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했는데도 어찌 당신은 그들을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뎠던 우리와 같게 하셨나이까?(마20:12)" 그렇다면, 이 품꾼의 주장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주인은 정말 불공평한 사람인가? 그런데 이 비유의 끝에 결론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은 이 품꾼의 불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맨나중(마지막)의 사람들이 처음의 사람들이 될 것이며 처음의 사람들이 맨나중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마20:16).

 

4. 주인은 맨나중에 들어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했던 품꾼들까지 왜 다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인가?

  우리는 이 포도원의 주인이 다른 주인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자기의 포도원에 들어와 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오전6시)에 고용한 사람에게는 하루치의 일당 곧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들여보냈었다. 그리고 오전9시나 12시, 오후3시에 들여보낸 자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고, 다만 상당하게(정당하게, 합당하게, 의롭게) 준다고만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 한 시간밖에 일할 시간이 없었을 때에 고용된 자들에게는 그냥 자기의 포도원에 들어가거 일하라고만 말했었다. 또 하나는 오후6시가 되어 품삯을 줄 때에 먼저 들어온 자부터 품삯을 준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자(오후5시에 들어온 자)부터 품삯을 주게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일반적으로 먼저 온 자부터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친다면, 이른 아침에 와서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아간 자들은 주인에게 전혀 불평하지 않고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혹시 주인이 자신들이 시간때우기식으로 일하였던 부분을 놓치지 않고 말하면서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그들이 어떻게 일했는지에 관하여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정확히 한 데나리온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떠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품삯을 거꾸로 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것은 주인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것임을 짐직할 수 있다. 그럼 왜 주인은 청지기에게 맨나중에 온 자들부터 품삯을 주게 했던 것일까?

 

5. 주인은 아침 일찍 들어온 품꾼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인가?

  주인이 분명 맨나중에 온 자들로부터 품삯을 주되 처음 온 자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은 의도적이었다. 그것은 처음 온 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의 마음과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첫째, 처음 온 자들은 자기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자들이었던 것이지 자기에게 한 데나리온만을 준다고 불평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이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지 그들의 노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아침에 시장에 나가 그들을 고용했을 때에 주인은 그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한 상태에서 그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들이 비록 적당히 일하고 때로는 시간 때우기식으로 일하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일을 대충대충하고 있던 대로 그들에게 품삯을 줄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이른 아침에 온 자들을 둘로 나누어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일한 사람에게는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지만, 대충대충 농땡이하면서 일한 사람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음날 그 주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적당히 때우는 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당신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그들에게도 다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자기들이 신실하지 않았음에도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받은 돈을 내동댕이 쳐버리고는(14절) 주인에게 따지듯 말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맨나중에 들어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칭찬하고 높였어야 했다. 왜냐하면 주인은 매우 긍휼이 풍성한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한 것이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맨나중에 선택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가정해본다면 응당 그렇게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6.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깨우쳐주고 싶은 것이었는가?

  이 비유는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3가지를 말씀하시려고 들려주신 비유다.

  첫째는 주인되신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심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만약 이 주인이 긍휼이 많은 주인이 아니었다면 주인은 결단코 나중에 들어온 자들에게 하루 일당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긍휼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하려고 하는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인의 눈에는 모두가 다 주인이 고용해주지 않으면 저녁에 빈털털이로 집에 돌아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포도원을 위해 필요한 일꾼으로 먼저 뽑혔느냐 아니면 아니면 나중에 뽑혔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과 6절에 나와 있다. 여기에 보면 나중에 들어온 일꾼들이 처음 뽑힌 자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뽑힌 자들은 처음 뽑힌 자들보다 힘이 없거나 어딘가 보기에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원문에 보면 나온다. 여기에 '다른'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때 '다른'은 '전혀 종류가 다른'이라는 단어('헤테로스')가 쓰이지 않았고,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단어('알로스')가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날 이른 아침 먼저 고용된 사람은 그가 잘나고 힘있고 건강해보여서 먼저 뽑힌 것이 아니었다. 단지 주인에게 먼저 뽑힌 것 뿐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날 거기 시장 1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치자, 주인이 필요로 하는 인원은 총 10명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뽑힌 그 10명은 단지 그 10명 안에 우선 들어갔던 것 뿐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주인의 일을 맡아 수고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장 먼저 선택을 받았든지 아니면 맨 나중에 받았든지, 주인이 자신을 불러서 일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먼저 부름받았으니 자신은 특별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매우 공평하신 분이어서 오후 늦게까지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서성이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이른 아침에 뽑힌 자가 거꾸로 그날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해 오후5시까지 거기에 서성이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오후5시에 온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처음 왔던 자들이 맨나중에 들어와서 일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은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했는지를 깨닫고, 더욱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자신을 선택해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그나마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더욱 충성하라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에게 왜 주인은 하루의 1/12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은 정말 주인이 자신들을 불러주신 것만해도 감사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도 그날 아침부터 뽑혀서 일을 하게 되었다면 그는 아마도 쌀 한 포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주인이 일하게 해 주어서 집에 돌아갈 때에는 쌀 한 됫박이라고 들고갈 수 있게 되었기에 그들도 역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 번에는 주인에게 이른 아침부터 선택받을 수 있도록 그날에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인이 그날 자기를 늦게나마 선택해주신 것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비록 이른 아침부터 선택을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만나게 되면 열심히 일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자신을 불러준 주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이 그들의 열심을 보고는 그들에게 하루 품삯의 1/12의 데나리온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열심을 보고서 처음 온 자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을 것이다. 

 

7. 이 마지막 시대에 주어진 한국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이 시대에 맨 마지막으로 불러 쓰시는 주님의 사명자로서, 복음사역자의 마지막 주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많은 은혜를 한국교회에서 부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사실 1~2대만 위로 올라가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른채,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던 저주받은 백성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내주셨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그렇게 해서 받은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렇게 찾고 싶었던 신(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참으로 열심이었다. 다른 민족은 전혀 하지 않는 일들을 감당해왔다.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회를 가졌고,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날짜를 정하여 기도하는 백성이 되었다. 그리고 주일에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예배드리는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늦게 믿었어도 전세계에서 선교사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오후5시에 부름받은 한국백성을 보시고 매우 기특해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영적인 최고의 거성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그리고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산출해내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교회의 사명은 매우 막중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영적인 비밀과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다가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 갔던 품꾼들처럼 뜨뜻미지근하게 사명을 감당하면 되겠는가? 우리 민족이 늦게 부름받은 만큼 세상 어떤 교회도 감당하지 못했던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늦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염 없는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우리는 진실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듣고서도 게을러 적당히 안주하려는 성도가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처음 주님이 선택했던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께서 버리셨는데, 나중에 잠깐 일하게 하려고 부른 이방민족이 만약 게으르거나 적당하게 일을 하면 얼마나 더 토해버리실 것인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보자.  

 

8. 나오며

  포도원 품꾼(일꾼)의 비유가 이토록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주는 비유였는지를 이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무슨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처럼 착각하게 된다면, 그는 이 비유를 통해서 겸손해져야 한다. 먼저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리고 신앙을 가진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조건 그에게 더 좋은 지위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늦게 믿은 자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는 은혜를 주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주님의 눈에는 처음 믿는 자나 나중에 늦게 믿은 자나 그들의 충성도를 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이었지만 적당히 한 시간만 때우고 갔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주인은 긍휼이 풍성하셔서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선택받은 것이나 나중에 선택받은 것이나 그것은 주인의 소관에 따른 것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불렀다고 해서 응당 큰 복을 받게 되고, 나중에 불렀다고 작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 어느 때에 부르셨든지 관계 없이 우리는 주인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불러 쓰신 것에 감사하면서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기뻐하시고 예상 외로 놀라운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성도가 죽는 날에는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의 문까지 직접 마중을 나오시고, 또한 영광의 혼인잔치에 데리고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늦게 믿었다고 해서 무조건 특별 혜택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늦게 믿을수록 더욱더 분발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한국교회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2년 02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오늘날의 구원론의 잘못은 무엇인가?(마20:1~16)
https://youtu.be/Bgsu5c-IHQA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품군의 비유는 무엇이며(마20:1~16), 이것과 오늘날의 구원론은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인가요?

2. 포도원품꾼의 비유는 천국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포도원품꾼의 비유는 포도원주인이 포도 수확철이 다가오자,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 포도수확에 필요한 일꾼들을 뽑아서 포도원에 들여보낸 뒤, 해질 무렵이 되자 청지기를 시켜 먼저 온 자부터 품삯을 주게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좀 특별한 것은 주인이 일꾼들을 뽑아서 포도원에 들여보낸 시각들입니다. 이른 아침(오전6시), 제3시(오전9시), 제6시(정오), 제9시(오후3시), 제11시(오후5시) 등의 제 각각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청지기를 시켜 하루 일당을 주게 했는데, 나중에 들어온 자부터 불러다가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제11시(오후5시)에 들어온 자에게도 한 데나리온(하루의 품삯)을 주게 합니다. 그러자 먼저 온 자들(오전6시, 오전9시, 정오, 오후3시)이 자기들은 더 받을 줄 알았는데 자기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고불평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에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론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대표적인 예로서 이 비유를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보편적으로 어떻게 해석되고 있습니까?


3. 포도원품군의 비유는 구원론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서 사용되는데, 그 중심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구원은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다. 둘째,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려 있다. 셋째,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진다. 넷째, 구원의 판단의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전부다 맞는 해석 같아 보이지만 군데군데마다 주님의 구원관과는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잘못된 해석들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이 비유를 위의 4가지 관점으로 보게 된다면, 그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구원을 정하는구나.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봤자 결국 아무 소용이 없겠구나. 그리고 오후5시에 들어온 자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니, 우리의 구원은 나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로구나. 그러니 적당히 신앙생활하자. 그래도 믿음만 굳건히 지킨다면 구원받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야. 무엇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나와 일하여 쌩고생을 해. 그런 자들만 바보되는 것 아니야? 이른 아침부터 일해봤자 어차피 한 데나리온 받을 건데 말이지. 적당히 세상을 즐기다가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되지 않겠어? 그래도 다 천국갈 수는 있잖아?"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된 해석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과연 올바른 구원관입니까?


4. 포도원품군의 비유를 잘못 해석하면 위와 같은 잘못된 구원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러한 비유가 결코 아닙니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공평하게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후5시까지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뽑아서 포도원에 들여 보냈습니다. 만약 이 주인은 얼마나 포도원에서 일을 많이 시켜 부려먹느냐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주인은 오늘도 일감을 구하지 못해 장터에 서성이고 있을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늦게 온 자라도는 일하는 태도와 모습에 따라 품삯을 주며, 처음 들어온 자에게는 약속에 따라 품삯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인이 품삯을 줄 때에는 그들이 일한 분량보다도 그들의 태도에 따라 품삯을 죽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이른 아침부터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었느냐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임으로 "열심히 일해봤자 다 소용없어. 어차피 늦게 들어온 자들처럼 나도 한 데나리온만 받을 걸"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싶어하는 주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늦게 부름받았어도 일하는 태도와 모습에 따라 결국 구원받게 해 주신다는 데에 초첨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신학자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품삯에 대한 논리가 들어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체가 선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결정에 대해 우리가 왈가불가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그분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것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해석함으로, 하나님은 공평하지도 않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폭군같아 보이는 분이지만, 그분은 원래가 선한 분이니까 그분의 결정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입니까?


5. 일반적으로 성도들과 신학자들의 보편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려다가 빚어낸 참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하려다가 그만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한 분이라고 만들어버릴 공산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문제 있어서 우리 인간은 그 어떤 개입의 여지도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할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공히 구원의 기회를 주어, 그들의 태도와 모습을 보고서 그들의 구원을 결정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왜 청기기더러 오후5시에 들어와 1시간만 일했던 품군에게 하루치의 품삯(1데나리온)을 주게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아무 쓸모없어 장터에 버려지다시피 한 자신을 그나마 어떤 선한 포도원주인이 품군으로 불러주어서 포도원에서 일하게 했기에,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한 나머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을 다 동원해서 포도원에서 일했을 오후5시에 들어온 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오후5시에 불러가시면 우리가 일할 시간도 거의 없는데, 그럼에도 당신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시켜만 주십시오. 이 몸을 불살라서라도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더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던 이들은 이미 주인과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약속하고 들어왔으니, 오후6시까지만 일하면 한 데나리온 품삯을 받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시간 떼우기 식으로 일했을 사람들도 있어보입니다. 그러니 나중 온 자의 충성됨의 보고를 들은 주인은 청지기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온 자는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적당히 1시간만 농땡이 피운다도 해도 누구나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게 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 아닙니다. 주인은 1시간만 일한다고 해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공평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순수한 의도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비록 덜 떨어지고 무능하고 연약한 자라도 구원의 기회는 누구나 주어져야 한다는 주인의 결정에 따라 누구에게나 구원의 기회를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비유입니다. 혹시 이른 아침에 들어왔습니까? 그럼 먼저 부름받았으니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럼, 선하신 주인은 한 데나리온만 주실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혹시 늦게 부름을 받았습니까? 충성되어 주인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럼, 늦게 들어왔어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상급도 많이 주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2018년 10월 26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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