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특별새벽집회 셋째날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22) 회복될 유다의 새 왕국은 과연 어떻게 실현되는가?(렘23:1~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pHdN62VbhU [또는 https://tv.naver.com/v/33751811]

 

1. 남유다를 파괴하고 흩어버린 목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목장의 양떼를 파괴하고 흩어버린 목자들을 반드시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렘23:1~2).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장의 양떼를 목양하라고 맡겨준 목자들이 양떼를 오히려 쫓아내고 돌보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떼를 파괴하고 흩어버린 목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바로 남유다의 왕들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유다의 마지막 4명의 왕들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의 뒤를 이은 다윗에게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삼하7:8,12). 그러므로 남유다의 목자는 바로 다윗왕과 다윗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남유다의 왕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레미야 23장 1절~8절의 말씀은 예레미야 21장 1절부터 시작된 '남유다의 4명의 왕들에 대한 심판'예언의 마지막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목자는 곧 남유다의 4명의 왕들인 것이다. 

 

2. 이스라엘 국가는 다른 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스라엘 나라는 다른 나라와 좀 차이가 있는 국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국가인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워 이스라엘의 국가를 처음 만드실 때에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워진 왕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위에 세워진 왕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고 잘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위에 세워진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을 돌보라고 위임받은 위임 왕에 불과했던 것이다(삼상9:16). 고로 만약 이스라엘 위에 세워진 왕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잘 인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폐위시키시고 그에게서 백성들을 빼앗아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백성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며, 왕은 자신이 대장인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 통치하라고 위임받은 위임 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다윗왕의 뒤를 이어 세워진 왕들이 계속해서 타락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왕에게 징계를 내려 그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남유다의 혈통적인 마지막 왕은 여호야긴(고니야, 여고냐)인데, 그의 후손들 가운데 다시는 왕위에 앉을 사람이 있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셨다(렘22:24,30). 

 

3.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시겠다고 하는 새 목자와 새 왕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남유다의 왕을 폐하시고 새롭게 다시 세우시겠다는 새 목자이자 새 왕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양떼를 양육할 새 목자를 회복된 이스라엘 위에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렘23:4). 그러면 양떼들은 더 이상 바벨론과 같은 나라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 나라 때문에 더 이상 놀라지도 아니할 것이고, 또한 양떼도 바벨론과 같은 나라의 포로로 빼앗기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싹)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렘23:5). 그리고 그가 왕이 되면 형통할 것이며, 세상에 공의와 의를 행할 것이라고도 하셨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유다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게 될 것이라고 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렘23:5~6). 이 말씀에 따르면, 여호야긴왕의 뒤를 이을 새 목자들은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이 여러 명이 있을 수 있으나, 새 왕은 오직 한 분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는 바로 그 가지(싹)라고 하셨으니(사11:1),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롬1:2~3). 사실 이때로부터 이미 100여 년 전에도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보내실 왕이 어떤 존재인 것을 알려 주신 적이 있었다(사9:6~7). 그 내용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부분이나(렘23:5~6),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부분이나 거의 똑같다(겔37:24~25). 이는 다시는 인간 왕을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사람되신 예수님을 새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겔37:24~25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4. 새 왕이 세울 새 왕국은 어떤 왕국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날이 이르게 되면 장차 세우시겠다는 새 왕국은 대체 어떤 왕국인가? 오늘날에 많은 성도들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다시 물질적인 성전이 세워지고 이스라엘에 새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운동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과연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세우시겠다는 새 왕은 결코 인간 왕이 될 수 없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새 왕은 오직 하나님이 사람되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도 함께 배웠다. 그렇다면 그분이 세우실 새 왕국이란 어떤 왕국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세우신 새 언약의 백성들이 참여하는 왕국을 가리킨다. 이 왕국에는 사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든지 할례받지 아니한 헬라인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시며, 그분이 우리 인류를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심을 믿고 죄를 회개한다면 그도 역시 새 언약 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실 새 언약 백성이요 새 왕국은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도 이 땅에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진정 세워질 완전한 새 왕국은 저 천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새 언약 백성이 새 언약 안에 머무르지 않아도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는가?

  오늘날에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거듭난 성도들은 다 새 언약 안에 머물러 있는 새 언약 백성이다. 그렇다면 만약 새 언약 안에 들어와 새 언약 백성이 되었던 자는 자신이 받은 구원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 보장이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구약시대에 첫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에 새 언약에 들어와 있는 새 언약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새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그도 역시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양떼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실 때에는 어떻게 약속하셨는가? 그때에도 역시 영원히 멸망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10:28). 그런데 문제는 새 언약 안에 들어온 새 교회의 생각이 문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보혜사 성령님은 영원히 성도들 속에 거주하신다고 하셨으니(요14:16), 사람이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구약의 실례를 보고 성령의 내주 원칙을 알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왕조)과 그의 나라(다윗 왕국)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될 것이고, 그의 왕위(보좌)가 영원히 굳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7:16). 그런데도 범죄함으로 언약을 깨뜨렸던 남유다를 기꺼이 버리셨던 것처럼, 새 언약 안에 들어온 성도라 할지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회개케하심을 거부한 채 계속 죄를 짓고 살면 결국 그도 구원으로부터 탈락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란이 찾아왔을 때에도 자신이 가진 믿음을 잃어버린다거나 부인하지 않도록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신앙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매 순간 의심을 심는 악한 영들을 우리 몸에서 내보내야 한다. 그것은 회개다. 고로 우리는 내 영혼이 천국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악한 영도 떠나가니 일석이조가 되는 것이다. 

 

 

2023년 03월 0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16) 토기장이의 비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어떤 비유인가?(렘18:1~20:18)_2023-02-24(금)

https://youtu.be/7YI3dSKeOJs [또는 https://tv.naver.com/v/33750841]

 

1. 예레미야서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는 어디에 나오는가?

  예레미야서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는 예레미야서의 본론부 제1부의 12개의 단편 예언들 가운데 8번째에 나오는 예언이다. 즉 예레미야서에서 제8예언은 렘18:1~20:18까지의 말씀으로서, 토기장이의 실례와 옹기 파괴란 상징적 행동을 통하여 온 우주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함으로, 범죄한 유다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원칙에 따라 엄정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토기장이의 비유'는 제8예언 가운데도 제일 처음으로 '만민 처우 원칙'이라는 주제에 따라 등장하고 있다. 그때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렘18: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2. 토기장이의 비유는 성경 어디 어디에 나오는가?

  성경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는 주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 나온다(사29:16, 64:8, 렘18~19장).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과 디모데후서 2장에 언급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롬9:21, 딤후2:20~21).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토기장이가 자신의 의견을 따라 여러 종류의 그릇을 만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모든 만물의 창조주로서 당신의 뜻을 따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계신다. 특히 사람을 당신의 뜻을 따라 창조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조물주요, 아버지이며, 토기장이인 것이다(사64:8). 

사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3. 토기장이의 비유는 오늘날 어떻게 잘못 전달되고 있는가?

  그런데 오늘날 토기장이의 비유는 잘못 알려진 것이 많다. 왜나하면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람의 어떤 쓰임 즉 용도에 관한 비유로 사용하지 않고, 구원과 멸망에 관한 비유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토기를 빚으시는데, 어떤 개인이나 민족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계속해서 빗나간다면 결국 그 토기를 깨뜨려 버리시고 새로운 다른 그릇을 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만세 전에 개인에 대한 구원과 또한 멸망이 이미 결정된 채 있다는 것으로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구원과 멸망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이러한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도와 목적을 따라 당신이 사용하시려는 용도에 맞춰 사람들을 창조하신 후에 그 영혼을 이 땅에 있는 사람 속에 보내신다는 것이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4. 토기장이의 비유는 어떠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관한 비유인가?

  그러니까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이 비유는 사람의 쓰임(용도)에 관한 비유인 것이지, 결코 어떤 사람을 만세 전에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고 하는 개인 구원 예정에 관한 비유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예정론을 추구하는 한국 장로교에서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개인 사역 예정이 아니라 개인 구원 예정이나 개인 멸망 예언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혼돈이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기장이의 비유를 잘못 해석하면 인간의 운명(구원과 멸망)은 하나님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구원을 받거나 혹은 멸망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만세 전에 결정해 놓으신 것으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이나 민족을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하고 만들어 가시지만, 결코 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망시킬 것을 아무도 모르게 정해 놓고 사람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 토기장이의 비유가 개인 구원에 관한 절대주권으로 와전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빚으신다는 것을 말해 주는 개인 사역 예정에 관한 비유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사용할 것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사용할 것이라고 작정하고 사람을 빚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주의 종과 사역자로서 정해진 채 이 땅에 보내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창조하실 때에, 이 땅에서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종이자, 당신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도록 하는 데에 사용하시려고 준비하시고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역하는 사역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빚으셨고 또한 이 땅에 보내셨는지를 파악을 하고서 사역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역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사역자들 가운데 약 1/3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역자들 중에 1/3은 자신이 사역자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모른 채 사역하고 있고, 1/3은 자신이 사역자로 지음받았다고 믿고 그냥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역자로 지음받았으며 그래서 이 땅에 보내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 땅에 범죄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이 세상 임금인 마귀에게 속아서 죄짓다가 지옥에 떨어질 것이 뻔함으로, 이 땅의 사람들 중에 건질 자를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사역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또한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용도로 쓰여질 것인가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따지지는 말아야 한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빚어진 자신의 모습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된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를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길밖에 더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2023년 02월 2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08) 진정한 회개의 조건 4가지는 무엇인가?(렘3:6~6:30)_2023-02-15(수)

https://youtu.be/ediVq8AnBAk [또는 https://tv.naver.com/v/33254109]

 

1. 예레미야가 회개를 촉구하는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예레미야가 남유다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과연 남유다를 멸망함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예레미야가 남유다를 향해 회개를 촉구했던 것은 이미 예고된 멸망을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남유다 백성들 중에서 다만 몇이라도 건질 자를 건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시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하기를 진정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남유다 백성은 선지자를 통해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2.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에 동참하여 구원얻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에 동참하여 과연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극소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했어도, 진정 예레미야의 외침을 듣고 회개에 동참하여 구원얻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 숫자를 언급하셨는데, 그것은 성읍에서 한 명 정도요 족속 중에 둘 정도라고 말씀하셨다(렘3:14). 이 숫자가 회개의 외침을 듣고 구원얻을 자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보좌에 앉을 144,000명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숫자가 그 숫자만큼 적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성읍에 한 명, 족속에 둘 이라는 말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144,000명에 포함될 숫자를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3.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12가지 단편 예언들 중에 2번째 단편 예언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에 말씀하신 단편 예언들이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장부터 25장에 수록되어 있다. 그것들 중에서 제1예언은 2:1~3:5까지 말씀이며, 제2예언은 3:6~6:30까지의 말씀을 가리킨다.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제1예언은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시도하기 전에 주신 말씀으로 보이며, 제2예언은 요시야왕이 종교개혁(B.C.622년)을 단행한 이후에 주신 말씀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2예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북이스라엘을 답습한 남유다의 심판에 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남유다 백성들에게 진실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남유다 백성들이 비록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였으나 그들의 동참은 아주 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4. 남유다는 종교개혁 중에도 어떤 것을 답습하고 있었는가?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자매'라고 하셨다. '언니'가 '북이스라엘'이고 '동생'이 '남유다'라고 하셨다(렘3:6~7).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그만 회개하지 못하고 나라가 망해버렸다. 그때가 B.C.722년 남유다의 13대 히스기야왕 때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19대 호세아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앗수르의 살만에셀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멸망했다. 그런데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모습을 자기들도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남유다는 언니 북이스라엘의 영적 음행을 그대로 따라가고 말았다. 높은 산 위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들을 섬기면서 그들에게 절하며 향을 피웠고 음식을 바쳤기 때문이다(렘2:20, 3:6).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변절자'라고 말씀하셨고, 이혼 증서를 써서 그들과 이혼한 관계라고 언급하셨다(렘3:6,8). 그런데 이것을 지켜본 남유다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었다. 남유다도 북이스라엘과 똑같이 '돌'과 '나무'와 더불어 영적 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기서 '돌'이라 함은 남성신으로서,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신'을 가리키고, '나무'라 함은 여성신으로서,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신'을 가리킨다. 

 

5.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회개의 4가지 조건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가 주님께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4가지를 언급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가증한 우상들을 제거하되 망설이지 말고 제거하라고 하신 것이다(렘4:1). 이는 이방신들과 완전한 결별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회개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과의 완전한 결별을 하는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들도 함께 섬겨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둘째로,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회개여야 한다고 밀씀하셨다(렘4:2). 즉 회개는 말이 아니라 삶이 따라오는 회개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행함으로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회개란 사실상 하나님께서 회개로 인정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요, 또한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회개 역시 죽은 회개일 뿐인 것이다(약2:26). 셋째로,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위에 씨를 뿌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렘4:3). 이는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과 관념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낱낱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가시덤불 위에 씨를 뿌리는 격이 되고 말아서, 결코 열매를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 마음이 잘못된 생각과 관념을 유지한 채로 회개하면, 회개의 모양은 있겠지만 그 결과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시덤불 위에 씨를 뿌리면 그 사이에서 씨앗이 싹은 틔우겠지만 결코 열매를 거두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넷째로, 스스로 할례를 행하되 자신의 마음의 가죽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다(렘4:4).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 마음을 다해서 돌이키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심을 담지 않은 회개는 회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시야왕 때에 남유다 백성이 그러했다. 그들도 역시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에 동참하고 있는 듯했으나 그들은 위의 4가지와 같은 진실한 회개를 실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시면서,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무인 그들에게 불이 되어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하셨다(렘5:14). 

 

2023년 02월 15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거듭난 성도들을 도와주시기를 매우 기뻐하시고 바라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분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그것을 우리가 알아차리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므로 이 문제와 함께 구원의 문제까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나는 지금 종말론적으로 얻는 구원을 향해 바로 가고 있는 사람인가?

 

2022-01-09(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가?(빌2:12~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MRwwT8y7Uo [혹은 https://tv.naver.com/v/24771549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하실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우리가 만약 그 방식을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과 상반된 삶을 살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인지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 방식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방식에 대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  주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지 그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사실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방식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는 방식을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서, 우리가 받을 구원도 이루어 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상급도 풍성하게 준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구원은 한 번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난 일인가?

  사람은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가? 그렇다. 사람은 믿을 때에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분명히 그와 같은 사실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렇다. 사람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믿을 때에 속죄의 은총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남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부분은 아직도 우리가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자신의 구원의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라고 말한다. 정녕 믿고 회개한 자는 구원의 문제가 정말 이미 끝난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은 진술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빌립보서 2:12과 같은 말씀은 그 말씀과 충돌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충돌되는 듯한 말씀을 볼 때에 이 말씀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두 개의 말씀은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로 다른 측면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구원의 이중성이란 무엇인가?

  사실 성경은 2가지 구원을 말한다. 하나는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이 있다. 이것은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거저주심으로 우리가 얻는 구원이다. 이때 사람들은 죄사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중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영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구원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평생 지속되어지는 경험 속에서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할 구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이 혼의 구원을 '성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성화와 혼의 구원은 조금 차이가 있다. '성화'는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굳이 안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혼의 구원은 성화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혼의 구원을 이루지 못했을 때에는 죽는 날에 우리의 영의 구원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는 날에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의 성령이 떠나가심으로 그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성밖에 있거나 혹은 불못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혼의 구원을 이뤄 가야 한다. 오늘 빌립보서 2:12에서 말씀하는 구원이란 바로 이 '혼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혼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영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영의 구원은 사실 믿음과 회개로 거저 받는 구원이지만 혼의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스스로가 이뤄 가야 할 구원이기 때문이다. 

 

4.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는 혼의 구원은 하나님이 해 주시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인가?

  그렇다면 혼의 구원 즉 이미 영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 자신의 혼의 구원을 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뤄가는 구원은 누가 해야 하는 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인가? 그것을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정확히 알려 주셨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 해 주시는 구원이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얻어야 할 구원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빌립보서 2:12의 말씀을 다시 보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이 본문의 주어는 분명 '너희들'이다. 다시 말해 이미 예수님을 믿어 영의 구원을 받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이다. 구원을 이루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사용할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이다. 즉 끝까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야 할 주체는 '너희들' 곧 '우리들'인 것이지 하나님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장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빌립보서 2:12의 후반절의 말씀을 이제 직역해 보자. "너희들은 두려움과 떨림과 함께 너희들의 구원을 [너희 자신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힘써서 완수하고 있어라." 이때 동사를 보니, '카테르가제스테'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원형은 '카테르가조마이'라는 동사의 '현재 명령법 중간태 수동태 디포넌트 2인칭 복수'다. 이 단어는 '카타'라는 강조 접두어에다가 '에르가조마이'가 결합되어 생긴 단어다. 이때 '에르가조마이'가 '만들다. 생산하다' 혹은 '완성하다. 성취하다. 완수하다'라는 뜻이므로, 강조 접두어와 합치면 그 뜻은 '힘써서(애써서) 완수하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 동사는 현재 명령형이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힘써서 완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 동사는 '중간태 수동태 디포[넌트]' 동사다. 이는 형태는 수동태형을 띠고 있지만 해석은 능동형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요, 중간태인 만큼 '자기 자신을 위하여' 혹은 '스스로'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카테르가제스테'라는 동사는 '너희 자신들을 위하여 힘써서 완수하고 있어라'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무엇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가? 우리 한글성경에는 단지 '구원을'이라고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너희 자신들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너희 자신들의 구원'을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 문장을 헬라어로 번역해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얻어야 할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 혼의 구원까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혼의 구원은 우리가 부지런히 노력하여 순종함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5. 혼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중생의 구원까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혼의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다 맡겨 버리시고 하나님은 그냥 바라만 보고 계시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그럼, 주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혼의 구원을 위하여 애쓸 때에 어떻게 우리를 도와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13절에 나와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그렇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딤후1:13~14)께서는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어떤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그분이 우리 속에서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동사가 현재 분사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이 일하시되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중생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망만 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어떤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의 혼이 구원받도록 도와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 곧 성령님은 우리를 돕는 자 곧 '보혜사(돕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성령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소원을 불러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날 우연히 '회개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울림이 계속 내게 남아 있어서 이제는 나도 회개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이제 회개를 시작해야겠어'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소원은 다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때는 즉시 성령께서 우리 속에 갖게 하시는 바로 그 소원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곧 혼의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에게 일하시는 방식인 것이다. 

 

6. 우리가 가진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인지 내 육신이나 사탄이 주는 소원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문제는 우리 안에서 올라오고 있는 소원이 과연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빌립보서 2장 14~16절의 말씀을 통하여, 나의 소원이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본문을 고영민목사님께서 번역하신 원문번역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빌2:15-16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분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말고 하십시오. 15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하게 되어 삐뚤어지고 타락한 세대에서 책망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들 가운데 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16 그리고 생명을 말씀을 굳게 붙들어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게 자랑할 것이 있게 하십시오. 그 이유는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수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우리가 어그러지고 타락해 버린 세대 가운데서도 책망받을 것이 없어야 내 속에서 올라오는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에 점이 없고 순결하게 될 때에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소원이 생기게 하려면 반드시 회개를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우리 속에서 깨끗하고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서 일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우리 속에서 올라오는 소원이 육신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로 그것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그 소원을 우리가 붙잡게 되는 것이다. 

 

7. 우리의 혼의 구원은 어떻게 완성될 수 있는가?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죽을 때에 대부분 예루살렘 성밖으로 쫓겨나거나 또한 불못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지만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가 그를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한 것이다(계21:8). 누가 성밖이나 누가 불못에 떨어지는가?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소원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속에서 올라오는 소원이 성령께서 주시는 소원인지 아니면 타락한 육신이나 마귀가 주는 소원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육신이나 마귀가 주는 소원도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으로 잘못 알고 따라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올라오는 소원이 실은 그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데도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 채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은 죽을 때에 그만 구원에서 탈락하는 경우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회개에 집중해야 한다. 더더욱 회개에 집중하여 우리 안에 더러운 영이 남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것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붙잡는 것이 곧 우리의 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불러일으켜 준 소원을 붙잡고 그것에 순종(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되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사명이 되며, 우리 민족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된다. 

 

8. 나오며

  2022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일주일을 보냈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 소원을 붙잡고 있는가? 아니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켜 준 소원을 우리는 과연 붙들었으며 붙들고 있는가? 아직 그러한 소원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진심으로 회개하자. 회개 기도문을 갖다 놓고 진심으로 회개에 집중해 보자. 그리하여 우리 속을 깨끗하게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주시는 소원이 나도 느껴질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루는 것이 곧 우리의 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임을 명심하자.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심으로 일하게 하시는 그 소원을 목숨처럼 사수하자. 그것에 100% 순종해 보자. 그것을 가감하지 않고 그냥 순종해 보자. 그럴 때에 우리의 혼의 구원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들의 구원을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힘써서 완수해 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죽을 때에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죽은 다음에 천국에서 상도 받게 될 것이다. 면류관도 받게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신분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2022년 01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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