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3) 주께서 들려주신 거듭남과 영생의 비밀(요3:1~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8KQFLbh96U  [혹은 https://tv.naver.com/v/29458957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과연 자기가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는데 그가 아직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거나 영생을 소유해지 못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리고 영생을 소유했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영생을 소유했는지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거듭나지도 않았고 영생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거듭남이나 영생을 얻는 것이 과연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서도 가능한가? 오늘은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과 더불어 그 해답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고자 한다. 

 

2. 니고데모는 누구며 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는가?

  니고데모는 그의 이름이 '니케(우세함,승리함)'와 '데모스(백성)'가 합쳐진 말로서, '백성 위에 우세함'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으로 볼 때 유대교 중에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는 율법을 매우 중요시하는 유대 종교 분파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의 지도자(통치자)였다. 그는 유대의 최고 중앙의결기구이자 최고재판소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율법에 있어서 최고 교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영적 갈증이 대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시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경계하고 있는 예수님을 밤중에 몰래 찾아올 리가 없다. 또한 그는 굳이 다른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먼저 예수님을 높이는 말부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온 채 있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절대 행할 수 없는 표적들을 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예수님을 율법의 정규과정을 다 밟은 자로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의 생각에는 예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도 더 뛰어난 분이요 율법에 대해서 뭔가를 더 알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율법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그가 가진 유대교의 율법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는 율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물과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 거듭남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께서는 율법 안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온 니고데모에게 한 가지의 대답을 통해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이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율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고 또한 영생을 얻는 방법은 율법 안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물과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요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거듭 태어난다'고 하신 말씀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헬라어로 '아노덴'으로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아노덴'이라는 말은 '다시, 새롭게, 위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겠느냐면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육체로부터 태어난 채 있는 것은 육체가 되는 것이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어야 영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3:6). 그런데 여기에 보니, 거듭남의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물'도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며,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물'에 대해서는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잘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그것은 '물'은 정화의 수단으로서, '세례'로 예표되는 것인데 그것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행2:38, 딛3:5).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그렇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훗날 자신이 죽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다고 말했다(고전15:45). 고로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먼저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처럼 사람은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사람이 거듭 태어나게 되면 그 순간에 무슨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며, 그를 돕기 위해 그 사람만의 수호천사가 파송이 된다. 

 

4. 사람은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먼저는 회개해야 하며 또한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먼저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뉘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난 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이 자신의 죄를 없애는 것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신다. 이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방법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수단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은 결코 율법을 지켜서 거듭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거듭남은 오직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사역을 믿고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을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니고데모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것은 곧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 사건이다(요3:14).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었을 때였다. 그들이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의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다. 모세더러 자기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인도해 냈느냐면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에 왜 데려왔느냐고 하면서 불평했다. 그리고 하찮은 만나같은 음식은 더이상 자기들에게 싫증난다고 외쳤다. 그러자 화가난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게 하셨다. 이에 독이 퍼져 고통받고 있을 때에 그들은 모세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가 여호와와 모세에게 원망하여 범죄를 했으니, 이 뱀들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지시하셨다. 그것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 뱀에 물린 자가 있으면 그것을 쳐다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살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자 모세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두었다. 그러자 백성 중에 뱀에 물린 자들 중에는 놋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독뱀에 물렸으면 빨리 독있는 피를 흘려버고 해독제를 먹어야 살아날 것인데, 놋뱀을 쳐다보았는데 그만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듭남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예수께서 놋뱀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인 것이다. 

 

5. 거듭남에 있어서 율법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왕국은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구원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율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정확히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율법으로는 사람이 중생할 수 없는가? 그것은 사람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것이 율법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온갖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자는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기 때문이다(신27:26). 사실 이러한 율법과 거듭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문제는 니고데모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훗날 사도 바울도 이 문제에 부딪혀서 약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 바울도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을 목도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21:23에 말씀에 따르면,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께서는 분명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정결법이나 음식법을 어기고 성전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죽고 없어진 그분이 어느날 생시에 그것도 대낮에 자기의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분이 살아서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바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자는 절대 다시 살아서 이 땅에 돌아올 수 없는데 그분이 자기의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과 그때 자기 눈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율법은 의롭고 거룩한 것이지기는 하지만,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 조항을 다 지키며 살아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율법의 온갖 저주를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려고 속죄양이자 아사셀양이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있는 모든 자로 하여금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되는 길을 새롭게 그분이 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예수께서 대신 받으신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셨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생명을 받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율법으로서는 도무지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저주를 받는 것이지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어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의 법칙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6. 영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는가?

  이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사도 요한은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지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16~21까지의 말씀이다. 이 부분을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가키려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 부분은 아무래도 사도 요한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하여 해설을 붙여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영생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이는 그를 믿고 있는 모든 자가 다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여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요3:1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 안으로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오히려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그분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하는 영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참고로 이것을 안다는 것을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요20:31).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이 앞의 3개의 공관복음서 외에 요한복음을 또 기록했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며, 그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먼저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주셨다(요5: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안에만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명'은 어느 시기에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세'다. '다음 시대'인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 자신의 영이 가서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생명을 이 땅에서 얻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는 사망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멸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이 생명을 얻지 못한 채 죽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사망'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있고 또 나를 보내셨던 분을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망에서부터 생명 안으로 옮겨진 채 있는 것이다(요5:24)" 그렇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컴컴한 곳으로 가서 살아야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한 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인류를 대신하여 죄값으로 십자가에 달려죽은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영생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고로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으로서, 이 생명을 가진 자는 죽은 후에 다음 시기에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 가서 거기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7. 사람은 왜 영생을 얻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사람 중에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빛으로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함으로 인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3:19). 그래서 악을 행하고 있는 자는 모두 다 빛을 미워하게 되는데, 이런 자는 빛을 향하여 나아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럽고 추한 자신의 죄된 행위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3:20). 그렇지만 오직 진리만을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그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자기의 죄를 예수님께 고백함으로 용서를 구한다. 또한 이런 자들은 빛되신 예수님 안에서 행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빛된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며 산다(요3:21). 그렇다.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빛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그분이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자기자신이 심판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그분을 믿고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때에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3:17~18).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래서 이 복음을 나만 알고 있지 말로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8. 나오며

  사람은 어떻게 거듭나며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리고 '거듭남'이란 대체 무엇이며 '영생'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는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거듭남과 영생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람의 거듭남은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으로서 이는 '회개'와 '믿음'의 방법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이유에서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다음 시대에 가져야할 생명으로서, 아버지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가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망'이란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곧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켜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 또한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도 없다.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지하고 사려깊은 니고데모라 할지라도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다. 율법보다 430년전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법칙이 지금도 율법보다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으니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거듭 태어나기도 하고 영생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알고 보면 이처럼 쉽고도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영생의 법을 모르고 있거나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먼저 믿어 거듭난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도리인 것이다. 

 

 

2022년 09월 21일(수)

정병진목사

 

 

천국, 예수님 시대 이후부터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못 들어가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대표는 '죄'다. 왜 그런가? 그 죄를 없이하려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최소조건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충분조건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 한 편의 설교가 우리의 미래를 엄청나게 바꿔놓을 것이다.

 

2022-02-27(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천국복음(07)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3가지 조건은 무엇인가?(마21:31~3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OX0pPhFbHo [혹은 https://tv.naver.com/v/25403493

 

 

1. 들어가며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구제를 많이 하고 고아를 돌보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아보며, 사회사업에 힘쓴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가? 아니면 이 세상 이웃에게 전혀 사랑의 손길도 베풀지 않고 인색하게 살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이제 와 돌아보니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한지도 벌써 8년 4개월이 다 되었다. 그동안 오직 한 길을 달려왔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성경에 나온 대로 전하고 또 전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천국'(하늘들의 왕국)과 또한 셋째 하늘에 실재하고 있는 천국에 관한 영적인 비밀들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아니 정확히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고 해야 옳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은혜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까지 전했던 천국입성 조건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나눠 보려고 한다. 이 말씀 하나로서 우리는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어떤 신분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시지를 영원히 기억하길 바란다. 

 

2. 천국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천국'이란 사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다. 헬라어로 보면, '하늘들의 왕국'을 줄여서 '천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셋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구약시대에 하늘을 '샤마임'이라는 복수 용어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천국은 상태적인 천국만을 가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장소적인 천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은 후에 부활체가 들어가는 장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구원이 완성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마귀가 없다. 귀신도 없고 죄도 죽음도 없다. 거기는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어둠도 없다. 그곳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통치만이 실현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그 보좌 위에 이기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계3:21). 그러므로 천국이라는 개념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잠시 실현될 때도 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3.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조건과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장소적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조건은 무엇이며,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여기서 최소 조건이라는 말은 이것만 갖추면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충분조건은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영원토록 누릴 영광과 신분과 지위까지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킨다. 어떤 이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은 믿음이 있기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그날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행함으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이 믿음과 회개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 편(아마 오른편) 강도의 경우인데, 그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였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으며, 죽으면 낙원(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까지 알았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날 주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고 회개하는 것'이다(막1:15, 마4:17, 계22:14). 믿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을 받아 궁극적인 장소인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4.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살펴보았을 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소 조건에 속한 것으로서 2가지이며, 충분조건으로 보면 다 합쳐서 3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먼저 최소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조건은 그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이란 죄를 씻는 물 세례와 같은 것을 의미하며, 성령은 성령을 받는 성령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죄사함과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런 자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거듭 태어난 자가 결국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죄사함'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회심의 회개를 통하여 과거의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을 가리키며,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었다(요5:26). 그러다가 그분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당신 대신 보내 주셨다. 생명이신 예수께서 생명의 영으로 성령을 대신 보내 주신 것이다(고전15:45).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에 오신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들어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람에게 들어간 것을 두고 거듭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사자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사자의 생명이 있어야 하고, 독수리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독수리의 생명을 지녀야 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생명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 은혜와 선물로서 주어진다. 

 

5.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예수믿을 때에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요일1:9). 왜 그런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죄된 본성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귀신들이 우리를 미혹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도 죄를 짓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살다 보면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하라고 말씀하셨다(요일1:9). 그래야만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죽는 그날까지 말이다. 만일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죄를 지었는데도 자백하지 않고 남겨두었거나 숨겨 두거나 회개를 뒤로 미룬 것이 있다면, 그는 그 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에 의하면, 믿는 자라도 비겁하여 주님을 부인한다거나 우상 숭배한다거나 음행하는 자는 반드시 불과 유황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다. 거듭나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진다고 하셨다(계3:5, 21:27). 그러면 어떤 자는 새 예루살렘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에 남겨질 자도 있을 것이며(계22:15), 어떤 자는 성밖의 더 바깥쪽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자도 있을 것이다(마25:30). 그리고 지옥 곧 불못에 떨어질 자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지옥도 3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그 후에는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성만찬 후에 세족식 때에 하셨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요13:10). 이미 예수믿을 때에 죄사함을 받은 자라도 살다 보면 짓는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기 때문에 그 더럽혀진 것을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도 회개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최소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로 주어진다기보다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쪽에 훨씬 가깝다. 

 

6. 우리는 왜 내가 짓지도 않은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들을 회개해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조상들의 죄들도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또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짓지도 아니한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왜 내가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되는데,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할 것은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인 것이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기 죄 때문에 지옥에 던져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내가 대신 회개하는 것은 사실 죽은 조상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그 결과들이 오늘 나와 내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조상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지으면 그 죄값을 3~4대까지 물린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출20:5). 그런데 영적으로 보니,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뱀들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창3:14, 마12:43~45). 그런데 이러한 뱀들은 더러운 영들이고 독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 결과들이 나와 내 후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누군가가 회개하여 그 죄를 씻어내지 않는다면 그 죄값으로 인하여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 곧 뱀들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의 몸과 환경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대신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 사람의 죄를 회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자기의 조상들의 죄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조상들이 범죄했을 때에 우리도 씨[앗으]로서 함께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조상들의 허리에서 나온 또 하나의 조상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수록 내게는 더욱 좋은 것이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은 2~3대만 올라가면 완전 우상 숭배자였다. 그것도 수천 년 동안 수십 대를 그렇게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들이 뭉쳐지고 뭉쳐져서 내려오고 그리고 또 내려오고 있었기에, 누군가는 이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려움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여 그것을 내 몸과 내 환경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상들의 죄를 내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이다. 

 

7.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조건은 천국 입성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 믿음과 회개로 거듭나서 지은 죄를 지금도 자백하여 회개하고 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충분히 들어가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지위와 신분을 얻기 위함인데, 우리가 천국에서 얻을 이 지위와 신분은 영원무궁토록 우리가 누릴 것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천국에 들어갈 때에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위를 이 땅에서 준비해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나에게 죄지은 자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요, 상처입고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의 친구로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하기 위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구약의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신약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길수록 우리는 천국에서 더 높은 신분과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된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 중에는 이미 천국에서부터 어떤 사명을 부여받아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그러한 그릇으로 쓰시려고 그렇게 결정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하나의 그릇을 만들되 자기가 필요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만들어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어 보내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어 보내신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시고 안배하여 그렇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명을 가지고 온 자들은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 만약 사명을 맡은 자가 있는데 그가 사명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는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바깥 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13~30). 그러므로 맡은 자는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충성의 마지막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사명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분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계2:10).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에게 저 하늘에서 놀라운 신분을 주실 것이다. 사명을 맡은 자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8.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누리게 될 4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말씀대로 순종하고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되는가? 그것은 총 4가지다. 첫째는 더 높은 신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제일 높은 신분이란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다. 그리고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만약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적고 충성하는 것도 적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서 섬기는 자로 살 것이다(마20:26~27). 이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겠지만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말씀해 주셨고, 천국에 가 보면 또한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산다고 해서 그것이 비참하게 느껴지거나 슬프게 느껴지거나 자존심 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는 말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섬기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더 앞쪽의 보좌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마냥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린다. 또한 천국에 들어오는 성도들을 환영하기도 한다. 그때에 천국 성도들은 자기의 보좌에 앉게 되는데, 천국의 무수한 성도들 가운데 144,000명만이 자기의 보좌에 앉게 된다.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울수록 높은 신분을 가진 자가 앉는다. 그런데 이 보좌 자리는 영구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준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순종하고 충성함으로 말이다. 셋째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면류관의 종류와 크기와 모양이 다르며, 거기에 박혀 있는 보석의 종류와 크기와 모양도 다르다.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섬김의 면류관, 사랑의 면류관, 충성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 다양한 면류관이 주어진다. 어떤 이는 20개 이상의 면류관을 받는 자도 있다. 그렇다고 고개가 아파서 어떻게 그것을 쓰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무게는 이 세상의 무게가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멋지게 지어진 천국집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면서 헌신할 때에 지어진다. 그때마다 천사가 그러한 사실을 보고하면, 그것이 행위책에 기록되고, 행위책에 기록된 대로 집이 지어지는 것이다. 집은 우리가 올리는 충성에 따라 연건평이 정해지고, 집의 크기가 정해지며 그 안에 들어갈 인테리어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세상에서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천국에서도 나에게 주어진다. 장미꽃을 좋아한다면 아마 화단에 장미꽃이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를 좋아하는 자들은 새들도 정원에서 노래할 터인데, 새들의 숫자도 이미 정해져 있다. 

 

9. 나오며

  그렇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회개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왕국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지은 자범죄들을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과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에게 내려온 악한 영들이 내 몸속에 침투해 있거나 내 주변에 진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회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실로 예수믿는 자가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자기의 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 회개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그럴수록 악한 영들이 우리 몸에서 제거되고 우리의 환경에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귀신들이 떠나간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부터는 주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이 더 크게 준비되기 때문이다. 그날 이렇게 충성한 자는 더 영광스러운 신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영광스러운 보좌 자리와 면류관과 천국집을 하사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잠시만 누리다가 반납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우리가 누릴 영광스러운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그 빛의 강도가 다르듯,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도 각자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다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한대로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는 말라. 오후 5시에 들어와서 한 시간만 일했던 자라도 주님은 하루의 품삯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라. 충성하라. 그러면 영광스러운 우리의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22년 02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우리는 두 세계에 살고 있다. 보이는 물질적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그것이다. 고로 사람만이 일종의 수륙양용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영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덕망있고 인격을 갖추었으며 종교심이 강했던 니고데모를 만나 그것에 관한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주님 말씀에 따르면 그는 영적 세계에 발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할 때에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군사가 될 수 있는가? 여기 그 열쇠가 들어 있다.

2021-01-1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원리와 방법은 무엇인가(요3:12~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3adWf8PwJG0 [혹은 https://tv.naver.com/v/17979070 ]

 

 

1. 들어가며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사람을 3가지로 언급했다.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고전3:3,2:14). 그중에 육에 속한 사람은 보이는 것만 인정하면서 오직 육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시기와 분쟁이고 다툼 뿐이다(고전3:3). 그런데 혼에 속한 사람도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한 그것이 자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어리석게 보인다. 또한 영적인 것을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다르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알고 기뻐하며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나는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니고데모에게 일어난 사건과 결부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니고데모는 왜 영적으로는 문외한이었는가?
  니고데모는 당시 인격과 덕망과 신앙심을 가진 훌륭한 인물이었다. 1절에서 나타난 그의 소개를 살펴보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어떤 인품과 종교심을 가진 인물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유대교의 양대분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의 어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사두개파와 함께 유대종교 최고의결기구인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함부로 평가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예수님에 대해 더 잘 알아보려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책망을 엄청 들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는 책망만 들어야 했는가? 그는 사실 사회적, 신분적으로, 도덕적, 종교적으로 볼 때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에는 그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거듭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선언하신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때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었다. "육으로부터 태어난 채 있는 것은 육이요, 영으로부터 태어나게 된 채 있는 것은 영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은 사람이 엄마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10달이 지난 후에 출생하게 되는데, 그때 사람은 육으로부터 태어난 채 있기 때문에 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 더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의 영역이 아니라 영의 영역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엄마의 뱃속에서 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은 작동이 불능한 영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은 영이라고 불릴 수가 없다. 영의 껍데기만 가지고 있다고 표현해야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엄마의 뱃속에서 10달동안 성장하여 태어나게 되는데, 이 때 태어난 사람은 육에 속한 탄생을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육에서 태어난 후에 영으로부터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에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는 것을 가리킨다. 누군가가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생명이 분리되어 자식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영으로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 사람도 역시 영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분리되어 그 속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전15:45에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예수께서 영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영)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인지 영에 속한 사람인지 그가 과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4. 사람은 어떻게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의 뱃속에서 태어나게 되면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일지언정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영이 그 사람 속에 있기는 있지만 작동하지 않고 있는 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직 그 사람 속에 거듭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령 혹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동물과 같은 존재이든지 아니면 혼이 잘 작동되는 혼적인 인간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땅에 있을 때에 반드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영이 작동을 하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은 어떻게 작동시킬 수가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영이 거듭나면 되는 것이다. 영이 거듭 태어날 때 영이 작동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5. 사람은 언제 어떻게 해야 자신의 영이 작동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영이 작동되게 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것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셨다(요3:5). 다시 말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그 사람은 영이 작동하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영이 거듭나지 아니한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영이 죽어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엡2:1). 영이 있기는 있으나 전혀 영이 전혀 활동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만약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영은 비로소 "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영이 비로소 영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사실 다음의 2가지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것의 하나는 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첫째, "물로" 거듭 태어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 나온다(요3:11). 

요3:1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말한다) 우리는 [이미] 아는(알아온 채 있는) 것[들]을 말하고(말한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본 [채 있는 ] 것[들]을 증언하노라(증언한다는 것을)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않는다는 것을)

  그렇다. 그동안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우리"에 해당하는 사람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거듭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우리"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우선 제자들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즈음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어떤 제자도 영적인 것을 보거나 듣거나 하지 않았으며, 증언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예수님 이전의 시기에 하늘에 속한 비밀을 증언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세례요한"이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준 말씀과 자신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세례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뜻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받아들여 회개함으로 자신의 죄를 정결케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로 씻어내듯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례를 줄 때에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올라옴으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과연 회개한 사람이었을까?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듭날 수도 없었고, 영의 세계로 진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 사람 속에 주시는 성령이란 대체 어떤 분인가? 그것은 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으로서, 사람 속에 들어와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해주시는 이이시다. 사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이 그들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보혜사 성령이 오셨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은 또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또다른 자신이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께서 부활 후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했다(고전15:45). 고로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말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생명이 분배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의 영이 작동되는 것이다. 영의 세계로 진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니고데모 역시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역시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6. 사람의 영이 작동되는 것을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육으로[부터] [태어]난 [채 있는] 것은 육이요 영으로[부터] [태어]난(나게 된) [채 있는] 것은 영이니(요3:6)" 그렇다. 사람의 육체는 엄마의 뱃속에서 나올 때에 비로소 태어난다. 그렇다면 영은 언제 태어나는가? 그것은 그가 성령을 받을 때다. 왜냐하면 성령받아 거듭 태어나기 전까지는 사람은 영을 가지고 있을 뿐, 영이 활동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이렇다. 누가 나에게 고성능의 비싼 컴퓨터를 선물해 주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으로 당장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컴퓨터 자체는 기계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선적으로 전기를 공급해야 한다. 컴퓨터에 전기가 들어가야 윙하면서 컴퓨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기가 공급되지 못한 컴퓨터는 아무런 일이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고철덩어리인 것이다. 그러면 전기가 공급되면 이 컴퓨터는 당장 일을 하는가? 그렇다. 그런데 그것은 컴퓨터 안에 내장되어 있는 자료와 정보만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 뿐이다. 최신 자료를 내려받고 올리려면 컴퓨터를 인터넷 선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래서 최신 정보와 그 밖의 자료들을 다운로드할 수도 있고, 업로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컴퓨터는 우리의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영과 같다. 그리고 컴퓨터에 전원을 연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우리의 영 안에 생명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미 컴퓨터 안에 저장된 정보는 이미 기록되어 있는 66권의 성경말씀과 같다. 그리고 인터넷에 연결한다는 것은 회개를 하는 것과 같다. 회개할 때에라야 지금도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상의 70%나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 있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나 운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은 인터넷에 자신의 컴퓨터를 연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회개하지 않아 영의 세계의 풍성한 정보와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7. 사람은 실제적으로 언제 영이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런데 사람이 실제적으로 언제 전원버튼을 눌러 컴퓨터가 작동되게 할 수 있는가? 그냥 컴퓨터가 전원만 연결해 놓으면 되는가? 아니다. 그렇게 해놓았다고 해서 컴퓨터가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전원버튼을 눌러야 작동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성령을 받는 마지막 단계를 하나의 예화를 통하여 소개해주셨다. 그것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사건이었다. 그때 출애굽2세대들이 또 다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독이 있는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죽게 하였다. 그러자 자신들이 잘못했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과 똑같은 모양을 한 뱀을 놋으로 만든 후에 그것을 모든 사람이 쳐다보라고 했다. 그러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모세는 모든 사람이 놋뱀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장대 위에 높이 달아놓았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미친 놈, 저 놈의 노인네가 나이만 쳐 먹더니 이젠 정신이 돌았군. 아니 독뱀이 물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아나겠어? 그렇게 해서 해독이 되겠어?" 그러면서 죽어갔다. 하지만 또 다른 부류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된다고 믿어야지,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빈 말을 하겠어!"라고 하면서 기어서라도 장막 밖으로 나와 놋뱀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즉시 살아났다. 성경에 보면,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되어 있다. 그때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쌈하셨다. 

요3:12-15 [만일] 내가 땅의(땅에 속한) 일을 말하여도(말하였을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아니하는데), 하물며 [만일 내가] 하늘의(하늘에 속한) 일을 말하면(말한다면) 어떻게 [장차] 믿겠느냐?...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들어올렸던) 것 같이 [반드시] 인자도 들려야(들어올려져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 그때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는 것은 최종적인 도구는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되는 줄로 믿고 행동에 옮길 때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법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지만, 믿음을 가동시켰을 때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성능의 컴퓨터가 윙하고 작동하도록 하는 마지막 관문은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스위치는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회개를 하고 믿음을 작동시킬 때에, 누구든지 영의 세계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의지가 그대로 전달되는 세계를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사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자만이 회개하기 시작하며 구원얻기 위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붙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회개는 사람이 영이 작동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셔들일 때에, 성령께서 우리들 속에 들어오시게 되고 그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공급되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의 영은 드디어 가동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들이 씻겨져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이성적인 혼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영을 작동시켜야 한다. 학자이며 종교생활을 오래 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거듭나지 아니했다면 그는 결코 영적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회개와 믿음이야말로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원리이자 방법으로서 영적인 세계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맛보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1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구원이 늘 흔들리는 이들이 더러 있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언제 받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거듭태어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거듭 태어나는가? 세례받을 때인가? 아니면 믿고 1년이 지난 시점인가? 이것이 늘 헷갈리는 것은 중생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가르침과 확고한 믿음이 부족하기 대문이다. 이제 자신이 과연 거듭난 사람인지 명확히 찾아보자. 그리고 더이상 흔들리지 말자.

2020-05-3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거듭남,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3:5~9)
https://youtu.be/ASF6nzfFics [혹은 https://tv.naver.com/v/14056357  ]

 

 

1. 들어가며

  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에는 자꾸 믿음에 있어서 의심이 들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가? 교회에 출석한지 오래 되었지만 왜 자신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일주일에 하루를 시간을 내어 주일성수를 하는데도 그것을 지키기가 왜 그렇게도 어려운가? 주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기기도하고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왜 그리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이 거듭났는지에 관한 믿음이 불투명하고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거듭남(중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며, 사람은 어떻게할 때 중생할 수 있으며,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신이 중생한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은 자신이 중생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을 뭐라고 딱불어지게 말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사람이 중생하는 그 순간을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중생 이후의 증상 내지는 중생의 결과를 통해서 자신이 중생했는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중생에 관한 질문지를 만들어보았다. 다음의 10가지 질문을 통해서 자신은 과연 중생했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아무런 부담이나 장애가 없는가? 둘째,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가? 특히 언젠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뼈속 깊이 느낄 때가 있었는가? 셋째, 주님을 부인하라고 해도 부인할 수가 없는가? 혹 주님을 시인함으로 인하여 죽어야 한다고 죽어야 한다면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넷째, 하나님과 예수님,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싶은가? 특히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보면 매우 부러운가? 다섯째,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라 할지라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여섯째,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물질을 바치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일곱째, 내 입술이 짜증내고 불평하던 것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었는가? 여덟째,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내적인 강한 확신이 드는가? 아홉째,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내적인 생명도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열째, 필수는 아니더라도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3. 중생(거듭남)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중생" 곧 "거듭태어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루터교회에서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에 거듭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니까 유아들도 유아세례를 받는 순간 중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게 사실인가? 아쉽게도 그것은 잘못된 교리다. 왜냐하면 세례받는다고 사람이 중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생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요1:13). 중생은 수동태인 것이지 결코 능동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종교개혁자들도 중생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보자. 17세기에는 중생을 '회심'과 같은 개념으로 보았다. 하지만 '회심'은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신앙에 눈을 뜨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회심은 회개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지 중생에 가까운 개념이 아니다. 또한 중생은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 존재하는 영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는 회심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회심은 사람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중생은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참여하시는 어떤 것이므로, 회심을 중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중생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중생이 아닌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중생은 자기자신을 개선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개선하여 좋은 방향으로 행동을 고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쳐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라고 마할 수는 없다. 중생하지 않아도 좋은 방향으로 자신을 개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중생은 칭의와도 다르다. 칭의는 믿음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그러나 중생은 내면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내면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셋째, 중생은 성화와도 다르다. 성화란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중생은 계속되며 반복적인 과정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단회적인 것으로 순간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일생을 통해 변화되는 과정을 일컫는 성화는 중생과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중생이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리키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해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중생(거듭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중생에 관하여 맨 처음 사용되는 예는 예수님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필요성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율법에 능통한다고 할지라도, 중생은 그것과 별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중생이란 어떤 뜻이었을까? 그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은 육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지만 영으로 나야 영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활동으로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셋째, 예수께서는 중생이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3:15~16). 다시 말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지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사람의 영 속에 성령께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눠주심으로서 새로운 생명이 그에게 더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4. 중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중생(거듭태어남)은 어떻게 할 때 일어나는 것인가?

  첫째, 주님께서는 중생이란 물과 영으로부터 거듭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3:5). 여기서 '물'이란 무엇을 가리키며, '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이를 해석하는 이마다 조금씩 다르다. 중요한 것은 육으로 태어난 사람이 다시 영으로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기 때문에, 사람의 영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어지도록 하는 일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태어나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럴려면 사실 죄인인 사람에게는 2가지의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하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하며, 또 하나는 생명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한다.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한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과거에 출애굽2세대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일들을 비유적으로 말씀해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짐으로 중생이 실현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의 독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달려 죽는 것이 중생에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건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생이란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수여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어디선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사람 속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셔야 그 사람이 거듭태어나는 것이다. 고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죄에 대한 용서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명공급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 주님께서는 중생은 그 사람이 믿을 때에 일어난다고 하셨다(요3:15~16). 고로 사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믿어야 하고, 성령을 자기의 마음 속에 모셔들여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다 믿음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사람이 자기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또한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롬10:9~10). 그래서 속죄와 중생이라는 일이 그 사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령은 보혜사로서 예수님의 또다른 오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자기 마음 속에 영접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것이다(요14:16~17).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생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활동이기에게 하나님께서 보시에게 우리의 믿음이 합당하다고 여기실 때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요1:13). 그래서 중생이란 항상 수동태로 쓰이고 있다. 그분이 행하시는 일인 것이지, 내가 능동적으로 행한다고 해서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5.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중생한 자 곧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진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가지다. 첫째로, 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했다둘째, 그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진다. 셋째, 회개하기만 한다면 어떤 죄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다넷째,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중생을 받은 자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중생을 얻은 자라도 죄를 짓다가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그가 죽을 때에 성령이 그를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이미 자신이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지금도 그 신앙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누구라도 자신이 중생한 싯점을 잘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변화나 체험이 자신에게 동반되지 않았다면, 자신은 중생하지 아니했다고 쉽게 판단해버리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미 중생했음에도 죄된 본성을 따라가는 자신을 보고 자기는 중생하지 않았다고 쉽게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다. 죄된 본성은 우리가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를 죄짓도록 계속해서 유혹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중생했다면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이미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이 자꾸 미혹하고 속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죄지을 때마다 귀신들은 우리의 양심에 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속이려든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사람이 중생했다고 해서 그 뒤로 그가 죄를 전혀 짓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귀신을 그 순간부터 우리를 영원히 떠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귀신은 택하신 자들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여 지옥으로 끌어가려고 지금도 갖가지 묘책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미 거듭난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죄된 본성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어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된 본성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으려면, 자기 속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그분이 우리를 책망하시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다면 보면 어느새 우리도 죄된 본성에서 점차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사탄마귀의 미혹까지 극복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5월 31일(주일)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