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21) 지극히 작은 자 및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신가(마25:34~46)_2021-09-09(목)

https://youtu.be/yZvL3FQan0g  [혹은  https://tv.naver.com/v/22365583 ]

 

1. 성경(헬라어 원문)이 말씀하고 있는 양과 염소 비유의 핵심 사항은 무엇인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첫째, 이 비유가 성도들의 심판에 관한 비유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심판을 받은 후 새 예루살렘 성에 준비된 왕국을 상속 받든지 아니면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에 들어가든지 하는 심판이다(고후5:10, 마16:27, 벧전4:17~18). 이 일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주님께서 공중으로 성도들을 불러 올리신 직후에 일어날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지상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이 있을 것이고 이어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이다(계20:11~15). 고로 이 심판은 결코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백보좌 심판의 비유가 아니다. 그 이유는 백보좌 심판에서는 상을 받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심판 받는 염소도 왕 앞에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마25:44).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염소들도 직접적으로 행하지 않았던 것이지 생색내는 일을 해 왔던 자들이다. 둘째, 이 비유는 성도들 중에서 영원한 불 곧 불 못에 던져지는 자도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셋째, 그런데 그날 심판의 순간까지 자기가 염소였는지를 잘 모르고 있고, 자신의 행위(외식이겠지만)를 몰라주는 왕에게 항의를 할 정도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그날 그 시각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이지 믿을 때에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언젠가 죽어보면 알 것이다. 

 

2. 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인가? 둘 다 성도들인데, 양들은 자기들이 행했던 것을 자랑하거나 생색내는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들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그날 심판대에 불려 가는 그날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의인들'이라고 불렀다(마25:37,46). 그런데 염소는 달랐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드러나거나 높여지는 일에는 기꺼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 곧 보잘것 없는 자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들 생각에 멋있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마23:29-30)" 그렇다. 이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 때에 자신의 행동이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군지 헬라어 원문을 보니, 그들은 다 자란 '염소'가 아니라 '염소 새끼'(에리포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내가 혹시 염소는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설마 내가 염소이겠어.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래도 교회에서 신앙생활한 지 벌써 수십 년이 되었고, 내가 장로와 집사인데, 결코 그럴 리가 없지'라면서 넘겨 버린 일이 있던 자들이다. 성경은 심판의 그 순간까지 자신이 염소였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3. 양과 염소의 비유는 행위 구원을 알려 주는 심판의 비유인가?

  또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가지고 행위 심판 구원론으로 몰고 가는 이들도 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 곧 주리고 목마를 때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혀 주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와보았다는 말이 꼭 그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 받았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은 그 판단이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로 첫째,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 한편 강도(아마도 오른편 강도였을 것)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눅23:43). 둘째, 여기에 나오는 그들의 행위는 자기들이 구원 받기 위하여 그러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믿음에 따라 그들의 삶 속에서 맺혀지고 있는 일종의 열매들이었기 때문이다(마7:20). 한마디로 그들의 그러한 행동들은 구원 받기 위한 행위들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믿음에 따른 열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섰지만 결국 마지막 심판 때에는 열매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고 늘 자신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4. 성도들이 돌보아 주어야 할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대체 누구인가?

  인자의 심판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이야말로 창세로부터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을 자들이라고 칭찬해 주신다(마25:34). 그렇다면 그들이 돌보아 주었다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보면, 그들은 주린 자와 목마른 자이며, 나그네다. 그리고 그들은 헐벗은 자요, 병든 자이자 옥에 갇힌 자이다. 그럼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마태복음 24~25장에 나오는 문맥에 따라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따라 해석해 보면, 이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2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구약적인 개념에서 정의한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신약적인 개념에서 정의한 것이 하나 있다. 먼저, 구약적인 견해에서 정의한다면, '지극히 작은 자'란 그가 신자와 불신자를 떠나서, 객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소외되고 힘없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신14:29). 가난하고 소외된 자, 감옥에 갇혀 있는 자 등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에서도 객(나그네)과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꼭 돌보아 주어야 할 약한 자들로서 여호와께서도 이들을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신약적인 의미에서 주님의 형제들로서 '지극히 작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님의 형제들이 될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얼핏 보기에는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만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신14:29). 특히 어려움과 고통받는 자들이 그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약적인 의미에서 주님의 형제들은 영적으로 보아서 예수님의 피를 나눈 자들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들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쓸모없는) 자"라는 대상은 그때 왕과 레벨이 같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날 심판하고 계신 이가 왕이시고 그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 옆에 있는 그분의 형제들은 곧 왕의 형제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곧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그분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로서, 천국에 있는 땅 위에서 왕 노릇하고 있던 고귀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이 누군지에 대해 무조건 '가난한 불신자들, 소외된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해석하면 아니 된다. 창조적인 관점에서 넓게 생각한다면 이들도 포함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 중, 사람들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럼, 이들의 진짜 실체가 누구인지는 내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021년 09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19)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과 차이점은(마25:3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BUpMsvKnu8  [혹은 https://tv.naver.com/v/22308344  ]

 

1.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에는 3가지의 천국 입성 및 심판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열 처녀의 비유이며(1~13절), 두 번째 비유는 달란트 비유이고(14~30절),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31~46절). 

 

2.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의 3가지 비유는 각각 독특한 점도 있지만 사실 이 세 가지 비유는 같은 종류의 다른 비유들이다. 그럼 무엇이 같은가? 첫째, 이 세 가지 비유는 마지막 날에 있을 성도들의 상급과 심판에 관한 비유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급보다는 심판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듯 보인다. 왜냐하면 종말과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들을 언급하는 본문들 가운데 모두 비유의 끝은 각성과 경고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비유가 아마겟돈전쟁(곡과 마곡의 전쟁) 이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의 비유라고 한다면 상(급)에 관한 언급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하여 불못에 던지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상급도 있고 심판도 있다. 성도들에 관한 상급과 심판에 관한 비유인 것이다. 둘째, 이 세가지 비유는 성도들이 심판을 받게 되면 딱 둘로 갈라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문 밖(새 예루살렘 성의 진주문 밖)에 영원히 버려질 자와 성 안에 들어가 혼인잔치를 하는 신부들로 갈라진다.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먼저 주인의 즐거움(혼인잔치)으로 들어간 후에 주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맡게 되는(므나의 비유와 합치면 여러 고을들 위에 왕노릇하는 것) 자가 있는가 하면,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 자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 따르면,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예비된 채 있는 왕국을 상속받을 자와 저주를 받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로 갈라진다. 셋째, 재림의 때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심판주로 오신다. 사실 초림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형체를 입고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한 없이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은 한없이 높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만민을 공의대로 심판하실 심판주이기 때문이다. 

 

3. 주께서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성도들을 심판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많은 성도들은 다시 오실 주님은 초림의 예수님과 같아서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왠만한 잘못은 다 용서하시어 모른 채 넘어가주실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랑의 주님이 아니시다  공의와 심판의 주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셔서 보좌에 앉으시는 분은 우리를 심판하시되, 우리의 믿음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그랬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랬으며,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그러하신다. 모두가 다 그들의 행위들에 따라 성 안과 성 밖의 지역으로 나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가? 그건 아니다. 여기서의 '행위'란 구원얻기 위해 행하는 행위들이 아니다. 믿음을 갖고 있고 회개하는 자라면 당연히 열매로서 나타나는 행위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열매나 믿음에 따른 어떤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날 심판의 때에 성 바깥에 남겨지거나 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거나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을 시작하지만 우리의 노정의 끝나는 날에 받을 심판은 우리의 행위를 따른 심판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날 심판대에 앞에 섰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를 미리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4.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은 진정 사실인가?

  그렇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는 사랑과 용서의 주님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공의와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날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는 우리의 믿음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긴 행위들을 따라 심판하신다. 그런데 그날 그 심판의 장소에서 어떤 사람은 상을 받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모두 다 부정적인 경고의 성격이 매우 강한 비유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날 심판의 때에는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씀들이 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19:27-29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눅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5. 이 비유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비유의 차이점은 심판 후에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최종적인 장소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상 받을 장소도 각각 차이가 있고, 벌을 받을 장소도 각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로, 열 처녀의 경우를 보자. 열 처녀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그녀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것을 말해 주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 밖에 버려진다는 것이다. 둘째로,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경우를 보자. 이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즐거움(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같은 것)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악하고 게으른 종은 더 바깥의 어둠의 장소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셋째로, 얌과 염소의 경우를 보자. 이 비유는 실천적으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던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처소 곧 왕국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염소의 비유는 그 어떤 행위도 나타나지 않았던 자들로서 그래서 버림을 받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떠나가게 되는 자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거주할 장소가 각각 다르다. 그들은 성밖이나 바깥 어두운 곳이나 영원한 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이러한 곳으로 가면 안 된다. 우리는 죽은 후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나아갈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므나의 비유처럼 왕노릇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기업을 차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021년 09월 07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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