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5(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이 마지막 시대에 끝까지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가 되려면(계11:3~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wnsqgx51XI [또는 https://tv.naver.com/v/32453792]

1. 들어가며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것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주신 말씀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다(마16:18). 이는 음부의 문들이 많이 있어도 죽은 사람의 영혼을 삼키지 못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에 의해서 이 땅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것은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한 마디로 '두 증인'처럼 사역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계11:3~6). 그렇다면 말세에 주님께서 쓰시는 교회로서 두 증인과 같이 사역하는 교회란 어떤 교회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두 증인처럼 사역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어서 주님께 끝까지 쓰임받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2. 말세에는 어떤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을까?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말세에 이 땅 위에 존재하는 교회에 대해 2가지 형태로 말씀하셨다. 하나는 라오디게아 형의 교회요(계3:14~22), 또 하나는 두 증인 형의 교회다(계11:3~6). 라오디게아 형의 교회는 요한계시록 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로서, 뜨뜻미지근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겉으로는 스스로 자신은 부자이며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영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교회를 가리킨다. 이러한 유형의 교회는 영적으로 가난한 교회를 가진 교회들을 가리킨다. 고로 이러한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인 세계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자랑하니, 스스로를 부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옷은 더럽혀진 채 있어, 주님께서 토해 내 버리고 싶은 교회라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벗고 있어서 수치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을 악한 영들로부터 지켜낼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또 다른 유형의 교회가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사탄이 무저갱에서 올라오기까지 이 땅에서 마지막 추수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인데, 그것은 바로 '두 증인처럼 사역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이 교회는 주님의 증인으로 사역하는 교회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서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증언하여, 사람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시켜 주는 교회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천국에 들어간 후에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로 준비시켜 주는 교회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쓰임받을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3. 말세에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다(마16:18). 이것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음부가 삼키지 못하는 교회로서, 죽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교회를 가리킨다. 고로 이 땅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과연 자신의 성도들이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은 영혼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교회가 진짜 주님이 이 땅에 세우고자 하는 교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말세에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살펴보았듯이 기본적으로는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여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쓰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세에 쓰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것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교회다. 그것은 바로 '두 증인처럼 사역하는 교회'를 가리킨다(계11:3~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말세에 두 증인을 사용하시는가? 그것은 두 증인이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두 증인을 두고 주님께서는 두 촛대라고 말씀하셨는데(계11:4), 이는 촛대가 곧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계1:20). 둘째, 두 증인은 사탄이 무저갱에서 올라오기까지 쓰임받는 교회이기 때문이다(계11:7~8). 사탄이 무저갱에서 올라오면 곧 일곱째 나팔이 불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두 증인과 같은 교회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능을 수행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교회로서 선지자 직을 수행하고 있는 교회여야 한다. 둘째는 일곱 금촛대에 기름을 흘려보내는 두 감람나무로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나눠주는 교회여야 한다. 그리고 셋째는 주님이 주시는 권세와 능력으로 사역하는 교회로서, 엘리야와 모세와 같은 사역을 하는 교회여야 한다. 

 

4. 말세에 쓰임받는 교회의 실제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께서는 말세에 쓰임받는 교회의 모습을 3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로,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는 '스스로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교회'라고 하셨다(계11:3). 왜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은 채 있었는가? 그것은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는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있는 교회였던 것이다. 회개를 실천하고 있는 교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친밀해지자 그들은 불순물(거짓말)이 섞여 있지 않는 예언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에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객관적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필요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럼, 어떤 것들을 통해 성도들은 그 시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어린아이들처럼 예언을 하는 것이요, 청년들처럼 환상을 보는 것이며, 늙은이들처럼 꿈을 꾸는 것이다(행2:17~18). 그런데 이러한 예언과 환상과 꿈은 사실 영적으로 영안이 열린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 즉 어린아이처럼 영안이 많이 열린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청년들은 영안이 조금 열린 층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환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늙게 되면 영안이 잘 열리지 않아서 꿈을 꾸는 정도가 된다. 

  둘째로,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는 '성령의 기름을 다른 교회와 사역자들에게 흘려보내는 교회'라고 하셨다(계11:4). 왜냐하면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같은 존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감람나무'라는 용어는 사실 스가랴 4장에서 빌려온 환상인데,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로 상징되는 일곱 개의 금촛대에 기름을 흘려보내는 두 감람나무를 가리킨다. 두 감람나무가 기름을 관을 통해 금촛대에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마지막 시대에는 자기 개교회만을 대상으로 성령을 흘려보내는 교회가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 성령의 기름을 흘려보내는 교회여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회개하고 무장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상속자로 들어가도록 돕는 교회가 바로 마지막 시대의 교회인 것이다. 

  셋째로,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엘리야와 모세처럼 사역하는 교회'라고 하셨다(계11:5~6). 말세에 주님께서 쓰시는 교회와 사역자는 말의 권세가 있는 교회다. 왜냐하면 이들의 증인 사역을 방해하고 이들을 해치려는 세력이 있다면, 증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이 그들을 태워버릴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의 권세가 있는 교회의 예표로서, 주님께서는 두 사람을 천거하셨다. 하나는 엘리야처럼 권세를 사용하는 교회요, 또 하나는 모세처럼 권세를 사용하는 교회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언하는 3년 반 동안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않도록 하는 증인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또 하나는 언제든지 물을 변케하여 피가 되게 할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전자는 구약의 선지자의 대표였던 엘리야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요, 후자는 출애굽 시대에 모세가 애굽에 행한 첫 번째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는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여야 하는 것이다. 

 

5. 말세에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세에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다.

  첫째, 정결함이다. 스스로가 회개하여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는 교회가 주님께서 쓰시는 교회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지 않는 사람이 예언하면 가짜 예언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양신이 역사하는 교회와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가 될수록 철저히 회개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단장해야 한다. 그래서 그 시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복음을 대적하고 성도를 핍박하는 적그리스도의 공격을 충분히 이겨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나눠줌이다. 말세에 쓰임받는 교회가 되려면 나만 은혜받고 나만 준비되게 하는 교회와 사역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다른 교회와 사역자들도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기름을 흘려보내는 교회가 말세에 주님께 쓰임받는 교회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시대에 다른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말씀도 함께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더 무장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기근이나 전염병 그리고 악한 영들의 미혹이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 차리고 살아 있는 말씀, 영적으로 자신을 무장시켜 주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셋째, 영적 수준이다. 말세에 쓰임받는 교회는 어느 정도 영적 수준을 가진 교회여야 한다. 예언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코로나 이후 영적인 실제를 갖추지 못하는 교회는 점차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교회가 영적인 신비를 잃어버리면 세상의 모임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자신의 영적 계급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회개와 말씀으로 준비하고 사역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과 가까워져서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예언할 수 있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으로 악한 영들과의 영적 싸움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말세가 되면 더욱더 적그리스도에 의한 핍박은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택하신 자들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주는 것인데도 그것을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고 미혹할 것이기 때문이다(마24:24).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핍박과 미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잘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말세에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 주님과 더욱더 친밀한 사람이 되는 것이요, 성령의 기름부음을 충만히 받아 다른 교회와 사역자들까지 도와주는 것이요, 자신을 주님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말세가 되면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피해 다른 나라로 이사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아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분이 나와 함께 있으면, 베드로처럼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의 감시도 결국 무용지물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으나, 주님께서 파숫꾼들의 눈을 감겨버리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가 감옥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관건은 얼마나 주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깨끗한 자가 되는 것이다. 정결한 자가 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친밀해지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꿈과 환상과 예언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말세가 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만이 이런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어 그들도 말세를 잘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한 강력한 권세와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것은 회개하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말세에 바로 이러한 자들과 이러한 교회를 곁에 두고 쓰시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0) 바울의 고별설교(1)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4가지는 무엇이었나?(행20:13~27)_2022-12-29(목)

https://youtu.be/nbgKGxZkYN0  [혹은 https://tv.naver.com/v/32116058 ]

 

1.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에 도착하여 행한 것은 무엇인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드로아를 지나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청하는 일이었다. 밀레도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로서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45Km 떨어진 곳에 있다.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 이곳 항구도시에 정박해 있을 때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그곳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에베소는 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약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던 곳으로서,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였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에서 최초로 두란노 서원이라는 선교센타를 운영하여 선교사를 훈련하여 각 지역으로 파송한 바 있다. 

 

2.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무엇을 말했는가?

  바울이 이때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무엇을 말했을까? 우리는 이때 바울이 말했던 것을 한 마디로 바울의 '고별설교'라고 부른다. 그럼, 바울은 이때 무엇을 전했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이 거기에서 어떻게 복음 전파를 했는지를 말했고,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을 전했다. 이때 바울은 먼저 자신이 에베소에 들어가서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지와 거기에서 전했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전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각오와 자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것은 자신에 관한 언급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을 전했다.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감독자가 되었는지 기억하고 감독자로서 양떼를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한 경계와 아울러 기독인들의 바른 삶의 자세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3. 바울이 밀레도에서 행한 고별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바울은 적어도 3번의 설교를 했다. 첫 번째는 1차 전도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했던 설교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2차 전도여행 중 아덴에서 행한 설교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에서 행했던 이번의 설교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설교는 상당히 구별된다. 왜냐하면 안디옥에서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였고, 아덴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설교였는데, 이번 밀레도에서 전한 설교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설교가 아니라 에베소의 장로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목회설교를 한 셈이다. 그러니까 앞의 두 번 설교가 전도설교였다고 한다면, 뒤의 한 번의 설교는 목회자들을 위한 훈련과 권면의 설교였던 것이다. 

 

4. 바울이 이때 전했던 4가지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의 설교 가운데서 가장 무르익은 설교를 하나 고르라면, 우리는 응당 밀레도에서 행한 고별설교를 들 수 있다. 바울은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다 놓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였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복음과 교회 생활에 대해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그가 회고하면서 전했던 말씀을 보면, 복음의 핵심 4가지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크게 보면, 영육 간에 유익한 것을 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회개'와 '믿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관한 메시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때 유대인들과 헬라인 둘 다에게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전했던 것이다.

  첫째, 바울은 그들에게 '회개'에 대해 언급했다(행20:21). 이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리킨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한 삶을 살았던 것을 회개하라고 권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때 바울이 전한 회개는 구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회심으로서의 회개와 자백으로의 회개를 전한 것이며, 그것을 내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상숭배'에 대한 회개와 '자범죄'에 대한 회개를 전한 것이다. 우상숭배의 죄도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함으로서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회개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저주 가운데서 해방되는 회개를 전한 것이다. 

  둘째, 바울은 그들에게 '믿음'에 대해 언급했다(행20:21). 이는'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믿음을 전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이신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주 하나님 자신이요, 한 분 하나님의 표현이시다. 그렇다면 그분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것은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피를 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는 아담 이후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흠없는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흠없는 제물로서 사람이 되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피가 없이는 속죄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피 흘리심으로 죽으신 것이다. 

  셋째, 바울은 '나라(왕국)'를 전했다. '하나님의 나라' 곧 예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에 대해 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두 종류가 있다. 상태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공간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상태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실현되는데,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쫓겨남으로 실현된다. 그리고 장소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은 후에 장차 들어가게 될 공간적인 천국을 가리킨다. 

  넷째, 바울은 '하나님의 뜻(의도, 계획, 경륜)'을 전했다. 여기서 뜻이라는 단어는 '쎌렘마'(뜻, will) 가 아니라, '불레'라는 단어로서, 이는 뜻과 의지 그리고 의도와 목적, 계획과 경륜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는 바울이 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게 되셨는지를 그 근본 의도와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에게 상속시켜 주고자 함이다. 이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는 만세 전의 계획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거기에서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아 왕 노릇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것이다. 

 

5. 오늘날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과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과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회개를 잘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이 회개요,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비결도 회개인데도 사람들은 회개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으로서,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도 모르며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잘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경륜)에 대해서도 잘 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우주 경륜에 대해서 전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복에 대해서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바울이 전한 순수하고 위대한 복음이 회복되고 온 세상에 그 복음이 전파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2022년 12월 29일(목)

정병진목사

2022-09-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2) 헐면 사흘 만에 일으시키겠다던 성전, 대체 무엇을 가리킴인가(요2:13~2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mXmYzIyJrw  [혹은 https://tv.naver.com/v/29089470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그분이 맨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는 언제였을까? 그때는 절기상으로 유월절이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했는가? 그리고 그때에 성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그분이 그때 행하신 일은 성전을 청소하는 일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이 일에 화가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묻는다.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며 그럴 자격이 있다면 어떤 표적이라도 보여보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들이 이 성전을 허물라. 그리하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바로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표적'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표적'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성전 청결기사를 통하여 왜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또한 성전 청결을 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던 유대인들에게 왜 예수께서는 자신과 죽음을 부활이 표적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서 '표적'의 진정한 의미와 그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며 그때 성전을 청결케 하셨는가?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가?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의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율법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인가?(출23:17)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어떤 일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전을 깨끗히 청소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14~16절). 그 일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다음,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소들과 양들을 전부 쫓아내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으며,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져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계속]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6절). 이는 장차 유월절 양으로 죽으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을 깨끗히 청소하기 위한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성전은 아버지의 집인데, 아버지의 집이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상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안에 있는 누룩을 다 제거해야 했다. 그리고 유월절 양을 준비하되 그 양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 4일동안 점검해야 했다(출12:3~6,19절). 그런데 유월절 양을 잡는 성전이 그만 돈벌이로 인하여 매우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매우 분노하셨다. 그 분노는 시편69:9의 말씀처럼, 주의 전의 열심이 예수님을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교권을 가진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행위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성전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둘기와 양과 소들을 비싼 값으로 팔아 이윤을 남기고 있었으며, 환전상들은 무려 12,5%라는 환전수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든 성인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것을 제사장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성전에 와서 2가지 일을 해야 했다. 하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고, 또 하나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머나먼 이방지역에서 살던 이들이 성전세를 내려 할 때에는 자기들의 사용하던 돈으로 성전세를 낼 수가 없었다. 성전세는 오직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성전세겔(은화)로 바꾸어 성전세를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권한은 당시 제사장들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제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살던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들은 어찌하든지 꼬투리를 잡아 제물로 드릴 수 없게 했고, 오직 성전에서 파는 희생제물만은 아무런 하자없이 통과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비둘기는 무려 12배를 남겨먹었다고 한다. 그렇다.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면 이렇게 추하게 되는 것이다. 돈에 눈이 멀면 하나님까지도 떠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3. 무슨 권위로 그러한 일을 행하는지 물으면서 표적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해주셨는가?

  그러자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환전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매우 연관이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흥분하여 예수께 말했다. "당신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당신은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2:18). 이는 예수께서 대체 무슨 권세로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을 방해하며, 그럴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표적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답변하셨다. "당신들이 이 성소를 [단번에] 허물어뜨리시오. 그러면 내가 세 날들 동안에 그것을 [장차] 일으켜 세우겠소"(2:19). 그러자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성소는 무려 46년동안 건축된 것이오. 그런데 당신이 세 날들 안에 그것을 장차 일으키겠단 말이오?"(1:20). 그랬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마저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22절).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야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성소'라는 것을 당시 건물인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성소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4. 성소를 헐고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말이 왜 표적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표적'과 유대인들이 요구하던 '표적'의 개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기적으로서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인정하겠다는 것은 당시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을 행하시자 그들은 그분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생각하는 표적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표적'이란 그것을 통해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해주는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으로는 총 7가지다. 하지만 실제 예수께서는 7가지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20:30).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기적들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표적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눅11:29). 다만 그분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전을 헐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은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정확히 요나가 말했던 바로 그 표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때 누가복음의 저자는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눅11:29-30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그렇다. 요나 시대에는 요나 자신이 표적이었다. 요나의 기적이 표적이 아니라 요나 자신이 표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서 니느웨 성에 가서 외치기를, 회개하지 않으면 앞으로 40일 후에 멸망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니느웨성 사람들은 회개를 하여 40일 후에 멸망을 당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요나 대신 와서 표적 자체가 되신 예수님의 시대에는 달랐다. 그분이 오셔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회개할 것을 외치셨지만, 그때에는 아무도 그분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40년만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을 당해 지구상에서 나라가 사라진다. 그렇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이란 어떤 기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신과 그분의 삶이 곧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사내아이로 탄생한 것 자체부터가 '표적'이라고 했다(눅2:10~12). 왜냐하면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는 이사야 9:6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2:10-12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5.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의 본 뜻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물질적인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멀리 외국에 사는 이들은 절기가 되면 하나님의 집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물질적인 성전이 더럽혀 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으셨다. 하나님과 성전을 그만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이들을 그냥 놔두고 볼 수만은 없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후에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특히 남유다의 므낫세 왕 즈음으로 추정되는 어느 시기에, 지성소의 법궤 가 이미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기에, 솔로몬의 성전 안에는 그 뒤로 법궤가 없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후에 돌아와서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 안에도 역시 법궤는 없었다. 당연이 예수님 시대에 헤롯 성전 안에도 법궤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법궤의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계시겠고 거기에서 사람을 만나고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다(출25:22). 그러므로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당시 성전과 함께 일하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거기가 아니라 딴 곳에 있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몸'이었다(21절).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들어오실 때에 혼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오셨기 때문이다(요8:29). 그러므로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었던 것이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성전을 방문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요,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더럽혀진 물질적인 성전 안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아니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요14: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진짜 어디에 아버지가 계시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19절). 왜냐하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4: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랬다. 예수님 당시에 아버지께서는 물질적인 성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 안에 계셨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정한 '표적'이었다. 그리고 그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3년 뒤 자신을 산 제물로 그들에게 내어주셨다. 그리고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었다가 스스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에게는 정작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0일 뒤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가셔서 약속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성령의 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의 몸은 하나님의 집(성전)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이들 속에 성령으로 아버지께서 들어오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전3:16~17)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제는 예수믿는 자들 곧 교회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성소)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전을 함부로 더럽혀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약 그래도 자신의 성전을 더럽힌다면 예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후에 그들을 쳐 내버려 불못에 던져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사람을 신뢰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는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계셨다(23절).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던 자들에게는 표적으로 보였겠지만 예수님 자신이 누군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한 표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이 온전한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에 행하셨던 것들은 그러한 표적들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만을 보고 믿었던 자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24절).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지,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군지를 진정으로 알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중에 배우겠지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종의 기적이면서 동시에 표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늘 아버지의 생명을 주려 오셨던 분으로 믿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그랬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속을 다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당신자신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디. 또한 그들의 증언을 기다리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목적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랐을 뿐 예수님이 진정 누군지를 믿으려고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3~26절).

 

7. 나오며

  오늘 우리는 성전청결사건을 보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들었다. 그런데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표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 중에 '표적'이라는 낱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기적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줌으로 인하여, 그것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받는 것이라야 한다(요12:37).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참으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또한 기사(기적들)도 행하셨다고 증언한다(요12:37,20:30).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셨던 표적들은 그리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어 그분을 구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하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단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기적 같은 일을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예수께 줄기차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켜 세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이 곧 표적이며, 그 표적의 핵심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요나 당시에 요나 자신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표적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주는 표적 중의 표적이며, 그것을 믿는 자들은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을 믿었다고 하는데(2:11),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주로 믿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그분의 죽음에 있다. 곧 예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겉으로 표출된 것이 당시 '포도주'였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믿고 따라가고 있는가? 그분이 날마다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시어, 우리의 삶이 윤택하게 되는 것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자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 일이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받게 해 주며 그것만이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게 해주며, 우리를 저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0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25)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이 보여준 교회의 정의와 건축재료와 사명(1)(창28:10~22)_2021-06-18(금)

https://youtu.be/4WkcIUjpKWM  [혹은 https://tv.naver.com/v/20895446  ]

 

1. 예수님과 사도바울에 의하면 야곱의 삶은 무엇의 예표인가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의 성경해석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에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삶은 성령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2.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사닥다리 꿈과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얼핏 보기에 창28장의 꿈이란 정처없이 길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찾아가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지켜 주실 것이며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해주시자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창28장의 야곱의 이야기는 성령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세우는지를 말해주는 하나의 완전한 그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닥다리 환상과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한 것은 신약시대이후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는 일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마16:18, 딤전3:16). 

 

3. 창28장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창28장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장차 탄생할 교회가 어떤 것이며 또한 교회의 건축재료는 어떤 것이 사용될 것이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로, 창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말을 통해서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교회와 비교해볼 때 창28장은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어떤 씨앗이 등장하고 있는 것인요? 그것은 총 3가지입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17절). 왜냐햐면 야곱이 꿈을 꾸었을 때에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혹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사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어떤 집을 누구의 집이라고 말하려 했을 때에 그곳에 그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라고 불리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람 냄새만 난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친목단체요, 종교 사교단체이며, 취미생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교회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그곳의 주인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그 모임의 주인이 될 때에 그곳을 비로소 "교회"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늘의 문"이라는 것입니다(17절). 야곱은 사닥다리 환상을 통하여 자기가 잠자고 있는 바로 그곳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로 들어가게 해주는 연결통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끝에는 여호와께서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시며, 유일한 길이 되시는 사닥다리(요1:51) 곧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어떤 단체나 장소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속한 사람을 전부 하늘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그 사람을 천국에 데려다주지 못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한 영혼을 천국문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12절). 왜냐하면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에는 그때도 부지런히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창28:12). 그럼, 이 천사들은 무엇하는 천사들입니까? 이 천사들은 보고천사들과 수호천사들 이며 그리고 전투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지금 성도들의 기도에 따라 움직이는 천사들로서, 이 세상의 임금이자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과의 싸우고 있는 우리 성도들을 돕기 위해 이 땅에 파송되고 있는 천사들이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행한 일을 보고하는 천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최초로 교회라는 단어를 언급하실 때에, 참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라면 그 교회는 반드시 "음부의 문들을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교회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전사들로 세워주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되려면 그 교회가 사탄마귀와 귀신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에 결국 실패하게 되면 그 교회는 음부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창28장의 야곱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건축재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나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재료를 통하여 세워지는 것인가요?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돌이요, 둘째는 기름이며, 셋째는 하늘의 이상입니다. 첫째로 교회의 건축재료는 야곱이 베고 잠자던 바로 그 "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18절). 야곱은 그날 자신이 가는 길에 하나님이 계속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기가 베고 잠자던 그 돌을 가져다가 기름을 붓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 장차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바로 "반석(페트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그러므로 훗날 베드로가 편지를 쓸 때에도 그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 잊어버리지 않고서, 유대인들에게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었던 예수께서 결국 교회를 건축하는 모통이 돌이 되셨다고 말하면서 그분이야말로 "보배로운 산(살아있는) 돌"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벧전2:4). 둘째, 교회의 건축재료는 "기름"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반드시 성령이 강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께서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지만 그때 베드로를 교회라고 말씀하시는 않으셨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베드로와 함께 한 무리들 위에 내려오실 때부터 그들을 "교회"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름"은 구약시대에 "성령"을 예표하는 것이므로(출30:23~25, 행10:38, 요일2:27), 교회의 건축재료로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기름같은 성령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셋째, 교회의 건축재료는 "하늘의 이상"으로서,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날 꿈을 통하여, 하늘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죄인이 사닥다리인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요14:6, 행4:12). 왜냐하면 이같은 하늘의 이상을 본 자만이 결국 교회가 되고, 교회의 성도가 되어야 음부의 문들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럼 내가 속해있는 교회는 과연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부분에서 충만한 것인가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건축자료가 무엇인지에 대한씨앗들을 우리는 창세기 28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야기가 성령하나님의 역사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천국에 못 데려다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교회"라는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귀신들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으면서도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들이 이러한 개념들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고 또한 가르치지 않으면서 자신을 교회라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 교회는 어느 측면에서 교회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서 그것을 보완할 수 있도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부의 권세를 못 이기는 교회가 되고, 그러면 교회는 사람들을 천국문에 데려다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021년 06월 18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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