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한꺼번에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구원론에 관해 8년간을 줄곧 외치다보니 무엇이 올바른 구원관이라는 것이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믿음과 회개"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를 오늘 말씀에 다 나온다. 그리고 구원론과 맞물려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다보니 그것도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파하고 있는 종말론이 100%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양한 종말론이 정통 교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구원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을 모르면 그날 땅을 치고 후회할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죽는 날에 알게 될 것이다.

 

2021-09-05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구원론과 종말론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차이(마19:23~3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fEC-2RisDCs [혹은 https://tv.naver.com/v/22300111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과연 죽은 다음에 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죽어보니 그곳이 지옥이더라 하면 얼마나 낭패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가? 또한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회개'는 하면 좋은 것이고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가? 사실 구원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또 어떠한가? 구원의 최종완성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의 구원과 맞물려 인간의 최종적인 완성인 종말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데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너무나 다양하다.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시는지, 환난 중간에 오시는지, 환난 후에 오시는지 각 교단과 목회자의 신앙노선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떤 노선을 따라가야 하는가? 혹시 내가 주께서 환난 후에 오신다고 믿고 있었는데 혹시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신다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한 번 쭉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사람이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 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이렇게 들어왔으니 아마 그것이 맞겠지 하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 구원은 과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의 간증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기존 교리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잠시 내려놓으라.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원론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설교하더라도 아마 일 년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구원론과 종말론을 서로 비교해보는 시간이므로, 구원론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과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엇이 진리인지 헷갈릴 때에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앞세우라.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한 그분 자체는 죄가 없는 분이심과 그분에게만이 부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분은 약속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둘째,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을 무효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시작하는 믿음은 사실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으나(한국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을 지켜내는 믿음을 계속 자고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고 치자, 과연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지켜내기 위해 탈레반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0:9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회개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자신이 예수님을 몰라보고는 전능자가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간 사실을 인정하지 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멀리했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으로서의 회개"라고 한다. 이러한 죄의 고백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둘째, 한 번 회심으로서의 죄를 고백했다면 그후부터는 날마다 짓는 자범죄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때 과거에 지었던 죄들과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은 같이 회개한다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조상들의 죄와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죄들 특히 우상숭배의 죄는 출20:5의 말씀에 따라 귀신들이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와 3~4대까지 머물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할 수록 귀신들이 주는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후손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회개의 한 파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 회개했다면 그 뒤부터는 회개했던 죄를 반복해서 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지었던 죄를 끝까지 끊지 못하고 반복해서 짓게 된다면 그는 결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회심할 때에 한 번 회개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온 몸을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요13:10). 

 

3.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믿음('지키는 믿음'이 아니라 처음으로 믿었던 믿음)과 회개('반복적인 회개'가 아니라 '회심으로서의 회개')로 한 번 구원을 얻었으니 그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얻은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우상숭배한다면 그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계21:8). 고로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계3:5).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믿음을 가졌으나 믿음에서 파선하는 자를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찾아보라. 한 번 가졌던 믿음이라도 그것을 버리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보더라도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고의로 다시 죄를 범하고 배도하게 된다면 그에게 회개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있음도 참고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 번 얻은 영원한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4. 믿음에 대한 인내와 반복적인 회개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가?

  이것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자. 처음 우리가 믿었던 믿음과 그리고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통해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면 그는 이제 구원의 노정에 갓 들어선 것이지 그것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를 읽어 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며 그 믿음으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노정이 끝나는 보는 구원관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노정에 이제 첫 발을 내 디딘 자가 나의 구원은 영원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또한 그렇게 가르치면 절대 아니 된다. 우리는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켜내야 구원은 유지되는 것이고,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만이, 죽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새 예루살렘 성의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한 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을 비롯하여 십계명을 어기는 자들은 반드시 불과 유황으로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알라(계21:8). 그래서 이미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겉옷을 계속해서 빨지 않는 자(현재분사형)는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 내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계22:14~15).

 

5. 영적인 측면에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또한 사실 구원이란 영적인 영역에서 볼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덧붙어진(추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믿었다면 그에게는 곧이어 성령께서 들어오실 것이다(요1:12, 계3:20).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 안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롬8:2, 고전15:45).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드디어 '생명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45). 이것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요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우리 안에 또다른 생명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첫째는 영원한(정확히는 '시대의') 생명이요, 둘째는 아버지의 생명이요, 셋째는 부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남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죽는 그날까지 그는 구원받은 채로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죽을 때다. 그가 죽을 때에 그간 믿음을 지키지 못해 주님을 부인하였거나 계속해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죽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과 함께 지옥에 가시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바울은 한사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으며(살전5:19), 또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했다(엡4:30).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고 인치고 있는 시간은 우리의 구속의 날 곧 우리의 육체가 죽고 우리가 부활체를 입는 바로 그날까지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엡4:30).

 

6. 한 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요14:16의 말씀이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보증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그것은 한글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이지, 헬라어 원문에는 그렇게 나와있지 않다고 말이다. 성경에는 '영원토록(영원히)' 혹은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낱말(부사어)가 가끔 나온다. 시간의 영원성을 뜻하는 이 말은 영어에서도 '포에버(forever)'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헬라어로 보면, 그것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에이스 톤 아이오나(eis ton aiwona)'라는 전치사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이스(into)'는 '~안으로'라는 뜻이지만,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와 결합하게 되면, '~까지(till), ~동안(for)'이라는 뜻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 전치사 뒤의 단어가 정관사 '톤(the)'과 명사 '아이온(age, period, generation, world)'이라는 단어다. 그런데 '아이온'은 우리말로 '시대, 세대, 세상'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므로, "에이스 톤 아이오나"는 "그 시대까지" 혹은 "그 시대동안"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이는 우리 안에 들어와셨던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동안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죽는 날에 우리의 믿음이 파산되었거나,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 겉옷(두루마기)이 더렵혀진 채 계속 있다면, 성령께서는 그날 우리를 떠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날 하늘의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은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서 탈락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보았던 끝이 없이 계속되는 '영원토록(영원히)'이라는 말은 정확히는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뜻으로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니오논'이다. 이 말은 영어로는 'for the ages of the ages'라는 뜻으로서 한글로 번역한다면, "그 시대들(세대들)의 시대들(세대들)까지"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온(시대,세대)'는 단수가 아니라 둘 다 복수의 형태다. 즉 이 문구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 그리고 이어지는 그 시대와 그 다음의 시대까지"라는 뜻이다. 고로 이 문구야말로 진짜로 영원토록이라는 뜻이 된다(딤후4:18).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만이 가지는 속성이자(계4:9)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시간(계14:11)이라고 할 수 있다.  

 

7.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종말론은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듣고 있고 믿어왔던 종말론은 과연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환난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고, 자기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못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더 성경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은 자들은 그날에 매우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것이 불보듯 뻔하지만 그것이 그의 구원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이 되면 자기가 믿고 따라왔던 목회자에 대한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지 목회자의 책임으로만 되돌릴 수는 없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디까지 자기가 어떤 목회자와 어떤 교단의 견해를 따라갈 것인지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지 강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종말론을 어느 것을 믿었다고 해서 교회가 왜 당신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느냐면서 그를 구박을 하거나 그를 고문을 하거나 그를 교회에서 추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씀은 다 자기가 섬기는 목사님의 견해를 따라가지만, 종말론의 견해에 있어서는 다른 목사님들의 견해를 따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흔들리거나 허물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말론의 견해가 다 정통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그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로 어느 누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 가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일은 꼭 있을 것이다. 

 

8. 가장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말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요한의 말씀이나 다니엘이나 에스겔 혹은 스가랴서에 나오는 말씀을 우선 적용할 것이 아니라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 1~2장과 21~22장에 나온 말씀을 우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나와 있는 말씀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할 가장 안전한 종말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장'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마24장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마24:29~30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24:29-30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렇다. "그날 환난 후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환난의 날을 겪게 될 것인데, 환난의 날이 너무나 혹독하여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한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날들을 감해주신다(줄여주신다)고 하셨다(마24:22).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로 숫자적인 7년대환난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다 환난을 통과하겠지만 환난의 날을 줄여주신다는 말을 믿고 그 환난의 날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럼, 휴거는 언제 일어나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인류 최후의 전쟁으로서 아마겟돈 전쟁 전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때가 되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불신자들 및 하나님을 거역하는 땅의 왕들을 미혹하여 하늘의 군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때 하늘의 군대의 대장은 재림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군대는 천사들과 이미 구원받아 천국에 있던 성도들들과 그 직전에 휴거받은 성도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쟁이 있기 전에 먼저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가?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7편의 말씀을 보면, '곡식의 추수(성도들의 휴거)'와 '땅의 포도송이의 추수(아마겟돈전쟁)'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러한 순서로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왜냐하면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의 휴거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은 조금 양보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있어도 구원관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은 우리의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구원관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막1:15, 마4:17, 계22:14). 만약 이러한 구원관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구원에서 멀어질 것이고 심지어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계3: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회개로 구원의 여정에 발을 딛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니다(죽어보면 알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딤후4:18, 계22:14~15). 그때까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2:12).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개인적인 구원의 사건 말고, 주님께서 오셔서 온 세상을 끝내시는 그날이 우리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종말의 때가 우리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때에 정신차려야 한다. 그날 주님 앞에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열 처녀처럼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주님 앞에 등불 들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는 사실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가 날 때 나의 영혼이 과연 주님을 영접하러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마다 회개하라.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더럽혀진 옷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겉옷을 걸치고 있는 더러운 성도를 결코 신부로 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바울은 과연 회개를 외쳤을까?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서 회개에 대해 바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현장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그는 어떤 말을 전했던 것일까? 우리에게 남겨진 그의 복음전파의 상황은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여러교회들과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13권) 속에도 남아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자료들에 근거하여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020-09-18(금)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1)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22)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했나?(2)(행20:17~21)
https://youtu.be/cdcq76AI5v4  [혹은 https://tv.naver.com/v/15857874  ]

 

 

1. 들어가며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했는가? 우리는 바울의 이신칭의론에 대해서는 들어봤어도 바울의 회개관에 대해서 잘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행위"와 대응되는 "믿음"이 강조되다보니, 정작 복음의 핵심내용인 믿음과 회개의 2가지 요소 가운데, 회개가 그만큼 소홀히 취급받고 있었기 때문다. 하지만 바울이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는 "오직 믿음"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회개"도 동시에 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과연 구원을 말할 때 오직 믿음만을 말했는지 아니면 동시에 회개의 중요성도 같이 언급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회개생활과 더불어 꼭 알아 두어야 할 "성령의 인도함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사도바울의 회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회개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이 언급했던 회개관은 어떤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2. 바울은 회개관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는가?

  바울이 외쳤던 회개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의 모든 기록을 오늘 전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은 그가 남긴 13권의 서신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복음을 전파한 장소에 함께 있었던 의사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도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현장에서 무엇을 전파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왜 서신서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강조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회개는 덜 강조했는지에 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13개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의 회개관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바울의 회개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 꼭 믿음과 더불어 동시에 회개를 같이 강조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회개를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 여겼으며, 회개없는 구원은 없으며, 믿는 자라도 회개없이는 심판날에 진노를 받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셋째, 그가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삶으로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강조했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 속에는 성령의 책망에 따른 회개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3. 바울의 회개관의 첫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의 첫번째 회개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그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에 대해 전파했으며, 더불어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복음전파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이 1차전도여행과 2차와 3차 그리고 로마전도여행 전에 있었던 복음전파 과정에서 무엇을 외쳤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1차전도여행 중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있을 때에 바울은 믿음과 더불어 회개 2가지를 모두 함께 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행13:23~39). 먼저 바울은 안디옥 사람들에게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던 구주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했다. 왜냐하면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로 오신 분이었으며 그분은 결코 죽을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로 그를 살리시어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힘입어 믿는 모든 자는 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라고 전파했다. 그리고 둘째는 그분이 오기 전에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으며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회개하는 자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전파했던 것이다(행13:24,38)

  둘째, 1차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을 것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전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행14:8~18). 왜냐하면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걷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제사장들이 나와서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숭배하려고 했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들은 그들과 똑같이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진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며, 그분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전파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루스드라에서는 창조주 하나님 자체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2차전도여행 때에도 바울은 믿음과 회개를 동시에 전파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2개의 교회를 살펴볼 것인데, 먼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한 바 있었는데, 그때 그가 전파하는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인 것을 전파했다. 그리고 바울은 그곳에서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전파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 교회에 써 보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 지를 말하니"라고 언급하였기 때문다. 그리고 거의 불신자들로 가득찼던 아덴에 갔을 때에는 아덴 사람들을 향하여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바로 천지만물의 주재이시며, 그분은 결코 손으로 만든 집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행17:24~25a). 그리고 그분이야말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이시라고 했다(행17:25b). 그런데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것을 관대하게 보아주셨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말했다. 또한 천하인간을 심판하실 분으로 정하신 약속된 사람이 있으니 그분이 곧 예수라고 증거하였다(행17:30~31). 여기서도 역시 믿음과 회개를 같이 전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바울은 3차전도여행 때에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가르쳤음을 말했던 것을 알 수 있다(행20:17~21). 바울은 그때에 3년동안이나 눈물로 자신이 에베소 성도들을 훈계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두란노서원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했었노라고 말했다(행20:21). 그렇다. 이것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여전히 믿음과 회개를 동시에 가르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는 왕 앞에서 믿음과 회개를 다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행26:19~23).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때 그는 성난 유대인들에게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하지만 소요를 알아차린 천부장에 의해서 바울은 구출을 받는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는데, 바울은 그때 자신이 다메섹에 만났던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소상하게 증거함과 동시에, 다메섹을 시작으로 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유대 온 땅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맺으라고 했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행26:20).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전파했음을 증언하였다(행26:22b~23). 이렇듯 바울은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꼭 믿음과 회개, 둘 다를 다 강조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4. 바울의 회개관의 두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바울의 회개관은 그가 썼던 서신서들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가 회개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후7:10). 그리고 만약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고 할지라도, 고집을 피우며 회개하는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그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고 경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롬2:5).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5. 바울의 회개관의 세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울이 기록으로 남겨놓은 그의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회개보다는 훨씬 더 많이 "믿음"에 관해 많이 글을 남겼지만, 궁극적으로는 믿는 이들은 반드시 성령이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롬8장, 갈5장).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서만을 가지고 연구하는 자들은 바울이 믿음에 비하여서 회개는 상대적으로 덜 강조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 편으로 옳은 지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 것은 바울이 비록 회개에 관한 글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했던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 안에는 반드시 회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가 이미 일차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할 것을 강조했지만 더불어,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곧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 회개할 것을 책망하시는 분이이시 때문에,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은 곧 그 안에 회개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한 쪽으로 치우친 분으로만 이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나오며

  우리는 "바울"하면 곧바로 "오직 믿음" 내지는 "믿음"에 의한 "이신칭의"를 떠올릴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의 행위들도 있어야 칭의도 얻고 구원도 얻는다는 유대율법주의적인 성도들을 향하여, 크게 책망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부터라는 을 강조했었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모토가 되어버린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더욱더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지상주의를 낳는데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하지만 바울이 전파했던 복음전파의 실제현장을 살펴보면, 바울은 결코 "오직 믿음" 혹은 "이신칭의"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동시에 강조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참으로 놀랍기만하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사도행전 13장부터 28장에 전반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바울의 전도했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객관적으로 기록해보려고 했던 의사 누가의 사도행전의 기록은 더욱 더 놀랍기만하다. 그렇다. 바울은 결코 "오직 믿음"만 외친 사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믿음과 동시에 회개를 강조해서 전파했던 사도였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회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전파했다 복음전파현장에서는 항상 "회개하라"는 외침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보낸 편지들 13권을 살펴보면, 바울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에 필수적으로 "회개"가 들어간다는 것을 말했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회개를 중요시했는지를 가늠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성령의 인도하심"도 실은 성도들 속에 내주하시어서 사람을 회개케하고 책망케하는 성령의 역사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고로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역시 동시에 회개도 강조했다는 의미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 바울의 오로지 믿음과 회개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엇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회개"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것 없이는 사람이 결국 구원받을 수도 없으며,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 구원자의 영역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자라 할지라도 과연 자기가 회개생활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실로 오늘날에 들어와서 회개가 필요없는 것이며,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 곳은 대부분 다 이단쪽에 가깝다. 이단치고 회개를 강조하시는 이단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따른 구원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회개가 없는 구원은 구원이 성립될 수도 없고,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죽을 때에는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더 마음 속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회개복음을 전파하는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20년 08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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