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11) 다윗의 감사기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특징(삼하7:18~29)_2022-01-17(월)

https://youtu.be/IsMdZRtmWJo [혹은 https://tv.naver.com/v/24992136 ]

 

1. B.C.995년경 45세가 되었던 다윗은 어떻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가?

   다윗은 30세에 유다 왕이 되었으며, 37세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7년 6개월이 흘러 그의 나이 45세가 되었을 때에 주변의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도 편안하게 왕궁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미 5년 전에 법궤를 자신의 성에 모셔다 놓았지만 그는 늘 법궤를 펄럭이는 휘장 가운데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자신이 여부스인들의 산성을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로 왕 히람이 사람들을 보내어 자신을 위한 백향목 궁궐을 지어 주어서 거기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날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마음에 있던 말을 전한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성전을 지어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말리시면서, 자신이 집이 필요했다면 진즉 다른 사람들을 시켜서 자신의 집을 지어 달라고 했을텐데 당신은 어디에나 계시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윗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언젠가는 누군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만은 받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히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왕조)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자 다윗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2. 다윗의 감사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다윗의 감사 기도(삼하7:18~29)는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는 현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로운 언약에 대한 감사가 나온다(18~22절). 그리고 두 번째는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기적적인 은혜에 대한 감사가 나온다(23~24절). 그리고 세 번째는 앞으로 미래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해 감사한 것이다(25~29절). 이처럼 다윗은 현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고, 또한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으며, 앞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게 베풀어 주실 미래의 은혜에 감사했던 것이다. 

 

3. 다윗의 감사 기도에서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은 무엇인가?

  다윗의 감사 기도를 하나하나씩 살펴보면 다윗의 감사 기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거절한 것에 대해 그 어떠한 불평이나 원망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그때까지 자신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으며, 앞으로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있게 될 미래의 일까지 알려 주신 것에 감사했다. 그러므로 다윗의 감사 기도에는 반항이나 거부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믿었기에 다윗은 그분의 말씀에 다만 순종하는 자세만을 보인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겸손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자신을 철저히 낮췄다. 자기와 자기의 집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양떼를 치는 데서 데려다가 왕을 삼아 주신 것에 대해 매우 매우 감사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기도에서 무려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당신)의 종"이라는 표현을 무려 9번이나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주 여호와"라는 호칭을 무려 6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주인이며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또한 그분이 행하신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을 찬양하였다. 즉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된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으며, 그분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고백했다(22, 28절). 그리고 그분이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셨던 위대한 일을 찬양했다(23~24절). 셋째, 그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정해 주신 분량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 이상을 구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 언약이 꼭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욕심이 지나쳐 분수 이상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4. 하나님과의 친밀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가 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일반적으로 얼마나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하나님께 얼마나 빨리 상달되고 응답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명확한 것은 하나님과 친밀할수록 하나님과의 통로가 잘 열려 있다는 것이며, 그 사람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까지 직접 나아가는데 아주 시간이 짧게 걸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가는데 가장 빠른 사람은 약 2~3초 걸린다고 말한다. 직접 자신의 영이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자신의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 보내는데 그 시간이 적어도 4~5분 이상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시간이 아주 짧게 걸리는 분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의 분량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친밀할수록 감사를 아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윗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고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는 온통 감사의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겸손했을 뿐만 아니라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대단히 높은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5. 신약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한 사람은 누구인가?

  신약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성경 기록으로 볼 때에 가장 많이 감사를 했던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죄인의 괴수였고(딤전1:15),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즉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것이다(딤전1:13).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기에는 전혀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대한 사도로 들어서 사용하셨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편지들 곳곳마다 그는 얼마나 감사했으며 또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감사할 것을 명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추측컨대 그는 아마도 영성에 있어서 상당히 깊은 경지에 들어갔던 인물같아 보인다. 그중에서도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서 구원받은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소개해 주는데 그것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라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가 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감사를 잊어버렸는가? 지금부터라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기를 바란다. 다윗은 정말 감사를 많이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022년 01월 17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34) 아가서강해(24)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신분과 그분의 놀라운 사랑(아8:6~7)_2021-10-19(화)

https://youtu.be/bn5-P6fjzUQ  [ 혹은 https://tv.naver.com/v/23047159 ]

 

1. 아가서는 주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가?

  아가서는 주님을 사랑하되, 우리가 그분을 도장같이 우리의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우리의 팔에 새길 것을 권면한다. 이는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르친 '쉐마'와 비슷하다(신6:4~9). '쉐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가르치며 강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자기 집의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까지 말한다. 그만큼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라는 것이다. 

 

2. 솔로몬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솔로몬은 사랑을 아가서 8:6b~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스올같이 잔인하다. 질투는 불길같이 타오르나니, 그것의 기세가 가장 강력한 불길같다. 많은 물일지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할 것이며,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랑은 자기의 모든 재물을 다 주고 사랑을 얻으려고 할지라도 그는 정녕 멸시를 받고 말 것이다(아8:6b~7)." 이것은 결국 사랑의 힘과 위대함과 값어치를 제대로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을 질투라고 표현하는 말이 중간에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질투'는 시기심이 아니라, 일종의 열정이요, 열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질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킨나흐'라는 단어로서, 그 뜻이 원래는 '열성, 열심, 특심'에서 비롯되어서 '부러움'으로, 다시 '시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기도 하며(출20:5), 하나님께서 열심을 내어 당신이 이미 하신 말씀을 성취할 것임을 약속하기도 한다(겔39:25, 왕상19:14, 사9:6~7). 한 마디로 사랑은 불타오르는 열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도 '열정'을 건드릴 수 없고 그러면서도 누구도 소멸시킬 수 없는 위대한 '열정'인 것이다. 

 

3. 아가서에는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는 솔로몬을 어떤 신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아가서에는 솔로몬의 신분을 4가지로 소개한다. 그는 첫째, 예루살렘의 '왕'이면서(아1:4,12, 3:9,11, 7:5) 동시에 둘째, '포도원의 주인'이다(아8:11). 그리고 그는 셋째, 동산에서 양을 치는(먹이는) '목자'이면서(1:6, 2:16, 6:2~3), 넷째, 동산에서 백합화를 돌보는 '동산지기'다(아5:1, 6:2~3). 특히 아가서는 솔로몬이 왕이라는 것을 많이 강조한다. 그래서 그가 술람미 여인과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에도 '왕'이었고(아1:4,12), 결혼식을 거행할 때에도 '왕'이었으며(아3:9,11), 결혼한 후에도 '왕'이었음을 계속해서 말한다. 이는 그의 신분은 고귀한 왕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원까지 심방하여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에게도 관심을 가졌음을 말해 준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지만 기꺼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포도원지기로 고생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말해 준다. 그렇다. 아가서를 읽어 보면 왕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로지 포도원과 동산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는 포도원의 농부와 동산의 양 떼 그리고 동산의 백합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아가서에 등장하는 '포도원 농부'는 죄에 매여 일평생 종노릇하는 인간을 상징하며, '양 떼'는 장차 천국 백성이 될 인간들을 가리키고, '백합화'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성도들을 가리킨다. 

 

4. 왕은 어떻게 시골 처녀를 사랑했으며, 결혼한 시골 처녀는 자신의 신랑을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했는가?

  왕은 처음부터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잃어버린 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잃어버린 단 하나의 자신의 짝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왕이니까 그냥 사람시켜서 데려오라고 했어도 되었지만 그는 결코 그냥 왕의 권한을 이용하여 술람미 여인을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보여 주었고 청혼을 하였다. 그때 연애 시절에 솔로몬은 한 번 그녀를 잔치집(포도주의 집)으로 데려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솔로몬은 그녀의 머리 위에 깃발을 하나 세워 주었는데 그 깃발에는 '사랑'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아2:4). 그가 포도주의 집에서 자신의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부는 결혼 후에 그녀가 얼마나 신랑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가 남편에게 드린 사랑은 3가지였다. 첫째는 그 때의 시간으로 포도원에서 꽃이 피어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와 석류나무였다. 둘째는 이미 거둬 놓은 열매들이었다. 셋째는 지금 거둔 새로운 열매들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성장하여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자기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약2:26).

 

5.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려면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신부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 백합화 같고 비둘기 같은 정결하고 정절을 가진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째는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밤의 두려움을 이기려면 영적 전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 땅에 포도원을 개척하여 다른 신부들을 산출하고 양육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은 이 일은 다 원래 주님이 하시던 일이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성장한 후에 그녀가 보여 준 것은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으며, 과거에도 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다(아7:12). 그래서 우리도 술람미 여인처럼,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변함없는 신부, 그리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신부이자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는 신부, 그리고 오직 주님이 하고 있는 일에 자신도 기꺼이 뛰어들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신부, 그리고 그러한 일을 행할 때에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불어닥쳐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신부, 그리고 세상 풍조가 아무리 치고 들어와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오직 백합화처럼 일편단심으로 주님께 바치는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21년 10월 19일(화)

정병진목사

 

창세기 18장에 보면, 인간 앞에 나타난 하나님께 사람이 드린 최초의 기도가 나온다. 그때에는 이 땅에 있는 아브라함이 사람으로 자기 앞에 오신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드리는 중보기도였다. 그런데 이때 드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응답이 곧바로 떨어지게 했다. 대체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길래 즉시 응답되는 기도가 될 수 있었을까? 오늘은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기도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2021-05-0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창세기강해(93)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기도의 특징(창18:22~3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ySQ-GNyd_Q  [혹은 https://tv.naver.com/v/20146245  ]

 

1. 들어가며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리고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다. 그분이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꺼내신 것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신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한 어떤 뜻과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것을 알아차린 아브라함은 즉시 자기 앞에 서계신 한 분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시작한다. 그리고 즉각즉각 응답을 얻아낸다. 대체 아브라함은 어떤 기도를 드렸길래 이렇게 즉석에서 응답받을 수 있었는가? 그의 중보기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우리도 기도를 해야 할 사람들인데 우리도 어떻게 하면 즉각즉각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를 알아보자. 

 

2. 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꺼내셨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어 음식을 공궤받으신 적은 창세기 18장에서가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드셨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래가 있는지를 물어보고는 반드시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오게 될 텐데, 그때에는 그의 아내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떠나려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두 천사와 함께 한 하나님을 배웅하러 나갔다. 그러자 길을 가다가 멈추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장래의 축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를 불러내신 이유도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에 대해 예고해주셨다. 그성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기에 가서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지금 그러한 사실을 몰라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을까?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시는가?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요, 거기에 있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는 롯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명의 천사들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떠났다. 그러자 아브라함 앞에 하나님만 서 계셨다. 

 

3. 오늘날 우리의 중보기도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때다 싶어 즉시 중보기도를 시작한다. 사실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아마 이러한 기회는 사람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늘에서 듣고 계신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아브라함의 바로 눈 앞에서 듣고 있는 것이다. 때를 이때다 싶어 아브라함은 즉시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작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를 살펴보니, 응답받는 기도란 대체 어떤 기도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람이 서 있을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대체 어떤 상태가 되었길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는가? 여기에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 오늘날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어떤 경우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서 기도드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될 수 있게 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지금 하나님의 면전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사실 2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아브라함이 비로소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 12~16장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던 74세부터 99세때까지 그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아갔다. 그래서 창세기 18장에 와서는 이제 아브라함도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자 전능하신 분에게 간구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누가 과연 하나님 앞에 서서 응답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어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을 믿는 순간에서부터다. 둘째, 아브라함이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를 하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실수 때에도 자신이 무엇을 날못했는지를 잘 몰랐다. 그러니 두번째 실수로 이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이니만큼 아내의 말을 들어 첩을 들여서 자식을 낳는 것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 말았다. 이어 13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는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주지시키고 그에게 회개하라고 하였다. 이전에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에서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날 즉시 모든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 그럼, 이 할례는 무슨 의미인가? 사도바울은 이것을 영적으로 "세례"라고 해석했다.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날 아브라함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회개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중보기도에 대한 응답이 어떤 것은 잘 되지만 어떤 것은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중보기도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회개하고 있는 자인지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회개하지도 않은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지도 아니하신다. 이 두 가지 사항을 명심한다면 우리의 중보기도는 오늘부터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4. 아브라함 하나님께 드린 중보기도는 5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드린 최초의 기도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를 보면 아브라함의 기도가 왜 즉시 응답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그 이유를 정리하면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칭했는가? 하나는 "아도나이"라고 칭하였다(창18:30). 이는 그가 하나님을 모든 역사의 주인으로 고백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음사항이 더 중요한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세상(온 땅)을 심판하시는 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창18:25).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재판장이자 심판자로 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자기의 부족의 신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한 분 하나님을 모든 신들 위에 있는 신이요,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분으로서, 온 땅을 통치하는 신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당신을 온 땅을 심판하시는 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하나님은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드리는 기도였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요청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고 그것을 꺼내어 말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공의로운 분께서 의인과 악인을 같이 죽이려 하심은 부당한 것이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취급하심도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온 땅을 심판하실 분이 공의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창18:23~25)"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었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로우신 분이 재판을 불의하게 행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셋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과 겸손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분의 모든 것은 공의로워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롯의 구출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겸매우 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청구할 것은 청구하기는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며 부질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기도의 두번째 간구에서는 "보소서,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아도나이에게 아뢰나이다(창18:27)"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었고, "아도나이여,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노하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했던 것이다(창18:30,32). 그리고 "내가 감히 주께 아뢸 수 없는데도 아뢰오니 나의 청을 들어달라"고도 하였다(창18:31).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께서 한 번 훅 불어버리면 날아가서 없어질 먼지같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끈질기게 매달리어 간구하는 모습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한 번 기도로 끝내는 그러한 기도가 아니었다. 어찌하든지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또 구하고 또 구하는 그러한 기도였던 것이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의인이 50명이 있다면 그 성을 멸할 것인지에 대해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보시고는 그렇다고 한다면 그 성을 멸하지는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금씩 조금씩 더 숫자를 줄이는 기도를 계속해 나간다. 어찌하든지 소돔성의 멸망을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성 안에는 자신의 조카 롯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면 그 성을 파멸에서 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돔성에는 롯의 식구가 최소한 8명 이상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돔 성 안에는 롯과 그의 아내, 결혼한 두 명이상의 딸들과 사위들, 그리고 결혼하지 아니한 두 명의 처녀딸들이 있었다(창19:12~14,16).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돔성이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의인의 숫자를 의인 50명에서 45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에서 결국 10명까지 낮추는 기도를 계속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소돔성이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최소 의인의 숫자를 10명까지 줄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성 안에는 의인 10명이 없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대범한 사람이었는지를 직감하게 된다. 그는 매우 겸손했지만 또한 매우 대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이 큰 일을 한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하는 형제와 이웃사랑의 마음이 빼곡히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자기나 자기가족을 위한 기도가 아닌, 자기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즉 자신의 형제와 이웃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였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 자기를 위한 기도는 어찌 보면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남을 위한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가 이처럼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이타적인 삶을 살려고 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는 자기가족을 위한 기도보다 자신의 조카 롯을 구출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먼저 드렸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드린 이러한 최초의 기도는 자기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으며 남을 위한 중보기도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중보자로 오셔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중보자적인 입장에서 드린 아브라함의 기도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뻐받으셨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어떻게 드려야 할 지 잘 모르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러한 분들에게 정말 추천할 일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사례를 한 번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도드릴 때에 과연 우리는 아떠한 상태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정말 주님께서 바로 내 눈 앞에서 내 기도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드리는지 잘 모르겠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정말 바른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얼마나 신뢰하고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회개를 한 상태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기도하고 있으며, 얼마나 끈질지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나보다는 얼마나 남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러나 이제 우리도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피고 회개하면서 기도한다면 우리도 즉각즉각 응답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2021년 05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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