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구원과 멸망은 어느 누가 말한대로 만세전에 예정된 대로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의 여지가 거기에도 들어가는가? 왜 우리는 구원을 전적으로 은혜라고 말하는가? 그러면서도 왜 우리는 "믿으라, 회개하라"고도 말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알려진 이중예정론은 과연 성경적인가? 여기, 이중예정론은 마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에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를 주목해보자.

2021-09-12(주일) 오후찬양예배
제목: 양과 염소의 심판에 [이중]예정론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마25:34,4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hcVYmhVpkA  [혹은 https://tv.naver.com/v/22428086  ]

 

1. 들어가며

  예정론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는 노력의 결과의 하나다. 그러므로 참으로 소중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정론이 어느새부턴가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제는 운명론처럼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진정 과연 개인구원이 만세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살 천국집이 이미 만세전에 준비된 상태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해놓으시고, 만약 한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을 집행하실 수가 있으실까? 심판이란 우리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나와있는 예정론과 우리가 실제 믿고 있는 예정론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예정하셨으며, 우리가 그 예정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만세전에 나 자신인 아무개를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예정해놓으셨다고 믿는 분들은 꼭 이 메시지를 끝까지 들어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사람이 받는 '구원(salvation)'은 '구속(redemption)'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사람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우리를 위한 구속의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온 인류의 죄값을 속량하시기 위해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피흘려 죽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피흘림이 없다면 사람이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롬6:23, 히9:22).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속은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로 이러한 구속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된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들이든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은 모든 인류의 속죄를 위한 피흘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 자기[자신]을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이니라(딤전2:6)' 그러나 구원에는 또 하나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께서 이미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속죄의 제사를 믿는 믿음과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예수께서 속죄제사를 치렀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속죄의 효력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천년전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사 치르신 속죄제사를 나를 비롯한 모든 인류의 죄들을 없애기 위한 속죄제사였다고 믿고 동시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요일1:9).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했다. 그렇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는 사함 받을 수가 없으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될 수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을 자신의 구원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데에 있다. 예수님의 속죄제사를 믿기만 하면 자신이 구원받은 줄로 아는 것이다. 만야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모든 인류는 다 구원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속죄제사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께서 속죄제사를 치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러한 효력을 지닌 속죄제사였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속죄의 은총이 베풀어지지 않으며,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한 사람의 죄는 씻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만세전에 예정된 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어진 것을 믿고 그분의 골로다 언덕의 희생이 나의 죄를 위한 속죄제사였음을 믿고 회개할 때에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일종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회개를 다 했을 때 그 노정을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구원의 노정에서 결국 탈락하게 되는 것이다. 

 

3.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신 인류 구원의 예정이란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관한 예정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엡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류를 자기의 아들들이자 상속자가 되게 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예정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불멸하는 존재로 지어진 존재는 오직 천사와 인간 단 둘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닌 천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결단코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3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구원 예정은 인류를 종족으로 나눌 때에 유대인들만을 그위하여 렇게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엡3:6). 그들이 유대인들이 되었든지 이방인들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요3:16, 계22:17). 

 

4.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론은 과연 성경에 나오는가?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인류의 개인을 위한 구원 예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이 아니라 인류(사람)를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는 일종의 공동체 예정인 것이다. 즉 천사가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하시겠다는 인류 구원 예정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예정을 잘못 해석한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어떤 개인을 위한 구원 예정으로 바꾸어 놓았고, 동시에 이중 예정으로까지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이중 예정론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은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개인은 멸망으로 예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인류를 그렇게 하시겠다고 작정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롬9~11장에서, 야곱을 구원하기로, 에서는 버리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냐고 주장할른지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말씀이 없다. 오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지예정일 뿐이다. 그것은 구원 예정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개인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에 대한 사역 예정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한 부르심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이미 그에게 명을 주어서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많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다 개인에 대한 사역 예정인 것이지 개인 구원 예정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성경적인 예정만을 믿어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은 어떤 개인을 구원이나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이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로 보내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이 치르신 골고다의 희생이 인류의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였음을 믿으며, 자신의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날마자 자범죄들을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예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예정이란 개인 구원 예정 혹은 개인 멸망 예언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구원 예정이요, 믿고 회개하는 자로 하여금 구원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예정인 것이다. 

 

5.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 및 개인 멸망 예정이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발생하는 일은 무엇인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아주 잔인하고 편협스럽고 나쁜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폭군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원을 당신이 이미 정해놓고는 그렇게 끌고 가시며 그것을 절대 변동이 없게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우리 중 누군가가 아무리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고 싶다고 주님께 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세전에 구원으로 예정해 놓지 않았다면 그의 모든 수고와 눈물 곧 그렇게 믿으려 하고 회개하는 모든 일이 소용이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누구는 멸망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그것은 매우 공의롭지 못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의지가 있기에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어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하나도 없는데 우리를 불러다놓고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시겠는가? 마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을 보라. 당신이 이미 결정해놓은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인가 아니면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한 심판인가? 또한 만약 정말로 이중 예정론이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으라고 초청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이 구원이 예정된 대로 될 터인데, 만약 그렇게 했다가 예정에는 없는데 덜컥 예수님을 믿기라도 하겠다고 하는 날에는 큰 일 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으로 예정해 놓았는데, 그가 믿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예정이 허물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누구나 구원으로 초청해서도 아니 된다. 아니 전도해서도 아니 된다. 또한 만약 이중예정론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굳이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씀을 들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리고 회개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믿게 하실 것이고 회개시킬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면 "주 예수를 믿으라"고 권먼해서도 아니 될 것이며, 또한 "회개하라"고 외쳐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 예정이 존재하려면 타락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죄없는 첫 아담이 죄를 지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어서 죄를 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과연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서 죄를 지어라. 그래야 내가 너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 수 있지 않겠니?"라고 하셨겠는가? 그렇다면 마귀에게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죄의 조성자라고 하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사람이 일찍이 구원과 멸망으로 정해놓고 강요하시는 그러한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셨으며, 모두가 구원을 얻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할 뿐이다. 

 

6.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심판이 말해주는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성도를 먼저 불러 심판하는 양과 염소의 심판의 비유에서 우리는 어떤 예정론을 발견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25:31~46에는 인자가 모든 민족을 불러놓고 심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모든 민족은 세상 모든 민족의 사람들 중에(유대인도 포함된) 모든 믿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불신자를 심판하는 백보좌 심판이 아니라 먼저 믿는 자들을 심판하는 심판이기 때문이다(마25:37,44, 벧전4:17~18, 고후5:10, 고전3:12~15). 그때에 왕은 자신의 보좌에 앉아서 사람들을 둘로 가르는데, 양은 주님의 오른편에서부터 서게 하고, 염소[새끼]는 주님의 왼편에서부터 서게 하신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는 "내 아버지에게 이미 복을 받은 채 있는 자들이여, 너희는 창세(세상의 창설)로부터(아포)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채 있는 왕국을 단번에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신다(마25:34). 그리고 왼편에 있는 염소[새끼]들에게는 "이미 저주를 받은 채 있는 자들이여, 너희는 나로부터(아포)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채 있는 영원한 불속으로 계속 들어가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신다(마25:41). 그런데 이때 이들이 양쪽으로 서게 된 이유는 믿음과 회개에 따른 열매들이 그들에게 있었나 없었나를 가지고 판단하신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언제 하나님의 왕국이 누구를 위해 그리고 언제 준비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마25:34).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이미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면, 이미 만세전에 준비된 그 천국집에 들어갈 사람에게 그 집을 주시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천국의 공간은 이미 예비되어 있지만 그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 점차로 그 집이 준비된다면, 그것은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이 틀린 것이다. 그러면, 마25:34의 말씀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구원받을 사람이 들어갈 집이 만세전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지 않고, 창세로부터 예비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창세의 시기 곧 세상의 창설은 그 시기 아네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세(세상의 창설)로부터"에 나오는 전치사가 "에크"가 아니라 "아포"가 쓰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쓰이고 있는 전치사가 자기를 포함하고 있는 출발이라면 "에크"이겠지만, 자기를 포함하지 않는 출발로서 "아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과연 멸망받을 자를 미리 만세전에 예정해 놓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심판의 비유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불못이 비록 외식하는 자들로서 형식적인 믿음과 가졌던 염소들이 들어갈 장소라 할지라도 그 장소는 처음부터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장소로서 준비된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염소들이 들어갈 그 영원한 불은 결코 사람들을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고, 다만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들(귀신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서 준비해 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멸망받을 인간를 정해놓으시고 또한 그들에게 형벌을 주실 장소를 불못을 만드신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기를 바라시며 진리의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바라고 계심을 알라(딤전2:4).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 길로 가며 죄악의 길로 가고 마귀를 따라가기 때문에,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지옥보내기 위해 지옥을 만들어놓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세전 개인 구원 예정이나 만세전 개인 멸망 예정은 하나님을 나쁘고 포악하고 불공정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불못을 만들어 놓고는, 그곳에 갈 자도 당신이 미리 정하시고, 그래서 사람들의 일부를 그리고 몰고가시려 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7. 나오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파트가 바로 예정론 파트다. 만세전 개인 예정론이 마치 성경에 있는 것인량 믿고는, 자신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고 또한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자신은 이미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정론을 믿고 따르게 되면 과연 그 사람이 정신차리고 신앙생활 하겠는가? 이러한 자가 날마다 죄와 싸우겠으며, 죄를 지은들 즉시 즉시 회개하겠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만일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언젠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회개시키겠지" 하면서 기다리거나 회개를 뒤로 미뤄 안일하게 대처할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자신을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교리에 철저하게 속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재림을 연기하고 계시겠는가? 그것은 한 사람이라고 더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렇게 하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한 번만 진실로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겠지만, 지은 죄들을 회개하는 일은 우리가 일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넋놓고 회개하지 않고 있으니 그분이 지금도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는가? 구원은 믿고 회개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은 그 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일종의 여정과도 같은 것이다. 100m달리기와 같다고 보시기 바란다. 끝까지 경주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끝날까지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하고,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믿음의 지조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은 죄들을 깨끗히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더러운 신부를 자신의 신부로 받아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미 믿음을 갖고 있으나 중간에 바람이 나서 다른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는 자를 곧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에 눈이 돌아간 자를 주님은 결코 신부로 맞이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비겁한)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불신)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렇다. 핍박이 두려워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불신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거나 음행하거나 거짓말하는 등의 범죄자들은 결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거룩한 신부로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불못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 지금이라도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점차 하나님의 구원 안으로 예정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버려져서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거나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슬피 울며 자기를 한탄하면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왜 그때 성령의 음성을 따르지 않았을까, 왜 그때 그 목회자의 말을 듣고 돌이키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2021년 09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성경적인 예정론은 무엇인가? 에베소서가 일러주는 예정론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칼빈이 말했던 예정론은 올바른 것이었는가? 사람은 구원받기로 언제 예정되는가? 만세전인가 이 세상에서인가?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나오는가? 사역예정이 곧 개인구원예정인가? 그래서 오늘은 사도바울이 들려주는 예정론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2020-11-04 수요기도회
제목: 에베소서강해(03)_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3)(엡1:3~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z-arByPKNQ [혹은 https://tv.naver.com/v/18186583 ]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바울이 교회론에 관하여 쓴 책이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교회를 7가지 방면으로 소개하는데, 그 첫번째 정의가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소상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에베소서 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서 예정하셨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더불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에 관하여 좀 더 들여다보려고 한다. 과연 칼빈의 후예들이 말했던 바, 칼빈의 예정에 관한 5대교리 곧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 성도의 견인"이 과연 얼마나 성경적이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늘 동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명철함이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성도와 함께 하기를 빈다. 

 

2.칼빈의 예정론은 과연 성경적인가?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은 흔히들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칼빈의 예정론은 그의 생애의 후기에 비로소 발전되어 완성된 것이다. 그가 쓴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에는 예정론이 들어있지 않다. 그러다가 제2판(1539년)에 비로소 17개의 장 중에서 한 장을 에정이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3판(1543~1550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이었던 제4판(1559)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예정론의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총 25장 가운데, 무려 4장(21~24장)이 예정론으로 할애된 것이다.

  하지만 칼빈의 예정론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가 최초로 만들어낸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중세의 어거스틴이 말했던 구원의 "신적 작정"을 확대해석하여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인간의 멸망(유기)예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판(1559년) 제21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를 예정하셨다. 각 사람은 이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선 분명한 언급들이 있다(행4:28, 롬8:29~30, 고전2:7, 엡1:5,11). 특히 엡1:3~14절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정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정과 칼빈이 말하고 있는 예정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칼빈은 하나님을 폭군이자 잔인한 분으로 만들 수 있는 이중예정론을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것도 불특정다수가 아니라,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예정론이 얼마나 하나님을 폭군 하나님으로 묘사하게 하는지를 알고, 그의 예정론의  위험성을 빨리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정론을 따라가다보면, 그의 개인멸망예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고로 누구든지 그의 예정론 사상을 한 번 듣게 되면,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이뤄가야될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림으로 나가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자범죄를 통회자복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게 되며, 신앙을 하나의 경주로 생각하지도 않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교리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정의 대상을 집단(공동체, 불특정다수)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끌고가려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셨고, 누구는 멸하기로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에 결코 항거할 수 없고, 왈가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므로, 그냥 따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릇이 자기를 지으신 토기장이에게 저항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엄청 큰 실수요, 최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고 미리 정하셨다고 정해놓음으로써, 인간에게는 "너희들은 입닥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분으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구원에 있어서 주권이 절대적으로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속죄사역을 치르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그 어떠한 수고나 노력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개인의 구원과 이를 위한 하나님의 주권역사가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단 한 번도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롬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사건을 마치 개인구원예정의 예표인 것처럼 알고 있다. 칼빈이 자신의 개인구원예정론 교리를 만들 때에 롬9장의 야곱과 에서의 사례를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그 요지는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 뜻대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틀린 진술이다. 왜냐하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큰 자(형인 에서)가 어린 자(동생인 야곱)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만 예언하셨을 뿐, 그들의 구원을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결정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서는 섬기는 자로, 야곱은 섬김을 받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는 구원을 못 받고, 섬김을 받는 자라고 해서 그는 꼭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가 남을 위해 많이 일하고 섬긴만큼 그는 천국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듯, 이 땅에서 자신이 종으로 살도록 예정되었다(개인사역예정)는 사실이 구원을 잃게 된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사람을 만세전에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25장을 보라. 거기에 보면 에서와 야곱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야곱과 에서의 문제는 두 민족간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족속과 에서족속에 관한 예지예정을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역예정 자체가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누구든지 메시야를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종이든 자유자든 상관없이, 그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그리고 그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이 없이,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조선시대에 종으로 살던 사람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구원예정이 성경에 나온다는 칼빈의 주장은 한 마디로 틀린 주장이다. 

 

3. 칼빈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어떤 것인가?

  칼빈은 그의 책인 "가독교강요(1559년)" 제21장~24장에서 창세전의 하나님의 구원예정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 근거가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 성경에서 가져온 말씀들을 논리적으로 맞추어 만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의 주장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분한다면, 다른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전적 타락" 내지는 "전적 무능력",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이 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엡1:7에 그 근거가 나오며, 그리고 "무조건적인 선택"은 엡1:4절에서 근거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은 엡2:8~9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둘째항목으로서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5절에서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개인을 구원하고 유기하는 것에 관하여 절대적인 선택을 하셨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선택은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보시고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즉 공로에 따른 어떤 결정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전에 그의 공로와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비성경적인 주장을 간파했던 베자의 제자, 알미니우스는 칼빈이 성경에서 이러한 예정교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예지선택 혹은 예지선택을 주장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예지의 능력으로 사람의 믿음여부를 조건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성경적인 선택교리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개인을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하신 일이 없되,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청하기는 하지만, 그 초청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교리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마22장에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베푼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었다. 하지만 온다고 약속했던 자들은 한사코 사양하고는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잔치에 참여할 예상인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의 음식을 준비하였다. 이제 임금은 자신의 종들을 시켜 사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대로 초청해서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자 종들이 나가서 그러한 사실을 전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믿고 따라오는 자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차야 할 인원은 차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멀리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혼인잔치의 빈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찼다. 주인이 생각하는 분량만큼 가득 찬 것이다. 그런데 누가 왔는가를 지켜보려 왕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떤 친구를 향해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어찌하여 [잔치[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와 있느냐?" 그런데 그는 그 예복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잘 몰랐다. 사실 그 친구가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도 아니었고 권력이 있어서도 아니면 물질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잔치자리에 참여해 달라는 종의 초청소리를 듣고 자원하여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어올 때 종은 모든 손님에게 흰 옷 한 벌을 나누어주었고 그것을 입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그 옷을 소홀히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쫓겨나고 마는데, 그는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이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고 하였다. 그렇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져 있는 것이다. 누구는 구원하기로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잔치잔리에 참석할 사람들로서 부특정다수를 하나님께서 미리 마음에 작정해놓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가 그날 선택함을 입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그가 잔치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잔치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예정이다.  

 

4. 칼빈의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 속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제는 칼빈의 예정론 가운데 네번째 항목인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제한 속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기록하고 있는 엡1:7을 근거로 나온 예정론의 항목들이다(물론 이러한 주장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베소서 성경적인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이 구절을 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말한 바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무엇인가? 여기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베풀어주실 은총은 그 누구도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해(1559년)" 제3권 제23장에서 하나님께서 한 번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인간의 자유의자로서는 결코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의 뜻이 하나님을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주시려 해도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고집을 강제로 꺾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칼빈이 말하는 "제한 속죄'에 관해 살펴보자. 그는 "제한 속죄"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오직 성부가 선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7절에  나오는 것으로써, 그는 전세계가 창조주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세상 자체는 예정한대로 자멸하게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아버지의 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른지도 몰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긍휼과 자비가 없으신 분으로 생각케 만들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분은 자신을 믿을 자를 위해서만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요일2:2). 하나님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쪼잔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듣고 믿어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5. 칼빈이 말하는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이제는 칼빈이 주장했던 예정론의 첫번째 항목으로서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적 타락(전적 무능력)"이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 무능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불신자 중에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선을 행하는 자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3장 3절에서 "사람은 모두가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가증할 뿐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정죄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 안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라는 그의 주장은 맞지만, 인간이 구원을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과 그만한 능력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간을 정의하다보면, 인간을 너무나 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악하며 무능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면 그것에 대해 반응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나, 다만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선한 행위들을 계속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주님이 초청하실 때에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복음을 듣고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란 어떤 것을 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갖고 태어나고 있으며, 그대로 놔두면 죄를 짓다가 사망에 이른다는 뜻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초청까지도 반응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처럼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인 것이다(마12:20). 그대로 놔두면 갈대는 꺾여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꺾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붙들어 주신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사람은 있는 그대로 놔두게 되면 곧 껴저버릴 불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불이 이미 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고 심지를 간검해주신다면 그는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절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으며, 선을 행하지도 못하는 절대무능력에 상태에 있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다음 주에는 칼빈의 5대교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이 얼마나 성경에 어긋난 구절이며, 근거가 되지 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러면서 반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론에 관련된 성경구절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함께 찾아보고 살펴볼 것이다. 

 

6. 성도에게 있어서 바른 성경적인 예정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고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빗나간 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안주의의 원조격인 알미니안주의 비교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밀드레드 와인쿱인데, 그는 자신의 책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생명의 말씀사, 1987, p37)"에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수호할 논리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은 그렇게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이중예정 중 "멸망으로의 예정"까지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와인쿱은 이것마저도 논리적인 발전의 결과이지 결코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예정론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에,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얻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고로, 개인구원예정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누구든지 자신의 불신앙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하나님의 예정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7. 나오며

  칼빈은 기독교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기억될만한 유명한 변증가다. 특히 그는 기독교강요를 써서 사도바울과 어거스틴에 이은 최고의 신학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신구약성경의 주석서는 기독교역사상 최초이자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칼빈 사후 약 200년동안 그 누구도 칼빈과 같은 주석서를 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주장하는 것이라면 다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발견해낸 교리가 성경이 아니라 논리적인 비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바로 "이중예정론"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다가, 그만 인간의 남아있는 의지마저 완전 묵살해 버렸다. 인간이 구원얻기 위해 최소한 해야 할 일마저도 인간의 공로와 행위라고 몰아붙히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래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팩트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아담의 범죄에 의해 정죄받은 상태에서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회개하고 믿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가 처음 범죄했을 때에 스스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뱀이 꼬드겨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기 전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이 강권할지라도 그분의 초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도록 지금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고 계신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의 초청에 응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적어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주의 음성에 반응할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훗날 하나님께서는 심판주가 되실 수 있다. 누구에게든지 구원받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서 항변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칼빈의 만세전 개인구원예정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니 성경에 위배된다고 본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들기 위해서 선악과도 만든 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죽을 운명에 처할 죄인들 중에서 당신의 뜻대로 살려줄 자와 멸망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내버려 둘 자를 고르는 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만큼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의 긍휼하심과 사랑은 지금까지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수 있는 분량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한사코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기 위해,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회개하고 그분을 자신의 인생이자 영혼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 육체를 벗는 순간에 심판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땅이요 행복의 땅인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믿는 이들 중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었지만 예수께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께서는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용서해주시는 분이라고 쉽게 판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용서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용인가, 아니면 과거에 지은 죄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대신 담당해주시겠다는 뜻인가? 그런데 오늘날 개인구원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와 맞춰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더러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2020-05-1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죄용서, 과연 죄를 지을 자유에 대한 선언인가?(요8:1~11)
https://youtu.be/EhaRYWjomnM [혹은 https://tv.naver.com/v/13765139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언제였는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우리는 지난 주일낮예배를 통하여 그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심판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정죄의 하나님에서 해방의 하나님으로, 징계의 하나님에서 용서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들었다. 이는 곧 구약적인 경륜이 신약적인 경륜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에서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배웠다. 그렇다면, 이제 무슨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께 나아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받게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죄용서가 과연 우리가 미래에 죄를 지어도 좋다는 자유에 대한 선언인지를 살펴보고자한다. 오늘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영악한 존재인지를 적나나하게 들여다볼 것이다.

 

2. 예수님의 죄용서에 대한 선언은 과연 미래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선언인가?

  예수께서 오심으로 사실 엄청난 변화가 생겨난다율법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이요, 정죄의 시대에서 용서의 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율법은 크게 2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통하여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인지 의인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도덕법인 "십계명"법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율법의 근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이라고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율법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장차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표하고 있는 또 다른 법도 역시 율법의 하나인 것이다. 특히 이것들은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들로서 곧 안식일법을 포함한 절기법, 정결법과 음식법과 제사법들이다. 이러한 의식법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가 어떤 존재이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안식일"은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법이다(마10:28~30). 그리고 유월절에 희생당하는 "어린양"은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실 속죄양이 누구며 어떻께 죽을 것인지를 알려주는 법이다(고전5:7). 그런데 바로 그분 곧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로서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구약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성취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다 이루셨다"(요19:30)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받게 될 온갖 종류의 저주와 형벌을 다 받으셨다. 다시 말해, 신22:22~23에 의거하여 예수께서는 저주의 나무(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셨고 거기서 숨을 거두셨다(갈3:13). 그리하여 그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있으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혜택을 다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바로 그 목적을 드러내셔야 했다. 그중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사건이다. 그 여인은 이른 아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손에 질질 끌려왔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그녀를 예수님 앞에 세워놓고, 율법에는 이런 여자들은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레20:10, 신22:22),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참 난감한 질문임에 틀림없다. 만약 그녀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준수자가 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과는 상충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그녀를 살려주라고 명령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고 매도되어, 그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비난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허리를 굽혀 땅을 글자를 쓰시더니 일어나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씩 뒷걸음치더니 다 도망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죄를 짓기 마련인데,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들이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했다. "여인아, 너를 정죄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리고 그 여인 대답하였다.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나도 너를 유죄판결하지 않는다. 너는 가서 지금으로부터 더이상 죄를 짓지 말라(요8:11)"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날, 예수께서 그녀를 유죄판결하지 아니하고 죄를 용서해준 것은 과연 앞으로도 어떤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용의 말씀인가? 아니면 과거의 죄값은 예수께서 담당할 것이니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도록 하라는 당부인가? 그렇다. 예수께서 그날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그녀가 지었던 과거의 죄들에 대한 용서인 것이었지, 앞으로 마음껏 죄를 지으라는 허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과거에 지었던 죄들에 대한 값을 예수께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용서해시겠다는 말씀인 것이지, 앞으로 죄를 얼마든지 지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여인에 과거에 지었던 죄 때문에 그순간에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녀는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품으신 계획들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고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곧 대신 죄값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죄용서를 구하여 죄사함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제 자신은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죄를 지어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미래에 죄를 지을 죄들에 대한 용서까지 더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2가지 교리는 무엇인가?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위와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자에게 교회가 너무나 쉽게 사죄권을 남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와 현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지은 자범죄들을 회개할 때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지, 한 번 믿은 것으로 인하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함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계속해서 갖도록 만들어주는 잘못된 교리가 2가지가 있으니, 그것의 하나는 개인구원예정론이요, 또 하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먼저, 개인구원예정론부터 살펴보자. 사실 개인구원예정론은 중세를 열었던 신학자 어거스틴이 최초로 만들었고, 종교개혁자 칼빈이 완성한 바 있는 교리다. 그러나 성경에는 개인에 대한 구원을 만세전에 예정해놓았다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다. 다만, 어떤 개인이나 국가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겠다고 정해놓은는 사역적인 예정은 더러 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개인에 대한 만세전 구원예정은 결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불특정다수를 예정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개인구원예정론을 완성함에 따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칼빈의 교리는 세뇌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죄를 지어도 자신을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두번째로, "성도의 견인교리"가 성도들의 구원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예수님을 믿은 자는 결코 구원에서 탈락되지 않으며 어떠한 시험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뚫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교리를 맹신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사람의 구원은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구원은 죽는 그날에 완성된다는 것을 잘 모른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다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죽는 그날에,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감으로(요14:16), 그가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고전9:27). 그날에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한다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일지라도 그날 지워질 수도 있는데 그것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계3:5). 다시 말해,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중생한 자는 결코 죽는 그날까지 성령께서 떠나가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면 그날에 용서받지 못한 채 멸망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히10:26~29).

 

4.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경고하시는 2가지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믿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남겨두신 2가지 경고장치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징계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 자들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나, 십계명법을 그대로 남겨두시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징계에는 질병과 가난, 저주와 고통, 귀신들림 등의 다양한 형태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이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음행을 저지르게 되고 예수 믿으니까 괜찮고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 우상숭배행위를 자행하자, 주님은 그 교회를 엄히 책망하신다. 만약 그녀가 만약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라고 경고하셨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자도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겠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녀의 자식들을 살해할 것이라고까지 경고하셨다(계2:20~23). 사실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들은 죄를 짓는다고 해서 즉시즉시 징계를 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을 징계들을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감당해 버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죄를 지어놓고도 그것이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죄인 줄로 모르고 죄를 짓는 성도들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해서도 죄인들이 돌이켜 회개하여 구원받으라고 하시는 안타까움의 마지막 표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징계가 쏟아지면 기뻐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철저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된 중풍병자가 나은 후 그를 만나 주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이 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내가 너를 치료해준다마는 다시 네가 죄를 짓게 된다면 더 심한 것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치료불가능한 38년이나 된 중풍병자를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해주셨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병에서 낫게 되었으니 앞으로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더이상 죄짓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더 심한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고로, 신약의 징계는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있거나 회개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자를 위한 최후의 경고장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구원받은 자도 탈락할 수 있다는 여러가지의 경고의 말씀들이다. 다시 말해, 믿는 자라도 계속 죄짓고 회개하지 않을 시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영영 안 주시겠다고 예고하심으로 분명하게 그들이 회개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특히 이러한 구원탈락가능성에 대한 경고는 히브리서, 야보고서, 유다서와 공관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예수께서도 무리들에게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불에 던져져 살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7:19), 주의 이름으로 귀신축사를 하고, 예언하고, 능력을 행했어도 그날에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7:22~23).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도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못보고도 떨어져나간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히6:4~6). 그런 자는 버림을 당하여 불살라질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접했더라도 고의로 계속해서 죄를 범했을 때에는 그를 위하는 속죄제사가 없을 것이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남아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히10:26~27).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첫사랑을 회복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촛대를 옮겨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고(계2:5), 생명책에서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그 이름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계3:5). 고로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이지만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은지 어떤 죄든지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오늘날의 성도들은 이미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여 인류의 모든 저주와 질병과 고통까지도 다 담당해버린 이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도 징계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나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다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 나를 떠나가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는 날에 버림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죄했을 때에 내게서 징계가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사람이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사생자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약성경이 얼마나 경고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죄에 더럽혀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혹시 실수해서 넘어졌다고 하면 즉시즉시 일어나 회개를 통해 그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죽는 날에 그만 멸망으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중생을 얻어 구원받은 자는 이 세상 끝날까지 성령은 떠나가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다(요14:16). 그러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죽는 날 버림받는다는 것을 명심하고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앞으로 자유롭게 죄를 지으라고 허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 행하다가 큰 코다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20년 05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누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려고 예정해놓은 바로 그 사람들인가? 아니면 들어갈 사람들은 분명히 예정되어 있지만 그가 누군지는 아직 개인적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는가? 성경에는 개인구원예정론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사역예정인 것이지 개인구원예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은 또 어떠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예정론이 무엇인지 로마서 9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정확히 알아보도록 하자.

2019-09-22(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개인구원예정론과 불특정다수구원예정론, 과연 어느 것이 옳은가?(롬9:14~29)
https://youtu.be/ODRhV5f2xuQ



1. 들어가며 

  성경에는 과연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계획하셨다는 말씀이 존재하는가? 그러한 사례가 한 번이라고 나오는가? 어떤 분들은 그러한 사례가 성경에 나온다고 말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서와 야곱"의 경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절대주권을 가지고 있으니 한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도 그렇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진정 옳은 것인가? 성경은 정말로 개인구원예정론을 말씀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특정다수예정론을 말씀하고 있는가? 그래서 특별히 오늘 이 시간에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사례와 그리고 애굽왕 바로의 경우를 들어서, 과연 개인구원예정 사례가 존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참된 예정론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 

  성경에서는 예정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에는 엡1장과  롬8장에서 예정론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서 엡1장과 3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엡1:3~6,3:6). 그리고 롬8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예정하신)자를 역시 부르셨고, 그리고 그분은 부르셨던 자들을 역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셨던 자들을 그분은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롬8:30)(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의 서정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롬8장에도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말씀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롬8:29,30). 그렇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누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는가? 그것은 최소한 천사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정을 "인간구원예정"이라고 말한다.


3. 성경에는 과연 개인에 관한 구원예정론이 나오는가 아니면 불특정다수에 관한 구원예정론이 나오는가?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실 때에, 그 대상이 아직 창조되기도 전에 아무아무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또한 그를 출생하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것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개인구원예정"을 계획하신 것인가? 지금까지 많은 분들은 그러한 예정이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성경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사례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어떤 개인을 그가 아직 존재하기도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지 않으셨다. 만약 개인에 관한 어떤 예정이 있다고 한다면,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어떤 개인을 어떻게 쓰실 것인가에 관한 사역으로의 예정은 존재한다. 또한 그 시기도 어떤 개인이 태어나기도 전의 시점에서 하나님은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대표적인 경우를 살펴보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그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거룩히 구별하여 선지자로 쓰시겠다고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렘1:5).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사도바울을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그를 선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쓰실 것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갈1:15~16).

렘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갈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렇다면 성경에는 개인구원예정에 관한 말씀 말고 또다른 어떤 예정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불특정다수구원"에 관한 예정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은 사실이나, 그 대상을 어떤 특정인을 지정한 채 예정하신 것이 아니며, 불특정다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누가 될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되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어떤 사람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었어도 그가 끝까지 믿음을 붙들지 않고 믿음을 버린다거나 핍박 때문에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구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구원이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고 회개하며 인내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될른지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구원 안으로 초청을 받았다면 그 초청에 응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람의 구원의 여정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간다면 그가 처음 믿었을 때에 그 믿음으로 그는 결국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그 믿음을 포기한다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한다면 그 믿음은 좌초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불특정다수구원예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편,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상속자가 될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 숫자를 아신다. 그 숫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올 때까지다(롬11:25).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4. 롬9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사례"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렇다면, 에서의 야곱의 경우는 개인구원예정 사례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개인구원예정 사례가 아니라, 개인사역예정에 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서 9장에 나온다. 롬9장에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를 어떻게 쓰시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직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아니하고, 그들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였지만, 그들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예지하셨다. 그래서 그것을 그의 모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롬9:12[직역] [그것이] 리브가에게 말해졌다. 큰 자가 어린 자에게 종이 된다고.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쌍둥이였던 에서와 야곱 중에 "큰 자인 에서가 어린 자인 동생 야곱에게 종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이 예언이 있고 난 후에 수백년이 흐른 뒤에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지 이것이 곧 에서와 야곱의 개인구원예정에 관한 말씀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25장에 보면, 에서와 야곱은 사실 두 민족 곧 에서(에돔)족속과 야곱(이스라엘)족속에 대한 사역예정이었던 것이니, 에서와 야곱의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형으로서 동생을 섬기는 자가 되었더라도 에서가 하나님을 잘 믿고 그분을 섬기며 지은 죄를 회개하였더라면 그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쓰임 때문이 자신의 운명이 구원과 멸망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구약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왕도 비록 자신이 범죄했을지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그도 다윗처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5. 애굽왕 바로의 경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렇다면, 애굽왕 바로의 경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예정한 사람은 반드시 멸망당하고 만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롬9장에 나오는 말씀은 그러한 내용의 말씀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흙 한 덩이로 당신이 사용할 그릇을 빚을 권한이 있으신 분이시다(롬9:21). 인간은 하나님에 의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그러한 권한을 갖고 계신다. 하지만 어떤 개인을 당신 마음대로 강제로 개종하여 구원받게 하거나 멸망시켜 지옥으로 보낼 권한을 갖고 계시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그 자신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칠 수가 있고, 기회를 주실 수가 있으신 분이시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코를 꿰어다가 강제로 구원시키는 분은 결코 아니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존중하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줌으로 우리를 구원 안으로 초청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의 초청의 손길을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도록 놔 두셨다. 만약 이것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이는 구원받을 자로 만세전에 예정해 놓으셨고, 어떤 이는 멸망할 자도 예정해 놓으셨다면, 아마도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만세전에 멸망으로 예정되었던 자가 그날에 "왜 당신은 나를 아무런 이유없이 지옥에 멸하기로 예정하셨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이라도 아무 대답을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악한 자 마귀를 심판하실 것인가?

  그러므로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애굽왕 바로를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으로서 안배하신 것은 맞지만 그가 결국에 멸망받아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은 그가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다는 이유 때문에 멸망당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인이라도 돌이켜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바로왕의 강퍅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게금 허락하신 것이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그의 자유의지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고 싶었고, 당신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는 도구로 사용하시려 하셨기 때문이다(롬9:17). 다시 말해 그를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려 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강제가 아니었고 그의 마음의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다. 고로 그가 멸망받게 된 것은 그가 재앙 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왜 구약의 사울왕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신약의 가룟유다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그것도 그들의 선택이었던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사울이 그날에 다윗처럼 회개를 하였고, 가룟유다도 베드로처럼 회개했다고 한다면, 그들의 운명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오래 참음으로 각기 회개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벧후3:9).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의 온전한 지식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딤전2:4). 그렇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돌이켜 다시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고 계신다(겔18:26~27).

겔18:26-27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6.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분은 롬8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있는 한, 한 번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 면은 맞는 주장이지만 다른 한 면으로 보면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 크고도 넓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피조물이 되시어 사람으로 나타나셨을까?(딤전3:16)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을 놓지 아니하고 어떠한 핍박에도 주님을 부인하지만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는 그날까지 끝없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 우리가 만약 주님을 믿지 않거나 핍박 가운데 주님을 부인해 버린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놔버린 격이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강제로 구원하실 수는 없으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가 결정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우리의 구원도 보장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 밖에 있는 어떤 외부적인 요소들(환난이나 곤고, 박해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 칼 등)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는 것이다(롬8:35). 특히 핍박의 상황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놓아버리거나 우리가 주님을 부인해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사랑도 우리에게서 그만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마22장과 눅14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에는 먼저 초청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있었다(마22:3~6). 하지만 그들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날에 있었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런데 잔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주인은 이미 잔치에 올 사람들의 숫자를 예상해 놓고 있었고 그 계획에 따라 음식을 준비했고 자리도 준비해 놓았다. 빈 자리가 많자, 주인은 자신의 종들을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보내어, 선한 자나 악한 자난 만나는대로 초청하고 데려오라 했다. 그래서 들어와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들"로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었다(눅14:21). 그래도 빈 자리가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렇게 해서 들어온 자들은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눅14:23). 그러자 잔치는 손님으로 가득 찼다. 결국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득차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날 잔치자리에 온 자들 모두는 다 그날 주인이 마련해준 "예복(겉옷)"을 입고 그 잔치에 들어갔다(마22:11~12). 그러므로 그들의 신분은 다 가려졌다. 그냥 아들의 혼인잔치의 손님들이라는 신분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복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거져주어지는 "의의 예복"이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의의 옷을 입어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주제를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왜냐하면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그런데 선택함을 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가 과연 천국잔치에 참여하는가? 미리 초청함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들어가는가? 아니다. 이미 초청하기로 예정된 채 있던 자라 할지라도 막상 그날 잔치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천국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미리 예정된 어떤 개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 잔치로 초대를 받은 자들 중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잔치에 결국에 참여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으로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겠지만 결국 선택함을 입은 자는 매우 적을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쪼록 구원으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의의 옷으로 갈아입어서, 꼭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9년 9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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