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6) 향유부은 여인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교훈(요11:45~12: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7PqSZouuBY [또는 https://tv.naver.com/v/32826012]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로서 대부분 예수께서 하신 말씀 어록에 집중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가급적 넣지 않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약 70퍼센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다른 공관복음서에서처럼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의 기록은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대체 어떤 것이 같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인가? 또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사도 요한은 왜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나사로와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책망했던 제자를 굳이 가룟 유다라고 왜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체포하자고 결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며, 예수님의 예루살렙 입성에 그렇게도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요한복음에서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2.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였던 공회는 왜 예수 체포령을 결의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부류는 제사장 그룹으로서 사두개인들의 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그룹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원래 서로 정반대의 신앙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데에 그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그해 유월절이 되기 전에는 왜 예수님을 그토록 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명분을 들고 나온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 때문이었다. 가야바는 A.D.18~36년까지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중대한 결단을 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논리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도록 공회를 설득하고 사형 법안을 통과시켰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께서는 비록 죄가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온 민족이 망하느니 그를 죽여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때 무슨 소요사태나 로마에 대항하여 무슨 독립전쟁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들더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제사장의 논리는 사실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분을 살려둔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 민족의 땅을 빼앗고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둔갑시켜 제거하려는 나쁜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결국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짜로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게 됨으로 유대 민족도 살릴 수 있었고, 이방으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악한 계획을 말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편으로 보면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3.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요한복음처럼 실명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은 사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는 조금 다르다. 첫째로, 향유 도유 사건 장소가 다르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의 장소를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막14:3).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소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즉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명시적으로 나온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 부은 여인을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마26:7, 막14:3). 그런데 이 사건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이름을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는 기록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이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자들이 나사로와 마리아를 죽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회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었기 때문이다(요12:10).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요12:11). 그렇다. 죽은 지 나흘되었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그만큼 그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와 마태복음 기자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쯤에는 유대인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가는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상황이 달랐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에는 벌써 A.D.90년 이후의 시점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미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었고 나라도 이미 망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그 이름들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성경 기록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4.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누군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말이다(요12:3). 그런데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요한복음이 좀더 구체적이다.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붓되, 예수님의 머리에만 부은 것이 아니라, 발에까지 부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까지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2:3). 둘째,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려 부은 것을 보고 책망했던 제자의 이름이 누군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장차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던 '가룟 유다'였다(요12:4).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는 더 분명하게 이 기사를 기록했던 것일까?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까지 붓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녀가 얼마나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기 위함이다. 사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며, 주님께 얼마나 자신을 낮추려 했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는 그녀를 높여 주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첫째로, 그녀가 한 일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시고, 낭비라고 말했던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리아도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을 매우 낮추자 그녀를 높여 주시기 위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신 것 같다. 셋째로, 그녀가 한 일은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는 그녀의 감사의 마음과 자신을 낮춤이 우리 주 예수님을 아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예수께서는 며칠 후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둘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을 보고 책망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을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라고 밝힘으로서, 가룟 유다가 말한 것 곧 약 3백 데나리온어치나 되는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 가룟 유다의 마음이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적으로서 돈궤에 들어온 돈을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요12:6). 이는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5. 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수께서 타셨던 운송 수단이 바로 '어린 나귀(오나리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2:14).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 한 번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자 이스라엘의 왕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셔야 했던 것일까? 정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왕의 행렬처럼 백마를 타고 오셔야 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을 듯한 어린 나귀를 일부러 타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어린 나귀를 준비했어야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스가랴 9:9의 말씀에, "시온의 딸,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의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인가? 그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어떤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길이길이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성이 열광적인 입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공관복음서에서는 사실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을 모시고 입성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기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9:40). 환영하는 무리들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왜 그날 그렇게 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나사로 소생 기적 사건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죽은 지 나흘되어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이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십자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그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한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12:19)"

 

6.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 내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시기심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분노로 표출되었고 결국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는데 사용되고 만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결국 사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자세와 각오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보은으로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리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돈 욕심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전철을 우리는 결코 밟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오히려 더 높여 주셨다. 그녀의 헌신을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때 마리아에게서 겸손을 배우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사람에게서 배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옷깃을 여밀 뿐이다. 

 

2023년 0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9) 가장 안전한 피난처에서 보호를 받으려면?(행23:12~35)_2023-01-20(금)

https://youtu.be/lvh0MWsX2B0 [또는 https://tv.naver.com/v/32646619]

 

1. A.D.58년경 바울이 1차 공회를 마치자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결의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A.D.58년경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에 에베소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게 되어 공회석상에 서게 된다. 하지만 공회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나눠짐으로 서로 간의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천부장은 유대 민족끼리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음을 간파하고 임시 대기를 시킨다. 그런데 그날 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결의를 하게 되는데, 바울을 살해하기 전까지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한 것이다(행23:12~13). 일종의 바울 암살단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암살단은 다시 공회가 열리면 안토니오 요새에서 공회로 이동하는 바울을 제거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바울 암살 음모는 어떻게 바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바울 암살 음모는 바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울의 조카(생질)가 와서 그 사실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행23:16).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의 조카는 바울 암살 음모를 알게 되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바울의 가족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울에게 누나가 있었다는 것이며, 그 누나에게는 적어도 아들 청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누나가 언제부터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장성한 청년 아들을 두었다는 것은 팩트다. 그런데 바울은 원래 길리기아 주의 다소 성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행21:39, 22:3). 그리고 어느 때부턴가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살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 바울은 율법의 가장 엄한 교훈을 가르치는 바리새인의 거장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행22:3). 그래서 그도 역시 바리새인이 되었고 바리새인의 후손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암살 음모는 당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바리새인 포함)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바울의 매형은 이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거나 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바울의 매형이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뒤, 자기 아들을 시켜 바울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바울에게 알려준 것이 아닌가 싶다. 

 

3. 바울 암살 첩보를 입수한 천부장은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그러자 바울의 조카가 바울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었고, 바울은 백부장을 통해 천부장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청년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천부장은 그날 밤에 바울을 보다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날 밤 9시, 보병 200명, 기마병 70명, 창병 200명으로 꾸려진 호송 군사들과 함께 바울은 가이사야의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진다(행23:23).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군인들은 고작 60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총독관저가 있는 가이사랴에는 로마 군인 약 6,0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변이 보다 더 안전한 곳이자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는 역시 가이사랴였다. 그리고 더불어 당시 총독 벨릭스 역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에 대한 정식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천부장은 바울을 총독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또한 총독 벨릭스는 유대 땅 뿐만 아니라, 수리아 그리고 길리기아 성까지 다스리고 재판하는 통치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재판도 할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돈 한 푼 내지 않은 채, 미결수의 신분으로 470명의 로마 군사들에게 둘러쌓여 안전하게 가이사랴까지 이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4. 바울이 죽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이 암살단에 의해 죽지 아니하고 가이사랴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2가지다. 첫째는 주 예수님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행21:11). 그러므로 바울은 안전하게 로마까지 이동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어떤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면 인간의 어떤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고로 바울이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었다면 바울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했을른지도 모른다. 둘째는, 그를 도와주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천부장이 있었다. 맨 처음에 천부장은 소요 사태의 진압 과정에서 바울을 만났으나, 그가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알고,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아직 바울이 죄인인지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죄인으로 취급했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그는 바울을 쇠사슬에 결박시켰고 더욱이 그를 채찍질 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이 잘못되면 도리어 자신이 벌을 받게 되고 관직을 박탈당할 위험이 있었기에 천부장은 바울의 안전을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 암살 음모를 듣게 되자 그는 즉시 바울을 보다 더 안전한 가이사랴의 총독관저로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안전하게 재판을 받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둘째로는 좀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의 생질(조카)이 있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죽지 않고 가이사랴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이 사건이 보여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을 때에, 로마의 천부장과 바울의 조카 생질을 바로 그곳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에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교회 구성원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도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안에는 믿는 이 수만 명이 있다고 주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막상 붙들려 갔을 때에 어느 누구도 바울을 구출하는 데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엉뚱하게도 로마 장교가 나타나서 바울을 지켜주었고 그리고 바울의 조카가 나타나서 바울의 살해 위험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그곳에 사람을 배치하여 바울을 구원하기로 섭리하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피난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특히 우리들 중에 누구라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 남아 있다면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 인간편에서 볼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에서 보호를 받으려면 우리도 역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역시 당신의 일을 하는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시며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시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023년 01월 2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8) 바울이 혼자였음에도 공회 앞에서 위축되지 않았던 이유는(행23:1~11)_2023-01-19(목)

https://youtu.be/Ia-ZnFICKGA [또는 https://tv.naver.com/v/32508708]

 

1. A.D.58년경 바울은 왜 예루살렘 공회 앞에 서게 되었는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에베소에서 절기를 지키러 온 유대인들에 의해 바울은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간신히 천부장으로 도움으로 죽임당함을 면키는 하였으나, 그 일로 인해 바울은 천부장으로부터 결박을 당한 채 채찍질을 당할 상황까지 간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말한 후에 천부장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 

 

2.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데 바울은 유대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72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 앞으로 불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변호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자신의 신변은 이제 천부장에 의해 지켜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 불법적으로 자신을 심문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 중에서도 바울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과거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가말리엘의 제자로 공부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바리새인이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행23:6). 그는 바리새파로서 철저히 교육을 받았으며, 장차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산헤드린이 어떤 기관이며 무슨 일을 행하고 또한 그들이 어떤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회가 시작되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니아(재위 A.D.48~59)가 바울에게 죄를 정치도 아니한 가운데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하는 것을 듣고는 강하게 항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바울은 그를 가리켜 '회칠한 담'이라고 말했다(행23:3). 예수께서는 과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대제사장더러 '회칠한 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속은 이미 잘못된 상태에 있으면서 겉으로 회를 칠하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척, 의장인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로 탐욕스럽고 포악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산헤드린 공회 의장으로서 합당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산헤드린 의장은 재판관으로서 약한 자라고 재판을 굽게 하지 않아야 하고 공의를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레19:15), 또한 위증한 자를 철저히 가려서 모함한 자가 누군지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선고하여, 악을 제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신19:15~19). 그런데도 대제사장은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법을 알고 있으면 이처럼 법 앞에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의 실체를 폭로하여 그의 성질을 돋군 바울이 그 다음에 선택한 또 다른 자신의 변호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결과는 바울이 산헤드린 의장을 모욕한 것처럼 되어 버렸으니, 바울도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바울이 곧바로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선택한 다음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산헤드린 공회원 중에 바리새파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것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을 역이용한 것이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들을 위시로 한 사두개파 사람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바리새파 사람들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자 바울은 곧바로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비리새인의 제자라는 것을 알리고는, 자신은 지금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고 있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으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주장한 예수의 부활을 거부한다면, 사두개파 사람들과 같이 될 것을 우려한 바리새인들이 이제는 바울 편을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믿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으며, 천국과 지옥도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행23:8).

 

5. 바울의 복음 전파 방법의 부수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이전에 바울이 전도할 때에 쓰던 방법은 가장  먼저 이방인 지역의 회당에 찾아가서 거기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로 시작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직접적으로 그렇게 했다가는 곧바로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바울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자신의 간증 형식으로 증거하였으며, 바리새인들이 믿고 있는 부활 사상을 근거로 예수님의 부활의 타당성을 함께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자신이 배우고 익혔던 것들과 자신의 학문과 지위와 지식을 적절히 이용하여, 그것에 상응한 신분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백부장과 천부장에게는 자신이 로마의 시민인 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고, 천부장에게는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그로부터 발언권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산헤드린 공회법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그들에게 적절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와 능력과 학문과 지식을 적절히 활용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참으로 지혜로운 바울의 복음 전파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01월 19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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