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복의 가장 안전하고 빠른 지름길은 무엇인가?(욥42:5~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dGWo5fUfMY [또는 https://tv.naver.com/v/32964187]

 

1. 들어가며

   과연 원인이 없는 고난이 있는가? 동방의 최고의 부자였던 욥은 자신이 바로 '원인이 없는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하면서 따졌다(욥40:2). 왜냐하면 자신은 분명히 지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시고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느냐면서 항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분명 깨끗하며 순전하고, 불의를 행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냐며 그 이유를 알려 달라고 대든다(욥33:9~11).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닭 없이 자신을 치시고 자기에게 괴로움을 더하신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욥9:17~18). 왜냐하면 자신은 잘못한 일이 없었는데도, 하루아침에 자신의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자신의 열 명의 자식들도 비명횡사로 잃어버렸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건강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욥의 세 친구들이 와서 그에게 이유 없는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동안 그의 고통은 감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은 과연 어떻게 되어서 그 길고도 깊은 고난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그는 왜 고난 가운데 계속해서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사람이 자신의 비참함에서 벗어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복의 가장 안전하고 빠른 지름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 욥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당한 고난은 어느 정도였는가?

  욥은 의인이었다. 그는 구속사의 라인에 서 있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그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의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악에서 떠나 살고 있었다(욥1:1). 그러므로 그가 동방에서 가장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아들 일곱에다가 딸은 셋을 두었으며, 그는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 소가 500 마리, 암나귀가 500마리나 되었고, 집안에 종들도 무수히 많았다(욥2:2~3).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욥은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그가 가진 모든 소유물 곧 가축들과 종들과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까지 모조리 잃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돋아나 살이 터지고 찢어지면서 진물이 흘러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렇다면 욥은 대체 얼마 동안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욥기서 자체만을 보면, 그가 언제부터 그리고 얼마 동안 고통을 겪었는지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판인 70인역을 보면, 그가 고난이 지나간 후에 170년을 더 살았고, 따라서 240년을 향유하고 죽었다고 나온다(욥42:16). 그리고 바울의 묵시록이라는 외경에 보면, 욥은 70세부터 고통을 겪기 시작하여 30년을 지냈다고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던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욥은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만을 겪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제자매와 친족들과 자신의 종들로부터도 버림을 받는다. 그러니 그 상실감은 어떠하였겠으며, 자신의 친구들마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갔으니 얼마나 힘들었던 것일까?

 

3. 회개의 비밀과 영의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욥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욥은 사실 인품도 좋았고 신앙도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탄 마귀에게 자랑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훌륭한 사람이었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고 30년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첫째, 욥은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욥에게 있어서 영의 눈이 완전히 떠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았다(욥23:8~9). 비록 그가 꿈과 환상 정도는 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욥7:14), 자신의 영의 눈이 떠지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자신의 재산과 자녀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건강을 잃어버린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욥의 영성은 초보적인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하에 사탄 마귀가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주시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왜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을 안겨주느냐면서 하나님께 항변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적 세계를 모르는 것은 그의 세 친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째, 욥은 율법적인 행위가 지닌 한계를 모르고 있었다. 욥은 율법의 행위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자신은 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원시적인 율법의 기준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고스란히 실천하고 있었다. 일례를 들어본다면, 그는 자신의 자녀들이 행여 잔치 때에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했을까 봐 잔치가 끝나면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번제를 드릴 정도였다(욥1:4~5). 욥의 모든 행사가 다 그와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율법에 비추어서 흠이 될 만한 일들은 전혀 행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곧바로 제사를 드려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온전한 자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얼마나 흠없는 사람이었는지는 욥기서 31장에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10가지 사항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즉 그는 어떤 쾌락이나 유흥을 추구하지 않았고,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남의 아내와 간음하지도 않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궁핍한 자에게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고, 우상숭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에게 복수하지도 않았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몰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위선적인 행동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무리 율법적으로 흠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몸에 이미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은 잘 몰랐다. 고백하기를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치신 이유가 바로 자신이 젊었을 때에 지은 죄로 인하여 형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욥13:26~27). 그랬다. 그도 젊었을 때에는 죄를 짓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그 죄로 인해 제사는 드렸겠지만 그는 회개를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자신의 몸속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에게까지 내려와 있는 것도 사실 잘 몰랐다(출20:5). 그러므로 자신의 현재의 삶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에 그는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들과 조상들이 지은 죄들로 인하여 자신의 몸에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오직 회개만이 자신의 죄된 본성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게 해 주며 원래대로 자신을 회복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욥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속죄제사는 드려왔지만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율법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제사를 드렸기에,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율법 말씀을 어겨 죄를 지었을 때에, 제사만 드린다고 해서 악한 영들이 떠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속에는 많지는 않아도 악한 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참고로, 사람의 몸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신학적으로는 '죄된 본성'이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아무리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과거에 지었던 죄로 인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과 조상들이 물려준 악한 영들은, 오직 제사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한 죄된 본성들(영들)은 오직 자신의 입술로 죄를 자백하여 용서받을 때에 자신의 몸에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몸안에 남아 있는 죄된 본성 곧 악한 영들 때문에 30년간 시험을 받으면서 그 영들로 인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4. 욥은 고통을 겪는 동안 어떤 죄를 범하고 말았는가?

  욥이 자신의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을 잃어버렸을 바로 그 시기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징계가 철회되지 않자, 욥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악한 영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3가지 죄를 범하고 만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원망 불평의 죄를 짓고 만다(욥7:10, 10:1). 그는 먼저 하나님을 저주할 수 없으니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욥3:1). 왜 자신이 어머니의 태 속에서 나올 때 죽어 나오지 않았을까 하면서 탄식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겠다고 말하면서, 왜 자신이 이런 고생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욥7:10).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물을 사해 주지 않고 죄악을 제거해 주지 않아서라고 항변한다(욥7:21). 그리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지니까, 불평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치시는지 모르겠다고 따진다(욥10:1,17). 고통의 기간이 길어지니,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술로 불평의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그는 비교적 작은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불신앙의 죄를 짓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속에 남아 있는 악한 영들로 인하여 언젠가 혹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과 건강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다고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3:25~26)" 그랬다. 그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는데,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롭다고 함으로 교만한 마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다가 그만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판단해 버린다(욥32:1~2). 죄를 지은 것이 자신에게는 없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통 속에 밀어넣었다고 판단하고는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한 일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게 여기는 마음 곧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5. 욥은 어떻게 되어서 회개하게 되었는가?

  그러하면 욥은 어떻게 되어서 회개하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이때 욥이 회개를 시작하게 되었던 그 출발은 젊은이 엘리후의 강력한 책망 때문이었다(욥32~37장). 욥은 엘리후의 변론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행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엘리후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항목을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말은 이러했다. 첫째,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지만 사람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의로움보다 클 수가 없다고 했다(욥33:12).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문제에 대답하지 않으심은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함이라고 했다(욥33:17). 셋째, 욥은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잘못되었다고 정죄할 수는 없다고 했다(욥34:17). 넷째, 그래도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욥은 끝까지 하나님의 시험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다(욥34:36). 다섯째,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주님을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욥36:23). 결국 엘리후는 욥이 무지하여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없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고 책망한 것이다. 그러자 욥은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욥은 절대 알 수 없는 일들 곧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일들을 욥에게 질문하심으로 비롯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일들과 하늘과 자연 만물이 운행하는 이치를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대답해 보라고 하신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던진 질문들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만 자신의 입술을 가릴 뿐이라고 말한다(욥40:4~5). 그리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웠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깨닫지도 못한 것을 말해 왔었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일들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욥42:3). 그래서 그는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면서 회개하기 시작한다(욥42:6).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무지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기에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었으며, 율법 준수만을 최고로 여겼기에 악한 영들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고, 회개만이 악한 영들을 내보냄으로 진정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만이 모든 곤경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비로소 회개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6. 욥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의  곤경에서 벗어나 회복될 수 있었는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세 친구들도 역시 무지한 상태에서 욥을 정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표시로 세 친구들이 자신에게 와서 번제제사를 드릴 때에 그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라 말씀하신다. 그러자 욥 자신도 무지로 인해 하나님께 따지며 항변했던 일이 있었기에, 욥은 기꺼이 자신의 친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욥42:7~9).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모든 곤경에서 돌이켜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욥42:10). 

 

7. 욥이 회개하고 자신의 친구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하여 욥은 자신의 영적인 무지함과 자신의 잘못을 먼저 회개한다. 그리고 친구들의 죄까지 대신하여 빌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모든 곤경에서 돌이켜 주신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잃어버린 '건강'과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게 해 주신다(욥42:10~11).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앓았기에 피부가 시커멓게 변해 버려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왜냐하면 그의 범죄와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그에게 악성 종기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사라지니, 몸이 회복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나간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이전에 알던 자들이 다시 돌아와서 그를 위로하면서 그를 원래 지위로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게 해 주신다(욥42:10,12). 그런데 그것도 두 배로 복을 주신다. 그래서 양과 낙타, 소와 암나귀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회개로 인하여 그에게 역사하고 있던 '재산을 잃게 하는 영'이 그에게서 떠나갔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잃어버린 자식들 대신에 다시 10명의 자식을 주시되 이전보다 훨씬 더 빼어나고 준수한 자식을 허락하신다(욥42:13~14). 그중에 그의 세 딸들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이라고 소문이 난다. 왜냐하면 회개함으로 인하여 그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죽음의 영''과 '살인의 영'이 욥에게서 완전히 떠나갔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욥 자신에게 장수의 축복을 허락하신다(욥42:16~17). 그래서 욥은 이 일 후에도 70년(혹은 140년)을 더 살면서 자손 4대를 보았고 늙어서 장수하고 주님 품에 안긴다. 

 

8. 나오며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회개의 대표자가 있다면 아마 그는 바로 '욥'과 '다윗'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 '욥'은 이방인의 회개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고, '다윗'은 할례받은 자의 회개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 역시 범죄를 했으나, 다윗은 놀랍게도 곧바로 곤경에서 벗어나게 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죄를 지은 후에 어떻게 했느냐에 있어서 달랐기 때문이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에 용서받기 위해서 속죄 제사를 먼저 드리지 않았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회개를 먼저 했던 것이다. 그는 회개의 비밀을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다윗은 회개를 행함으로 자신의 죄도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 들어온 악한 영들도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욥은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잘 몰랐기에 30년의 세월 동안 기나긴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아마 그가 사탄의 시험을 받은 즉시 회개를 시작했더라면 그는 좀더 빨리 모든 것에서부터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가서야 그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회개'야말로 회복을 최고로 그리고 가장 빠르게 가져오는 지름길인 것이다. 

 

 

2023년 02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보통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서'하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이신칭의의 복음과 충돌되는 책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 책은 그러한 책인가? 이 책은 정말 사도적인 저작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책이며, 성경책에서 빼어버린다고 할 지라도 별 문제가 없는 책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 말씀이 산상수훈 곧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보서를 왜 하나님께서 성경책으로 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서강해의 첫번째 시간으로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특히 이 책의 저술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2022-03-23(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1) 야고보서 대체 어떤 책인가?(약1:1~12)_2022-03-23(수)

https://youtu.be/ohj4thygcaY [혹은 https://tv.naver.com/v/25816992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어떤 책인가? 야고보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서신서에 해당한다. 그리고 서신서 중에서도 일반서신에 해당한다. 사실 서신서는 바울서신과 나머지 일반서신으로 나누는데, 바울서신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며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고보서는 야고보서가 쓴 1권의 책이니까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27권의 신약성경을 주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서신서에도 균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서신과는 상당히 차이나는 일반서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은 일반서신 중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다루려고 한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서, 저자인 야고보는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며, 무슨 목적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서 1:1~12까지에 나오는 시험(시련)을 대하는 자세와 시련을 이기는 방법 그리고 시련을 이겨낸 자가 받게 될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2. 야고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야고보서는 대체 누가 쓴 책인가? 우리는 야고보서 1:1에서 이 책을 쓴 저자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였던 '야고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맞다. 그럼, '야고보', 그는 누구인가? 과연 그는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야고보중의 한 사람인가 아니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제3의 인물인가? 혹 그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라면 그는 대체  여러 야고보들 중에 누구인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야고보'에는 약 네 명의 인물이 있다. 그중에 3명이 알려져 있는데, 첫번째로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도 있다. 이는 보통 '작은 야고보'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도 있다. 그런데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A.D.44년에 제일 먼저 순교자가 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행12:2). 그리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A.D.62년경에 순교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갈1:19, 마12:46~50)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의 형제 야고보, 그는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에는 불신자였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개인적으로 목격한 이후에(고전15:7),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가의 탄생하고 스데반의 순교하자 대부분의 사도들은 흩어지고 그 책임을 야고보가 맡는다. 그래서 A.D.49년경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에 의장역할을 맡는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기둥같은 인물이었다(갈2:9). 유다서의 저자였던 유다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할 정도로(유1:1), 야고보는 초대교회 당시 널리 알려진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가 A.D.49년에 안디옥과 스리아와 길리기아에 보낸 편지의 흔적이 사도행전 15장에서도 나오는데, 그때도 약1:1에 나오는 인삿말처럼 "문안한다"라는 말을 부정사 형태로 언급한다(행15:23). 그럼,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누구에게 왜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인가?

 

3. 야고보서는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그럼, 야고보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인가? 야고보서 1:1에 의하면, 그는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12지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흩어짐('디아스포라') 안에 있는 자들인 열 두 지파들"이다. 그런데 사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낼 당시에 이스라엘은 3개의 지파만이 남아 있었다. B.C.722년 이후 북이스라엘의 10개의 지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9개 지파인데, 므낫세 지파가 요단강을 중심으로 반지파씩 땅을 분배받았기에 10지파로 본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스라엘이 12개의 지파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3개 지파에 있어서 두 번의 '디아스포라'(흩어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B.C.586년에는 남유다가 느부갓네살에게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거기에서 정착하여 살면서 점차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신약시대에 스데반의 순교이후(행8:1)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두번째의 디아스포라 사건으로 전 로마제국의 각지에 흩어진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짐' 안에 있는 12지파들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의 유대인이자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편지를 보낸 대상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야고보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왜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108구절을 전부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있고, 감추어진 채 있는 이유가 또 하나다. 먼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는 로마의 각지로 흩어져있는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 각지로 흩어젼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도 원래는 유대인들이었기에 로마 각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나간다. 그런데 이 때 2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호감을 갖고 받아들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전자는 주로 부자들이었고 후자는 주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유댕인들은 A.D.70년 나라가 멸망한 후에 거의 다 죽고, 약 10만명 정도가 포로가 되어 로마에 이송된다. 그들의 자손들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점차 자유인이 되어갔고, 바벨론 포로이후에 자유민이었던 유대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나라는 이미 망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들에게 가나안땅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고는 믿음으로 돈을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바치는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회당으로 들어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부자들인 자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배척을 받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배척받고 있는 비천한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리고 부자들이었지만 가난한 형제를 돕지 않는 부자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부자들에 대한 언급이 세 번이나 나온다(약1:9~11, 2:1~9, 5:1~6). 그런데 갈수록 그 강도가 세진다. 즉 처음에는 부자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가진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약1:9~11). 왜냐하면 부요함은 풀의 꽃과 같아서 금방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홀대했던 것을 책망하기 시작한다(약2:1~9).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부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그들에게 임할 책망과 진노를 강하게 말한다. 그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으니 하나님을부터 불의 심판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야고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첫번째 이유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두번째의 숨겨놓은 동기가 있다. 그것은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처음에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었지만 점차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가려먹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교회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도 받고 믿음만 있으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받는다는 교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데에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 잘못 와전되어 전달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했지만 여기서 이방인들이 지키지 않아도 될 '율법의 행위들'은 전부 의식법(제사법, 절기법, 정결법, 할례법, 음식법)이었던 것이지 한 번도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그만 여기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형제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예수님만 믿고 있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는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되어 있다. 특히 객과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은 반드시 실천하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야고보서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엄하게 책망한다. 행위들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말이다. 그러한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두번째 저술 목적인 것이다. 

 

5. 야고보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1:1~12에는 어떤 말씀인가?

  야고보서는 얼핏 보면 중구난방식(衆口難防)으로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뚜렷한 구조나 체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서신서에 속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작 부분의 한 개 구절에서만 '문안인사'라는 형식을 갖추고 쓰고 있을 뿐만 서신형식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또한 내용도 단편적인 교훈들이 산재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야고보서도 일정한 구분이 지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야고보서는 3가지 주제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의 첫번째 부분(서론)은 '시험(시련)"이고(약1:1~18), 두번째 부분(본론)은 "믿음과 행함"부분이며(약1:19~5:6),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부분(결론)인 "고난"의 문제를 각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첫번째 부분(서론)(약1:1~18)을 살펴보면, 이 부분의 주제는 "시험에 의해 검증되는 참된 믿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한 성도의 바른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약1:1~18의 첫번째 부분(서론)을 나눠서 보면, 첫째로, 1~12절에서는 시험 곧 시련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 13~18절에서는  사람이 시험 곧 유혹을 당하는 원인은 인간 내부의 욕망에 있음을 지적한 이후 진정으로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 특히 1~12절에서는 이 편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문안인사(1절) 후에는 시험 곧 시련의 시험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2~12절). 이때  야고보가 제시하는 성도의 자세는 4가지다. 첫째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2~4절). 둘째는 하나님께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5~8절). 셋째는 가난한 자는 오히려 당당해지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9~11). 왜냐하면 부함은 풀은 마리고 꽃이 시듦같이 금방 쇠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는 시험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복 곧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12절). 그리하여 성도들이 시험중에 있더라도 끝까지 인내로 시험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6. 나오며

  야고보서는 성도들에게서는 보통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을 말하는 책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를 과연 누가 썼으며, 어떤 대상에게 썼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맥락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과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충돌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바울의 이신칭의와 야고보서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다른 평행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의 복음은 신앙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서신이라면, 야고보서는 신앙의 여정을 다 마치려할 즈음에 필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과 야고보의 행함있는 믿음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편만을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서신서를 읽고 싶다면, 사도바울의 책(12권)만을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와 상반되는 책으로 간주되는 일반서신의 책도 같이 읽어야 한다. 특히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일이삼서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신앙의 여정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차 들어갈 천국을 대비해서도 동시에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오늘날처럼 한 번 믿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되며, 한 번 믿으면 과거에 지은 죄와 현재 짓고 있느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사함받을 것이라고 믿는 이 세대 사람들을 깨우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바른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산상수훈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야고보서라는 성경 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2022년 03월 23일(수)

정병진목사

 


  골1:24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는데, 과연 그분께서 감당하지 못하고 남겨두신 고난이 있다는 말인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그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자신의 육체 안에 채운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당시에 무엇을 채우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라어원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로 된 성경으로 보면, 똑같은 단어인데도 번역자에게 따라 약간의 상이한 번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바로 그러한 부분 중의 하나다. 먼저,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으로 말씀을 읽어보고, 헬라어원문에 따라 직역해보도록 하자.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개역개정]

골1:24 나는 지금 너희를 위하여 고난 가운데서 기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환난의 부족한 부분을 그의 몸을 위하여 내 육체 가운데 채운다. 그것은 교회다.[직역]

  그렇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사실상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두신 고난은 없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가 받을 고난을 다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담당하신 고난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고난이 한 부분이요,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낫게 하시기 위한 고난이 또 한 부분이다. 앞의 고난은 그분의 육체가 죽는 고난이요, 뒤의 고난은 그분의 육체가 상함으로 받는 고난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가 받은 고난의 영역이 2가지였던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질병을 없애기 위한 고난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의 죄를 없애주기 위한 고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없애기 위해 째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예수게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는 고난을 받으셨다.

  어느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고 하자,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다윗의 왕국을 세우실 날이 도래했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내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자신을 앉혀 달라고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한 부탁의 대표는 요한과 야고보 제자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이렇게 물었다(막10:38~40).

막10:38-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렇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고난의 잔을 가리키고, 죽음의 세례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면 그리스도가 당하실 고난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해야 할 고난이 그것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피조물의 형상인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 그래야 고난을 당할 수 있고 피흘려 죽으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고난을 다 당하셨음을 큰 소리로 외치셨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지불해야 할 질병의 값과 죄값을 다 지불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또 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들어가야 인류의 질병이 없어지고 인류의 죽음이 해결되는 그러한 고난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다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남겨두신 고난은 위에서 말하는 질병을 대신 담당하는 고난이 아니며, 죄값을 대신 담당하는 고난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받아야 할 환난을 가리킨다.

  먼저, 헬라어원문을 보자.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의 환란의 부족한 부분"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고난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할 환난인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환난'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바로 '들립시스'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온전케 하려 할 때 우리가 당하게 될 환난과 역경과 고뇌와 고통을 가리킨다. 이것이 없다면 교회는 사실상 교회가 세워지기가 어려우며,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온전케 되기가 어려울 것이.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행20:23~24).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들립시스)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이 환난은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은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들립시스)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렇다. 우리 인간들은 불완전하다.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된 본성을 자기 육체 안에 가진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환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환난은 징계라는 것도 들어가 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불완전한 교회이니까 그 교회가 거룩해지고 그리고 온전해지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환난이 거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이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롬5:3~4).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들립시스)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들립시스)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의 신앙이 정금같은 신앙,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신앙이 되기 위해서 환난은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요 필요한 요소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환난이 없다면 우리가 버림받은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소다. 그러므로 결국에 천국에 들어간 자들은 이러한 환난을 겪고 이겨낸 자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백성이 누구인지를 보라(계7:13~15).

계7:13-15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들립시스)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떠나시기 며칠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요16:33).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거나 신앙에 실패하도록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너진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고 신앙의 길을 올바르게 가도록 세워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 가운데서 닥치는 환난을 당할 때,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것 없이 우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가 어려우며, 깨끗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고난에 대해서도 조금 더 살펴보자. 조금전에 고난이란 질병값과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순교하는 자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급은 환난을 받는 성도들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그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롬8:17~18).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이러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작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난당하는 자를 놀랍게 보상해주신다. 그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는 것도 한 가지 대처 방법일 것이다.


  한편, 사탄이 주는 이러한 고난을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핍박'이요, '박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핍박과 박해를 만나면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에게 주어질 상이 매우 클 것이기 때문이다(마5:10~12).

마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렇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 이런 것들은 결코 좋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다 아픈 것이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정금같은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죄와 허물  투성이인 우리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올 때 이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말라. 이것은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하여 받는 환난이 있다면 그때에는 빨리 회개하라. 그리하여 그러한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탈출해 나오라. 혹 만약 그것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회개하라. 그리고 회개한 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환경과 질병을 꾸짖어버리라. 그리고 끝까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힘쓰라. 그리고 교회가 온전해질 때까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앞으로 전진하라.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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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이 영생을 얻는 조건은 무엇일까? 요3:16에 의하면, 영생얻는 조건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것이다. 하지만 눅18:18에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쭉 따라가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쪽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한국교회는 후자의 경우는 쏙 빼어버렸다. 그때로부터 값싼 구원론이 한국교회 안으로 물밀듯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함량미달의 성도들로 넘쳐났고 결국 오늘날 그 열매들을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믿는 자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계획은 제자였지 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3년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지만 그 사실을 말씀해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하자, 예수님은 이제는 그들이 꼭 알아야 할 제자도에 관해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3가지였다. 첫째, 자기자신을 부인하라. 둘째, 자기의 십지가를 지라. 셋째, 그리고 나서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라.
  먼저, 자기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정말 귀중이 여기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 자신의 의지를 꺾고 기꺼이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자. 사실 베드로가 3년전에 처음으로 주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왜 주님을 따라갔던 것일까? 물론 주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적어도 이런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니, 이 사람을 따라가면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을거야! 그리고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범상치가 않으니 뭔가 좋은 일도 분명 있을 거야!" 그런데 막상 그들이 주님을 3년동안 따라다녀보니 주님은 선지자 이상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였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시고는 자신의 속내를 비로서 드러내셨다. 주님께서는 곧 고난받고 죽으러 간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말린다. 꾸짖듯이. 그때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더러 주님을 따라오면서 품어왔던 생각과 야망을 이제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르다면 기꺼이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당신도 주님의 뜻과 생각에 당신의 뜻과 생각을 맞출 수 있는가? 여러분 자신의 뜻과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둘째,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반역죄인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사형도구다. 그러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하며, 때로는 멸시시천대를 받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지금 주와 복음을 위하여 이러한 멸시와 천대, 고난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도 날마다.
  셋째, 그리고 나서 주님을 따르되 이 세상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따르라고 하셨다. 한동안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1년 과정의 제자훈련을 통해 선발된 사람은 목회자와 한 주에 한 번씩 만난다. 그리고 매일묵상한 것을 나누고, 성경2구절을 암송하고, 경건서적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며, 짜여진 커리큘럼에 따라 한 과씩 공부를 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졸업여행을 다녀오고 그리고 졸업식을 한다. 그러면 제자반 제 몇기라고 해준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완성된 제자는 없다고 하셨다. 죽을 때까지 제자의 길을 걸어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교회는 너무나 쉽게 성도들을 제자로 만들어주고 말았다. 생각해보라. 과연 오늘날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가족과 생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주님께 내놓을 각오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 교회에 참된 제자가 없다. 아니 교회에 커리큘럼으로 제자훈련과정은 있지만 제자다운 제자가 없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자신의 야망과 성공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따라가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너, 이제는 네가 추구하는 그것을 버리고 나를 따를 수 있겠니?"하고 묻는다면 기꺼이 주님만을 따르겠다고 할 자가 얼마나 있을까? "너, 나를 따르다보면 나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니?"라고 묻는다면,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의 시대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많지만 제자가 없다. 사실 주님께서는 제자가 되면 3가지 복을 받는다고 하셨다. 하나는 영생이요(막10:29-30) 또 하나는 하늘나라에서 왕노릇할 수 있는 권세요(눅22:28-30), 셋째는 영광의 상급으로서 면류관이다(딤후4:7-8). 하지만 제자가 없다. 영생얻을 자가 거의 없는 것이다. 당신도 베드로처럼 신앙고백만 하지 말고, 이제는 진짜 제자가 되어보라. 자기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제자가 되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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