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오늘날 구원을 위해 교회들이 목숨처럼 지켜내야 할 것은?(막6:10~13)_2022-07-10(주일)

https://youtu.be/gSYeRk8HDHc  [혹은 https://tv.naver.com/v/28024586 ]

 

1. 들어가며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 항상 우리 물으며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교회가 사회 기관 또는 친교 모임 기관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음부의 권세가 해하지 못하는 튼튼한 교회를 세우고, 교회생활하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18~19). 그러므로 겉으 아무리 멋있게 보이고 건물이 화려해 보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퍼센트가 적은 교회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친교 모임이 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와 다음주는 교회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 교회되게 만들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꾸준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우리가 과연 목처럼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가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가 대체로 타락하거나 세상이 부하게 되면 교회는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는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고 오늘날은 세상이 부하게 된 시대다. 그러니 중세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을 잘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는 약 천 년 혹은 약 오백 년 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천국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을 것인지와 죽어서 이미 연옥에 빠져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지를 전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현대 교회도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전해 왔다. 그 방법으로서 셀모임을 어떻게 잘 하는지, 제자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를 전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회개의 중요성을 빠뜨리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과연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잘못 가르쳐 주거나 혹은 너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방법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럼 중세 교회는 어떠했을까? 그때는 오직 교회의 사제 계급 곧 신부들의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그럼 왜 이렇게 천주교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3. 천주교회는 어떻게 천국복음을 전하지 않고 연옥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왜 천주교회는 참된 진리의 천국복음과 회개를 전해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천주교회의 타락과 그리고 세상과의 혼합주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D.378년 로마의 다마수스(Damasus)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 곧 고대 로마의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속한 최고 사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A.D.590년 제63대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 1세가 자신의 직함을 '교황'이라 사용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이교도인 태양신 종교와 혼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는 갖가지 이방 종교의 의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수많은 교리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다. 그중의 으뜸은 바로 '연옥'이라는 교리다. '연옥'이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기는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임시 감옥으로서,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구원에 대해 보장은 받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때부터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회가 가르쳐 준 것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에에게 기도를 바치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미 자신의 선행과 공로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은 잉여 공로가 있는 성인들에게 기도를 바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품들도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회마다 앞다투어 성물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숭배하고 찾았으니,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에도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는 평소 3배가 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 성당 안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속옷과 십자가의 녹슨 못 1개 그리고 마리아의 머리카락 3개 그리고 불가타역 성경을 만들었던 제롬의 이빨 3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드디어 A.D.1091년도부터다. 교회가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 하고 재정 축재를 하기 위해 재정 모으려다 보니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의 도장이 찍힌 면죄부를 사게 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사실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그때부터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리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못하게 했다. A.D.1123년부터 5차에 걸친 라테란 종교회의 결과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게 되면 종교 재판에 넘겨 온갖 고문을 하고 죽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녀사냥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죽인 성도들의 수가 무려 6천만 명이었다고 한다. 

 

4. 천주교가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준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런데 이러한 천주교회의 연옥복음에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신부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A.D.1483~1546년). 그도 죄로부터 해방되어 살기를 원했으나 온갖 고행과 선행 그리고 거지 성지순례, 성인 숭배 등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인 스타우핏츠 신부의 도움으로 성경을 접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루터는 사람이 구원얻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오직 의인은 믿음과 회개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롬1:17, 합2:4, 시32:5). 그리고 드디어 만성절(모든 성인 대축일) 하루 전날에 비텐베르크 성당에 자신의 생각을 함께 토론해 보고자 95개 반박문을 게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중세의 구원관이 성경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는 중세의 구원관 3가지 중에서 2가지 거부한다. 하나는 교회의 사제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가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과 구원에 달려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5. 루터가 성당문에 게제한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루터가 만성절 하루 전날에 나무로 된 성당문에 붙던 95개조 반박문을 읽어 보면 우리는 그가 대체적으로(학자마다 다르겠지만) 3가지 주제로 항의를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렇다.

  첫째는 진정한 계속된 회개없이는 사제의 어떤 고해성사도 죄용서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95개 조항의 첫 번째부터 4번째 조항이다. 그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4:17), 그분은 신자들의 전 생애에서 회개가 지속되기를 원하셨다. 
제2항 이 ‘회개하라’는 말씀은 고해성사 곧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어지는 고백과 속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3항,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마음 속에서의 참회만 국한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참회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들을 죽이는 외적인 표지들을 낳지 않는다면 그 참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4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존재하는 한(즉 진정한 내적인 참회가 없는 한), 죄의 형벌은 [계속] 존재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죄의 형벌은]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 루터는 사람이 죄용서를 받는 것은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직접 하나님에게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고할 수 있으며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제직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만제사장설).

  그리고 둘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은 실제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요, 째는 교황이 가지고 있다는 사죄권(천국 열쇠) 합당한 것이 아니며, 돈을 받고 면죄부를 발하는 권한이 교황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 중 핵심적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5항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제6항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제10항 죽은 자에 대하여 연옥을 교회법적 형벌로 유지하려는 사제들의 행위는 무지하고 사악한 짓이다.
제22항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26항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 사죄를 허락할 수는 없다(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은 당치도 않다).
제27항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빠져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제28항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32항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36항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데, 이는 면죄부 없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제52항 면죄부로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 성지순례와 같은 고행, 성자 유품과 유물 숭배를 통한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나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루터는 중세 시대에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진정한 회개만이 죄용서를 받게 해 준다는 것을 찾아낸 놀라운 중세 신학자였던 것이다. 

 

6. 루터의 공헌에 맞물려 그가 가졌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루터의 모든 주장들은 다 들어맞는 것인가? 아니다. 그가 외쳤던 회개에 관한 부분과 연옥교리 및 교황 수위권에 있어서는 옳은 주장을 했지만 그가 주장한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의 실수 여기서부터 발견된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게 되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이후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것이 면류관이 되고 상급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우리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직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 의지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라고 했으며, 인간이 자유 의지를 사용한다면 구원을 얻는데 적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구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책임이 없다면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다 정해 놓고 하는 일을 가지고 말이다. 또한 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명하셨겠는가? 왜 우리의 시인과 부인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며 말했겠는가? 그리고 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님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셨겠는가?(마5:39~40) 그렇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반응함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나아오고 결단을 할 수 있는 의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했다(마12:18~21).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꺾여지고 말 것이며, 우리의 심지는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꺾여진 갈대라도 다시 바로 세워지고,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타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 의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천국에서 상급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믿었으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천국을 위해 살고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도 있고 주님 보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 교회와 싸우느라고 미 이런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죄용서받는 것이 회개라는 것까지만 생각했던 것이다. 회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상황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지 아니했을까...

  둘째, 위와 맞물려서 또 한가지는 신약 성경 중에서 믿음으로서의 행위 곧 회개의 열매로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나 유다서를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는 사실 성경을 잘 이해한 것이다. 그는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한 책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에 어긋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했으며, 이는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야보고서 강해 서문에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쓴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이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한 의가 어떻게 믿는 이들에게 전가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인생의 결말에 갔을 때에 자신을 되돌아보건 믿음에 따른 행위가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각도가 다르다. 그리고 그는 야고보서가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무려 21가지가 거의 인용다시피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심판주(5:9), 재림주(5:8), 생명의 면류관의 수여자(1:12), 치유자(5:14~15)로서 묘사하고 있으며, 비록 자신이 예수님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이 자신은 종이라고 칭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한 것이 무려 10번 이상이나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그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놀라운 발견 곧 회개의 중요성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잃어버렸으며, 결국에는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절대예정와 절대작정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는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배턴을 그만 넘겨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회개의 중요성을 외쳤어야 했다. 그리고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잘못된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원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쉽게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줌으로서 결국 올바른 구원관의 퇴보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주에 한 번 더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루터가 중세의 500년간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정말 기뻐 춤을 추어야 한다. 비록 그가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연옥의 실상에 대해서 분명한 관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이 땅에서 수고하는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 주었다. 또한 참회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현재 살고 있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가 되었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는 것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상관없이 죄용서가 일어난다는 것도 밝히 드러내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는 사람이 죄용서받는 것까지는 잘 말했으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무시해 버렸고 그것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회개만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죄용서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사탄에게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사수해야 할 진리는 바로 진정한 회개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며, 이 땅에서도 벌을 면죄해 준다는 사실이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래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알려 주신 회개 이후의 삶에 관한 말씀들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회개되어진 자유 의지로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는 날,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 얻고 보좌 자리를 차지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 가까이에 서서 주님께 찬양하고 감격하며 예배할 그날을 위하여... 

 

2022년 07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교회는 언제 없어지게 되는가?(벧전2:9)_2020-01-21(화)

https://youtu.be/UEg2hZtnuKU

 

1. 베드로전서는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보낸 편지인가요?(벧전1:1~2)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지역인 본도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는 소아시아에 흩여져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D.64년경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A.D.64년 7월 19일에 있었던 로마시의 대화재로 인한 네로황제(A.D.54~68년 통치)의 핍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기독교가 아직까지는 로마에서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겪고있는 어려움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2. 베드로전서에서 가장 중요하고 취급하고 있는 단어와 그 주제는 무엇인가요?

  베드로전서는 일명 "고난의 서신" 혹은 "위로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고난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며, "고난을 견디어내라"는 주제로 이 편지가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로전서에는 "고난"이라는 단어가 무려 15번이나 등장합니다(벧전1:11, 2:19,21,23, 3:14,17. 4:1,13,15,16,19, 5:1,9,,10).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도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고난을 잘 견뎌냄으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이기고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영광을 얻기 위해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3. 고난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을 위해 베드로 사도가 특별히 명령한 것은 무엇인가요?(벧전2:9)

  놀라운 사실은 고난에 직면해 있느 성도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고난을 잘 견뎌내라"고만 편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서라도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2:9). 어둠 가운데에서 처해있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놀라운 영광을 전달하여 그분의 아름다운 미덕들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곧 그러한 상황에서도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4. 베드로는 왜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복음전파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했던 것인가요?

  베드로 사도가 고난받는 성도들을 향해 "고난을 견뎌내라"고 말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라"고 한 이유는 교회의 존재목적인 복음전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을 산출하는 것인데, 만약 고난받는 환경이라고 해서 복음전파에 게을리한다면, 교회는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 교회가 이 땅에서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사도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자기 민족(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부르심을 통해서 그는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으로 인하여 부르심받은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출19:5~6에 보면, 출애굽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첫째, 모든 민족들 중에서 주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것이고 둘째, 하나님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며, 셋째,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민족적인 사명을 망각해버렸고 그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대신에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교회가 실천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받았는데(벧전2:5), 만약 교회가 핍박이라는 환경에 직면했다고 해서 복음전파를 게을리한다면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교회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벧전2:5,9)

  결국 교회가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모든 민족에 대하여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세상 모든 민족을 하나님께로 잘 인도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야 했듯이, 교회도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잘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의 직무는 사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위치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속죄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교회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망각하고 핍박의 현장에서 자신의 신앙지키기에만 급급하여 복음전파를 게을리하게 된다면,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해야 할 목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민족적으로 버린 것처럼, 교회가 당연히 버릴 것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이었던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전파의 명령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만약 이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결국 교회도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전파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전도합시다.

 

2020년 1년 21일(화)

정병진목사 


주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주님의 온전한 제자를 만들라고 세우신 것인가? 한 때는 그렇게 알고 제자훈련에 매진하던 때가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불행한 이 세대에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서,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3중축복(물질과 건강과 자녀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 교회를 주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는 아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도들(천국보내는 성도들)을 산출해내야 교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워나가야 교회라고 불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미리 예비해두신 신실한 당신의 종들을 통해 이뤄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열심히 기도하는 일인가? 아예 자신이 주의 종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선교사가 되는 것인가? 물론 이런 것들이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주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알아보고, 주께서는 그 일을 어떻게 이뤄가고 계시며, 성도들은 어떻게 그 일에 동참할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이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이 땅에 구원받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가 제자되고 다른 이들을 제자삼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이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으니 교회의 존재목적은 복음전파에 있다고도 말한다. 모두가 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가장 큰 목적 한 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만약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이것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무관심하고 있다면 그는 교회가 존재할 목적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과연 우리교회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무엇에 미흡한지 그리고 우리교회가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방향으로 고쳐나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의 존재목적과 신앙생활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셨을까? 그리고 제자들에게 꼭 그 일을 하라고 부탁하셨던 것일까?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둘째는 기도를 통해서 삶을 필요를 채우고 또 얻을 수 있다. 셋째는 세상에서 치유할 수 없는 중병이나 불치병이라도 치유할 수 있다. 넷째는 부모와 자녀 등 모든 이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며 서로 사랑하며 아끼는 법을 배울 우 있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생활을 통해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목적일텐데 말이다. 교회생활을 하면 다른 부수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겠지만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요, 신앙생활하는 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2가지다. 첫째, 죽어서 내 영혼이 천국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며(딤후4:18), 둘째, 사람이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을 얻는 성도가 되기 위함이다(딤후4:7~8, 2:12)

 

3. 신앙생활의 첫번째 목적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먼저, 사람이 신앙생활하는 첫번째 목적에 대해 알아보자. 그것은 자신이 죽었을 때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딤후4:18). 만약 교회가 분명 교회이긴 한데, 교회가 천국보내는 성도들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닌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빗가뻔쩍한 교회이지만 주님 보시기에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성도들을 천국에 들여보내주는 교회가 참된 교회요 진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시고자 했던 교회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마16:18).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죽을 때에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을 믿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구원얻는 것이다(막1:15, 마4:17).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시어 인류가 지은 죄값을 처리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 직후부터 말씀하신 것인데, 구약시대에는 그를 "메시야"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 인류를 구원해주시겠다고 무려 350가지 이상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진짜 오셨는데, 나중에 보니 그분은 바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려면, 첫째, 인류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지은 죄들을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즉 회개하는 것이다(마4:17). 그렇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하신 일을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요16:9). 그리고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요일1:9). 그래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내기 때문이다(요일1:7,9, 계7:14).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피가 자동적으로 죄를 씻어준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도 남음이 있는 효능을 지닌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에 비로소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때문이다(요일1:7,9).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자동적으로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번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아버렸기 때문이다.

 

4. 신앙생활의 두번째 목적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둘째로, 사람이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을 얻는 성도가 되기 위함이다(딤후4:7~8, 2:12). 이 목적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A.D.95~96년경 소아시아에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편지를 써보내라고 명령하셨다. 이 편지에는 그들 교회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는데,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겁지도 아니한 교회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이 2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는 열심히 내되 계속해서 열심을 내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회개하되 단호하게 회개하라는 것이다(게3:19). 라오디게아교회는 믿음에 있어서 부족한 교회는 아니었다. 또한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비할 데 없이 축복받은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적함이 없이 누리고 사는 교회였다. 하지만 그들을 영적으로 진단해보았을 때에 그들은 한 마디로 거지였다(계3:17). 그들은 영적은 가난했으며 가련했고 벌거벗은 채(옷을 입지 않은 채)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천국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빈털털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력하게 그들을 권고하셨다. 천국에 들어와서 그들이 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들은 희희낙낙거리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은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부족함이 없었고 매우 풍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천국에서 누릴 상급은 전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열심을 내라고 하셨다. 그리고 단호하게 끊을 것은 끊고 붙들어야 할 것은 붙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라오디게아교회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며, 무엇에 열심을 내야 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영적인 것으로서, 자신이 영혼에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받을 것들(면류관,기업,상급,영광)에 열심을 내라는 것이었다. 천국에서 받을 그것을 얻기 위해 열심을 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은 한 번으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열심을 내라"는 명령은 헬라어로,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뒤에 "과거 명령법'을 사용하여 회개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된 가치관과 목표를 단호하게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5.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의 영혼이 누릴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서 받을 것들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야 천국에서 누릴 것들을 충만히 준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들은 과연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모든 물질과 시간과 달란트와 은사 심지어 목숨까지도 드렸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2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냈다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였다. 하지만 이들은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한 이유를 잘 몰랐다. 그들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진 자들의 헌금을 받아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타난 결과는 참담했다. 누가 많이 가져가고 누가 못 가져갔다고 하면서 서로 치고 박고 싸웠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기와 원망의 말이 계속 쏟아져나왔다. 그것이 교회를 세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배출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했고, 그것이 이루어졌으면 이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올인해야 했지만 그들은 다른 일에 집중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교회는 얼마 못가서 핍박으로 인하여 산산히 흩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가서 교회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교회를 세우는 지도자를 돕는 일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얻을 상급과 면류관을 위해 힘써야 할 두번째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좀 폭넓게 말하면,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는 자신이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가 선교사가 되어 선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자기가 주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가 다 틀린 것은 아니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참된 교회를 세우는 주의 종을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참된 교회를 세우는 지도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를 세워놓았는데, 천국에 들어갈 성도를 배출하지 못한 채 지옥에 떨어지는 성도들을 배출한다면, 교회는 아니 세우느니만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 주의 종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질 때 가장 좋다.

  사실 오늘날까지 교회의 성도들이 천국가고 지옥가고 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의 십중팔구는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의 종들이다. 이들에 의해 교회에 출석하는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세가 될수록 참으로 올바른 주의 종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초기교회의 사례를 보니, 하나님께서는 맨날 구제에 빠져 그러한 문제 해결에만 급급해하는 예루살렘교회를 버리셨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를 세워서 그 일을 감당케 하셨다는 것이다. 아무나 가서 교회를 세울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전부터 택정해놓은 사람을 불러서 그 일을 감당케 하신다. 그가 바로 사도바울이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평생 죽을 때까지 긴 전도여행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선교팀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다. 선교비도 충당하는 일이다. 혹은 직접 가서 바울의 사역을 도울 수도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교회를 세우는 주의 종들을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성도들이 가장 열심이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천국보내는 교회를 세우는 주의 종에게 협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세운 종들을 도와 천국보내는 성도들을 낳는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6. 어떻게 교회를 세우는 주의 종을 도울 것인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보면,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는 주의 종을 돕는 방법이 나온다. 그것은 4가지다. 첫째, 그것은 중보기도하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4:2~3). 둘째,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주의 종들을 돕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다.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 왔던 장막만드는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일터에서 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장막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의 직업으로 일평생 바울을 돕게 된다. 셋째, 어렵더라도 선교비를 충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다. 하지만 선교비는 이내 떨어지고 말았다. 2차전도여행 때에는 중간에 전도비가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하지만 유럽의 첫성이었던 마케도냐의 빌립보교회는 바울팀에 선교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넉넉해서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지만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선교를 보내주었다(고후8:2~4). 하늘의 자녀가 되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그들은 잊지 않았고, 그들을 힘닿는대로 표현했던 것이다. 넷째, 직접 사람을 협력자로 보내 돕는 것이다. 또한 빌립보교회는 훗날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지낸다는 소식을 듣고는 늙은 바울곁에서 바울을 시중들 사람을 파송하는데 그가 바로 에바브로디도라는 청년이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열심히 바울을 시중들었던지 바울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편지에 썼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아니했다(빌2:30)"고 말이다. 그는 바울을 섬기는 일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알고 죽기까지 충성했던 것이다. 그렇다. 평신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무슨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로 섬기며, 자신이 가진 직업으로 섬기며, 물질로 섬기고, 직접 손과 발로 섬기는 것이다.

 

7. 교회를 세우는 지도자를 돕는 성도들이 받은 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는 참된 지도자들을 섬겼던 성도들을 어떻게 복을 주셨을까? 첫째, 자신의 직업으로 섬겼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자신의 일생을 마치기까지 자신의 직업을 잃어버리지 않고 바울을 도울 수가 있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 부부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불렀다(롬16:3). 한편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동역자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이름의 하늘의 생명책에 있다고 하였다(빌4:3). 그렇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도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을 것이다. 둘째, 환난 중에서도 선교비를 충당했던 빌립보교회는 바울로부터 자신의 기쁨이자 면류관같은 성도라는 칭함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필요할 때에는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기적을 맛볼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들었다(빌4:1,19). 셋째, 죽도록 헌신하다 병들었던 에바브로디도는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질병에서 깨끗이 나았고 다시 빌립보교회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교회를 세우는 주의 종을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주시기 때문이다(빌2:27).

 

8. 나오며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아주 고상하게 생각하거나 거창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은 고상하거나 거창한 것만이 아니다. 또한 자기가 총대표가 되어 어떤 업적을 남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름도 없고 빛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진짜 천국보내는 주의 종들을 돕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빌2:30). 그러므로 내가 일반 성도로서 주의 종들을 섬기는 일을 쉽게 생각하지 말고 또한 작게도 보지 말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시 12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한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으리라(마10:40~41)" 그렇다. 주님의 종을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성도로서 주의 종을 섬기게 되면, 내가 받는 상급은 주의 종이 받는 상급과 동일하다는 것도 잊지 말라.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7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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